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군 (2)
일행은 들키지 않고 잠입했다.
도처에 깔린 혈교도들은 일행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얼굴에 다소 긴장감이 흐르긴 하나,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면서 일행을 지나친다.
‘경계조에게 걸어둔 금제를 너무 믿는걸.’
물론 믿을 만한 금제이긴 하다. 단지 금제만 믿고 안심하기엔 일행의 재주가 지나치게 특출났을 뿐.
“방심한 상대에겐 엿을 먹여주는 게 인지상정이지.”
쾅! 콰앙! 콰아앙!
심처에 오자마자 주변에 널린 것들을 모조리 부숴버린다.
강맹한 공력 파동이 주변을 휩쓸 때마다 부서진 돌조각들과 육편이 핏물과 함께 흩날렸다.
그리고....
-쿠워어어어어어......!
장내를 빼곡하게 채운 석관.
잇따른 충격에 깨어난 흡혈괴마들이 제 몸을 일으키면서 포효한다.
그러나 흡혈괴마들이 싸울 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날카로운 검광이 그들의 목을 날려버린다.
‘아무리 재생력이 뛰어나도 머리를 잃으면 싸우지 못해.’
뜻밖의 호재가 따르기도 했다.
콰앙!
-꾸에엑!?
막 깨어난 흡혈괴마들이 천지분간 못하고 저들끼리 뒤엉켰던 것.
서로 안면을 강타하고 살점을 물어뜯으면서 자멸하는 흡혈괴마들의 모습에 강엽이 씩 웃었다.
“운이 좋군.”
이 거점에 들어오기 전, 그는 흡혈괴마들의 수가 적어도 백 마리는 넘을 거라 예상했다.
그동안 소모한 숫자를 빼더라도 그 이상을 채워넣었을 테니까. 실제로 이 안에 있는 석관의 숫자만 해도 물경 이백을 헤아렸다.
‘만약 이놈들이 모두 완성됐다면 꽤나 위험했겠지.’
살아남더라도 상당히 공력을 써야 했을 터. 강적과의 싸움을 앞두고 그런 식으로 소모했다면 이후에 굉장히 불리한 입장을 강요받았으리라.
물론 혈교도 손 놓고 있지만은 않았다.
위이이이이잉!
수천, 수만 마리의 벌 떼가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것처럼 요란한 소성.
일행이 흡혈괴마를 죽이다 말고 천장을 올려다보자 핏빛의 법문들이 요사스럽게 발광하고 있었다.
“이럼 우리가 들어온 걸 놈들도 알았겠네.”
“그렇겠지.”
급박한 상황임에도 일행은 놀라지 않았다.
석관을 파괴하기 전에 이미 나름의 방비가 갖춰졌다는 걸 파악한 강엽이 미리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강엽의 말대로 일행이 지났던 통로 저편에서 수많은 기척들이 적의를 품고 달려오고 있었다.
혈령교위들이 수많은 교도들을 이끌고 달려오는 모습.
그 선두엔 팔에 완장을 찬 혈사교령이 악귀처럼 일그러뜨린 채 살광을 내뿜고 있었다.
“이교의 죄인들, 감히 성소(聖所)를 침범하다니!”
“염병하고 자빠졌네. 광신도 새끼들, 돌아버린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 이상으로 미쳤구나. 이딴 게 성소?”
백서희가 기가 차서 중얼거렸다. 사람 잡아다 괴물로 탈바꿈시키는 곳을 성소라고 부르다니?
강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일일이 대응할 필요 없어. 말로 한다고 알아들을 놈들이었으면 애초에 이런 짓도 안 했을 거다.”
백서희도 알고 있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으니 혼잣말로 분통을 터뜨린 거지.
뒤에서 달려드는 흡혈괴마의 허리를 끊어낸 강엽이 선두에서 달려오는 교령을 향해 자성검을 던졌다.
선두의 교령이 코웃음을 쳤다.
“고작 투검(投劍) 따위로... 허업!”
원을 그리면서 날아온 검.
