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매듭 (1)
-크오오오오오...!
매서운 설풍이 몰아친다.
한서불침에 도달한 고수조차 뼛속까지 에일 듯한 추위.
“내 기억하기로 설산검문의 심법이 빙공은 아니었는데....”
그러나 완안극은 얇은 단삼만 입고도 얼어붙기는커녕 멀쩡하게 입을 놀리고 있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기막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지만, 괴물이 된 설산검문주는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콧김을 씩씩 뿜어내며 으르렁댔다.
“가련하구나, 설산검호(雪山劍豪).”
설산검문주의 이름을 점창파 장문인과 대등한 반열로 올려주었던 별호.
운남을 대표하는 위대한 검호가 이성 없는 괴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어찌 비애를 느끼지 않을까.
“하긴 나 또한 얼마 전까진 네 녀석과 다를 바 없는 꼴이었지.”
강엽을 만나지 못했다면, 그에게 구원받지 못했다면 추악한 괴물의 모습으로 삶을 마감했으리라.
“이젠 화도 나지 않는군. 그저 동정할 뿐이다.”
-카아아아아악!
설산검호가 대검을 내려찍었다.
큼지막한 거구 만큼이나 사전 동작도 커서 어떤 초식을 가져갈지 훤히 보였지만, 그 이상으로 민첩한 속도가 약점을 상쇄한다.
투콰아아앙......!
석벽이 쪼개지고, 흡혈괴마들의 잔해가 그에 휘말려 하얗게 얼어붙는다.
공격 조짐을 읽어도 휘말릴 수밖에 없는 광범위한 검격.
“단순무식하군. 설산검문의 검법이 언제부터 이렇게 단조로웠나?”
설산검호가 휘두른 대검의 위.
학처럼 한 발로 선 완안극이 반대쪽 발을 뻗어 녹색 독기를 내뿜는다.
본능대로 눈꺼풀을 질끈 감은 설산검호였지만 너무 늦었다.
치이이이이익!
-끅? 끄아아아아악!
검을 내버리고 나뒹구는 모습.
훌쩍 뛰어오른 완안극이 유려하게 몸을 돌리며 뒷꿈치 족격을 날렸다.
콰아아아앙!
“몸이 크다는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지.”
때릴 데가 너무 많거든.
중얼거리면서 독기를 주입하자 설산검호의 거구가 잘게 경련했다.
그동안에도 완안극의 독공은 계속 이어졌다.
‘장기전으로 가면 골치 아파진다.’
똑같이 재생력을 가지고 있다면 결국 어느 쪽이 먼저 지치느냐로 승부가 판가름날 터.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라도 빨리 해치워야....
-크아아아아아!
“끄응, 쉽진 않구만.”
지속적으로 독을 주입해서 신경을 파괴하고 피를 굳혔음에도 설산검호의 재생력이 웃돌았던 것이다.
창졸간에 일어선 설산검호가 진각을 쿵 밟으면서 대검을 회수, 일도양단의 기세로 찍어누른다.
“......!”
바닥 전체가 잘려나가는 위력.
설산검호가 올라올 때 한차례 박살났던 바닥이 완전히 꺼지면서 시커먼 무저갱이 아가리를 벌렸다.
부서지는 파편을 박차고 뛰어오르면서 허공에 체류한 완안극은 밑에서부터 올라오는 경파를 감지하고 눈썹을 구붓하게 휘었다.
“이런 터무니없는...!”
콰아아아아앙!
천장을 뚫어버리는 거대한 경파.
호신강기도 종잇장마냥 찢겨지고, 살갗이 벗겨지며 피가 뿌려진다.
부상이야 금세 아물었지만, 문제는 산산조각 박살난 파편들이 우후죽순 떨어지고 있다는 것.
‘흥, 이까짓 바위들 따위!’
바늘구멍만한 틈새를 포착, 허공을 거슬러올라간다.
