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67화 (264/450)

50화. 운남 (2)

곤명.

운남의 성도이며 여러 민족들이 어우러져 살아가는 도시엔 일찍부터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백주대낮부터 칼과 도끼, 창 등으로 무장한 이국적인 복장의 무인들이 당당히 거리를 활보하는 광경.

이층 다루에서 창문 아래로 그 모습을 엿본 강엽은 등 뒤에 앉은 사람이 하는 얘기를 가만히 들었다.

차를 홀짝인 서생이 책을 읽는 시늉을 하며 작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맹월림의 전사들입니다. 곤명을 제 집 안방처럼 돌아다니고 있지요. 곤명의 무림 문파들도 제지를 못하는 형편입니다.”

“곤명엔 점창의 속가 문파가 많지 않소?”

“많지요. 하나 점창파의 장문인께서도 참변을 당하셨는데 저들이 무슨 힘이 있어 맞서겠습니까?”

“사실상 항복했단 말이군.”

“의기 넘치는 이들만 목숨을 걸었지요. 그들은 현재 점창산에서 힘겨운 항전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낭인전은?”

“처음엔 점창파의 편을 들었지만, 점점 이탈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낭왕께서 무림맹의 편을 들어주신다지만 낭인들까지 그럴 이유는 없으니까요. 다들 제 보신을 우선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맹월림엔 가담하지 않소?”

“부족 출신의 낭인들 중엔 그런 자들도 꽤 많습니다. 다만 낭인으로서 가담한 게 아니라, 낭인전을 그만두고 가담한 겁니다. 그게 맹월림에 들어가는 조건이라서....”

“점창파의 상황은 어떻소?”

“궁지에 몰렸습니다. 사상자가 많은 건 둘째치고, 물자가 절망적으로 부족합니다.”

거기까지 말한 서생은 목이 답답했는지 더 이상 김을 내뿜지 않는 차를 한 입에 들이켰다.

“맹월림의 등쌀에 시달린 부족들이 점창파로 피신하는 바람에 안 그래도 부족한 식량이 더욱 부족해졌지요. 까놓고 말씀드리면 점창파는 고사 직전입니다.”

부족한 게 식량만은 아닐 것이다. 약이나 병장기 등 중요한 물자들도 거의 동났다고 봐야 할 터.

“맹월림은 장문인을 참살한 뒤엔 무리하게 공세를 퍼붓는 대신 포위만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로는 본문도 점창파의 내부 정보를 알아내는 데 난관을 겪고 있습니다.”

“점창파로 가려면 포위망을 뚫어야겠군.”

“천인장과 혈교의 교성이 지키고 있습니다.”

“맹월림주가 팔대교왕이라 들었소. 혹시 다른 팔대교왕도 있소?”

“아직까진 없습니다. 다만 본문도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니 혹시 모를 사태를 염두에 두셔야 합니다.”

“비밀리에 와 있을 수도 있다는 뜻이구려.”

“예. 대신 이걸 알아냈습니다.”

“이게 뭐요?”

뒤로 슬그머니 전달한 양피지.

탁자 아래에서 양피지를 펴본 강엽이 이채를 빛냈다.

“...지도?”

운남의 지형을 표시해둔 지도엔 몇몇 지명과 함께 붉은 염료로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붉은 점은 포로 수용소로 짐작되는 장소들입니다. 짐작컨대 지도에 표시해둔 곳들 말고도 더 있을 겁니다. 수용소 내부까지 잠입하진 못했지만, 포로들이 두 부류로 나뉜다는 건 알아냈습니다.”

“두 부류라....”

“하나는 노예상들에게 팔려서 군자금을 얻는 데 쓰입니다. 다른 하나는 몰래 빼돌려지고 있는데, 어디로 빼돌렸는지는 찾지 못했습니다.”

“.......”

등받이 너머로 송구스러워하는 분위기가 전해졌지만, 강엽은 딱히 개의치 않았다.

‘포로들이 몰래 빼돌려지고 있다....’

그 한마디만으로도 포로들이 어떤 결말을 맞이했는지 알 것 같았다.

“도와줘서 고맙소, 당주.”

