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66화 (263/450)

50화. 운남 (1)

[부주의한 짓을 했다.]

심상세계로 오자마자 투덜거리는 진조의 모습.

강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할 말인데.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왜 남의 일에 끼어드나?”

[그게 최선의 수였으니까. 네놈이 피를 주는 바람에 그놈이 혈족이 되지 않았느냐.]

“뭐?”

[하아, 이제 와서 누굴 탓하랴. 미리 알려주지 못한 짐의 부덕인 것을.]

“자세히 말해봐.”

[흡혈귀를 늘리는 방법은 둘이다.]

강엽에게 권능을 넘겨주면서 여기저기 몸이 소실된 진조는 손가락이 없었지만, 혈공진기가 연기처럼 피어오르면서 손가락 두 개를 만들었다.

[하나는 흡혈귀끼리 결합하여 아이를 낳는 것. 이건 인간들과 똑같지. 하나 세상에 남은 흡혈귀가 네놈 하나뿐인 지금은 쓸 수 없다.]

“그럼 다른 하나는....”

[타인에게 피를 먹여 혈족을 늘리는 거다.]

“...!”

[물론 일방적으로 피를 먹여선 안 된다. 이건 의식 같은 거라서. 쌍방이 동의해야지.]

“그래서였나....”

강엽이 신음을 흘렸다. 혈교의 신녀가 그의 피를 먹었을 땐 혈족을 자처하는 일은 없지 않았나.

[눈치챘나 보군. 그래, 자칭 혈교의 신녀라는 계집은 네놈의 동의 없이 피를 마셨다. 그래서 ‘혈계식(血係式)’이 성립하지 않았던 거다.]

그러나 완안극에게 피를 먹였을 땐 혈계식에 대한 지식은 몰랐을지언정 쌍방이 동의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혈계식의 정통성을 인정받아 완안극이 강엽의 혈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놈은 반푼이긴 해도 흡혈귀의 일부를 지녔으니 기적적으로 성공한 거지. 원래 십중팔구는 피에 담긴 힘을 이기지 못하고 죽을 만큼 위험천만한 짓이다.]

십중팔구라고 했지만 확률이 항상 들어맞는 건 아니니 실제로는 대부분이 죽을 것이다.

“그럼 완안극이 나를 주인으로 인식한 건?”

[짐이 조금 도와주긴 했지만, 딱히 개입하지 않았어도 그놈은 네게 충성했을 게다. 혈계식을 통해 혈족을 늘린다는 건 그런 의미니까. 무림 문파로 치면 제자를 받은 셈이지. 네놈에게 절대 복종하는 제자를 말이다.]

다만 진조는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그 충성심을 거욱 굳건히 굳혔을 뿐.

[물론 세뇌만큼 완벽한 건 아니지. 그놈의 충성이 끝까지 이어질지는 네놈 하기에 달렸느니라.]

“...그렇군.”

[잘 해봐라. 흡혈귀가 되기 전엔 독쟁이였다면서? 그만하면 꽤나 쓸모가 있겠지.]

사천당문의 문주에 견줄 만한 독공의 대가를 한낱 독쟁이라 깎아내리는 오만한 언행.

하지만 진조라면 그런 자신감을 가질 자격이 있었기에 강엽은 뭐라 하는 대신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다음 능력을 받을 때가 된 것 같은데.”

정마안을 각성한 것도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동안 피를 마신 횟수는 많지 않지만, 하나같이 굵직한 고수들의 선천지기를 취했던 것이다.

유이강의 경우엔 내공을 물려받는 과정에서 선천지기를 취했고, 오사도는 과다출혈로 죽을 만큼 피를 뽑아냈으며, 당랑산군은 아예 전신의 피를 강탈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뭘 받지? 혈무화?”

일전에 진조의 기억에서 엿본 능력.

자신의 몸을 핏빛 안개로 바꾸는 능력은 강엽이 보기에도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아니, 그전에 줄 능력이 있다. 어쩌면 지금의 네겐 그리 필요없는 능력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태양을 극복하는 덴 반드시 필요했다.

거기까지 말한 진조가 불만스레 구시렁거렸다.

[사실 이 능력을 각성하면 백무량 그놈이 만든 진법은 하등 쓸모도 없는 것을. 괜히 그놈의 진법을 얻겠다고 발 아프게 뛰어가지고는....]

