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68화 (265/450)

50화. 운남 (3)

맹가서원.

곤명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서원은 뜬금없는 횡액을 맞았다.

온몸이 피로 점철된 불청객들이 대문을 부수고 난입한 상황.

어떤 적이든 격퇴할 수 있다고 호언한 맹월림의 전사들은 그 말이 무색하게도 장원 여기저기에 처참하게 널브러진 채 피를 게워내고 있었다.

서원의 제자들과 식솔들이 새파랗게 질린 가운데 학창의를 입은 깐깐한 인상의 노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자만하더니 네 명을 감당하지 못해서 이 꼴이 되었는가.”

쑥대밭이 된 장원의 참상에 착잡해진 노인은 서원에 쳐들어온 침입자들을 돌아보았다.

젊은 청년과 아리따운 여인, 그리고 어린 소년과 중년인으로 이루어진 기이한 일행.

워낙 특이한 구성이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듯한 일행은 무공을 모르는 그가 봐도 굉장히 강했다.

단출한 마의를 걸친 중년인이 머리 위의 초립을 벗으며 예를 표했다.

“소란을 피워서 송구합니다, 원주님. 빈도는 무당의 현운이라고 합니다.”

“무당이라... 노부가 비록 무림과 연이 없는 학자이지만 무당파의 이름은 익히 들었소이다. 점창과 더불어 구파라 불린다고 알고 있소만.”

“예, 원주님을 찾아온 척무경이 저희 일행이었습니다. 갑자기 그의 행방이 묘연해져서 빈도가 낮에 원주님의 댁을 찾아왔지요.”

“...알고 있소. 하나 대답해줄 수는 없었소이다.”

현운 도장과 문답을 나누고 있으나 시선은 바닥에 널브러진 맹월림의 전사들을 향해 있다.

그 눈동자에 어린 냉막한 감정만 봐도 원주가 맹월림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보다시피 불의한 무리가 노부의 집을 점거하고 공갈협박을 일삼았다오. 순순히 협력하지 않으면 유혈사태를 일으킬 거라더군.”

“알고 있습니다. 바깥의 무리에게 저희의 존재를 알린 것도 원주님이 아니라 이들이겠지요?”

고개를 주억인 원주가 대답했다.

“무경이는 노부의 외손주요. 그 아이가 명성을 떨쳐서 그런지 맹월림도 알고 있더구려. 노부의 집을 강제로 점거했소. 무경이가 온다면 잡을 심산이었지.”

“손주분께서 어디로 잡혀가셨는지 아십니까?”

시름이 어린 노원주의 늙은 얼굴이 좌우로 움직이자 현운 도장의 이마에도 깊은 주름이 잡혔다.

잠자코 있던 강엽이 나선 것은 그때부터였다.

“척무경이 맹월림과 싸웠습니까?”

기습을 당하거나 서원 식구들이 인질로 잡혀 협박당한 게 아니라면 필사적으로 저항했을 터.

원주가 한숨과 함께 넋두리를 늘어놓았다.

“당연히 격렬히 저항했네. 하나 노부와 식구들이 인질로 잡히자 포기하고 말았지. 노부만 인질로 잡혔다면 목숨을 끊었을 것을....”

외손주의 발목을 잡았다는 사실에 감정이 북받치는지 늙은 원주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함께 있던 서원 사람들도 한숨을 쏟아내거나 침울한 얼굴로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모습.

그러나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이어갔다.

“혹시 흔적이 남았습니까? 옷이나 병장기, 혈흔 같은 것들 말입니다.”

“으음, 그런 걸 왜 찾는지 모르겠지만... 내 맹월림 몰래 보관해뒀네. 너희가 가서 가져오너라.”

지시를 받은 제자들이 부리나케 달려가서 피딱지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철검을 가져왔다.

현운 도장이 무겁게 신음했다.

“척무경의 검이 맞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군요.”

강엽이 철검에 묻은 피딱지를 어루만졌다.

혈공진기를 끌어올리는 것과 동시에 수류의 능력을 쓰자 딱딱하게 굳어있던 피딱지가 물처럼 흘러내린다.

