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운남 (4)
강엽은 하오문 당주에게서 받은 지도를 펼쳤다.
운남 전역을 아우르는 지도엔 산과 강, 도시들의 명칭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놈들의 동선을 보면 녹풍현이 목적지였겠지.’
곤명 옆에 붙어 있는 현이었다.
지도 위에 수용소를 의미하는 붉은 점이 찍혀 있었기에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수용소는 한번 들르긴 해야 해. 문제는 수감자들을 구출한 이후인데....’
구출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삼화취정의 고수만 세 명인 일행이라면 대방파와도 싸울 만하니까.
문제는 그 이후.
‘그들을 무사히 지킬 수 있을까?’
구출만 하는 것과 구출한 뒤에 함께 이동하는 것은 다르다.
일행의 경공이라면 점창산까지 며칠 만에 도착하겠지만, 군식구가 딸린다면 어림도 없는 일.
그러니 이해득실만 따지면 척무경의 부탁을 거절하고 점창산까지 가는 게 가장 낫지만....
‘이미 군식구가 딸렸지. 기동력이 줄어드는 건 피할 수 없어. 추격대가 오면 따라잡힌다.’
그렇게 미간에 주름이 패이도록 고민히고 있을 때였다.
“하도 노려봐서 지도에 구멍 뚫리겠네.”
백서희가 다가와서 물었다.
“아까 그 부탁 때문에 그래?”
“...뭐, 그렇지.”
강엽이 떫은 얼굴로 긍정하자 백서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네. 수용소는 내버려둘 수 없고, 사람들 때문에 속도가 줄어드는 건 걱정되고. 그런 거 아냐?”
“귀신같이 알아맞히는구만.”
“얼굴에 다 써있는걸.”
씨익 웃은 백서희가 강엽의 무릎 위에 앉아서 지도를 살펴보았다.
“어디 보자. 이 붉은 점이 수용소라고? 겁나게 많네. 맹월림 이 새끼들, 말로는 나라에 대항하느니 어쩌니 하면서 지들이 가장 많이 동포를 핍박하는 거 아냐?”
“운남에 있는 부족들만 수십이야. 같은 부족도 여러 마을로 나뉘고, 서로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지. 애초에 하나로 뭉치는 게 힘들어.”
수많은 부족들을 한 울타리 안에 억지로 욱여넣은 셈.
맹월림의 힘이 약했다면 해보기도 전에 실패했겠지.
“수용소를 부수긴 해야 해. 그래야 모산혈조 그놈의 계획을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으니까.”
물론 하나만 부수는 걸로는 큰 타격을 입히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수용소를 파괴하는 일은 본래 계획에서도 후순위로 밀려 있었다.
“그런데 이미 군식구가 딸렸으니까. 저들을 내버릴 게 아니면 점창산까지는 데려가야 하는데....”
“그러게. 그건 고민이 되긴 하네. 우리 대신 지켜줄 사람들이 있으면 좋을 텐데.”
“내 말이 그 말... 음?”
“왜?”
말하다 말고 벌떡 일어난다.
덩달아 몸을 일으킨 백서희가 의아한 기색으로 돌아보자 강엽이 턱끝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우리 대신 지켜줄 사람... 그렇군. 그걸 깜빡하고 있었어. 바보같이 지금에서야 생각하다니....”
“뭐야. 혼자만 알지 말고 좀 알아듣게 설명해 봐.”
“처음부터 간단한 문제였어.”
강엽이 지도를 가리켰다.
그들이 한나절 전까지 머물렀던 곤명을 짚으며 말했다.
“하오문을 이용하는 거다.”
* * *
곤명을 점령한 세력은 맹월림이지만, 그 위에 군림하는 자는 혈교의 교성인 구루귀마(佝僂鬼魔)였다.
추격대를 이끌고 산중에 들어온 그는 분통을 터뜨리고 있었다.
“망할 소나기가 일을 망치는구나!”
별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곱사등이였다. 키는 오 척에도 미치지 못하며, 목 뒤에도 커다란 혹이 달려 있었기에 추레하기 그지없는 몰골.
하지만 추격대의 그 누구도 그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츠아아아아악!