“그런 게 있었으면 빨리 줬어야지.”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계승자의 고통을 덜어줬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조가 흥하고 코웃음을 쳤다.

[일에는 단계가 있는 법이니라. 충분한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서 이 능력부터 받았다면 네놈의 육신이 견디지 못했을 것이야.]

“그래서 그 능력이 뭔데?”

[그것은....]

* * *

강엽이 가부좌를 풀고 눈을 뜨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뭐래?”

백서희가 누워 있었다.

강엽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피를 준 걸로 내 혈족이 됐다던데.”

진조와 나눈 얘기를 전해주자 백서희는 기가 막히다는 듯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럼 모산혈조 그 인간은 삽질한 거 아냐?”

“...?”

“그렇잖아. 단지 흡혈귀가 되는 걸 원했다면 제발 좀 피 좀 달라고 구결하면 되는데.”

“아, 그건 나도 물어봤는데... 모산혈조가 원한 건 단지 흡혈귀가 되는 게 아니더군. 평범한 흡혈귀가 되어봤자 낮에 약한 건 매한가지니까.”

삼화취정에 이르면 태양 아래에서도 죽지 않지만, 힘이 극도로 약해진다는 약점은 극복하지 못한다.

흡혈귀로 영락한 이상 죽기 전까지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

“반면에 진조는 다르지.”

태양을 완전히 극복할 수 있었고, 실제로도 극복했다.

“그 힘이 내게 전해진 거고.”

모산혈조는 낮에 약해지는 애매한 흡혈귀보다는 낮과 밤 모두 강한 흡혈귀가 되고 싶어했다.

하나 진조에게 거절당했기에 계승자를 고르는 데 협조했고, 진조가 죽은 뒤에 계승자를 노리는 식으로 자신의 야망을 이루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놈의 계획은 실패했다. 결과적으로는 죽음을 앞당겼고. 그래서 본인이 원한 방식은 아니지만, 억지로 흡혈귀가 되려고 하는 거지.”

그리고 모산혈조의 계획은 운남에서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 그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이 순간에도 목숨을 잃고 있었다.

그때 문 바깥에서 기척이 났다.

똑똑!

“주인님, 완안극입니다.”

“...들어와라.”

허락이 떨어지자 완안극이 조심스러운 태도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허둥지둥 일어나는 백서희를 본 그가 머리를 넙죽 숙였다.

“주모(主母)께서도 계셨군요.”

“흠흠.”

자신을 부르는 호칭에 백서희가 헛기침을 했지만, 입꼬리는 기분 좋게 씰룩거리고 있었다.

완안극의 말이 이어졌다.

“선장이 말하기를 조금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합니다. 조금 있으면 병산입니다.”

금사강은 운남과 사천을 잇는 물길이지만, 계곡이 험하고 물살도 빨라서 상류까지 지나기는 무리였다.

“허락해주신다면 속하가 길을 안내하고 싶습니다. 운남은 여러 번 왕래해서 길을 잘 알고 있거든요.”

“...원한다면.”

“옙!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안색이 환해져서 황송해하는 완안극의 모습에 강엽은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솔직히 좀 불편한데....’

완안극의 입장이 불분명할 때야 말을 놔도 상관없었지만 그의 나이는 자신보다 훨씬 많았다.

본인은 개의치 않는다지만 나이 많은 사람에게 말을 놓는 게 그리 편한 심정은 아니었다.

‘방법이 없지. 본인이 이러기를 극구 원하는데.’

게다가 진실된 정체가 뭐든 완안극은 이제 막 열다섯을 넘은 소년으로 보일 뿐이었다.

하인을 자처하는 소년에게 일일이 공대를 쓰면 바깥 사람들이 수상히 여기지 않겠는가?

...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해봤지만 영 껄쩍지근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백서희는 완안극을 함부로 대하기가 좀 그런지 꼬박꼬박 공대하고 있었다.

“완 노사님은 점창파하고도 만나봤나요?”

“몇 번 만나봤습니다. 그리 유쾌한 만남은 아니었습니다만....”

완안극이 쓴웃음을 흘렸다.

독곡이 폐쇄적인 문파이기는 해도 모든 독을 내부에서 자급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독물이 독곡 주변에서만 서식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끔씩은 외부로 나가야 할 때도 있었고, 다른 문파와 시비가 붙을 때도 있었다.

