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해방 (3)
“이 악귀 같은 놈들....”
대요현의 수용소를 책임지는 마인이 이를 갈았다.
가까운 수용소들이 아작났다는 소식을 듣고 방비를 철저히 굳혀놨는데도 무참하게 뚫렸다.
그들이 죽었다 깨도 감당할 수 없는 고수들이 들이닥쳐서 추풍낙엽처럼 쓸어버린 것이다.
문득 마인이 부르르 떨다 말고 미친놈처럼 웃었다.
“...흥, 하지만 그런 발악도 여기까지지. 네놈들은 죽었다 깨도 우릴 이길 수 없다!”
“뭔 개소리야?”
백서희가 턱을 갸웃했다.
두 자루의 쌍검은 물론 얼굴과 옷 곳곳에 피가 묻었음에도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녀였다.
그녀가 신들린 쌍검술로 맹월림의 전사들과 혈교도들을 썰어버리는 광경을 보지 못했다면, 주제도 모르고 음심을 품었을지도....
목울대를 꼴깍 움직인 마인이 애써 두려움을 떨쳐내며 목청을 높였다.
“다른 수용소들이 박살났을 때부터 준비하고 있었지! 대기하고 있는 맹월림의 고수들이 전사들을 이끌고 이쪽으로 오고 있다! 너희 두 연놈이 강해도 수백 명이나 되는 전사들을 감당할 수는 없을 터!”
처음부터 수용소 안에서 대기하지 않은 것은 그들을 모두 품기엔 수용소가 작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유사시에 움직이기로 약속하고, 그때가 왔을 때 지체없이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것.
하지만 두려움, 하다못해 망설이는 기색을 보일 거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두 사람은 태평 일색이었다.
“수백 명이라... 좀 많긴 한걸.”
“그러게. 그래도 두 사람이라면 알아서 하겠지. 그보다 몇 배 더 많아도 감당하지 않겠어?”
알 듯 모를 듯한 대화에 마인의 미간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지금 무슨 말을...?”
“무슨 말이긴.”
회색 피풍의를 휘날린 백서희가 해사하게 웃었다.
“너희는 엿 됐다는 소리지.”
“오, 오지 마라!”
발작적으로 고함을 지른 마인이 부하들에게 은밀한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저편에서 뾰족한 비명이 터지면서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이 끌려나오는 게 아닌가?
막 걸음을 내딛은 백서희가 멈칫하자 마인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미친 듯이 폭소했다.
“하하하하! 역시! 포로들을 구하러 온 놈들이라면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못 본 척할 수 없겠지? 너희가 그렇게 나올 줄 알고 미리 골라두었지!”
“으...!”
끌려온 자들 중 가장 앞에 있던 사람이 이빨을 딱딱 부딪치며 온몸을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전사들의 칼날이 온몸을 난자할 듯이 온 사방에서 겨누고 있었기 때문.
“한 발짝이라도 움직여 봐라! 이놈들의 목이 떨어질 테니까! 너희가 이놈들을 죽이는 거다!”
삐딱하게 선 백서희가 헛웃음을 흘렸다.
“진짜 가지가지 하네. 하는 짓거리를 보면 이 새끼들은 전사라는 호칭이 아깝다니까?”
“.......”
귓속을 쏙 파고드는 통렬한 비아냥거림.
전사들의 악다문 턱에서 이가 갈리는 소리가 빠득 새어나오면서 백서희를 노려보는 눈알에 힘이 들어갔다.
“하, 꼴에 자존심은 있나 봐? 근데 내 말에 반박할 수 있나? 쫄리니까 그 사람들 인질로 삼고 우리 좀 건드리지 말라고 협박하는 거잖아?”
“닥쳐라-!”
불같이 격노한 마인이 손을 들어올렸다.
“버러지 같은 것들! 상황 파악이 덜 됐나 본데, 칼자루는 이쪽이 쥐고 있다! 본보기로 하나를 죽여야 말을 들을 건가 보군! 그게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하늘 높이 치켜올라간 손이 떨어지면 포로의 목이 단칼에 날아갈 터.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어?”
팔뚝 아래로 뚝 잘려나간 팔목.
잘리기 전까지 자각도 없었기에 깨닫는 게 늦었다.
근육과 뼈가 훤히 드러난 절단면이 한 박자 늦게 피를 뿜어내자 그제야 마인이 울부짖었다.
“크아아악! 내 팔! 내 팔이...!”
넋이 나간 건 맹월림의 전사들도 매한가지. 그들 역시 사전에 어떠한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문제는 깨닫는 게 늦어도 너무 늦었다는 것.
촤아아악!
올가미에 걸린 것처럼 날붙이를 겨누었던 전사들의 목이 일시에 위로 솟구친다.
피분수를 뿜은 시체들이 철푸덕 쓰러지는 광경에 포로들이 힉 하고 질겁하는 찰나.
“방금 한 말, 그대로 돌려주지.”
“뭐, 라고...?”
