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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81화 (278/450)

54화. 점창 (3)

변신하자마자 다리를 잘렸으니 촌극도 그런 촌극이 없었지만, 강엽은 상대를 얕보지 않았다.

‘이 짐승놈... 흡혈귀처럼 재생력을 가졌다.’

절단면의 살덩어리가 불룩 부풀어오르는 괴이.

생포만 할 수 있다면 진득하게 연구해볼 텐데, 안타깝게도 그럴 만한 여유가 없었다.

-휘이이이이익!

날카로운 소성이 심령을 자극한다.

인랑이 죽을 위기에 처하자 모산파의 여인이 결국 명령을 어기고 망혼소를 시전한 것이다.

망혼소야 큰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전부 저 괴물을 죽이세요!”

이런 상황에서도 사내들의 욕망을 부채질하듯 끈적거리는 색기를 담아 선동한다.

하지만 그 효과는 굉장했다.

“이야아아아아아아!”

“맹월림을 위하여!”

수백의 전사들이 일시에 달려든다.

단지 명령 때문에, 혹은 상전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달려드는 것이 아니었다.

인랑의 안위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는 작태. 오직 살기를 불태우며 병장기를 앞세운다.

“오호호호호홋!”

말 한 마디로 전사들을 선동한 여인이 교소를 터뜨렸다.

“귀영 당신이 암만 강해도 이 많은 전사들을 당해낼 순 없겠지! 설령 감당한다 해도 시간이 걸릴걸? 한꺼번에 없애버리지 않는 이상은...!”

콰아아아아앙!

여인의 비웃음은 장대한 굉음에 그대로 파묻혔다.

비웃는 표정 그대로 굳어진 얼굴은 강엽의 손에서 명멸하는 하얀 뇌광을 보자마자 핏기가 싹 가셨다.

“자, 잠깐...!”

뇌기가 빠직거리는 손이 앞으로 향하자, 거대한 빛줄기가 전사들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렀다.

지져버리거나, 태우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양상. 말 그대로 폭죽처럼 터져나가는 몸뚱이들.

천벌처럼 연달아 꽂히는 뇌격이 전사들을 도륙했다. 시체도 남기지 못한 전사들의 육신은 잿더미로만 그 흔적을 증명할 뿐.

그녀는 혈교에 머물렀을 적에 언젠가 이런 신위에 대해 들어본 적 있다는 걸 떠올렸다.

광명마교의 일사도가 하늘의 벼락을 불러 수백이 넘는 녹림의 산도적들을 태워죽였다고 했던가.

강엽이 싸우는 걸 보니 그때 들었던 일화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어떻게! 어떻게...!”

얼이 빠진 나머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한 그녀는 문득 거대한 그림자가 떠오른 것을 보고 반색했다.

“어르신!”

“젠장, 망신살이 뻗쳤군!”

전사들이 시간을 끄는 동안 인랑이 잘린 발목을 붙인 것이다.

“이제부턴 같이 싸워요!”

“으음!”

인랑은 침음을 삼켰다. 자존심 때문에 차마 수락하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자존심을 고수할 때가 아님을 인정했는지 이내 고집을 꺾고 우렁차게 외쳤다.

“매소봉, 날 도와라!”

“네, 어르신!”

전사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마공 구결을 운용하며 공력을 비축한 두 사람이었다.

일대일로 승리하겠다는 기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추한 꼬락서니에 강엽이 비죽 입꼬리를 당겼다.

“아까 전의 용기는 어디 갔나?”

“인정하지! 내가 객기를 부렸다! 하지만...!”

쿠와아아아앙!

털이 수북한 일권이 음속을 넘나드는 속도로 강엽을 멀리 날려버렸다.

“멋을 포기했으면 승리라도 챙겨야지 않겠나!”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뻔뻔한 말을 늘어놓은 인랑이 날아가는 강엽을 바람처럼 따라잡아 팔뚝을 휘둘렀다.

그 와중에도 자세를 잡은 강엽이 역습을 가하려 했으나, 매소봉이 음산한 목소리로 진언을 외우자 땅에서 검은 손이 올라와서 양손을 묶었다.

절호의 기회를 잡은 인랑이, 솥뚜껑만한 주먹을 높게 치켜들어 강엽의 정수리를 향해 내리쳤다.

쾅! 콰아아아아앙-!

충격파를 감당하지 못한 지면이 움푹 함몰된다.

깨진 판석 사이로 파묻힌 강엽은 점점 더 깊숙이 처박혔다.

어떤 술법을 쓴 건지 매소봉이 진언을 읊조릴 때마다 인랑의 기파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비대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절박한 심정으로 공력을 있는 대로 뽑아내서 쏟아부었을 때.

쿠아아아아앙!

“끄어...!”

둥그스름하게 파인 구멍 속에서 솟구친 벼락이 인랑의 거구를 인정사정없이 날려버렸다.

“맙소사! 어르신!”