“점창파와는 사사건건 많이 부딪쳤지요. 대강 기억나는 것만 해도 열 건은 넘습니다.”

“부딪칠 구석이 있었어요?”

점창파가 당문처럼 독을 다루는 문파도 아니고, 독물의 소유권을 놓고 다투진 않았을 것 아닌가?

완안극이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원인이야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주로 놈들의 속가를 자처하는 부족들 때문이었습니다.”

부족들이 모두 무공만 단련하는 건 아니다. 치료나 사냥, 혹은 술법을 위해 독을 구하는 자들도 많았다.

“그들은 자기네 땅에서 독물을 채집한다고 독곡의 무인들을 적대했지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주인 없는 땅이었습니다. 땅문서도 없지 않습니까?”

부족들끼리야 관례적으로 영토를 인정하지만 외부인의 관점에선 주인 없는 땅인 것이다.

“저희도 문제를 일으키고 싶진 않아서 대부분의 경우엔 재물을 주고 해결했지만, 간혹 말이 안 통하는 부족들도 있어서요. 그땐 몰래 들어가거나 무력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자의 경우엔 점창파가 나서기도 했습니다.”

완안극 역시 곡주의 지위에 오르기 전엔 운남 곳곳을 들쑤시며 독물을 채집했던 시절이 있던 만큼 운남 지리는 빠삭했다.

“단언컨대 척준경인지 척무경인지 하는 점창의 제자는 속하의 발끝도 따라오지 못합니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백서희가 강엽을 돌아보며 눈을 반짝였다.

강엽이 턱을 긁으며 말했다.

“...우리끼리 가는 것도 아니고 현운 도장과 만나기로 했으니까. 점창파의 협조를 얻으려면 척무경이 필요하니 일단은 합류해야지.”

완안극이 아쉬운 기색을 내비쳤지만 강엽의 결정에 반대를 표하진 않았다.

그렇게 배에서 내린 일행은 남하를 개시했다.

* * *

물줄기를 따라 쭉 내려가면 됐기에 방향을 헷갈릴 일은 없었다. 일행 모두 고수인 만큼 깊고 험준한 협곡도 수월하게 넘을 수 있었던 것이다.

“흑무암쇄진은 어떻지?”

“훌륭합니다!”

완안극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강엽에 의해 완전한 흡혈귀가 되고 난 뒤 그는 안정적인 재생력을 얻은 대신 태양에 저항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삼화취정에 오른 만큼 피부가 타는 꼴은 면했지만 무공을 전혀 못 쓰는 것이다.

그렇다고 흑무암쇄진을 전수하기엔, 완안극이 술법에 문외한이었기 때문에 난항이 따랐다.

그러나 강엽은 한 방에 이 문제를 해결했다.

흑룡비환을 빌려준 것이다.

술법을 내장하는 흑룡비환은 굳이 술사가 아니어도 안에 든 술법을 발동시킬 수 있다. 검은 안개를 둘러싼 완안극은 그때부터 낮에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반면 강엽은 흑무암쇄진을 쓰지 않고 온전히 모습을 드러낸 채 경공을 쓰고 있었다.

‘그나마 일곱 번째 능력이 통해서 다행이지.’

피부가 바늘로 찌르듯이 따가운 건 매한가지지만, 이전처럼 완전히 무력화되진 않았다.

‘아직은 삼 할의 공력이 한계지만....’

고수들의 피를 마시고 혈공진기의 화후가 깊어진다면 십 할의 공력을 모두 쓸 수 있으리라.

또한 백서희 역시 밤낮으로 전륜구룡공을 수련하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아, 이거 쉽지 않네.”

백서희가 입맛을 다셨다.

어젯밤 전륜구룡공이 칠성의 경지에 올랐음을 확인한 그녀는 시험 삼아 향로에 도전했다.

“어디까지 가봤는데?”

“음, 강시놈들이 떼로 나오는 건 어떻게든 돌파했어. 그다음이 문제인데....”

“흑도객 세 명?”

“지랄맞게 강하더라.”

수련자의 정신 건강을 염려한 건지 안쪽에서 죽어도 고통은 그리 심하지 않았지만, 칼날이 목을 파고드는 감각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랐다.