파편을 피해 솟구치는 모습을 다른 이들이 봤다면 금리도천파(金鯉倒千波)라는 이름을 떠올렸겠지.
그렇게 벗어나는 듯했던 완안극의 얼굴은 곧이어 창백하게 질렸다.
-크오오오오!
땅바닥에 떨어졌던 설산검호가, 어느새 면전에서 주먹을 뻗을 자세를 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마 지하에서 여기까지...!”
말을 끝낼 새도 없었다. 새하얀 강기를 덧씌운 주먹이, 파편을 부수면서 한달음에 도달했으니까.
콰아아아아앙-!
“컥!”
순간적으로 의식이 암전되었다가,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을 땐 발에 채여 천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안면이 뭉개지고 부서진 이빨이 우수수 떨어졌다. 사지의 관절은 기형적으로 꺾이고, 늑골이 내장을 뚫고 밖으로 삐져나온 처참한 몰골.
떨어진 완안극을 움켜쥔 설산검호가 주둥이를 벌리자 입천장까지 빽빽이 채운 이빨이 드러났다.
우드드득!
“크아악!”
재생하기도 전에 온몸을 쥐어짜는 힘에 뼈와 내장이 으스러진다.
의식마저 가물가물해지는 상황.
“제...길, 이렇게...!”
이렇게 무기력하게 패할 쏘냐.
덜렁거리는 팔을 억지로 빼내자 팔뚝이 뚝 끊어졌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반대쪽 손으로 잡아채서 설산검호를 향해 던졌다.
“아무거나 처먹으면 피 보는 법이다!”
입천장을 향해 날아가는 팔뚝. 그딴 것도 먹이라고 날름 받아먹은 설산검호가 으적으적 씹어댔다.
목울대가 꿀렁거리고, 백태가 낀 눈알이 만족스럽게 휘어진다.
“하... 그게 맛있나?”
피떡이 된 완안극이 힘없이 웃었다. 설산검호는 팔 한 짝으론 만족하지 못하겠는지 그를 두 손으로 잡고 들어올렸다.
“팔.”
-크르륵...?
“칠.”
천천히 숫자를 세어간다.
설산검호에게 호기심이 남아있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시간을 끌어야 했다.
육, 오....
‘검로를 잊진 않았다. 완전히 변이하진 않은 거야. 하다못해 짐승 수준의 사고력이라도 있다면....’
사, 삼, 이....
-카아악!
통째로 삼킬 기세로 한껏 벌어진 주둥이.
마지막 숫자까지 센 완안극이 눈을 질끈 감았다.
목숨을 건 도박수가 틀어졌다.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전....’
어딘가에서 싸우고 있을 주인에게 사죄하면서 다가올 최후를 담담하게 기다렸다.
죽을 때 죽더라도 겁쟁이처럼 굴고 싶진 않았기에.
“......?”
하지만 예상했던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씹어삼킬 기세였던 설산검호는 통나무마냥 뻣뻣하게 굳어져서 미동도 없었다.
오히려 게거품을 질질 물더니, 완안극을 붙잡은 손에 힘이 스르륵 풀리는 게 아닌가?
-크아아아아아악!
그 뒤부터는 발광이었다. 완안극을 신경도 쓰지 않고 땅을 뒹굴더니, 무저갱으로 쿵 떨어졌다.
무거운 거구가 부딪치는 굉음과 함께 흔들리는 지면.
한숨을 내쉰 완안극이 짓이겨진 육신을 억지로 끌며 기어갔다.
‘간발의 차로 통했군. 조금만 늦었어도 죽을 뻔했다.’
독인이 위험한 이유는 피조차 극독이 되기 때문이다.
흡혈귀가 된 이후로 독성은 더 강해져서, 이젠 한 방울의 피로 능히 코끼리도 죽일 수 있을 지경.