“남 걱정이나 할 때가 아닐 텐데.”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에 흠칫 놀란 매소봉이 고개를 돌리자, 강엽이 아무렇지 않게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소 흙먼지를 뒤집어쓴 것만 빼면 놀랍도록 멀쩡한 신색.

생채기도 나지 않은 강건한 몸가짐에 매소봉의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이런 미친. 무슨 금강불괴도 아니고...!”

“넌 모산혈조의 제자지? 몇 번째냐?”

“...그걸 왜?”

예상치 못한 질문이 심리적인 허점을 찌른 걸까.

무심결에 반문한 그녀는 곧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입술을 꼬옥 깨물었지만, 강엽은 아랑곳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심윤이라는 놈이 대사형을 자처했었지. 넌 그놈보다는 아래겠군.”

“...역시 심윤 사형을 죽인 건 당신이었군요.”

“알고 있는 것 아니었나?”

물론 암시장의 혈교도는 전멸당한 만큼 심윤을 죽인 흉수가 누군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심윤이 신녀나 명도상인만큼 비중 있는 인물도 아니었고.

“네놈들이 준비한 함정으로 갔는데 모산혈조는 안 보이더군. 어디 갔는지 알려줘야겠어.”

“하, 제가 말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굳이 심문할 생각은 없다.”

“뭐?”

아미를 치켜뜬 그녀는 강엽의 눈동자가 서로 다른 광채를 품고 회전한다는 걸 알고 움츠러들었다.

“...말씀드리면 살려주실 건가요?”

머뭇거리면서 조심스럽게 묻는 자태는 뭇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만큼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단단히 여몄던 앞섶을 조금씩 풀어 깊고 풍만한 가슴골을 드러내며 시선을 잡아끌기까지.

눈치를 보면서 교태를 부리는 모습은 고혹적이면서도 안타까워서 연민을 불러일으키까지 한다.

강엽의 시선이 움직이는 것을 본 매소봉은 내심 회심의 미소를 품으며 촉촉한 눈길을 보냈다.

“아아, 잘생긴 공자님....”

“이 되바라진 년이 감히 누구한테 꼬리를 쳐?”

별안간 등골을 훑고 내려가는 싸늘한 음색.

위기감을 느끼자마자 매소봉은 몰래 빼두었던 비녀를 휘두르면서 진언을 외칠 준비를 마쳤다.

시퍼런 섬광이 허공을 긋자 비녀를 쥔 손이 땅에 툭 떨어졌다.

“...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봉목을 멍하게 뜬다.

꿈틀거리는 손을 보고 나서야 영문을 깨닫고 새된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아악! 너, 너...!”

“내가 언제까지 저기 처박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전원 은패급의 고수들로 이루어진 호위단은 까다롭긴 했지만 백서희가 궁지에 몰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시비들을 보호하면서 호위단의 합격진을 견뎌냈고, 외려 예리한 반격으로 적들을 격멸시켰다.

그 시간이 불과 반 각도 안 걸렸다는 점에서 그녀가 그동안 얼마나 일취월장했는지 알 만했다.

물론 손모가지를 잃은 매소봉은 그런 세세한 것은 생각지 못하고 핏발만 세웠지만 말이다.

백서희가 코웃음을 치며 쌍검을 들자 강엽이 얼른 끼어들었다.

“죽이진 말고. 저래봬도 모산혈조의 제자니까. 모산혈조를 찾는 데 반드시 필요해.”

“흐응, 그렇구나. 좋아. 살려는 드릴게.”

장난스럽게 대꾸했지만 매소봉을 응시하는 얼굴은 수중에 쥔 쌍검보다도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손목이 잘려나갔기에 수인을 맺을 수도, 무공도 제대로 쓸 수 없는 매소봉은 창백하게 질렸다.

* * *

뇌기를 맞고 날아갔던 인랑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일어났다.

“...방금 삼도천이 살짝 보인 것 같았는데.”

“그런가?”

그 앞에 선 강엽은 인랑을 바로 공격하는 대신 나지막이 물었다.

“싸우기 전에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다.”

“흐, 내가 대답해줄 거라 생각하나?”

“아직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을 텐데. 재생력을 갖고 있긴 해도 불괴강시보단 한참 떨어지더군.”

“.......”

“대답하기 싫은면 말아라. 네놈 명줄만 줄어드는 거지. 난 아무래도 상관없어.”

여차하면 마안으로 기저 의식에 깔린 기억을 싹 훑어내면 그만.

다만 삼화취정의 경지에 올랐고 재생력까지 가진 놈을 제압하는 건 강엽에게도 어려운 일이기에 가급적 시간을 아끼고 싶었다.

“...묻고 싶은 게 뭐냐?”

“혈교와 맹월림의 비의를 받고 탄생했다고 했었지. 비슷한 능력을 지닌 놈이 너 말고 더 있나?”

“...그렇다면?”

“누구지?”

“말할 수 없다.”

인랑은 절대 대답하지 않겠다는 듯이 침묵을 택했지만, 강엽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맹월림주였군.”

