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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77화 (274/450)
  • 53화. 매듭 (2)

    “죄다 똑같이 생겼네. 네쌍둥이야?”

    “.......”

    가벼운 질문에도 불괴강시들은 묵묵부답이었다.

    그들의 면면을 쭉 둘러본 백서희는 어깨를 살짝 으쓱이고는 쌍검을 들어올렸다.

    “하긴 불괴강시들은 말하지 못한다고 했으니까.”

    혈교의 신녀와 완안극이 예외일 뿐.

    심지어 신녀는 강엽의 피를 마시고, 완안극은 죽기 전까지 맞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지 않았던가?

    그렇게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딛는 찰나였다.

    쐐애애애애액!

    ‘선공을?’

    뜻밖에도 한발 앞서 공세에 나선 붕괴강시들.

    검, 도, 퇴, 겸. 서로 다른 병장기로 무장한 그들이 사방에서 압박하자 백서희는 목덜미에 식은땀이 맺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큽...!”

    발바닥 용천혈로 진기를 분사, 유연하게 몸을 틀며 좌우에서 들이닥치는 도검을 회피.

    이후 뒤에서 떨어지는 철퇴를 맞기 전에, 다시 한번 허리를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흘려내고,

    촤아악!

    허벅지 대퇴근을 향해 검기를 날려 상대의 무게중심을 무너뜨린다.

    직후 튕기듯이 치솟자 두 자루의 쌍겸이 그녀가 있었던 자리를 파헤치며 삭풍을 일으켰다.

    똑같이 생겨먹은 네 명의 쌍둥이, 비록 강시가 되었다 하나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봤을 터.

    일단 합격진이 완성되면 그 위력이 폭발적으로 강해지는 만큼 어떻게든 숫자를 줄여놓아야 했다.

    ‘포위당하면 끝장이야. 공간을 내줘선 안 돼.’

    다행히 좁은 공간에서 싸우는 덴 이골이 났다.

    짓쳐들어오는 불괴강시들을 연달아 피하며 좁은 공간으로 끌어들인 백서희가 눈을 반짝였다.

    지하 공간까지 오는 동안 대강의 지리는 파악해둔 바.

    손목의 팔찌에서 발출된 은혼사가 벽을 뚫고, 맞은편의 벽까지 연결되었다.

    팅티잉!

    불괴강시가 힘으로 밀어내자 팽팽히 당겨지는 강사.

    사람의 육신을 두부처럼 썰어버리는 절삭력을 지녔으나, 호신기로 무장한 불괴강시가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자 뚜둑 끊어진다.

    불괴강시 역시 완전히 무사하지는 못해서 내장까지 드러나는 큰 부상을 입었지만....

    ‘소용없겠지. 재생될 테니까.’

    예상대로 숨 한 번 쉴 동안에 말끔하게 낫는 불괴강시였다.

    그 뒤를 따라온 쌍둥이들이 형제의 어깨를 밟고 뛰어올라 그녀를 향해 쇄도했다.

    그리고 미리 쳐둔 은혼사에 베이고 찢겨 피를 뿜어낸다.

    반면 백서희는 두 겹으로 겹친 은혼사를 밟고, 천장을 향해 쏘아졌다.

    은혼사에 통달한 그녀는 단순히 적을 썰고 죽이는 용도뿐 아니라, 기동력을 비약적으로 늘리는 데도 알차게 써먹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허리춤의 암기를 던져 가장 선두에서 쫓아오는 불괴강시의 눈알을 꿰뚫었다.

    “......!”

    꼭두각시 같은 놈들이라지만 고통까지 면역은 아닌지 달리다 말고 크게 비틀거린다.

    그 사이에 다시 거리를 벌리며 연달아 은혼사를 놓은 백서희는 조용히 공력을 모았다.

    몇 번을 쓰러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불괴강시들과 달리 그녀는 한 번 쓰러지면 끝장인 몸.

    얼마 없는 기회를 확실하게 살리기 위해, 불괴강시들에게도 통할 비장의 수를 준비한다.

    ‘됐어!’

    비로소 역습에 나서는 순간이었다.

    은혼사를 천장에 박고 몸을 싣는다. 탄력적인 강사는 그녀의 몸무게를 능히 감당해냈다.

