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마군 (1)
조금 시간이 지난 뒤에 두 사람은 포로들과 함께 수용소를 빠져나왔다.
오랜 감금과 학대로 거동이 불편한 자들이 태반이었으나 빠져나가려면 서둘러야 했던 것.
그나마 활명술로 기력을 되찾은 포로들은 불안해하면서도 두 사람을 따라서 수용소를 빠져나갔고....
“하오문 여강 분타의 향주 몽서양입니다, 강 무사님.”
스스로를 하오문 향주라 칭하는 납서족 여인이 숲 어귀에서 그들을 맞이했다.
강엽도 그녀와 초면이었는지라 멈칫했다.
“여강 분타라고 했소?”
“예. 대요현엔 사람들이 많이 살지 않아서요. 정식으로 분타를 두는 대신 연락소만 몇 개 두었답니다.”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지금껏 지나친 현들도 향주 대신 문도들만 왔으니까.
몽서양이 강엽의 뒤편에서 불안한 눈초리를 보내는 포로들을 발견하고 눈을 반짝였다.
“저들이 대요현 수용소에 갇혀 있던 사람들이군요. 그럼 저들을 무사히 대피시키겠습니다.”
“그전에 한 가지.”
갑자기 화제를 돌리는 강엽의 모습에 몽서양이 의아한 낯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강엽이 서찰을 전해주며 물었다.
“여강에 맹월림의 거점이 있소?”
“....”
서찰을 읽어가는 몽서양의 이마에 주름이 서리더니, 잠시 후에 침음이 흘러나왔다.
“...짐작이 가는 곳이 없진 않습니다.”
“확실하지는 않다는 뜻이군.”
“예. 정확히는 여강의 산자락에 있는 버려진 사찰인데, 맹월림의 전사들이 그곳을 자주 출입했습니다. 다만 안쪽까지 조사하기엔 경계가 삼엄하여....”
물론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소용없었다는 말이 뒤따랐다.
“기실 식량을 비롯한 생필품은 다른 데서 구할 수밖에 없는데, 사찰에 있는 자들은 여강의 상인들을 이용하는 대신 맹월림을 이용했습니다. 문제는 그들조차 안쪽으로 출입하지는 못했다는 겁니다.”
“이해했소.”
하오문의 잠입력이 출중해도 그토록 경계가 삼엄하다면 함부로 접근하지 못할 수밖에.
하지만 맹월림의 전사들이 그쪽으로 접근했다는 것을 안 것만으로도 가볼 가치는 충분했다.
“이들은 어디로 데려갈 것이오?”
“여강으로 데려갈까 합니다.”
“적들이 있는 곳으로?”
“흔히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하지요. 여강의 시가지는 현지의 주민들도 길을 잃을 만큼 구조가 복잡합니다. 오죽하면 미궁이라고 할까요.”
한마디로 맹월림이라 해도 여강 전체를 뒤집지 않는 한 숨어있는 사람들을 찾기는 어렵다는 뜻.
몽서양은 자신감을 갖고 당당하게 말했다.
“여강엔 본문이 마련한 비밀통로가 여럿 있습니다. 그걸 이용하면 저들을 빼돌리는 건 쉬운 일이에요. 지금도 그곳엔 점창파의 제자들이 여럿 숨어 있습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포로들을 헤치면서 달려나온 인영.
현운 도장에게 길안내를 하기 위해 자리를 비웠던 척무경이었다.
그와 함께 온 현운 도장에게 눈인사를 건넨 강엽이 묻기도 전에 현운 도장이 대답했다.
“맹월림의 전사들은 후퇴했네. 수용소에서 연기가 올라오는 걸 보고 일이 틀어졌음을 직감한 것 같더군.”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다행히 적들 중에 주의할 만한 강자들은 없었네. 백인장 수준만 조금 있었지.”
현운 도장은 가볍게 취급했지만 맹월림의 백인장이라 함은 강호의 절정고수와 맞먹는 강자들.
