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71화 (268/450)

51화. 해방 (2)

“다 끝나버렸군.”

어둠 속의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만이 명암을 구분짓는 방 안에서 그는 우두커니 선 채 손을 움직였다.

갑자기 찾아온 불청객을 향해 출수하려는 의도는 아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차 한 잔은 괜찮지 않은가?”

“....”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맞은편에 앉은 자는 새카만 음영 속에 파묻힌 채 몸을 기대고 있었다.

얼핏 보면 방만하기 그지없는 무방비한 자세였지만, 노인은 그의 모습에서 빈틈을 찾을 수 없었다.

허튼 수작을 부린다면 그 즉시 목이 떨어지리라는 예감만 들 뿐.

어둠 속에서 요사스럽게 꿈틀거리는 붉은 안광을 마주한 노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살 만큼 살아서 죽는 게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군. 그렇게 노려보지 않아도 자네 칼을 받을 테니 조금만 시간을 주게.”

“왜 맹월림에 협조했소?”

“그렇지 않으면 죽을 테니까.”

노인이 한숨을 쉬면서 탁자 한 켠을 돌아봤다.

햇빛을 받아 은은하게 반짝이는 은패가, 그가 과거에 낭인전 소속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내가 아니라 내 가족들이, 아들 내외와 손주들이 찢겨 죽었을 걸세. 아들과 손주들이 죽고, 며느리가 능욕당하는 걸 어찌 지켜보겠나?”

“낭인전엔 언제까지 속해 있었소?”

“허허, 어째 취조하는 분위기로구먼. 그래도 대답하겠네. 얘기를 하는 만큼 내 명줄도 늘어날 테니까. 삼십 년 전까지 낭인전에 있었다네.”

노인은 찻잎이 우러나오고 있는 주전자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시선은 먼 과거를 돌아보고 있었다.

“난 일찍 성혼해서 자식도 빨리 봤지. 불혹을 넘길 즈음엔 아들 녀석도 장성했어. 그쯤 되니 은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서 낭인짓을 때려치우고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나 지었지....”

행복한 추억에 젖은 노인의 입가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반면에 맞은편에 앉은 자의 입매는 냉정하리만치 건조했다.

“그래서?”

“뭐, 별 거 있겠나. 그래도 배워먹은 게 칼질이라서, 마을에 맹수나 도적이 나타나면 열심히 싸웠지. 소싯적엔 나름 은지패까지 올라간 몸이라서 웬만한 놈들은 단칼에 죽일 수 있었네. 한데 강호인으로 살았던 경험 때문인지 맹월림 놈들이 날 여기 책임자로 앉히더군.”

허연 수염을 쓸며 껄껄 웃은 노인은 이야기의 끝에 다다라선 쓰디쓴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렇게 돌아보니 나쁜 인생은 아니군. 마지막에 불의를 못 본 척한 것만 빼면 말일세.”

“오는 동안 여기저기 둘러봤소. 개판이더군.”

“맞아. 개판이지. 투기장에, 고문에, 내가 생각해도 정말 신선한 방식으로 포로들을 괴롭히더군. 여자들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짓을 당했고....”

“막을 생각은 안 해봤고?”

“.......”

대답 대신 차를 따르는 노인.

그가 다시 입을 연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나서였다.

“굳이 변명하진 않겠네. 난 비겁했어. 자식과 손주들을 핑계로 편한 길을 택한 게야.”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염치 없지만 편히 보내줬으면 좋겠네. 아프게 죽고 싶진 않거든.”

김이 가라앉은 차를 한 입에 털어넣은 노인이 준비됐다는 듯이 눈꺼풀을 내렸다.

“.......”

기나긴 침묵이 지나간 뒤.

예상했던 고통이 찾아오지 앉자 슬며시 눈을 뜬 노인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당황했다.

반사적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린 그는 문득 귓가에 낮고 건조한 목소리가 꽂혀오자 돌처럼 굳어버렸다.

[스스로 목숨을 끊든, 가족들을 데리고 도망치든 알아서 하시오.]

“...편히 죽지도 못하게 하는군.”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수용소가 풍비박산이 난 시점에서 그는 책임을 피할 수 없는 신세였다.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맹월림이 들이닥친다면 죽음을 면치 못하겠지. 차라리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게 덜 고통스러울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가족들과 함께 도망친다면?

무사히 도망치면 다행이겠지만, 잡힌다면 감히 상상하지도 못할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 것이다.