    길어진 강사를 잡고 호선을 그린다. 떨어지는 힘과 당겨지는 힘을 함께 받은 몸이 새처럼 날아갔다.

    맞은편에서 달려온 불괴강시들이 벽을 박차고 뛰어올랐음에도 그녀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래, 얼른 오라고! 다 썰어줄 테니까!”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거리. 돌연 은혼사를 끊어낸 그녀가 바람결에 몸을 내던졌다.

    짙푸른 검강의 궤적이 질주한다.

    촤아아아아아악......!

    무언가 잘리는 소리가 나지막이 이어지고, 검은 머리카락 몇 가닥이 허공에 나부낀다.

    그리고 한 사람의 목이 떨어졌다.

    바닥에 곤두박질친 불괴강시의 머리를 흘깃한 백서희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쩝, 두 명을 노렸는데....’

    철퇴를 휘두른 놈의 목을 베고, 도를 다루는 놈의 어깻죽지를 깊게 베는 데 그친 것이다.

    간헐적으로 피를 뿜은 놈이 상처를 재생시키곤 다시 무서운 기세로 짓쳐들었다.

    쩌엉! 카앙...!

    그렇게 강기와 칼날이 부딪치는 찰나.

    검강이 칼날을 반쯤 파고들면서 넓은 도신에 거미줄처럼 흉한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조금만 베면 부술 수 있겠지만 머리 위에서 또다른 불괴강시가 역수로 쥔 검을 찔러들어왔다.

    모골이 송연해질 정도로 무지막지한 공력 파동을 발했기에 백서희도 마냥 무시할 수 없는 상황.

    도를 휘두르는 놈을 밀어내고, 쌍검을 교차시켜 검기를 막아냈다.

    투아아아앙!

    내려치는 검기와 버티는 검강.

    승자는 검강이다.

    차아악!

    급작스레 치솟은 검푸른 반월이 흙먼지를 가른다.

    어깨부터 옆구리까지 사선으로 양단된 놈이 안에 든 내용물을 울컥 토해내며 고꾸라진다.

    그리고 지풍이 허공을 관통했다.

    “끄읏...!”

    반쯤 박살난 도를 들고 덤빈 불괴강시가 요혈을 맞고 크게 휘청거렸다.

    혈도가 제멋대로인 흡혈괴마들과 달리 불괴강시의 경맥 구조는 사람과 다르지 않은 바.

    하지만 쌍겸의 불괴강시가 형제의 앞을 막으며 겸막(鎌幕)을 그려냈다.

    따다다다다다당!

    연속으로 쏘아낸 지풍이 요란하게 콩 볶는 소리를 내며 튕겨나오자 백서희는 낭패감을 느꼈다.

    “이 새끼가 제일 고수였네?”

    쌍둥이 형제인데도 무위에 격차가 있었던 것.

    백서희처럼 좌우의 쌍겸에 강기를 두른 불괴강시가 거리를 좁혀들어오며 절초를 구사한다.

    네 자루의 날붙이가 전후좌우 얽히며 충격파를 일으키고 불꽃을 튀겼다. 강기를 다루는 고수답게 호흡 한 번에 십여 합이 넘는 공방.

    그동안 몸을 회복한 도객이 망가진 도를 버리고, 형제가 휘둘렀던 검을 주워들었다.

    단숨에 허공 위로 붕 뛰어오른 전직 도객.

    공중제비를 돈 놈이 배후에 착지하면서 검초를 뻗어왔다.

    “씁, 어떻게 기른 머리인데...!”

    머리카락이 한 움큼이나 뜯겨나가자 백서희는 구시렁거리면서도 보법 경파를 발하며 검극을 흘려냈다.

    한 박자만 늦었다면 머리카락이 아니라, 아예 머리가 통째로 뜯겨나갔을 위기였으니까.

    그 와중에도 쌍겸은 요혈을 노려왔다. 마치 제 형제가 당한 고통을 배로 갚아주겠다는 듯이.

    피하기 늦었음을 직감한 그녀는 무너뜨리듯이 자세를 낮추고 긴 다리를 뻗어 놈의 발목을 걸었다. 금나수를 펼치듯 발목을 감아서 꺾어버리려는 의도였다.