그들이 이끄는 정예 전사들을 단 한 명도 통과시키지 않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현운 도장과 척무경이 돌아왔을 때쯤, 숲의 응달을 통과하며 내달린 완안극도 도착했다.
그 역시 현운 도장과 마찬가지로 반대편에서 오는 맹월림의 전사들을 붙잡아두는 역할이었다.
“음, 제가 가장 늦게 온 겁니까?”
근방의 지리를 몰라서 척무경까지 대동했던 현운 도장보다 늦었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한 듯한 얼굴.
쓴웃음을 지은 강엽이 고개를 내저었다.
“얼마 차이 나진 않았다. 특기할 만한 일은?”
“없었습니다. 죄다 약한 놈들밖에 없었지요. 백인장을 칭하는 놈들만 세 명을 죽였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완안극의 눈빛에선 오랫동안 싸운 사람답지 않게 기이한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적들이 뒤도 안 돌아보고 도주한 뒤에 남은 시체들 중에서 적당한 놈들을 골라서 흡혈한 덕분.
“그렇군. 그럼 이것부터 읽어봐라.”
강엽은 몽서양에게 건넸던 서찰을 돌려받아서 두 사람이 차례대로 읽어보게끔 했다.
현운 도장과 완안극이 동시에 말했다.
“어째 꺼림칙한데....”
“함정입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명숙답게 서찰의 내용만 보고도 적들의 수작을 헤아리는 안목.
현운 도장을 힐끔거린 완안극이 먼저 말했다.
“서찰에 적힌 대로라면 맹월림의 주공은 흡혈괴마들입니다. 흡혈괴마들을 동원하겠다면 점창파를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무너뜨리겠다는 건데, 굳이 포로들을 이용할 필요가 없지요. 저라면 점창파가 굶주릴 대로 굶주려서 힘을 못 쓸 때 맹공을 가할 겁니다.”
“만약 이게 우릴 끌어들이려는 함정이라면, 흡혈괴마만 있지 않을 걸세.”
뒤이은 현운 도장의 말에 백서희도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삼화취정의 고수만 세 명이야. 놈들이 우리 전력을 정확히 파악하진 못했어도 만만히 보진 않을걸? 구루귀마라는 작자를 죽였잖아.”
또한 현운 도장이 곤명에 남은 교령들을 격살하기 위해 백일하에 모습을 드러낸 만큼, 맹월림도 일행의 전력이 정도십대고수 이상이라는 걸 인지했을 터였다.
강엽이 턱을 매만지며 고민하는 기색을 띠었다.
“...일단 흡혈괴마를 대량으로 만들었다는 얘기는 사실일 가능성이 높겠지. 그러니 이달 말에 총공세를 가할 거라고 명시했을 테고.”
흡혈괴마를 얼마나 많이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한꺼번에 전선에 투입된다면 엄청난 소요를 일으키겠지.
강엽이 팔짱을 끼며 정리했다.
“여강으로 간다. 정말로 흡혈괴마를 만들고 있다면 반드시 막아야 해.”
고개를 주억거리는 일행을 일별한 강엽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완안극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서찰에 적힌 대로 맹월림이 여강에서 흡혈괴마들을 만들고 있다면, 완안극 역시 그곳을 거쳤을 터.
‘그리고 어쩌면....’
그토록 만나길 학수고대했던 원수 역시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 * *
대요현에서 여강까지는 약 팔백 리.
하루에 수백 리쯤을 내달릴 수 있는 강엽 일행과 달리 수용소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나마 싸울 수 있는 척무경이 그들을 여강까지 호위하기로 하고, 일행은 야음을 틈타 이동하며 사흘 만에 여강 근처의 산자락에 도착했다.
새벽녘의 맑은 공기를 폐부 깊숙이 받아들인 현운 도장이 감회가 새롭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예서 조금만 가면 설산검문(雪山劍門)이 있구만.”
“설산검문이요?”
백서희가 궁금해했다.
구파나 팔가처럼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대문파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설산검문은 금시초문이었던 것.
현운 도장이 답하기 전에 강엽이 먼저 반응했다.