“...뭐!?”

“놀라는 걸 보니 정답인가 보지?”

“큭......!”

그제서야 유도 심문에 넘어갔다는 걸 직감한 인랑은 분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이, 이 개같은 놈이! 감히 날 엿 먹여!?”

“개같은 건 너고. 설마 자신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 평소에 면경도 안 보나?”

“닥쳐!”

강엽이 피식 웃었다.

“뭐, 생각하면 뻔한 거지.”

“...뻔해?”

“동종들이 혈교에 있다면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어차피 말해줘봤자 누군지도 모르거든. 말해주지 않았다는 건 나도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인물이라는 거지.”

“......!”

“혈교와 맹월림 양쪽에 적을 두고 있는 건 맹월림주밖에 없다. 교성이나 천인장들도 비슷한 능력을 지녔을 수는 있지만, 그랬다면 내가 모를 리 없어.”

운남에 들어오기 전에 천인장인 당랑산군과 조우했고, 들어온 이후엔 교성인 구루귀마와 조우했다.

그들이 인랑과 같은 능력을 지녔다면 목숨을 빼앗길 위기에 처했을 때 그 능력을 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별다른 명성도 없는 네놈을 천인장 자리에 앉히고 막중한 임무를 준 건 네놈을 믿는다는 거지. 배신하지 않을 거라고 말이야. 어째서 그랬을까.”

“.......”

“혈교에 있을 적부터 함께 지냈던 사이. 지금 네놈 꼬라지를 보면 동종이기 때문일 확률이 높지.”

따지고 보면 누가 동종인지 이실직고해도 변하는 건 없다. 강엽이 그걸 안다고 맹월림이 열세에 처하는 것도 아니고.

그럼에도 끝까지 숨겼다는 건 맹월림주에 대한 충성심이 그만큼 두텁다는 뜻이겠지.

“늑대는 우두머리에게 복종한다지? 근데 반대도 그럴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네가 죽으면 맹월림주는 어떻게 반응할까?”

“흥, 그분께선 끝까지 추격하실 거다! 너도, 네 여자도, 친한 놈들도 다 죽여주시겠지!”

“어쨌든 쫓아온다는 말이군?”

“너...?”

강엽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리자 인랑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강엽이 손을 들자 자성검이 수중에 날아들어왔다.

“목이 날아가도 살 수 있을까?”

그날, 맹월림은 또 한 명의 천인장을 잃었다.

* * *

짹짹!

동녘이 밝기도 전에 지저귀는 산새들.

간밤에 비가 내린 터라 잎사귀엔 물방울이 아롱졌는데, 물냄새와 녹음의 냄새가 뒤섞이며 맑은 청량감을 선사해주었다.

그러나 산문을 지키는 점창파의 제자들은 새벽 정기를 음미하지 못했다.

외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운 나머지 눈밑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상태였다.

몇 시진 동안 보초를 선 피곤함, 언제 적이 쳐들어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적들에게 잡힌 사문 식구들에 대한 걱정이 뒤섞인 것이다.

온갖 번뇌가 마음을 괴롭혔지만, 이 순간 그들이 품은 가장 간절한 욕구는 따뜻한 밥을 먹고 푹 쉬고 싶다는 것이었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쉬지도 못했다.

“사형, 슬슬 다음 조가 올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조금 있으면 오겠지.”

어쨌든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단지 그들의 초조함을 따라올 만큼 빠르지 않을 뿐이지.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곧 점창파의 제자들은 이쪽을 향해 걸어오는 인영들을 발견했다.

산 위가 아니라 아래에서 오는 자들이었다.

“...사제, 준비해라.”

“알겠습니다.”

사제라 불린 이가 호각을 불 준비를 했다. 적들이 쳐들어왔을 때를 대비한 물건.

이걸 불면 뒤쪽에 자리한 또다른 경계조가 호각을 불 것이다. 그렇게 이쪽에서 보낸 소식이 건너 건너 점창파의 경내에 닿을 터.

비록 그들은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만, 대 점창파의 제자로서 용감하게 싸우겠....

“사질들!”

“어엉?”

온몸에 검댕이를 묻힌 꾀죄죄한 청년.

얼핏 봐도 그들과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자가 사질이라고 부르니 당혹감부터 들었다.

암만 봐도 개방 거지인데...?

“하하, 나다! 척무경이라고!”

반갑게 손을 흔들며 웃는 척무경의 모습에 그제야 알아본 점창파 제자들이 입을 떡 벌렸다.

“처, 척 사숙!?”

“대체 뭘 하다 오신 겁니까!?”

“아, 그게 이야기하자면 긴데....”

척무경이 볼을 긁적이며 고개를 돌렸다.

피와 잿가루를 뒤집어쓴 일행들의 면면.

하지만 점창파 제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개성적인 일행들이 아니라 웬 소년이 짊어진 짐덩이였다.

머리만 빼꼼 내민 채 포대자루에 둘둘 말려진 여인.

뭘로 봐도 납치당한 모양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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