구멍이 시작되는 부분에 다다라서야 걸을 수 있을 만큼 회복한 완안극은 안쪽에서 발광하는 설산검호를 보고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방식으로 결착을 내고 싶진 않았는데....”
수십 년 전 설산검호와 겨루었을 때는 승부를 내지 못했다. 승자도, 패자도 가리지 못하고 먼 훗날에 다시 한번 자웅을 겨루기로 했거늘.
그때의 약속이 이런 형태로 결착될 줄 누가 알았을까.
“...그래도 끝은 내야지.”
저대로 둔다면 다시 재생할지도 모르는 일.
무저갱 너머로 떨어진 완안극은 틀어지는 허리를 재차 비틀어서 울퉁불퉁한 파편 위로 착지했다.
그때까지도 고통을 참지 못하고 머리를 찧은 설산검호를 향해 손톱을 휘두르려는 찰나.
-으르르르르... 안...!
“음?”
일순 귓전을 파고드는 육성.
잘못 들은 거라 여기고 조풍을 내쏘아 설산검호의 팔을 베었다. 완전히 끊지는 못했으나 침투한 독기가 근육과 경맥을 파괴할 터.
한데 설산검호의 입에서 다시 한번 목소리가 나왔다.
-아프다! 아파...!
“설마?”
이번엔 확실하게 들었다.
설산검호, 괴물로 타락한 검호가 마성을 극복하고 이성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었다.
‘...숨통을 끊을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
설산검호가 회복할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회복하지 못한다면 아까 같은 싸움이 반복될 뿐이다.
한번 호되게 당한 만큼 독혈을 먹이는 기지가 다시 통한다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자해하는 설산검호를 향해 독장을 내쏘려고 했지만....
“젠장, 눈을 떠라! 설산검호!”
-으으아아아아!
사실 흡혈괴마의 재생력이라면 독기쯤은 진작 극복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저리 괴로워하는 이유가 무엇이겠나.
‘흡혈귀의 피. 그것밖에 없겠지.’
그 자신이 강엽의 피를 마시고 그의 혈족이 되지 않았던가?
진조에 비하진 못해도 흡혈귀가 된 그의 피 또한 특별했다.
-끄윽! 으윽! 나, 나는...!
“정신 차려라, 설산검호! 아니, 설광우!”
평생 동안 뇌리에 각인된 이름.
누구의 자식인지 모를 갓난아이를 산문 앞에서 주운 사부가 붙여준 이름이라고 했던가.
“설산검문의 십구대 문주! 뇌음사(雷音寺)의 마승들을 무릎 꿇린 검호! 설산의 이무기를 토벌한 영웅! 네가 한 일들을 기억해라! 어떻게든 떠올려내!”
-끄으으으윽!
“한낱 마성 따위에게 질 거냐? 고결한 검문의 종주가 괴물로 죽을 거냔 말이다!”
-으아아아아아!
대포알 같은 주먹이 벽을 친다.
한 끗 차이로 주먹을 비껴낸 완안극이 독장을 날려 설산검호의 턱주가리를 날려버렸다.
“설우현! 금사하! 강호협!”
-......!
“네 제자들의 이름이다!”
살을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떤 설산검호가 큼직한 눈동자를 굴려 완안극을 내려다보았다.
광기만 가득했던 백태에 비로소 감정이라 할 만한 것들이 떠오른다.
-으, 으으...!
“...돌아와라, 설산의 주인.”
그 말이 신호가 되었던 걸까.
주먹을 떨군 채 주저앉은 설산검호의 덩치가 조금씩 쪼그라들면서 희미한 육성이 흘러나왔다.
“...은혜를 입었군, 만독자.”
“날 알아보겠나?”
“처음엔 못 알아봤다. 하지만 그 독기... 절대 잊을 수 없지. 어떻게 젊어진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성을 되찾았지만 원래대로 돌아오진 못했다. 완안극과 달리 인간과 흡혈괴마가 혼재된 몰골.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설산검호가 씁쓸히 중얼거렸다.
