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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70화 (267/450)
  • 51화. 해방 (1)

    하오문의 운남성 당주, 오남희는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스스로를 무당의 현운이라 밝힌 자가 하오문의 암어를 대고는 당주인 그를 찾아온 것이다.

    물론 그는 현운 도장을 알고 있었다. 현운 도장이 강엽보다 하루 먼저 곤명에 도착했었다는 사실도.

    하지만 하오문과 접점이 없는 현운 도장이 찾아올 줄은 몰랐다.

    심지어....

    “포로들을 빼돌리는 걸 도와달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우린 맹월림의 수용소를 습격해서, 억울하게 갇힌 포로들을 구출할 것이오. 하오문이 그들을 지켜줬으면 하오.”

    “잠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평정심이고 나발이고 소용없었다.

    급하게 현운 도장을 제지한 오남희는 마른 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어넘겼고, 조금 시간이 지나서야 간신히 긴 숨을 토해냈다.

    “아, 죄송합니다. 너무 예상 밖인지라... 정신이 좀 없었습니다.”

    “이해하오. 혹시 궁금한 게 있으면 말씀하시오. 허심탄회하게 말씀드리리다.”

    그 뒤로 이야기가 이어지길 한참.

    덕분에 오남희는 강엽 일행이 척무경을 구출했으며, 구루귀마를 격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구루귀마가 죽었다니 기쁘군요. 그자 때문에 곤명의 사람들이 얼마나 공포에 떨었는지 모릅니다.”

    강엽 일행은 비교적 짧은 시간 체류했기에 몰랐지만, 구루귀마는 무림과 민간을 불문하고 곤명 사람들에게 깊은 두려움을 안겨준 대마두였다.

    “도장도 아시다시피 구루귀마는 곱추였고, 자신의 외모에 큰 자격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특히 젊고 아름다운 사람들을 시기했지요.”

    뛰어난 용모를 지닌 사람들을 거슬린다는 이유로 살가죽을 벗겨내는 짓을 일삼으며 악명을 떨친 것이다.

    거기까지 말한 오남희가 다시 한숨을 쏟아냈다.

    “본문이 운영하는 기루도 많은 피해를 봤습니다. 죄없는 아이들이 그자로 인해....”

    “유감이오.”

    “이제라도 그가 염라대왕의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이는군요. 감사드립니다.”

    오남희가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예를 표하자 현운 도장도 마주 고개를 숙였다.

    “구루귀마가 죽었다고 끝이 아닐 것이오.”

    “예. 맹월림과 혈교가 저간의 사정을 파악한다면 다른 책임자를 내려보내겠지요. 하지만 짧은 시간이나마 곤명 사람들은 숨통이 트일 겁니다. 어쩌면....”

    오남희의 눈빛이 심연처럼 어두워졌다.

    “앞으로 내내 그럴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요.”

    강엽 일행이 운남 무림에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오남희는 그런 기대를 품고 있었다.

    “그러려면 놈들의 수용소를 격파해야 하오. 끌려간 사람들도 구해야 하고 말이오.”

    “문주님께서 강 무사님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라고 하셨으니 제 손이 닿는 선에선 돕겠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씀하시오.”

    “통상적으로 교성의 휘하엔 세 명의 교령이 있습니다. 간밤에 구루귀마가 추격대를 이끌고 성문 밖을 나갔을 때, 교령은 한 명밖에 대동하지 않았습니다.”

    “얼핏 본 것 같구려.”

    현운 도장은 구루귀마와 완안극이 결착을 짓기 전에 떠났기에 교령의 죽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강엽이 있었던 만큼 구루귀마나 교령이 탈출하는 광경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다른 둘은 곤명에 남아있습니다.”

    “그들을 처리해달란 뜻이오?”

    “놈들까지 없어져야 곤명이 해방되니까요.”

    “당주의 부탁이 아니어도 그들을 징치할 생각이었소. 기왕 시작했으면 확실하게 끝내야지.”

    “감사합니다.”

    “그들을 동탑(東塔)으로 유인하겠소. 당주께선 사람들을 보호해주시오. 서쪽 성문 바깥의 숲에 있소.”

    자세한 위치를 들은 오남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포권지례를 올렸다.

    “하시는 일 모두 이루시기를.”

    “당주도 건승하시오.”

    현운 도장이 일어나고 얼마 뒤.

    오남희는 측근을 불러 명령했다.

    “운남 전역의 분타에 전해라. 귀영 일행의 일에 무조건 협력하라고. 이는 문주님과 내가 내리는 명령이니, 어긴다면 본문에 대한 배신으로 간주할 것이다.”

    “명을 받듭니다.”

    깊이 읍한 수하가 총총걸음으로 사라졌다.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오남희가 작게 중얼거렸다.

    “작은 구멍이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지. 당신들이 이 땅에 평안을 가져오기를 기원하겠습니다.”

    * * *

    “죽여! 죽이라고!”

    “망설이기만 해봐! 등짝을 확 뚫어버린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악다구니.

    험악한 인상의 사내들이 고래고래 소리칠 때마다 안쪽에 있던 자들이 움찔거렸다.