등 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그게 강엽의 것임을 깨달은 마인이 눈이 찢어지도록 크게 떴을 때, 시야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목과 팔을 잃은 자신의 몸뚱이가 간헐적으로 피를 뿜으며 널브러지는 광경이 눈에 또렷이 들어온다.
콰직!
높이 치솟은 머리는 난간 너머로 뚝 떨어져서 산산조각 으스러지고,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강엽이 고개를 뚜둑 꺾으며 중얼거렸다.
“너희들이야말로 상황 파악이 덜 됐다고.”
“아....”
죽은 자가 탄식할 순 없었다.
운 좋게 격공의 전권에서 벗어난 맹월림의 전사들과 일부 혈교도들이 쥐어짜는 절망 섞인 탄식.
그 와중에도 반쯤 정신이 나간 놈들이 악다구니를 지르며 덤벼왔지만, 결말은 정해져 있었다.
-혈각(血角).
바닥에 뿌려졌던 피가 돌연 송곳처럼 날카로워지면서 그들의 발바닥을 뚫었던 것이다.
병장기를 휘두르기도 전에 볼썽사납게 구른 이들이 그대로 강엽을 지나쳐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그때까지 일층에 남아있던 백서희가 불구가 된 그들을 차례대로 확인사살을 하며 올라왔다.
“그러게 기회 있었을 때 도망갔어야지. 그럼 조금은 살 가능성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큭, 웃기지 마라! 우리가 죽더라도 너희도...!”
“아, 바깥에서 여기로 오고 있다는 놈들? 걔들은 너희 못 도와줘.”
“...뭐?”
지금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건가.
얼빠진 신색이 된 맹월림의 전사들의 모습에 백서희가 차갑게 조소하면서 말했다.
“여기에 우리만 왔다고 생각했어?”
언제까지고 똑같은 작전이 먹힐 리가 없지 않나.
곤명과 녹풍현의 수용소는 일행의 존재를 몰랐으니 당했다고 쳐도 비슷한 일이 연이어 반복되면 적들도 머리가 있는 이상 대처할 터.
‘예상대로 매복을 해두고 있었지.’
현운 도장과 완안극이 바깥의 적들을 상대하며 시간을 끌고 있었다.
그들이 적들을 막는 동안 수용소를 정리하고 포로들을 구출해서 약속된 지점으로 가면 된다.
“하, 항복....”
꽈앙!
퍼억!
그렇게 말했던 자는 보이지 않는 일권에 맞은 것처럼 벽을 부수고 안에 깊숙이 파묻혔다.
그러자 얼어붙은 전사들 중 일부가 발끈했다.
“큭! 항복했는데 어째서...!”
“항복하지 마라.”
“뭐, 뭣!?”
“항복을 받아줘봤자 우리가 돌아가면 너흰 다시 맹월림에 가담하겠지. 그렇다고 너희를 끌고 가기엔 우리 숫자가 부족해.”
“....”
극히 냉담한 말투에 주춤한 전사들이 이를 악물었다.
도문의 수행자인 현운 도장이라면 싸울 의지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대지 않겠지만, 강엽은 딱히 자비를 베풀 생각이 없었다.
“...우리가 살아날 방법이 정녕 없겠소?”
“포로들에게 그런 짓을 해놓고? 뭐, 손모가지 내놓고 간다면 보내주지 못할 것도 없긴 한데.”
손을 잃어버린다면 병장기를 쥐지 못할 테니 싸우지 못할 테지.
하지만 어느 누가 자기 손목을 선뜻 자를 수 있겠는가?
엉거주춤 눈알만 굴리는 전사들의 면면에 강엽이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시간 낭비했군. 문답에 쓴 시간이 아까워.”
말로는 전사를 자칭해도 이들의 본질은 맹월림의 위세를 등을 업고 다른 부족들과 약자들을 등쳐먹을 생각만 하는 무뢰한일 뿐.
전사는커녕 병사조차 되지 못하는 놈들을 갱생시키려고 심력을 낭비하기엔 앞으로 갈 길이 멀었다.
강엽이 한 발짝 내딛자 움찔 놀란 전사들이 고민하는 표정을 짓더니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그러나 강엽은 그들을 쫓는 대신 포승줄에 묶여있는 포로들의 안위부터 챙겼다.
“아, 아니. 쫓지 않아도 됩니까?”
방금 전엔 모조리 죽일 듯이 굴던 사람이 정작 적들이 도망치는 걸 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쫓을 필요가 없으니까.”
“예에?”
뜻 모를 말에 포로들이 의아해할 때였다.
-아아아아악!
-괴, 괴물이...!
목구멍이 찢어져라 울려 퍼지는 비명과, 그 뒤를 잇는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둔탁한 소성.
어둠 속에서 울려 퍼지는 처절한 절규에 포로들이 안색이 창백해져서 식은땀을 흘리는데 옆에서 여상스런 목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신경 쓰지 마시오. 별 일 아니니까.”
“아, 예....”
아무리 생각해도 별 일 아닌 게 아니었지만, 진실을 파고들 용기 따윈 없었다.
지하의 혈목이 전사들을 정리한 걸 확인한 강엽이 시선을 돌렸다.