“책에서 그들에 대해 설명하는 글귀를 본 적 있습니다. 옥룡설산에 있는 유구한 명문검파라고요.”
하지만 강엽도 그 이상은 몰랐다. 설산검문이 어떤 검공을 쓰는지, 그들의 무공에 어떤 특성이 있는지.
“강 도우의 말대로 설산검문은 옥룡설산에 있는 명문검파라네. 그들의 검기(劍技)는 구파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지. 제자를 까다롭게 선별하는 데다 속가를 들이지도 않아서 세는 조금 작지만, 모두 역전의 검호들일세.”
현운 도장에 따르면 설산검문의 문주는 구파 장문인에 버금가는 무위의 소유자였다.
그 제자들도 화산의 매화검수나 무당의 태극검수처럼 일당백의 절정고수였고.
그때 완안극이 말을 보탰다.
“예전에 설산검문의 문주와 손속을 겨뤄본 적이 있습니다. 현운 도장의 말대로 점창파의 장문인과 비견할 만한 절세검호였습니다.”
“음....”
높게 쳐줘도 열다섯이 될까 말까 한 소년이 그리 말하니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완안극은 운남 무림을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독곡의 곡주였다.
완안극이 제 정체를 밝힌 적은 없지만, 현운 도장도 완안극의 독공을 여러 번 견식했기에 이제 그가 독곡의 곡주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대단한 문파라면 도와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런 사람들이 가세하면 큰 힘이 될 텐데.”
“실은 아까 자네들 몰래 하오문의 향주에게 물어봤다네. 한데 설산검문이 사라졌다는군.”
“예? 아니, 그렇게 강하다면서 왜요?”
“그녀도 정확한 경위는 몰랐네. 설산검문이 외부와 잘 교류하지 않아서 아는 게 늦은 게지. 그녀가 그 사실을 알았을 땐 이미 풍비박산이 난 뒤라더군.”
“...맹월림의 짓인가?”
완안극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운남 무림에서 설산검문을 짓밟을 수 있는 자들은 점창파와 맹월림뿐인데, 점창파가 그런 짓을 할 리는 없으니 용의자는 맹월림밖에 없었다.
“흉수의 정체는 확실치 않다고 했습니다. 다만 한 사람의 소행으로 보인다고 하더군요.”
“맹월림주일 가능성이 높겠군.”
완안극뿐 아니라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맹월림주가 설산검문이 점창파에 가세하는 걸 막기 위해 각개격파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때 강엽이 말했다.
“목적지가 가까워졌어.”
그러면서 한 군데를 가리켰다.
일행이 걷는 산길의 돌무더기 위에 다 낡아빠진 나무 판자가 덩그라니 걸려 있었던 것이다.
-금륜사(金輪寺).
흙먼지를 뒤집어쓴 오래된 나무판자.
세월에 풍화된 글씨는 읽기도 힘들었지만, 나무판자의 존재는 목적지에 다다랐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차가 겨우 통과할 좁은 잔도의 끝에서 암벽과 달라붙은 작은 사찰이 등장했다.
바위 뒤에 숨은 일행은 동자료혈에 공력을 싣어 산문을 지키는 자들을 관찰했다.
“감시가 꽤나 삼엄한걸. 어떻게 할 거야?”
입구를 지키는 병력만 십여 명. 하나 일행의 힘이라면 저들 몰래 잠입하는 것은 일도 아니다.
“당연히 제압하고 가는 게 깔끔하지 않겠나?”
현운 도장이 의견을 냈지만 강엽은 고개를 저었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습니다. 놈들의 몸에 술법이 걸려 있거든요.”
“술법이라니?”
“죽거나 정신을 잃으면 발동되는 종류 같습니다. 일반적인 금제를 약간 비튼 것 같은데... 아마 내부에 어떤 식으로든지 신호가 갈 겁니다.”
“그걸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나?”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경계조를 봤을 때부터 예감이 안 좋아서 혹시나 하고 정안으로 관찰했는데, 기형적인 주력의 속박이 그들의 상단전을 옥죄고 있었다.