    누군가 답답한지 돌을 던졌다.

    퍼억!

    “악!”

    새된 비명과 함께 고꾸라지는 소년.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흥건하게 흘러내렸지만 흉수는 개의치 않았다.

    “싸워! 싸우라고, 이 좆같은 점창파 새끼들아! 죽이라고 칼도 줬잖아! 뒈지고 싶어 환장했냐!?”

    “야, 이 미친놈아! 저 새끼한테 석 냥 걸었어! 네가 돈 물어낼 거 아니면 닥치고 있으라고!”

    “알 게 뭐야. 너나 아가리 여물어, 호로자식아!”

    “뭐야?!”

    싸우라고 아우성을 치고, 그러다 저들끼리 시비가 붙어 치고박고 싸우는 요지경.

    지옥같은 수라장 속에서 점창파 제자들은 아무것도 못했다.

    “으, 사형...!”

    “침착해, 사제! 우리끼리 싸우면 안 되잖아!”

    두 사람 모두 약관도 되지 못한 소년이었다.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소년도 창백하게 질린 채 다리를 떨었지만, 그래도 배에 힘을 꽉 주고 버텼다.

    “사부님의 가르침을 잊지 마! 우리는 피보다 진한 사이라고 하셨어! 싸우면 사부님께서 슬퍼하실 거야!”

    “하, 하지만 사부님은....”

    어린 소년이 울먹거렸다.

    두 사람의 사부는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어린 제자들을 지키려다가 흉적의 칼에 등을 내주었던 것.

    “그래, 사부님은 돌아가셨어! 이젠 없어! 하지만 사부님의 가르침은! 우리 가슴 속에 남았잖아!”

    “푸하하하하하!”

    소년의 처절한 외침에 맹월림의 전사들이 낄낄 폭소했다.

    “야야, 들었냐? 저놈 새끼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어휴,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내 손발이 다 오글거린다.”

    한 전사가 닭살이 돋는다는 듯이 팔뚝을 문지르자 소년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하지만 그건 부끄러운 짓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원수들이 사부의 가르침을 비웃었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항의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만.”

    장내를 무겁게 짓누르는 목소리.

    시끄럽게 울렸던 전사들의 웃음소리도 뚝 멎으면서 고요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천박하고 거만한 전사들도 눈치를 인물.

    흑표범이 연상될 만큼 피부를 검게 태운 건장한 전사가 같잖다는 듯이 콧방귀를 뀌었다.

    “이딴 촌극이나 보려고 온 게 아니다. 판을 깔아줬는데도 싸우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따악!

    손가락을 튕기는 것과 동시에 거구의 장한이 남루한 행색의 소녀를 질질 끌고 왔다.

    투기장의 소년들이 식겁했다.

    “사매!”

    “이 악적놈들이 선아를...!”

    두 사람보다도 어린 소녀는 장한이 어깨를 꽉 잡자 아픔을 못 견디고 비명을 질렀다.

    눈망울이 퉁퉁 부어오르도록 울고 있는 소녀를 힐끔거린 검은 피부의 전사가 잔혹하게 웃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아듣겠지? 너희가 싸우지 않으면 이 계집애가 죽는다. 아니....”

    다음 순간 넝마나 다름없는 소녀의 옷이 거칠게 뜯어졌다.

    “아악!”

    “제, 젠장! 너 이 자식 무슨 짓을...!”

    검은 피부의 전사가 능청을 떨었다.

    “젖비린내 나는 계집을 희롱하는 취미는 없지만, 내 부하들은 그렇지 않거든. 점창파 계집을 짓밟을 수 있다면 나이 따위 상관하지 않는 변태들이 즐비하지. 너희들의 사매가 짓밟히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목숨을 다해서 싸워야 할 거다.”

    “으으......!”

    둘 중 하나가 죽지 않으면 사매가 죽는다.

    이도 저도 못하는 진퇴양난 속에서 사형격인 소년이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하다, 사제. 날 용서해라....”

    소년이 날붙이를 고쳐 잡았다. 벌겋게 녹이 슬어서 날도 무딘 검날이 목으로 향했다.

    바로 자기 자신의 목을 향해서.

    까앙!

    “컥!”

    그러나 검날은 주인의 목을 가르지 못하고 전사가 손가락으로 튕긴 동전을 맞고 뚝 부러졌다.

    검은 피부의 사내가 싸늘하게 내뱉었다.

    “누가 자결하라고 했지?”

    사형제가 서로 죽이는 걸 원한 거지, 어느 한쪽이 목숨을 끊는 것을 보고 싶던 게 아니었다.

    “흥이 식었다. 모두 죽여.”

    “며, 명을 받듭니다.”

    감히 대거리하지 못한 전사들이 각자 병장기를 빼들고 소년들을 향해 다가간다.

    사형제는 당황하면서도 등을 맞대고 적들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그러면서도 어린 사매의 생사를 염려하며 검은 피부의 사내가 있는 쪽을 힐끔힐끔 곁눈질하는 모습.