상리를 벗어나는 현상에 원주와 서원 식구들이 신기해할 때 강엽은 행낭에서 양피지를 꺼내 넓게 펼쳤다.

이어 자신의 손바닥을 그어서 피를 떨어트리고 손가락에 묻은 척무경의 피를 하나로 합친다.

‘원래라면 이쯤에서 진언을 외워야겠지만....’

그간의 연구와 깨달음으로 술법의 경지가 깊어지면서, 이제 웬만한 술법들은 진언이나 수인을 생략하고 바로 쓸 수 있게 됐다.

직후 양피지에 떠오른 붉은 점들.

서쪽을 향해서 점차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강엽은 양피지를 둘둘 말아서 품 속에 갈무리했다.

“어디로 갔는지 알겠군요.”

“그게 참말인가!?”

혈종술을 처음 보는 현운 도장이나 완안극보다도 원주가 깜짝 놀라서 목소리를 높였다.

“예. 멀지 않으니 금방 따라잡을 겁니다.”

“부, 부탁하네! 무경이... 내 손주 녀석을 구해주게!”

강엽이 집안을 초토화시킨 장본인이라는 것도 잊고 버선발로 달려와서 손을 맞잡는 노인의 모습.

묘한 눈길로 강엽을 바라보던 현운 도장이 대신 대답했다.

“반드시 구할 겁니다.”

* * *

추격대가 따라올세라 재빨리 서원을 탈출한 일행은 곤명을 벗어났다.

땅거미가 지면서 햇볕도 사그라들었기에 완안극 역시 경공을 쓰는 데 아무 문제가 없는 상황.

공력이 가장 처지는 백서희조차 힘든 내색 없이 묵묵히 따랐기 때문에, 추격자들이 붙을 새도 없었다.

“희한한 술법이군. 피로 위치를 추적하다니... 천리추종술보다 더 뛰어나구먼.”

“대상의 피가 있어야 하니 만능은 아닙니다. 거리가 너무 멀면 양피지에 표시가 안 되고요.”

양피지에 떠오른 혈점의 크기와 위치로 남은 거리를 가늠한 강엽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침까지만 해도 화창하기만 했던 하늘에 짙은 먹구름이 흐르면서 공기가 눅눅해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순식간에 장대비가 되어 쏟아지기 시작했다.

“...계속 추격할 텐가?”

빗속에서는 냄새나 흔적이 씻겨지기 마련.

그러나 일행은 혈점을 따라가는 만큼 하늘이 어떤 풍운조화를 일으키든 문제없이 쫓아갈 수 있다.

그때 백서희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저쪽의 혈점도 멈춘 것 같은데?”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강엽의 손에 들린 양피지로 모였다.

백서희의 지적대로 상대방의 혈점이 한 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차로 이동하나 보군. 야밤에 빗속에서 이동하기는 껄끄러울 테니 야영지를 찾겠지.”

옮기는 사람이 척무경 하나라면 굳이 마차를 쓸 필요가 없겠지만, 여러 명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곤명엔 점창의 속가 문파들이 많은 만큼 척무경 말고도 적잖은 제자들이 숨었을 터.

그들을 모두 잡아들였다면 짐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완안극이 뭔가 떠올랐다는 얼굴로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 근방에 버려진 관제묘가 있었습니다. 십 년쯤 전에 근처를 지났습니다.”

“관제묘라... 비를 피하기는 제격이겠군.”

객잔이 있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도관이나 암자, 관제묘가 가장 좋은 장소일 터.

양피지를 집어넣은 강엽이 말했다.

“혈점의 위치를 보면 놈들의 위치는 이십 리 이내다. 서두르면 한 시진 내로 찾을 수 있을 거야.”

일행이 힘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 * *

척무경은 새삼 한숨이 나왔다.

‘현운 도장님이 권유하셨을 때 동행했어야 했는데....’

실수였다. 설마 맹월림의 전사들이 무림과 상관도 없는 맹가서원을 점령하고 있었을 줄이야.

놈들이 외조부를 비롯한 식구들을 인질로 잡고 협박했기에 순순히 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해도 현운 도장이 동행했다면 놈들을 해치울 수 있었을 텐데.