그가 휘두르는 쌍비조의 궤적을 따라 열 그루가 넘는 거목들이 잇따라 박살났으니까.
한동안 씩씩거린 구루귀마가 고개를 홱 돌렸다.
“비가 언제 그칠 것 같으냐?”
“하, 한 시진 뒤엔 그칠 것 같습니다.”
지목받은 맹월림의 전사는 가까스로 대답을 쥐어짜냈다.
구루귀마의 안광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렸지만, 대답이 늦으면 목숨을 잃는다.
“한 시진, 한 시진이라....”
“놈들도 이 빗속에선 꿈쩍하지 못할 겁니다.”
“모르는 소리! 상대는 무당의 삼청검이다. 그놈의 제운종이라면 이 빗속에서도 달릴 수 있단 말이다.”
하나 그렇게 고함을 질러봤자 맹월림의 전사들은 와닿지 않았다. 무당파의 절세고수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하지 못했던 것이다.
구루귀마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죽은 점창파의 장문인도 강호에선 정도십대고수로 인정받지 못했다. 하나 삼청검 그놈은 정도십대고수로 인정받았을 뿐만 아니라, 제 사부인 검선을 제치고 무당의 제일검으로 인정받았느니라.”
현운 도장이 무당제일검이라는 칭호를 물려받은 것은 검선이 반쯤 칩거했기 때문이었다.
검선이 장문인으로서 내실을 다스린다면, 현운 도장은 무당의 대표로서 대외적인 일을 처리하는 것.
현운 도장은 무당제일검이라는 호칭을 부담스러워했지만, 이는 그가 그만큼 인정받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천하팔존에 공석이 생긴다면 그 자리에 가장 가까운 자가 삼청검이다. 점창파 장문인보다 강한 자를 쫓는다고 생각하도록. 방심은 용납되지 않는다.”
구루귀마의 으름장에 맹월림의 전사들은 내심 불만을 품으면서도, 점창파 장문인보다 강한 자를 잡아야 한다는 말에 꺼림칙함을 느꼈다.
구루귀마가 강하다지만 그런 강자를 잡는 게 말이 되나.
“흡혈괴마(吸血怪魔)들을 준비해서 망정이지....”
맹월림의 뒤편에 시립한 거대한 인영들.
빗속에서 더욱 칙칙하게 보이는 거인들을 힐끗한 구루귀마가 입꼬리를 올리며 음침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교성님!”
빗줄기를 뚫고 온 혈사교령이 한쪽 무릎을 굽히며 부복했다.
비에 젖은 정수리를 보며 구루귀마가 물었다.
“놈들을 찾았느냐?”
“그게....”
교령이 긴장한 낯빛으로 고개를 숙였다.
“놈들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무어라? 확실하게 본 것인가?”
“행색이 보고와 일치했습니다. 네 명 모두 빠짐없이 오고 있습니다.”
구루귀마의 낯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곤명에서 탈출한 놈들이 다시 돌아온다...?”
비상식적이었다. 맹가서원에서 점창파의 제자를 찾기 위해 행방을 물었다고 하지 않았나.
“점창파의 제자는 없더냐?”
“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허어, 영문을 모르겠군. 겨우 하루도 안 지나서 찾는 걸 단념했을 리가 없거늘....”
“추격부터 뿌리치고 다시 쫓으려는 게 아닐는지요. 저들의 입장에선 자칫하면 앞뒤로 포위당할 수 있습니다.”
“그럴 작정이라면 그렇게 급하게 곤명을 떠나지 않았겠지. 분명 뭔가 꿍꿍이가 있음이야.”
눈을 가늘게 뜬 구루귀마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뒤쪽에 있던 모산파의 술사가 달려왔다.
“흡혈괴마들은 문제없이 조종할 수 있겠지?”
“명령만 내려주시면 지금 당장 깨울 수 있습니다.”
“좋아. 여기서 놈들을 맞이한다.”
어차피 쫓으려고 했던 놈들이다. 먼저 찾아와준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내가 흡혈괴마들과 함께 삼청검을 잡을 것이다. 너희들은 그놈과 함께 온 연놈들을....”