“강 무사님을 도우라는 게 문주님의 명령이었습니다. 이것밖에 알려드리지 못해 죄송할 뿐입니다.”

“아니오. 많은 도움이 됐소. 이만 바빠서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군. 먼저 실례하겠소.”

“무운을 빌겠습니다.”

운남성을 총괄하는 하오문 당주의 인사를 뒤로한 강엽은 다루를 나와서 대로를 거닐었다.

거리 곳곳에 있는 맹월림의 전사들이 눈을 번뜩였지만, 강엽을 제지하지는 않았다.

병장기를 패용하기는커녕 하얀 학창의를 입고 한 손엔 서적들을 안고 다녔기 때문.

그렇게 완벽한 백면서생으로 위장해서 거리를 살핀 강엽은 자연스럽게 골목으로 방향을 꺾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서 멈춰 섰다.

“.......”

골목을 가로막은 무리들.

한눈에 봐도 맹월림의 전사들임을 알 수 있었던 구릿빛 피부의 장한들이 길을 막고 서 있었다.

“뭐야? 웬 기생오래비처럼 생긴 놈이....”

딱히 강엽이 곱상한 외모는 아니지만, 맹월림의 전사들은 시비를 걸며 누런 가래침을 퉤 뱉었다.

“어이, 너 뭐하는 새끼인데 여기 들어와?”

“...집에 가는 길입니다.”

겁먹은 것처럼 우물거리자 맹월림의 전사들이 서로를 돌아보더니 와하하 폭소를 터뜨렸다.

“이거 딱 봐도 외지에서 흘러들어온 놈이구먼. 말투부터 확 다르잖아. 어디서 온 놈이냐?”

“사천에서 왔습니다만....”

“아, 사천. 거기에 반반한 계집들이 그렇게 많다면서?”

“예? 저, 저는 잘....”

주눅든 기색으로 뒷걸음질을 치자 맹월림의 전사들이 워워 달래는 손짓으로 강엽을 막아세웠다.

“이 새끼가 어딜 튀려고. 너 이리로 와봐라. 우리가 이 거리를 순찰하고 있거든?”

위협하듯 날붙이를 슬쩍 들이민 맹월림의 전사들이 건들건들 걸어와서 어깨동무를 했다.

“키는 멀대같이 크구만. 그거 책이지? 너도 공자 왈 맹자 왈 하는 먹물쟁이냐?”

“예, 예. 그렇습니다.”

“사천에서 곤명까진 왜 왔어?”

“먼 친척분께서 서원을 하고 계셔서... 과거를 준비하는 동안 신세를 좀 지러 왔습니다.”

“친척 누구?”

“예?”

“친척 누구냐고, 새꺄. 두 번 묻게 하지 마.”

빠악!

“억!”

강엽이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숙이자 낄낄거린 맹월림 전사들이 어깨를 토닥였다.

강엽이 발작하듯 외쳤다.

“매, 맹가서원입니다!”

“맹가서원? 거기가 어디지?”

“이 친구야, 남쪽 외곽에 있는 데잖아. 곤명에서 나름 유명한 곳인데 모르나?”

“망할, 곤명에 배치된 지 두 달밖에 안 됐다고. 아직 여기 지리를 다 익히지도 못했는데....”

투덜거린 맹월림의 전사가 은근슬쩍 강엽의 허리춤을 건드렸다.

“이봐. 맹월림에 대해서 얼마나 알아?”

“아, 저, 저도 곤명에 온 지 며칠밖에 안 돼서 잘... 훌륭한 일을 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우린 네놈들 빌어먹을 한족놈들을 쫓아내기 위해 일어선 협사님들이다. 네놈들이 우리한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모르지?”

“저, 전 정말 아무것도 모릅니다!”

“겁먹지 말고. 네가 한족을 대표해서 우리에게 잘못을 갚을 방법이 하나 있어. 우리가 오랫동안 고생해서 목이 좀 마르거든. 네가 좀 보태주는 게 어때?”

몸 무사히 돌아가고 싶으면 돈을 내놓으라는 엄포.

겁에 질린 것처럼 창백한 안색으로 벌벌 떠는 강엽은 얼른 전낭을 꺼내 공손히 바쳤다.