“흐으읍....”

문득 귓전을 파고드는 목소리.

포승줄에 묶인 몸을 뒤집은 척무경은 구석에서 흐느끼고 있는 소년을 보고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소년의 이름은 잘 모르지만, 점창파의 속가제자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수련하는 모습을 멀리서 몇 번 보기도 했었다.

아마 점창파와 맹월림의 싸움 이후 운 좋게 탈출해서 가족들이 있는 곤명으로 도망친 게 아닐까.

‘휴, 너도 결국 맹월림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했구나.’

다독여주고 싶었지만 온몸이 묶인 데다 입에 재갈까지 물었기에 벙어리가 된 신세.

별안간 바깥에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구만. 산을 내려가는 게 만만치 않겠어.”

“지금 비가 문제냐? 하, 씨발. 누구는 빗속에서 청승이나 떨고 있고, 누구는 뜨신 곳에서 계집질을 하고....”

“별 수 있나. 끗발에서 밀리는데.”

“쳇, 점창파의 제자라고 했나?”

“아니, 그건 마차에 있는 애새끼고. 윗분들이 데려간 년은 그놈 누이라고 하던데. 자기 동생이 끌려갈 때 같이 끌려온 모양이야. 생긴 게 반반하니 적당히 데리고 놀기는 딱 좋지.”

“하아, 미치도록 부럽네.”

“며칠 전에 기루에 가지 않았나?”

“다 늙은 기녀랑 탱탱한 계집이 비교가 되나. 우리도 목숨 걸고 싸우는데 개뿔도 없으니....”

“행여나 윗분들 있는 데선 그런 말 말어. 경을 친다.”

“아니까 몰래 씨부리는 거지.”

빗소리에 파묻혀 드문드문 끊겼지만 척무경은 놈들이 하는 말을 똑똑이 들었다.

속으로 이를 빠득 간 그는 구석에서 울고 있는 소년을 곁눈질하며 장탄식을 쏟아냈다.

포승줄을 풀고 놈들을 징치하고 싶어도 출발 전에 산공독을 먹었기에 내공이 모이지 않았던 것.

“그보다 점창파 놈들은 어디다 쓰려고 하는 거래? 그냥 목을 치면 이딴 고생 안 해도 되잖어?”

“낸들 아나. 윗분들이 생각이 있으시겠지. 들리는 소문으로는 수용소에서 다른 곳으로 또 보낸다던데....”

수많은 점창파의 제자들이 수용소로 보내졌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말.

척무경이 듣든 말든 사내들은 느긋하게 입방아를 찧었다.

“뭐, 운이 좋다면 우리도 수용소에 도착하기 전에 계집들을 맛볼 수 있겠지. 그때까지....”

돌연 잦아드는 사내의 말꼬리. 의아함을 느낀 척무경이 고개를 들어올릴 때, 답답한 신음이 연이어 울렸다.

찰나 짐마차를 가린 천막이 걷히며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구, 꼴이 말이 아니네.”

“흐읍!”

척무경을 비롯해서 안에 있던 점창파의 제자들이 숨을 들이키는 것과 동시에 빛살이 번뜩였다.

바짝 굳은 척무경은 몸이 느슨해진 감각에 그제야 포승줄이 끊어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반색했다.

입을 막은 재갈을 빼낸 그가 깊게 심호흡을 뱉으며 빠르게 외쳤다.

“놈들이 여인들을 잡아갔습니다!”

“알아요.”

“예?”

“그쪽은 강엽이랑 현운 도장이 갔고요. 별 일 없으면 지금쯤 끝이....”

-으아아아아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밤하늘을 찢어발기는 절규.

처절한 목소리만으로도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짐작이 된다.

잔뜩 움츠린 점창파 제자들을 돌아본 백서희가 어깨를 으쓱였다.

포승줄을 일일이 끊어준 그녀가 허리 위에 손을 올리며 물었다.

“따로 마혈이나 아혈이 짚인 사람?”

“저 아이들은 어려서 그렇게 철저히 대비하진 않았습니다. 저에게만 산공독을 먹였습니다.”

“탈출하지 못한 게 그래서였어요?”