“...그래도 이럴 줄 알았다면 독을 타지 않았을 것을.”

조그맣게 중얼거리는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는 핏물.

혹시나 고통스럽게 죽을지도 모른다는 노파심에 찻잔에 독을 발라두었던 것이다.

“미안하오, 부인. 미안하다, 얘들아. 내가 못나서 먼저 가는... 우욱!”

마른 기침과 함께 석고처럼 굳어지는 몸뚱이.

엎어진 노인의 눈시울을 따라 회한 어린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 * *

“척 사숙! 무사하셨군요!”

“아아...!”

뇌옥에서 풀려난 점창파의 제자들은 서로 얼싸안으면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척무경은 연장자인 만큼 울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의지와 상관없이 뜨거운 눈물이 뺨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척 사제....”

“과, 관 사형? 관 사형 맞습니까?”

“그래, 이놈아! 네 사형이다!”

“이럴 수가....”

수척해지다 못해 병색이 완연한 사형의 몰골에 척무경이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자책하지 말거라. 네가 오지 않았으면 우린 살아남지 못했을 거다. 이제라도 만난 걸 다행으로 생각하자.”

“몸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못 움직일 정도는 아니다. 아니, 살아남으려면 어떻게든 움직여야지. 그래야 폐가 안 될 테니....”

“폐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말도 안 된다는 듯이 척무경이 펄쩍 뛰었다.

작게 웃은 사형이 고개를 돌렸다.

“한데 저분들은 뉘시냐?”

갇혀 있던 이들은 척무경이 구했기에 강엽 일행과 처음 마주친 것.

눈가를 닦은 척무경이 소개했다.

“절 도와주신 분들입니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사형과 사질들을 구하지 못했을 겁니다.”

“알고 보니 은인들이셨군요. 점창파의 관개량입니다.”

관개량이 포권을 쥐어 보였지만, 온갖 고초를 겪은 몸은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제서야 사형의 양팔 근육이 쥐어짜낸 것처럼 비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척무경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형...!”

“별 것도 아닌 일로 소란 떨지 말거라.”

“이게 뭐가 별 거 아니리는 겁니까!?”

검수에게 있어 팔은 목숨만큼 중요한 부위.

한데 양팔이 망가졌으니 검수로선 끝장난 거나 진배없었다.

“이까짓 부상은 아무것도 아니지. 목숨을 잃은 제자들에 비하면....”

“사형...!”

뭐라 외치려는 척무경을 고갯짓으로 만류한 관개량이 강엽을 향해 머리를 깊이 조아렸다.

“초면에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점창파의 이대제자 관개량이 삼가 은인들께 인사 올립니다.”

“몸도 성치 않은데 무리할 것 없소.”

짧게 대답한 강엽이 관개량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상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지 않을 것을 알아도 절로 움찔할 수밖에 없는 동작.

하지만 관개량은 강엽의 손바닥에서 따스한 빛이 쏟아지자 기력이 충만해지는 걸 느꼈다.

“아...!”

“활명술이라는 술법이오. 임시방편이긴 하지만 아무것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지.”

타인에게 선천지기를 나누어줘서 상처를 치료하고 기운을 북돋는 술법.

관개량이 워낙 지독하게 당했기 때문에 효과는 미미했지만, 거동할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다.

“미안하지만 이제부턴 발에 땀 나게 달려야 할 거요. 적들이 언제 쫓아올지 모르니까.”

“각오하고 있습니다.”

뇌옥에서 풀려나 척무경과 재회했을 때부터 관개량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땅히 힘이 되어드려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서 송구할 뿐입니다. 제 무공이 온전했다면....”

“그렇다 해도 당신은 풀려난 사람들을 데리고 피신해야 하오. 우리와는 갈 길이 다르지.”

“설마... 다른 수용소도 공격하실 생각이십니까?”

관개량을 비롯한 점창파 제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물론 수용소 하나를 박살내놓은 마당에 다른 수용소를 습격하지 못할 이유가 뭐냐 싶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맹월림이 일행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일이 몇 번씩 반복되면 맹월림도 일행의 존재를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겠는가?

“전부는 무리겠지. 일단 점창파로 가는 길목에 있는 수용소를 부수는 게 목표요.”

“포로들이 방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건 하오문의 도움을 받기로 했소. 당신들도 곤명에 가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거요.”

“하, 하지만 곤명엔 혈교의 교성이 있습니다. 맹월림의 병력도 많아서 자칫하면....”