“여기 있습니다!”

“오, 제법 두둑하구만. 역시 운남까지 여행 온 공자님은 뭐가 달라도 다르단 말이야.”

좁은 골목이라고 해도 곳곳에서 이목이 없는 건 아니다. 대로를 지나거나 창문을 통해서 이쪽을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다만 맹월림의 전사들이 무서워서 감히 나서지 못할 뿐.

이쪽을 두렵게 바라보는 시선들을 즐긴 전사가 전낭을 뒤적이면서 희희덕거렸다.

“좋아. 이제 가보자고, 친구들....”

급작스레 말꼬리를 줄이는 언동.

은은한 붉은 광채를 토해낸 강엽의 왼쪽 눈동자가 뇌리를 파고들자 초점이 흐려지면서 멍해진다.

다른 전사들 역시 마찬가지. 마안의 환술에 당한 이들은 더 이상 제멋대로 굴지 못했다.

“...뭔가 오해가 있었나 보군. 우린 이만 가지.”

“어, 그래. 가보자고.”

자연스럽게 전낭을 돌려준 것은 물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전사들.

“살펴가십시오, 협객님들!”

골목을 벗어나는 자들의 뒤에서 과장되게 소리치면서 인사한 강엽이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언제 겁먹었냐는 듯이 무미건조한 눈빛.

마안을 담았던 왼쪽 눈두덩이를 문지르면서 빠르게 골목을 지나쳤다.

‘역시 마안의 공능이 더 강해졌어.’

혈공진기의 화후가 깊어질수록 암신이나 혈목이 강해지는 것처럼, 마안도 점점 성장하고 있었다.

단순히 대상에게 환술을 걸어 기억을 빼내는 것을 넘어, 아예 새로운 기억을 덧씌우는 경지.

그로써 대상의 감정에 영향을 주며 자신이 원한 대로 유도할 수 있다.

맹월림의 전사들이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고, 빼앗은 전낭도 얌전히 돌려주고 가버린 게 그 방증이다.

그들에게 강엽이 우호적인 인물이라고, 돌려보내야 한다는 기억을 덮어씌웠던 것이다.

‘고수들에게는 통하지 않지만, 하수들을 상대로는 유용한 능력이야.’

혹시 하는 마음에 완안극에게도 써봤지만, 그쯤 되는 고수에겐 마안의 공능이 일절 먹히지 않았다.

‘정보를 빼먹는 데는 쓸 만하겠어.’

조금 전에도 맹월림의 전사들에게 환술을 걸어 맹월림의 내부 정보를 빼내려고 해봤다.

원하는 걸 얻지는 못했지만 마안의 효과를 확인한 것으로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다면....

‘점창파의 제자를 발견하면 무조건 제압하라고?’

맹월림이 곤명을 점령한 이유.

단지 곤명이 자기들의 세력임을 과시하려는 게 아니었다. 점창파의 제자들을 그물질하고 있었던 것이다.

* * *

“큰일 났네.”

간만에 재회한 현운 도장은 굳은 안색이었다.

강엽보다 먼저 현운 도장을 만난 백서희도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완안극은 벽에 기댄 자세로 한숨을 쉬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척무경이 사라졌어.”

“...언제 어디에서요?”

“오늘 아침에. 근방에 친척이 있다면서 나갔는데 소식이 끊겼네.”

현운 도장은 같이 가고자 했지만 척무경은 가까운 곳이니 혼자 가도 괜찮다며 사양한 것이다.

척무경 역시 용봉지회에 들 만큼 뛰어난 후기지수였기에 만약의 상황에도 대비할 자신이 있었을 터.

“하아, 내 불찰일세. 무슨 일이 있어도 따라갔어야 했거늘....”

“거기가 어딥니까?”

“맹가서원.”

우연치곤 공교로웠다. 맹월림의 전사들에게 대충 둘러대려고 낮에 지나쳤던 서원 이름을 댔는데, 하필이면 척무경이 갔던 장소일 줄이야?

“내 이미 맹가서원에 가봤지만 그들은 척무경을 못 봤다고 했네. 해서 밤에 몰래 들어가볼 생각이야.”