“휴우,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조심했다면 폐를 끼치지 않았을 텐데....”

“맹가서원에 가봤어요. 외조부님이 걱정하시던데요.”

“현운 도장님과 같이 갔어야 했는데 제가 괜한 고집을 부려서....”

“좋게 생각해요. 척 공자를 구하는 김에 이 아이들도 함께 구한 거니까.”

그리 위로가 되진 않았지만 척무경은 차마 반박하지 못하고 쓴웃음만 머금었다.

그때 구석에 있던 소년이 부리나케 뛰쳐나갔다.

“엇, 아직 나가면 안 되는데....”

“누이가 걱정돼서 나갔을 겁니다.”

하지만 소년은 마차에서 나가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가슴이 철렁해진 척무경이 서둘러 나가자, 엉덩방아를 찧은 소년이 무언가를 보고 덜덜 떨고 있었다.

소년을 따라 고개를 돌린 척무경 역시 귀신을 본 것처럼 파리해졌다.

“이, 이게 대체...?”

빗줄기를 뚫고 비추는 녹색 안광.

점창파의 속가 제자와 비슷한 또래로 보이는 소년이, 사내들의 안면을 억척스럽게 틀어쥐고 있었다.

주변엔 이미 숨통이 끊긴 시체들이 굴러다니고 있었는데, 온몸에 핏줄이 흉물스럽게 돋아난 채 칠공에서 피를 쏟고 있었다.

소년이 사내들을 놓아주자 피칠갑을 한 시체들이 털썩 쓰러졌다.

“아, 같은 편이니까 무서워할 필요 없어요.”

두 사람을 뒤따라서 마차에서 내린 백서희의 말에도 척무경은 두려움을 내려놓지 못했다.

척무경을 위아래로 훑어본 완안극이 짧게 내뱉었다.

“이놈은 산공독에 당했군요.”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어요?”

“예. 산공독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이놈이 당한 독은 청음십독(靑陰十毒)입니다. 중독되면 황달에 걸린 것처럼 안색이 누렇게 뜨는데, 심하게 당하면 눈밑에 퍼런 음영이 지기도 합니다. 열 가지 독을 배합해야 하는지라 만들기 어려운데 맹월림 놈들이 용케 구했군요.”

“해독할 순 있나요?”

“그냥 두면 닷새는 지나야 풀릴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척무경은 완안극에게 제압당한 걸 알고 흠칫했다. 한순간에 거리를 좁혀와서 완맥을 움켜쥔 것이다.

직후 완맥으로 차가운 기운이 파고들었고, 전신 경맥을 한 바퀴 돌더니 목구멍에서 무언가 올라왔다.

“쿠웩!”

피를 한 바가지나 쏟아낸 척무경이 충혈된 눈으로 완안극을 노려봤다.

완안극이 코웃음을 치고 물러났다.

“눈깔에 힘 줄 시간 있으면 몸이나 점검해봐라.”

“예...?”

척무경은 의문을 느끼면서도 시키는 대로 진기를 움직여봤다.

그러자 딱딱하게 경직됐던 단전의 진기가 호응하는 게 아닌가?

“맙소사, 이런 괴사가...!”

“뭘 이런 걸 가지고 놀라나.”

완안극은 별 거 아니라는 듯이 피식거렸지만 딱 봐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모습이었다.

그때쯤 적들을 처치한 강엽과 현운 도장이 여인들을 데리고 나왔다.

“누, 누나!”

“성아야!”

방년의 여인과 동생이 포옹한다.

흐뭇하게 웃은 백서희가 옆구리를 툭툭 치자 강엽이 얼른 대답했다.

“최악의 일은 당하지 않았어.”

“다행이네.”

현운 도장과 해후를 나눈 척무경이 다가와서 포권을 쥐었다.

“감사합니다, 강 무사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운이 좋았소. 조금만 더 멀었다면 쫓지 못했을 텐데.”

“그래서 말인데....”

어려운 말을 꺼내려는지 망설이는 기색을 띠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말을 이었다.

“맹월림의 소굴에 본파의 제자들이 잡혀간 것 같습니다. 그들을 구출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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