그것이 한순간 눈부신 빛살로 화해 질주하자 교령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호신기를 두르고 있었으나, 어검술로 구사하는 어기충검(御氣充劍) 앞에선 종잇장처럼 찢겨나가고 그 안에 있는 몸뚱이마저 관통당한다.
유장한 공력을 견디지 못한 몸뚱이가 폭발하듯 터져나가고,
-뇌망.
빠지지지지지직!
“끄아아아악!”
어검에서 터져나온 뇌기의 그물이 통로를 물샐 틈 없이 감싸는 광경.
나무 줄기처럼 퍼진 뇌기가 혈교도들의 몸뚱이를 관통, 그 뒤에서 달려왔던 자들까지 꼬챙이처럼 꿰매버리면서 저편까지 뻗어나간다.
그제야 상대의 격을 깨달은 혈교도들은 두려움에 질렸지만, 이미 자성검은 그들이 어찌할 새도 없이 빠르게 쇄도하고 있었다.
그렇게 자성검이 한 혈령교위를 치려는 찰나.
콰아앙!
난데없이 들이닥친 묵직한 경력이 어검의 진격을 저지했다.
혈령교위의 어깨를 잡아당긴 더벅머리 사내가 서늘한 눈빛을 뿌렸다.
“쥐새끼치곤 꽤 강하군. 설마 어검술을 구사할 줄은... 음? 네놈은?”
멀리 있는 강엽을 알아보는 사내.
잠시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다문 사내가 별안간 미친 듯이 폭소하기 시작했다.
“큭큭큭... 크하하하하하하하!”
“....”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사내가 그의 존재를 보고 깜짝 놀랐듯, 그 역시 사내가 이런 곳에 있을 줄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혈음마군.”
지난날 광명마교와의 싸움에 갑자기 난입해서 그와 오사도의 합공을 받아냈던 팔대교왕.
과거 방문좌도를 탐하는 바람에 파문되었고, 수많은 동문 사형제들을 참살하고 도망쳤던 무당의 배신자.
언젠가 만나리라 생각은 했지만, 설마 이런 식으로 이루어질 줄이야.
“오랜만이구나, 귀영!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그때 만나고 두어 달 좀 넘게 지난 것 같은데... 왠지 나는 시간이 오래 지난 것 같단 말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팔을 자른 원수다. 엄밀히 말하면 강엽이 아니라 진조가 한 짓이지만, 혈음마군의 입장에선 아무래도 좋은 일.
입가에 사이한 미소를 매단 그가 이마를 쓸어올리며 말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과연 그렇군. 적들이 온다는 말은 들었지만 네놈일 줄은 몰랐다. 난 현운 사제가 올 줄 알았는데 말이야.”
그때 강엽의 옆에 현운 도장이 착지했다.
무당의 제자답지 않게 온몸으로 사특한 기파를 뿜어내는 혈음마군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사형.”
“아, 그래. 현운... 널 기다리고 있었지. 이 우형(愚兄)은 잔칫상을 받은 기분이구나. 내 평생 가장 죽이고 싶었던 놈들이 같이 나타날 줄이야.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광기가 뇌를 절여버린 것처럼 저 홀로 키득거리는 모습.
일그러진 안면을 내리누르는 무광검정의 손은 무쇠를 덧바른 것처럼 차가운 질감을 품고 있다.
혈음마군이 상반신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기에 흉하게 연결된 이음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의수인가?”
“그래, 혈교의 보물이지.”
철갑마수(鐵甲魔手). 팔대교왕인 혈음마군을 회복시키기 위해 혈교주가 하사한 법보였다.
유리알처럼 투명한 안광을 번들거리며 강엽과 현운 도장을 번갈아본 혈음마군이 비릿하게 웃었다.
“자, 누구부터 죽여주랴? 너무 고민돼서 괴로운걸. 둘 다 죽여야 하는데... 수많은 산해진미 속에서 딱 하나만 골라야 하는 심정이야.”