    완숙한 고수답게 놈은 형편없이 고꾸라지는 신세는 면했지만, 그 위엔 형제의 검이 있었다.

    득달같이 출수했던 불괴강시는 본능적으로 멈칫했고, 그 덕분에 아주 약간의 틈이 발생했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좁은 공간을 쏙 빠져나온 백서희가 폭포를 거슬러오르듯 번쩍 솟구쳤다.

    콰직!

    턱주가리를 꿰뚫은 검은 그대로 입천장을 부수고 놈의 뇌까지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어렵사리 한 놈을 죽였지만, 다소 피해를 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쉬아악!

    “크윽...!”

    어떻게든 직격은 면했는데도 옆구리를 길게 베였다. 우윳빛의 살결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렀다.

    ‘승부수!’

    쌍검의 길이가 적당히 짧아서 다행이었다. 덕분에 이 좁은 공간에서도 검극을 겨룰 수 있지 않나.

    검강을 유지하느라 내공도 얼마 남지 않은 판국.

    바닥까지 긁어낸 진기를 검극에 담아 화살처럼 내쏘았다. 길쭉해진 검강이 쌍겸 사이를 절묘하게 파고들면서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

    꼬챙이처럼 꿰뚫린 육신이 잘게 경련했다.

    백서희는 놈의 눈알이 약간이지만 놀란 듯 커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일장을 내뻗었다.

    언젠가 강엽에게 배운 한천최심장의 일수.

    터어어엉!

    면전에서 직격당한 놈의 머리가 용수철처럼 튀어나갔다. 충격을 이기지 못한 목뼈가 우두둑 부러졌다.

    눈을 부릅뜬 안면에 얕게나마 얼음이 낀 놈은, 통나무처럼 뻣뻣해진 채 뒤로 넘어갔다.

    “하악! 하악!”

    거칠게 숨을 몰아쉰 그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머리가 박살났는데도 꿈틀거리는 불괴강시. 놈의 턱주가리에 꽂힌 검파를 움켜잡고 그대로 뜯어냈다.

    이어 쌍겸의 목까지 벤 그녀는 남은 시체들을 확실하게 처리한 뒤에야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후아, 힘들다... 진짜로 염라대왕이랑 면담하는 줄 알았네.”

    한 달 전의 그녀였다면 승리를 장담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쩌면 동귀어진하거나 패했을 수도 있는 일.

    전륜구룡공을 익히고, 향로 속의 조상님을 만나서 기연을 얻고. 뭐 하나만 부족했어도 저곳에 눕는 것은 그녀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 * *

    “사형.”

    “대충 이십 년 만인가?”

    “정확히는 이십이 년이 흘렀지요.”

    “그런가. 하도 옛날이라서 그런지 헷갈리는구나.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그때의 일을 후회하십니까?”

    혈음마군이 피식 웃었다.

    “멍청한 질문이군. 후회하냐고? 아니, 그때로 돌아가도 나는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다만 들키지 않기 위해 조금 더 현명하게 처신했겠지.”

    “...그렇습니까.”

    현운 도장의 얼굴에 복잡한 심경이 어렸지만, 그도 잠깐에 불과했다. 오래전 사문에서 탈주한 사형을 보는 얼굴에 다부진 각오가 어렸다.

    “사부님께서 이 자리에 계시지 않아서 다행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 말씀을 들으셨다면 그분의 마음에 대못이 박혔을 겁니다.”

    두 사람을 가르친 스승. 세간에선 검선이라 불리며 신선처럼 추앙받는 무당의 장문인.

    스승을 언급하는 현운 도장의 목소리엔 안타까움이 실렸으나, 혈음마군은 냉소만 내뱉었다.

    “그래, 다행이지. 그 늙은이가 있었으면 꽁지 빠지게 도망쳐야 했을 텐데. 덕분에 널 죽이고, 나중에 그 늙은이를 죽일 기회도 얻었군.”

    “왜 그렇게 사부님을 미워하십니까?”

    “쯧쯧, 현운아. 이 순진한 녀석아. 그걸 정말 몰라서 묻는 게냐?”

    “예, 모르니까 가르쳐주셨으면 합니다.”

    “태극혜검(太極慧劍).”