대신 완안극이 핀잔을 주었다.
“현운 도장, 주인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마시오. 상식적인 잣대로는 주인님의 능력을 재단할 수 없소이다.”
그렇게 말해도 납득할 수 있을 리가 없지만, 현운 도장은 구태여 말싸움을 하는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강엽이 굳이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저들 몰래 들어가야 한다는 거군. 은잠술은 특기가 아니지만 기척을 최대한 죽여보겠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
의아해하면서도 현운 도장은 강엽이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는 것을 선선히 허락했다.
찰나 암신이 발동하면서 어둠과 동화되는 신형.
“묘한 은신술이구먼. 접촉하면 다른 사람도 혜택을 보다니....”
“목소리를 내시면 은신술이 깨질 수 있습니다.”
“알겠네. 내 아무 말도 하지 않음세.”
강엽처럼 암신을 쓸 수 있는 완안극은 물론 백서희의 기척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렇게 사찰의 입구를 지키는 자들을 교묘하게 속여넘긴 일행은 유일한 입구를 향해 들어갔다.
* * *
“몸은 좀 어떤가?”
풍채가 좋다 못해 비대한 살집을 지닌 대머리 노인.
실내임에도 불구하고 건장한 가마꾼들이 짊어진 사인교에 오른 노인은 뭔가를 우적우적 씹으며 더벅머리 사내를 오연하게 굽어보았다.
방금까지 수련을 하고 있었던 듯 수증기가 올라올 정도로 땀을 흘린 사내가 날카롭게 반응했다.
“...금마(金魔), 무슨 바람이 불어 찾아온 거냐?”
“그야 조만간 적들이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그런 몸인데 싸울 수 있겠나?”
대머리 노인이 뚝 잘린 팔목을 묘한 눈으로 바라보며 묻자 더벅머리 사내가 이를 악물었다.
“...아무 문제도 없다.”
“그럼 다행이지만, 의수에 적응하는 덴 다소 시간이 걸리겠지. 자네가 전력을 다하지 못해도 이해....”
“아무 문제 없다고 하지 않나-!”
콰앙!
격노가 담긴 호통이 충격파처럼 번져나가 방 안의 기물들을 부수고 짓이겨버린다.
그러나 대머리 노인은 물론 그를 호종하는 가마꾼들도 눈썹도 꿈쩍하지 않았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더벅머리 사내가 다시금 격분하려는 찰나 대머리 노인이 능글맞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만하면 싸울 수 있겠군. 만약 자네가 덜컥 죽어버리면 내 입장도 곤란해져. 금분세수나 할 나이에 책임 많은 자리에 올라가는 건 사양이야. 난 돈이나 처먹으며 부귀영화 누리면 족하다네.”
“금마, 감히 내 자리를 넘보는 거냐?”
“아니, 자네 팔만 병신이 된 게 아니라 귀도 병신이 됐나? 난 그 자리 싫다니까? 근데 자네 죽으면 그 자리를 이을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까 그렇지.”
“.......”
“부디, 죽지 말라....”
위이이이이잉!
그 순간 벌 떼가 날갯짓을 하듯 요란한 경종음이 울렸다.
사내의 눈썹도 구붓하게 휘어졌다.
“침입자인가?”
“놈들이 온 것 같구만. 멍청하게 경계조 놈들을 건드렸....”
콰아아아아앙......!
느닷없이 지축을 흔드는 충격.
아래에서부터 올라온 흔들림에, 대머리 노인이 반질반질한 정수리 위로 경악을 드러냈다.
“설마 바로 지하로 쳐들어갔다고?”
“거기에 흡혈괴마들이 있지 않나?”
사내도 아연해졌다. 아무리 팔을 잃고 영락했다 하나 자신이 알아채지 못하다니?
“이, 이럴 게 아니야! 당장 막으러 가야 해!”
“제길, 계획대로 되는 게 없군.”
두 절세고수가 울화통을 터뜨리며 자리를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