“하나만 고르게, 하나만. 과식하면 탈나는 법이야.”
혈음마군의 뒤편에서 등장한 노인.
사인교에 오른 비대한 노인이 강엽과 현운 도장을 돌아보았다.
“저들 말고도 두어 명이 안쪽에 더 있는 것 같구먼. 저만한 실력자들이라면 맹월림이 쩔쩔맬 만하지.”
노인은 기파를 뿌리지 않았지만, 그가 혈음마군 못지 않은 절세고수라는 것은 바로 알 수 있었다.
현운 도장이 물었다.
“노인장은 뉘시오?”
“금마라네.”
가벼운 소개였지만 현운 도장은 흘려듣지 못했다.
“사대악인...!”
흔히들 천하팔존이나 정도십대고수, 사도십대고수 등으로 대표되는 강호의 고수들과는 다른 존재였다.
밥먹듯 악행을 일삼는 사마외도의 고수들 중에서도 격이 다르다고 일컫어지는 마인들.
‘이러면 사대악인만 세 명을 만나는 건가?’
지난날 강엽과 부딪쳤던 괴뢰마, 그리고 처음으로 강호의 은원을 맺은 모산혈조가 사대악인들.
그리고 강엽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지만, 광명마교의 삼사도로 임명된 마의 역시 사대악인의 일인이었다.
“교왕급의 고수만 두 명이라... 아주 작정을 했군.”
“아무렴 자네들만 할까? 자네들 뒤편에서 싸우고 있는 자들 중에도 삼화취정의 고수가 있는 것 같은데. 이 늙은이가 보기엔 자네들이야말로 과한 전력이구먼.”
때마침 흡혈괴마를 모두 격살했는지 정신없이 울려 퍼지던 포효와 악다구니가 뚝 그친 마당.
피로 범벅이 된 완안극과 백서희가 강엽의 좌우에 등장하자 금마의 눈이 쥐방울 만해졌다.
“만독자(萬毒者)? 죽은 게 아니었나?”
그것은 완안극이 독곡주였던 시절 강호에서 불렸던 별호였다.
금마가 소년이 된 그를 바로 알아봤다는 게 무얼 의미하겠는가?
완안극이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얼굴... 어렴풋이 기억이 나는구나.”
“...허, 이런 사태는 전혀 상정하지 못했는데.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회복했다니. 어디서 기연이라도 얻은 게야?”
“네놈은 알 것 없느니라.”
“흐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뭐, 내가 전문가도 아니니. 모산혈조에게 보여주면 좋아하겠구먼.”
마침내 적들의 입에서 모산혈조의 이름이 나왔다. 강엽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물었다.
“모산혈조는 어디 있지?”
“아해가 그 친구는 왜 찾느뇨?”
“어디 있는지나 말해.”
“클클, 그걸 협박이라고 하는 게냐? 어설픈...!”
화아아아악-!
강엽의 전신에서 폭발적으로 기파가 솟구치는 것과 동시에 적아를 막론하고 모두의 안색이 일변했다.
사대악인의 일각을 차지한 금마조차 입을 다물 만큼 농밀한 살의.
수십 년 만에 재회한 사형과 대치한 현운 도장도 무심코 돌아봤다.
“강 도우, 자네...?”
“혈음마군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건 원래부터 내가 해야 할 일이었네. 자네도 부디 조심하게. 금마는 금기(金氣)의 마공을 익힌 절세고수. 생긴 건 저래도 금강불괴를 이뤘다고 알려졌네.”
“금강불괴라....”
전혀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현운 도장이 허튼 말을 내뱉을 사람도 아니었다. 진짜로 금강불괴를 이뤘다면 상시로 호신강기를 두른 격이었다.
“염려하지 마시오, 현운 도장. 주인님께선 혼자만 싸우시지 않을 테니.”
“맞아요. 우리들도 있다고요.”
완안극과 백서희가 나섰다. 완안극은 삼화취정을 이루었고 백서희 역시 그에 버금가는 경지에 올랐으니 밀릴 일은 없을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마는 여유만만한 낯빛으로 일행을 둘러보면서 껄껄 웃었다.