    무당파의 모든 오의가 담긴 장문 비전. 개파 조사인 삼봉 진인이 창안했다는 절세신공. 태극권이 무당의 시작이라면, 태극혜검은 무당의 끝이라 일컫어진다.

    “사부는 내게 태극혜검을 전수하기를 거부했다. 내가 장문인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하더군. 나는 무당산을 품을 그릇이 아니라고 말이야.”

    “.......”

    “당시엔 인정하지 못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무당을 배신했지. 그런 면에서 사부는 선견지명이 있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태극혜검을 가르쳐주었다면 내가 무당파를 배신했겠느냐?”

    혈음마군의 무재가 부족해서 태극혜검을 전수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적어도 현운 도장이 아는 검선은, 평생을 부모처럼 따른 장문인은 무재의 유무로 제자를 차별하는 이가 아니었다.

    “사형이 그렇게 도망치고 십 년이 지난 뒤에 황실의 번왕(藩王)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지요.”

    “.......”

    “번왕은 물론 그의 부인과 자식들, 호종하는 황실의 고수들이 하룻밤 사이에 떼몰살을 당했고....”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혈음마군을 향해 현운 도장이 침통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갓 태어난 핏덩이조차 처참하게 죽었습니다.”

    “하하하하하하!”

    이마를 잡으면서 웃고 있는 혈음마군의 모습.

    붉게 충혈된 눈동자에 깃든 광기를 엿본 현운 도장이 한숨을 삼키자 혈음마군이 낄낄거렸다.

    “제법 잘 조사했구나. 내가 했다고 동네방네 떠벌리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한데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는 모르느냐?”

    “....”

    “아, 이런. 사부가 그것까진 말해주지 않았나 보군. 그 작자가 내 가족들을 몰살시켰기 때문이다.”

    “어째서 그런 짓을...?”

    “그자는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거든. 한데 황실에 정황이 흘러간 게야. 역모를 꾀한 주제에 겁은 많아가지고, 바로 관련자들을 없애려 하더군.”

    “토사구팽...!”

    “그래, 우리 가문은 그 반역에 가담했지. 몇 년이나 음지에서 번왕을 보필했다. 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반골의 상이었던 거다. 하지만 그자는 그렇게 하면 안 됐어....”

    차라리 반역을 저지르고 장렬하게 죽었다면 그토록 증오하지는 않았겠지.

    하지만 번왕은 꼬리가 밟히자마자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자들을 가지치기하듯 쳐내버렸다.

    “우리 가문이 어찌 멸문했는지 아느냐? 아비는 목이 잘렸고, 어미와 누이는 죽을 때까지 치욕을 당했다. 내가 살아남은 건 그야말로 천운이었어.”

    “한데 그것과 사문을 배신한 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찌 상관이 없겠느냐. 사부가 왜 내게 태극혜검을, 무당의 장문직을 물려주기를 거부했겠느냐? 내가 그 힘으로 복수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당파를 역도의 소굴로 만들까 봐 두려웠던 게야.”

    “......!”

    “그래서 무당을 배신했다. 복수를 위해 힘을 추구했어. 그놈이 왕후장상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내 가족을 죽였으니, 나도 똑같이 갚아줘야 공평하지 않겠느냐.”

    “그럼 혈교에 가담한 건...!”

    “이 세상은 더럽고 추악하다. 차라리 완전히 부수고 새롭게 시작하는 게 낫지. 그래서 혈교에 귀의했다. 놈들이 믿는 혈마가 강림하면 전부 파괴될 테니까.”

    “궤변입니다! 시산혈해가 쌓일 겁니다! 사형이 겪었듯 수많은 피해자가 나올 거란 말입니다!”

    “그거 괜찮겠구나.”

    유리알처럼 투명하게 번들거리는 눈알이 흐뭇한 호선을 그린다.

    “그럼 그놈들도 내 기분을 알게 되겠지. 모두가 똑같아지면 선도 악도 없어지는 거야....”

    “사형-!”

    무당의 송문고검이 빛살처럼 내달리고, 핏빛을 뿜어내는 쌍륜이 굳건한 방벽을 세운다.

    광기 어린 비웃음이 뒤따라 울려 퍼졌다.

    “막을 테면 막아봐라, 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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