현운 도장이라고 해도 적진 한복판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그때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한발 늦은 것 같군요.”

“으음!”

현운 도장이 신음을 흘렸고, 완안극이 창문의 암막을 살짝 들추었다.

“주인님, 맹월림 놈들이 오고 있습니다.”

강엽을 주인으로 섬기는 완안극의 품행.

현운 도장은 본래 일행엔 없던 그의 존재에 의구심이 담긴 눈초리를 보냈지만, 곧이어 백서희가 중얼거린 말에 표정이 일변했다.

“그 맹가서원이라는 놈들이 꼰지른 거 아냐?”

“그게 아니면 설명이 안 되지.”

척무경이 실종된 것은 그렇다고 쳐도, 하필 현운 도장이 맹가서원을 들르자마자 맹월림의 전사들이 객잔을 포위한 걸 어떻게 설명할 텐가.

때마침 바깥에서 흉포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쥐새끼 같은 점창파 놈들... 객잔에 숨은 거 다 안다. 썩 나오지 못할까!”

“...라고 하는데 어떡할래?”

백서희가 고개를 돌리며 묻자 강엽이 실소했다.

“글쎄, 부르면 나가주는 게 인지상정이겠지?”

가만히 있어봤자 객잔만 피해를 입을 터. 애꿎은 사람들이 다치는 꼴을 볼 수는 없었다.

“근데 완 노사님은 싸울 수 있겠어요?”

“걱정 마십시오, 주모. 소인에겐 아직 열두 개의 독이 있습니다.”

곤명까지 오는 동안 짬날 때마다 숲에 들어가서 독물을 잡아왔던 것.

햇볕이 쨍쨍하게 내리쬐는 만큼 무공을 쓸 수는 없지만, 독을 뿌리는 정도라면 딱히 무공이 필요없을 터.

“완 노사라고 했소? 백 소저가 말을 높이는 걸 보면 보기보다 연배가 많으신 것 같은데... 혹시 괜찮다면 춘추를 알려주실 수 있소?”

“네놈보다는 훨씬 많으니라.”

“....”

강엽과 백서희에게는 충성을 바치긴 해도 그 외의 사람에게는 쌀쌀맞은 완안극이었다.

머쓱해진 현운 도장의 모습에 쓰게 웃은 강엽이 말을 보탰다.

“그의 말은 사실입니다. 몸에 문제가 있어서 젊어 보일 뿐이지요.”

“음, 그렇구만.”

“완안극, 현운 도장은 내 친구의 사부님이다. 예의를 갖춰서 대하도록.”

“...송구합니다, 주인님.”

면목이 없어진 완안극이 뒤통수를 긁적이고는 현운 도장을 향해 공수를 해보였다.

“내 결례를 범했소이다. 부디 용서해주시오.”

“사과를 받아들이겠습니다. 한데 완안극이라면....”

현운 도장쯤 되는 인물이라면 독곡주의 이름을 들어봤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흘러가는 상황이 한가롭게 환담을 나눌 시간을 주지 않았다.

“소, 손님들.”

오들오들 떠는 목소리로 일행을 부르는 객잔 주인.

하지만 객잔 주인의 뒤를 따라온 기척들을 알아챈 네 사람은 조용히 시선을 나누었다.

방문 바깥뿐만 아니라 창문 너머, 심지어 옆건물의 지붕에도 싸늘한 살기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객잔 주인 뒈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순순히 문 열어라, 빌어먹을 점창파 놈들아!”

“히이익!”

겁에 질린 객잔 주인이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

현운 도장과 눈이 마주친 강엽이 천천히 손을 들어올렸다.

급속도로 확장되는 감각 속에서 방문 너머 객잔 주인을 위협하는 전사들의 목줄을 허공섭물로 옥죈다.

“커억!”

“으으으윽...!”

창졸간에 현운 도장이 문을 박차고 나가며 전사들의 혈도를 짚었다.

“저기다! 놈들을 잡아!”

몰려오는 적들을 쓱 훑어본 강엽이 차가운 살광을 발했다.

“맹가서원까지 단숨에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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