“자네들이 강한 건 알겠지만 승리를 논하기엔 많이 이르구먼. 흡혈괴마들을 잃은 건 뼈아프지만... 우리가 그것만 준비하진 않았거든.”
쿠구구구구구궁......!
금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커다란 진동이 일행의 밑바닥을 내달렸다. 지진이 난 것처럼 지면이 흔들리고, 바닥과 벽에 균열이 가면서 부스러기가 떨어진다.
본능적으로 밑에서 무언가가 깨어났음을 직감한 일행이 위로 치솟은 것과 동시에, 바닥이 박살나면서 그 아래 있던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아아아아아아아!
지금껏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거대한 살덩어리.
평범한 흡혈괴마의 두 배는 될 법한 무지막지한 흡혈괴마가 기둥짝만한 대검을 휘둘렀다.
광기에 찬 금마의 웃음소리가 동공을 울렸다.
“꼬맹이부터 죽여라, 설산검문주!”
“뭣이!?”
모두가 경악했다. 설산검문이 멸문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문주가 흡혈괴마가 되었다니?
“무엇을 숨기랴! 그 괴물은 설산검문의 문주다! 원래는 불괴강시로 만들려고 했지만 실패했지! 그걸 생각하면 만독자 자네는 복받은 게야!”
“이놈,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지껄이지 마라!”
“싫다! 나는 내 마음대로 입을 놀릴 게야! 자넨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들어야 해!”
“큭...!”
완안극이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 같아선 금마의 아가리를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흡혈괴마가 된 설산검문주를 뿌리칠 순 없었다.
대충 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일 장이 훌쩍 넘는 신장. 이만하면 네 발 달린 짐승 중에선 가장 크다고 알려진 코끼리와 맞먹지 않을까.
그 거대한 몸뚱이를 비대한 근육으로 꽉 채운 설산검문주가 검을 휘두르자, 눈보라처럼 매서운 검풍이 일행을 몰아붙였다.
한순간에 벽까지 밀려난 일행이 침음했다.
“뭐 이런 괴물이....”
지금까지 만난 흡혈괴마는 절정고수도 찢어죽일 만큼 강했지만 생전의 무공을 구사하진 못했다.
그러나 설산검문주는 흡혈괴마가 되었음에도 상당히 정확한 검로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평범한 흡혈괴마는 아니야. 흡혈괴마와 불괴강시의 중간쯤... 그 어딘가라고 봐야겠지.’
재생력도 지녔을 테니 무공으로 압도한다 해도 숨통을 끊으려면 상당한 노고를 들여야 하리라.
완안극이 독기를 뿜으며 외쳤다.
“주인님, 여긴 제게 맡겨주십시오!”
“...조심하도록.”
이길 수 있겠냐고 묻지는 않았다. 완안극이라면 이길 거라 믿었다.
-크워어어어억!
설산검문주가 포효하자 완안극이 눈썹을 역팔자로 치떴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침을 튀기느냐!”
투아아앙!
관절을 맞은 설산검문주가 비틀거리는 것과 동시에 완안극을 제외한 일행이 화살처럼 쏘아졌다.
“너흰 저 계집을 상대하거라.”
금마가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사인교를 띄우자 가마꾼들이 백서희를 향해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단순히 호종하는 하인들이 아니다. 백서희는 그들의 입술 바깥으로 드러난 어금니를 발견하고 혀를 찼다.
“쳇, 이놈들도 불괴강시야?”
“상단전까지 개방하진 못했어. 벽을 넘지 못해도 불괴강시가 될 수 있나 본데.”
지금까진 혈교의 신녀와 완안극만 봐서 삼화취정을 이뤄야만 성공할 수 있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삼화취정을 이룬 설산검문주는 실패한 걸 보면 조건이 더 있거나 순전히 운에 달린 듯했다.
콰아아아아아앙!
장렬한 굉음이 지하 공간을 뒤흔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