“그건 걱정할 필요 없소. 곤명에 있는 적들은 몽땅 처치했으니까.”

“...!”

점창파의 제자들이 숨을 들이켰다.

더러는 교성쯤 되는 절세고수를 주머니 속의 공깃돌처럼 취급하는 언행에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관개량의 목소리도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러고 보니 은인들의 성함을 여쭙지 못했군요.”

“강엽. 낭인전의 금패고, 사천 무림에선 귀영이라 불리고 있소. 이쪽은 내 동료들이고.”

백서희와 완안극은 따로 소개하지 않았다.

강엽에 비하면 백서희의 무명은 그리 널리 퍼지지 못했고, 완안극은 정체를 감추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들어본 적 있습니다. 하지만 금패급이라고 해도 혈교의 교성은....”

“사형, 강 무사님은 이미 광명마교의 사도를 격살하셨습니다. 혈교의 교성도 여럿 잡으셨고요.”

척무경이 강엽의 활약을 읊었다. 무림맹엔 강엽이 어떤 일들을 했는지 널리 퍼진 만큼 그 역시 강엽에 대해 남들보다는 많은 걸 알고 있었다.

“.......”

소리 없는 경악성이 장내를 휘젓고 지나가는 분위기 속에서, 관개량이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다른 사람들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원시천존 맙소사....”

그저 하늘에 계신 높으신 분만 찾을 뿐이었다.

* * *

맹월림은 비상이 떨어졌다.

전사들은 물론 실질적으로 두뇌 역할을 하는 혈교의 교성들도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곤명, 녹풍, 원모, 영인....”

등 뒤에 시뻘건 단창을 멘 사내가 지도를 짚으며 침음 섞인 한마디를 내뱉었다.

“곤명을 제외하면 전부 수용소가 있는 교구입니다.”

“.......”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은 사내만이 아니었다.

맹월림의 중진들 전부가 집결한 것은 물론, 그들 위에 군림하는 절대자까지 자리를 잡고 있었다.

맹월림의 전사들이 으레 그렇듯 태양볕에 그을린 피부를 지닌 바위같은 체구의 사내.

몸 속까지 근육으로 꽉 찬 듯한 사내가 반라의 미녀를 주무르면서 술나발을 불고 있었다.

-혈산패군(血山霸君) 고검악.

무심한 듯 나른한 자세로 털가죽을 씌운 태사의에 몸을 기댔는데, 무려 네 곳의 거점이 날아갔다는 보고를 들었음에도 무신경한 얼굴이었다.

긴장감에 목을 꼴깍 움직인 교성이 보고를 이어갔다.

“원모와 영인의 수용소에서 보낸 급전에 의하면 놈들은 소수 정예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많은 포로들을 빼돌렸는데도 어느 누구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이보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밤송이처럼 뾰족한 수염을 기른 장한이었다.

무례한 언사에 교성이 눈썹을 굽히며 불쾌감을 내비쳤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맹월림 내에선 교성과 대등한 대우를 받는 천인장이었기 때문.

교성이 한숨을 참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조직적인 도움을 받았으리라 생각한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말이 안 된다니까? 수용소 주변은 우리들의 텃밭이다! 우리에게 우호적인 부족들이 쫙 깔렸는데 찾지 못할 리가 없어!”

“그 말대로라면 포로들이 하늘로 솟거나 땅으로 꺼졌겠군. 혹은 부족들이 죄다 눈 먼 장님이 되거나.”

“뭐가 어쩌고 저째!?”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지 말고 좀 생산적인 의견을 내봐라, 역발산(力拔山). 아니면 몇몇 부족들이 배신했다는 의견을 내고 싶은 건가?”

“너, 적룡마창(赤龍魔槍)!”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거대한 철탑이 솟구치는 듯한 기척.

하지만 적룡마창이 맞설 건덕지도 없었다.

“역발산.”

혈교에선 혈산패군, 맹월림에서는 주군이라 불리는 사내가 입가에 흐르는 술을 닦으며 말했다.

“네놈 의견 안 물어봤다.”

“주, 주군.”

사색이 된 역발산이 식은땀을 흘렸지만 사내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곁에 있는 미녀를 희롱하며 나직이 질문을 던질 뿐.

“그래서 대책은 있나?”

“있습니다.”

적룡마창이 단언했다.

귀를 쫑긋 세우는 면면들을 돌아본 그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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