구루귀마가 그렇게 작전을 늘어놓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그들의 발밑에 고인 물웅덩이가 나선을 그리면서 폭발, 거대한 포말이 나무 꼭대기 높이까지 솟구쳤다.
“우어어억!”
“크악!”
난데없는 폭발에 휘말린 맹월림의 전사들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저 멀리 튕겨졌다.
물론 구루귀마는 예외였다.
“술법인가!?”
“모, 모르겠습니다! 주력은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
구루귀마의 쌍비조에 허리춤이 잡힌 술사가 벌벌 떨면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구루귀마가 혀를 찼다.
“이런 쓸모없는 놈 같으니! 흡혈괴마들이나 깨워라!”
“예, 예!”
술사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두려움에 휩싸이면서도 진언을 외우는 데 성공했다.
그러자 구루귀마가 흡혈괴마라 불렀던 회색 거인들이 고개를 들고 우렁차게 포효했다.
-우오오오오오오!
“돼, 됐습니다! 이제 명령만 내리면...!”
퍼석!
기뻐하며 외친 모산파의 술사는 어디선가 날아온 빛살을 맞고 그대로 목이 달아나버렸다.
허무한 죽음에 구루귀마도 대략 멍해졌다.
“어, 어검술...?”
교성인 그조차 흉내낼 엄두도 못 내는 지고한 영역.
이런 짓을 할 만한 자는 한 명밖에 없었다.
“삼청검, 네 이놈...!”
술사의 시체를 내던진 그가 어검술이 날아온 방향을 향해 쌍비조를 휘둘렀다.
소름 끼치도록 서슬 퍼런 경파가 시야를 가리는 빗줄기를 갈라버리고 저편까지 뻗어나가는 모습.
물론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극야탄멸(極夜炭滅).
절세의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며, 양손의 쌍비조에 검붉은 강기를 한가득 피워올린다.
찰나 쌍비조가 피와 살로 이루어진 육장과 부딪치면서 무채색의 충격파가 너울처럼 퍼져나갔다.
막강한 반탄지력에 은은한 통증을 느낀 구루귀마는 자신을 덮친 소년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네놈은 뭐냐? 삼청검이 아닌데?”
“완안극.”
녹색의 안광을 줄줄이 뿜어낸 완안극이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네놈들이 짓밟은 독곡의 주인이니라!”
“......!”
모든 것을 잃고 흡혈귀로 전락한 늙은 소년이 불구대천의 원수를 향해 독니를 드러냈다.
* * *
“저대로 둬도 되겠어?”
“알아서 잘 싸우겠지.”
무심한 태도에 백서희의 얼굴에 어처구니없다는 기색이 스쳐지나갔지만, 강엽은 몸을 돌린 뒤였다.
“혼자 싸우고 싶다고 하는군. 도와주지 않아도 교성 따위는 처치할 수 있다면서.”
겉모습만 어릴 뿐 완안극은 당문주와 비견된다는 독곡주였다.
흡혈귀까지 됐는데 교성 하나도 감당하지 못하랴?
“이쯤 했으면 충분히 도와준 거야.”
그렇게 말하는 강엽의 주변엔 흡혈괴마였던 것들의 잔해들이 너저분하게 쓰러져 있었다.
어검술로 모산파의 술사를 해치우자마자 흡혈괴마들을 수백 조각으로 썰어버린 것이다.
그 지경이 되고서도 움찔움찔 경련하는 시체 조각들의 모습에 현운 도장은 벌레 씹은 표정이 되었다.
“지독하군. 두 눈으로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완성된 불괴강시는 더합니다.”
강엽이 손을 뻗자 창백하게 명멸하는 벼락이 빠직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시체 조각들을 덮쳤다.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 뇌기가 주변으로 뻗어나가 다른 시체 조각들까지 까맣게 태워버린다.
백서희와 현운 도장도 조각들을 한데 모으면서 삼매진화를 일으켰다.
“비 때문에 잘 타진 않네.”
“그래도 운이 좋구만. 완 노사와 싸우는 자는 구루귀마일 걸세. 곤명 교구(敎區)를 다스리는 자야.”