“...난 괴물이 되었던 건가?”
“네놈 잘못이 아니다.”
“아니, 내 잘못이다. 내가 부족해서 검문을, 제자들을 지키지 못했어.”
“그리 따지면 나도 똑같지.”
힘이 부족해서 적들이 독곡을 짓밟는 걸 막지 못했다.
완안극이 한숨을 쉬자 설산검호가 쓰게 웃었다.
“...끌려왔을 때 얼핏 자네 이름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서 난 자네도 괴물이 된 줄 알았네.”
“나도 한때는 괴물이었다. 주인님을 만나서 새로운 삶을 얻었을 뿐.”
“주인님?”
“이야기하자면 길다.”
완안극의 입에서 그간 겪은 이야기가 나왔다. 불괴강시가 되어 상관세가를 습격한 일. 강엽을 만나서 이성을 되찾고 흡혈귀가 되었던 일.
“그렇게 운남에 와서 네놈을 만난 거다.”
“허, 엄청난 모험이었군. 세상에 그런 존재가 있을 줄이야. 믿기지 않지만... 믿지 않을 수도 없군.”
당장 자신도 괴물이 된 마당에 그보다 더한 괴물이 있다는 걸 믿지 못할 이유는 없으리라.
“조금만 기다려라. 주인님께서 네놈을 고쳐주실 게다. 인간으로 되돌아갈 순 없겠지만....”
완안극 자신의 피로는 이성을 되찾게 하는 데 그쳤지만, 강엽의 피라면 그 이상을 해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설산검호의 만면엔 쓴웃음이 어려 있었다.
“아니, 나는 늦었네.”
“뭣이?”
“자네와 달리 나는 불괴강시가 아니지 않나. 내 몸은 무너지고 있어.”
그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하듯 설산검호의 육신은 조금씩 부서지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점토처럼 피부가 떨어져나가고, 두꺼운 팔뚝이 뚝 끊어지면서 바닥을 나뒹군다.
“.......”
“그런 표정 짓지 말게.”
참담해하는 소년을 바라본 설산검호가 미소 지었다.
“이미 자네는 날 구해주었어. 내가 사람으로서 죽을 수 있게 해주지 않았나.”
“하지만...!”
“그리고 난 더 이상 살기를 바라지 않네. 저승에 가서 제자들과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야.”
“나와의 승부는 잊은 거냐!”
“자네가 이긴 걸로 하세.”
“네놈!”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처럼 발끈한 완안극이 쳇하고 고개를 돌렸다.
“...설산검문은 어쩔 거냐? 네놈도, 네놈 제자들도 죽었다면 명맥이 끊긴 건데.”
“그래서 자네에게 미안한 부탁을 하려고. 혈교놈들이 우리 검문의 비급을 빼앗아갔네. 비급이 남아있다면... 자네가 수습해주게.”
“이 망종이 보자보자하니까! 독곡을 재건해도 모자랄 판에 네놈 뒤치다꺼리나 해달란 말이냐?”
“설산검문을 재건해달란 말이 아니야. 그저 후인만 찾아주게. 그럼 명맥은 이어지겠지.”
“.......”
“부탁하네, 안극.”
그 말을 끝으로 눈을 감은 설산검호는 먼지처럼 부서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그의 혼백을 인도하듯 망자의 흔적을 천장 너머로 데려간다.
그 광경을 하염없이 올려다보던 완안극이 고개를 떨어트렸다.
“...빌어먹을 인사 같으니. 그딴 유언을 남기고 죽어버리면 거절하지도 못하지 않느냐.”
망자가 죽은 자리엔 푸른 조각만 사리처럼 남아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게 설산검호가 음한지기를 다룬 비결임을 깨달은 완안극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영물의 내단인가.”
온전한 내단이 아닌 작은 조각. 부스러기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푸른 조각을 주운 완안극이 주먹을 꽉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