    그렇게 일촉즉발의 긴장감 속에서 한 전사가 욕설을 토해내며 소년들을 공격하려 할 때였다.

    느닷없이 덜컥 멈춘 그의 목에 붉은 실선이 아로새겨지면서 머리가 뚝 떨어졌다.

    현실감이 흐려지는 참상에 전사들이 눈을 껌뻑거릴 때,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 자칭 전사라는 것들이 수치심도 없네. 니들한텐 전사라는 호칭도 아깝다.”

    “누구냐!?”

    그들 사이에 적이 있다.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전사들이 감각을 곤두세울 때였다.

    “너희들은 이미 죽어 있다.”

    “뭣이?”

    영문 모를 말에 전사들이 눈썹을 치켜세운 순간.

    두 소년을 제외한 전사들의 목에 붉은 실선이 내달리면서 피분수가 솟구쳤다.

    “살수...!”

    예사롭지 않은 적의 등장을 직감한 검은 피부의 전사가 공력을 끌어올리면서 장한을 돌아봤다.

    여차하면 점창파의 여제자를 인질로 잡을 작정.

    하나 얕은 계책은 시작도 전에 좌초되었다.

    “끄아악!”

    콰직!

    불현듯 출현한 검은 안개.

    그 안으로 빨려들어가듯 삼켜진 장한은 무언가 부서지는 불길한 소리를 끝으로 영원히 침묵했다.

    “네놈들은 누군데 감히 맹월림에 침입...!”

    등골이 오싹해진 전사가 마른침을 삼킨 순간, 안갯속에서 녹색 귀화가 분출되었다.

    애써 두려움을 무시한 전사가 곡도를 휘두르는 찰나였다.

    머릿속이 핑 도는 느낌과 함께 목구멍이 막혔다.

    “으으읍...!”

    “안경사(眼鏡蛇)의 독이다. 네놈도 운남 출신이라면 안경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고 있겠지?”

    독사의 이름이 나오자 검은 피부의 전사가 대번에 해쓱해졌다.

    “대체 언제...!”

    “흥이 식었다고 말했을 때였지.”

    얼빠진 얼굴을 기분 좋게 바라본 완안극이 히죽 웃었다.

    “암신이라고 하지. 영광으로 알고 죽거라.”

    강엽의 혈족이 된 그는 암신의 능력을 깨우쳤을 뿐만 아니라 꽤나 능숙하게 쓰고 있었다.

    초음이나 혈목, 정마안 등 다른 능력들은 일절 다루지 못했지만, 암신 하나만으로도 그의 전력은 대폭 상승했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달은 전사는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완안극이 쯧쯧 혀를 찼다.

    “명을 재촉하는군. 그래봤자 독만 더 빨리 퍼질 뿐이거늘.”

    뱀독이 아무리 강해봤자 사람을 바로 죽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완안극이 다루는 독은 다른 독물과 배합해서 몇 배나 강력해진 극독.

    “네놈이 한 이 갑자쯤 되는 공력을 지녔다면 모를까,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느니라.”

    “커, 커걱...!”

    숨이 막혀서 쓰러진 전사가 덜덜 떨면서 손을 뻗었지만, 완안극은 그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때쯤엔 백서희도 적들을 쓰러트리고 점창파의 제자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꿈에 나올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참상에 소년들은 졸도할 것 같았지만, 완안극의 뒤편에서 기절한 소녀를 보고 정신을 차렸다.

    “사매!”

    “잠든 것뿐이니 염려하지 말거라.”

    아이가 감당하기엔 잔혹한 광경이었기에 수혈을 짚어 잠재웠던 것.

    소년들 역시 두려워했지만, 은혜를 입었다는 자각은 있는지 어설프게나마 포권을 쥐었다.

    “가, 감사합니다....”

    “정말로 그러하냐?”

    “예?”

    “너희가 정말 감사함을 느낀다면 매일 밤낮으로 위대하고 전지전능하신 귀영님을 찬양하거라. 오오, 주인님! 나의 빛, 나의 기쁨, 나의 삶, 나의 안식...!”

    “나 참. 거기까지 해요, 완 노사.”

    백서희가 고개를 설설 내저었다.

    원래부터 이런 성격이었는지, 흡혈귀가 되면서 맛이 가버린 건지....

    ‘강엽이 구루귀마의 피를 양보해서 그런가? 그래도 이걸 보면 배신은 안 할 것 같네.’

    하지만 이대로 두면 본인이 만든 귀영 찬가를 밤새도록 부를 기세였다.

    “끄응, 알겠습니다. 주모께서 명하신다면....”

    다른 사람이 말했다면 들은 척도 안 했겠지만 백서희의 말이라면 강엽의 명이나 마찬가지.

    침울한 얼굴로 어깨를 늘어뜨린 완안극의 모습에 쓰게 웃은 백서희가 소년들을 다독였다.

    “자, 이제 나가자. 한 사람은 사매 업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지금쯤 다 구했을걸? 우리만 온 건 아니거든.”

    “그, 그렇습니까?”

    “그럼. 우리 일행이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고 있단다.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도 구해주고 말이지.”

    소년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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