“잡힌 사람들은 당신들이 전부요?”
“아, 아닙니다, 대협. 저희 말고 더 있습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을 극히 일부입니다.”
“안내하시오.”
“아, 알겠습니다. 근데....”
하필이면 전사들이 도망쳤던 통로가 뇌옥으로 향하는 길목이었던 것.
그들의 우려를 알아챈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들은 걱정하지 마시오. 모두 처리했으니까. 남아있는 적이 있어도 해코지하진 못할 거요.”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별 수 있나.
포로들로 붙잡힌 사람들은 걱정과 두려움을 안고 그들을 구하러 온 두 남녀를 따라갔다.
도중에 죽어 나자빠진 전사들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였다.
“퉤!”
“잘 죽었다, 썩어빠진 놈들.”
강엽과 백서희의 눈치를 보며 시체들 위에 가래침을 뱉으며 욕설을 중얼거렸다.
두 사람은 알고도 모르는 척했다.
* * *
강엽은 활명술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사람들을 치료한 뒤에 수용소의 심부로 들어왔다.
활명술로 목숨을 살렸다지만 당장 움직일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잠시 시간을 둔 것이다.
수용소장이었던 마인은 이미 죽고 없었기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여기도 딱히 중요한 건 없나?’
굳이 이 방에 온 건 혹시나 일행에 대응하기 위해 맹월림이 어떤 방침을 세웠는지 알기 위해서였다.
맹월림의 상층부가 일행의 존재를 파악했다면 휘하의 수용소에 방침을 전해두었을 테니까.
그런데....
“흠.”
“뭣 좀 찾았어?”
어느새 방에 따라온 백서희가 탁자의 서랍에서 발견한 서찰을 읽고 있는 강엽의 뒤로 쪼르르 달려왔다.
함께 서찰의 내용을 훔쳐본 그녀가 눈썹을 찡그렸다.
“...이게 뭐야? 여강의 비밀 거점에서 대량으로 흡혈괴마를 만들어 이달 말에 점창파를 공략할 예정이다. 각 수용소는 인질로 쓸 점창파의 제자들을 대령하라...?”
“여강이라면 바로 위쪽이군.”
대요현을 넘어가면 점창산까지 지척이다. 굳이 여강을 끼고 갈 이유가 없는 일.
하지만 서찰에 적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여강의 거점에서 흡혈괴마를 대량으로 양산하고 있었다.
“흡혈괴마라면 그 회색 괴물놈들을 말하는 거지? 불괴강시를 만들려다 실패했다는....”
“완안극이 그렇게 말했었지.”
불괴강시가 되지 못한 실패작들.
완안극이 드문드문 기억하는 바에 따르면 백 명도 넘게 끌려왔다고 하는데, 대부분은 흡혈괴마로 전락했으며 오직 극소수만이 성공에 가까이 다가갔다고 했던가.
“어지간한 절정고수보다 까다로운 불사의 괴물들이 백 마리나 진격하는 거다. 점창파는 못 버텨.”
“...그런데 인질극은 왜 쓰는 거야?”
“음, 서찰에 적힌 대로라면 점창파를 동요시키려는 수작 같지만....”
압도적인 전력을 앞세우는데 굳이 인질극까지 쓸 필요가 있나 싶지만, 보다 철저하게 대비를 해두려는 상층부의 방침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하필 이 시점에서 서찰을 발견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점창파 공략이 중요해도, 당장 수용소들이 공격받고 있는데 어느 누가 이런 명령을 내릴까?”
점창파 공략이 중요한 만큼, 이 안에 있는 점창파 제자들의 목숨은 맹월림에게 있어 귀중한 자산이다.
그런 자산을 빼돌리는 괘씸한 놈들을 징치하지는 못할망정 점창파를 공략할 준비에 박차를 가한다?
“이치에 맞지 않지. 당장 지원해줘도 모자랄 판인데.”
“맹월림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거야?”
“이전엔 이런 서찰을 찾지 못했으니까. 방 안을 샅샅이 수색했는데도 없었어.”
가장 먼저 쳐부순 녹풍현의 수용소는 물론 그 뒤에 부쉈던 원모현와 영인현의 수용소도 마찬가지였다.
맹월림이 진심으로 점창파를 공략할 작정이라면 미리 보냈어야 하는데 그런 조짐이 없었다.
“흐음, 그놈들이 파쇄한 건 아닐까? 우리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말이야.”
“글쎄, 다른 놈들은 몰라도 녹풍현의 수용소장은 맹월림에 깊이 충성하는 사람이 아니었어. 서찰을 자기 목숨을 살려주는 거래 재료로 썼다면 몰라도, 죽어서까지 비밀을 지키려고 하진 않았을 거야.”
“그러면?”
“서찰의 내용은 그렇다 쳐도 시기가 적절하지 못해. 그런데도 무시하지 못할 내용이라면....”
서찰을 다시 한번 찬찬히 훑어본 강엽이 쯧하고 혀를 찼다.
“초대장이군. 흡혈괴마 대군이 점창파로 진격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여강으로 오라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