“한 명은 수월하게 이길 것 같고, 두 명까진 그럭저럭 싸울 것 같은데, 세 명은 영....”

전원이 그녀와 같은 경지의 고수들이었기 때문에 세 명을 한꺼번에 감당하는 건 무리였다.

심지어 마구잡이로 싸우는 게 아니라 정교한 합격진을 그리면서 궁지로 몰았던 것이다.

“거기를 돌파하면 삼화취정의 고수와 싸운다. 바로 구천호법이 튀어나와.”

“켁, 어쩐지....”

질린 기색을 드러낸 백서희가 곧 표정을 바꾸고 흠흠 헛기침을 했다.

“그래도 성과가 없진 않아. 빌어먹을 조상님이지만 성능은 확실하더라고.”

그녀가 검을 빼들자 그 위로 검푸른 화염이 타올랐다.

한편에서 두 사람을 보고 있던 완안극의 눈에 놀란 감정이 여실히 떠올랐다.

“검강...?”

물론 그 역시 지고한 경지에 오른 만큼 고작 검강 때문에 놀란 것은 아니었다.

진짜로 놀란 이유는 삼화취정에 오르지도 못한 백서희가 검강을 매우 안정적으로 운용하기 때문이었다.

“흑룡교주의 무공이라고 해도 그렇지, 완전히 상식을 벗어나는군요. 대체 어떻게...!”

“전륜구룡공 때문만은 아니겠지.”

강엽 역시 백무량에게 이것저것 받아먹은 게 많은 만큼 백서희가 무얼 받았는지 짐작하고 있었다.

“내공은 삼십 년 가량 늘어났고, 근골과 신경이 말도 안 되게 튼튼해졌어. 경맥도 그렇지?”

“맞아. 그리고 수류의 능력도 몇 배로 강해졌어.”

이미 전륜구룡공이 육성의 경지에 올라 수류의 능력을 손에 넣은 그녀는 새로운 능력을 받는 대신, 기존의 능력이 더욱 성장했다.

‘검강을 깨우쳤다면 혹시....’

순간적으로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가능성.

강엽은 바로 시험해보기로 했다.

“잠깐 나 좀 봐라.”

“응?”

아무 의심도 없이 고개를 돌리는 백서희를 향해 강엽은 약하게 격공장을 흘려보내봤다.

맞는다고 아프지도 않고, 그냥 툭 치는 느낌이 들 정도로만 살짝.

“엇?! 뭐야?”

피격 직전 백서희는 어깨를 틀며 격공을 피했다.

완안극도 그 사실을 알아보고 나직이 감탄했다.

“기감도 발달하셨군요. 격공의 조짐을 사전에 알고 반응하다니... 삼화취정을 정말 목전에 두셨습니다.”

“그, 그래요? 그것까진 몰랐는데....”

쑥스럽게 웃은 백서희가 강엽과 눈이 마주치자 혀를 빼꼼 내밀었다. 강엽은 설핏 웃었다.

‘용혈(龍血)의 일족이라고 했지.’

진조가 말해준 백무량의 정체.

예사란이 가루라의 영성을 타고났듯 백무량은 용의 영성을 강하게 물려받은 괴력난신이었다.

진조가 활동했을 시절만 해도 요마니 영수니 하는 인외의 것들이 살았다고 했던가.

-삼장이라는 승려가 요괴들을 데리고 멀리 천축까지 간 이야기는 알고 있겠지? 거기 나오는 요괴들이 대부분 과거에 실존했던 놈들이다.

개중엔 인간과 결합한 영수의 피를 물려받은 후예들이 있었고, 백무량 역시 그중 한 명이었다.

-물론 이 시대엔 존재하지 않지. 짐의 일용한 양식이 되었으니까 말이다.

진조 일행이 사냥했던 사마외도들 중엔 세상에 해악을 끼쳤던 요마와 영수들도 있었던 것이다.

‘전륜구룡공을 창안하고, 향로를 만든 것도 따지고 보면 용의 핏줄을 세세토록 물려주려는 이유고.’

세월이 지나면 선조의 피는 옅어질 수밖에 없다. 먼 훗날을 우려한 백무량은 자신의 심상을 이용해서 피에 깃든 용혈을 깨우려고 한 것이다.

그렇게 교주들을 통해 대대손손 전해진 용혈이 백서희를 통해 다시 한번 깨어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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