“교구요?”
“혈교는 자기들이 다스리는 영역을 그렇게 지칭하더군. 현 단위는 소교구, 부 단위는 대교구일세. 곤명쯤 되면 대교구인 게지. 나도 여기 와서 알았네.”
“운이 좋은 건 왜죠?”
“구루귀마가 몸소 병력을 끌고 나오지 않았나. 그렇지 않았다면 곤명에서 한번 더 싸워야 했을 텐데.”
“아하.”
알겠다는 듯이 손뼉을 짝 치는 백서희를 흐뭇하게 바라본 현운 도장이 강엽을 돌아보았다.
“역시 작전대로 할 건가?”
“예, 도장께서는 사람들을 데리고 하오문 당주를 만나주십시오. 제 이름을 대면 도와줄 겁니다.”
시간이 금보다 귀한 만큼 일행 모두가 다 같이 움직이는 것은 극히 비효율적이었다.
현운 도장이 침중한 안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 뒤따라가겠네.”
“빨리 오셔야 할 겁니다.”
왔던 길로 되돌아가려는 현운 도장을 향해 강엽이 담담한 기색으로 호언장담을 입에 담았다.
“너무 늦게 오시면 다 끝나고 난 뒤일 테니까요.”
그 말에 담긴 의미를 헤아린 현운 도장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초립을 매만졌다.
“허허, 산길이 미끄러워서 곤명엔 좀 늦게 도착할 것 같구만. 부디 내 몫도 남겨주시게.”
그렇게 일행은 사람들을 구하고 맹월림과 혈교에게 엿을 먹이기 위한 작전에 돌입했다.
* * *
“쿨럭! 크으억...!”
폐부를 옥죄이는 기침소리.
그때마다 검게 죽어버린 피가 길게 흘러내려 앞섶을 검붉게 물들이고, 땅바닥에 점점이 떨어져내린다.
낯짝에서 혈색이 완전히 사라진 구루귀마가 불신 어린 얼굴로 눈앞의 상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어떻게 네놈 따위가 그런 육신을...!”
“너희가 이렇게 만들지 않았느냐?”
녹광을 뿌리는 소년이 찢어지게 웃었다.
짧은 날숨을 쉴 때마다 뿜어져나온 진한 독기가 구루귀마의 코끝을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소나기로 인해 다소 위력이 죽었다 하나 독인의 경지에 오른 절세고수가 뿜어내는 독이었다.
마공의 호흡법으로 독기를 막은 구루귀마 역시 내상을 입고 나선 제대로 막지 못했다.
“망할 놈의 재생력만 아니었어도...!”
“큭큭, 인정하마! 네놈의 구명절초는 매서웠다. 흡혈귀가 되지 않았다면 위험했을 게야.”
교령을 미끼로 내던진 사이 준비했던 구명절초.
그야말로 사력을 다한 필살의 절초는 완안극의 호신강기를 찢고 상반신을 피로 물들였다.
그러나 재생력을 지닌 흡혈귀는 그 상처조차 일순간에 치유하고 구루귀마에게 중상을 입혔다.
“어떤 의미에서는 네놈들에게 감사하고 있다. 덕분에 영원히 늙지 않는 몸이 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라고 짧게 여지를 두며 말을 잇는다.
“핏값은 핏값으로 갚는 법이지. 네놈의 피는 주인님께 공양될 것이니 영광으로 알거라.”
“입 닥쳐라, 괴물놈...!”
최후까지 남은 공력을 있는 대로 쏟아부어서 쌍비조를 휘둘렀지만, 홀연히 사라진 완안극은 구루귀마의 등 뒤에 나타나서 손을 휘둘렀다.
날카롭게 모은 관수가 가슴팍을 뚫고 나온다.
“커어억!”
몸 밖으로 나와서도 펄떡거리는 심장.
자신의 심장을 바로 앞에서 지켜본 구루귀마가 경악한 얼굴로 절명하는 것을 즐겁게 감상한 완안극이, 입술 끝을 둥글게 말며 이죽거렸다.
“뭐, 다 네놈들의 업보 아니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