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쾌남 (4)
“이봐, 날 까먹은 건 아니겠지?”
허공에서 공중제비를 하며 가볍게 착지한 사내.
강엽의 시선이 향하자 정무악이 희끗희끗한 수염을 만지며 웃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네 혼자서만 싸우도록 내버려둘 순 없지 않나. 아우들 복수도 해줘야 하고.”
“아우?”
“저기 있는 녀석들 말이야.”
살아남은 이들이 옹기종기 모인 완만한 언덕.
그쪽으로 시선을 힐끔 준 강엽은 낭인들 사이에서 어디선가 한 번 본 얼굴을 발견하고 고개를 주억였다.
“당신을 따르는 낭인들 말이군. 저기 있는 자는 일전에 당문에서 만난 적 있다.”
“아, 잔섬 녀석? 자네와 한바탕 했다고 듣긴 했네.”
“한바탕?”
강엽이 실소했다. 일방적으로 처맞았다고 하긴 쪽팔렸던 걸까?
정무악도 웃으면서 고개를 살살 저었다.
“뭐, 자네를 이기진 못했겠지. 그래도 사내 새끼 자존심을 박살내서 뭐 하겠나. 때론 알면서도 모른 척 해줘야지.”
강엽은 잔섬이 먼저 시비를 털었다고 말할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굳이 끄집어낼 얘기도 아니었다.
“그래서 어느 쪽을 맡을 거지?”
“저 꼬맹이 녀석을 맡고 싶은데.”
“저놈은 내 먹잇감이다.”
“내 부하들을 죽인 놈일세.”
“원수를 갚을 기회는 주지. 하지만 그전에 알아볼 게 있어.”
“그게 뭔가?”
“잡아다 실험을 해볼 생각이다.”
마치 점심에 뭘 먹을지 말하는 듯 태연자약한 음색.
그러나 묘한 학구열이 느껴지는 대답에 정무악은 떨떠름해졌다.
“예전에 미친 독인이 무고한 사람들 잡아다가 실험하는 걸 봤었는데... 자네도 그런 부류는 아니지?”
“날 뭘로 보는 거냐.”
“으음, 내가 실언했군. 미안하....”
“난 무고한 사람들로는 실험하지 않는다.”
“...무고하지 않으면 괜찮고?”
“그럼 동의한 걸로 알고 먼저 실례하지.”
“엇!? 잠깐...!”
정무악이 붙잡을세라 재빨리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강엽의 신형.
[괴물들 시체는 온전히 남겨두도록.]
귓가에 아른거리는 전음에 대략 벙찐 정무악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
“아니, 이 친구야! 난 동의하지 않았다고!”
그러나 처량한 항의는 허망하게 스러질 뿐이었다.
이미 괴물들을 넘어간 강엽은 핏빛 갑주로 무장한 소년을 향해 짓쳐들고 있었던 것이다.
“......!”
강엽이 오는 걸 알았는지 얼굴을 감싼 투구에서 짐승의 울부짖는 소리가 낮게 깔린다.
휘이익!
발작하듯 휘두른 일권을 따라 노도처럼 몰아치는 검붉은 기운.
그러나 강엽을 둘러싼 벼락을 침범하기는커녕, 오히려 뇌기를 두른 손날을 맞고 두 쪽으로 갈라졌다.
바로 그 시점에서 발을 기묘하게 놀리며 자세를 뒤집은 강엽이 어깨를 내밀었다.
종아리 비복근에서부터 끌어올린 발경 경파가 붉은 흉갑을 강타,
꽈아아아아앙!
갑주가 깨질 만큼 묵직한 충격을 선사하며 소년을 훨훨 날려보낸다.
“이익...!”
형편없이 내동댕이쳐진 끝에 간신히 자세를 수습한 소년이 이를 빠득 갈며 고개를 드는 찰나.
“이 갈면 늙어서 고생한다.”
빠각!
또다시 암신으로 소년을 붙잡은 강엽이 투구 위쪽을 붙잡고 강력한 슬격을 먹였다.
안면 일부가 후두둑 떨어지며 드러난 피에 절은 얼굴이 강엽을 보며 살광을 불태웠다.
코뼈가 주저앉고 앞니가 부러지는 상처조차 원래대로 돌아온다.
투구 뒤쪽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머리 여럿 달린 이무기처럼 강엽을 노리고 달려드는 순간.
멀찍이서 날아온 자색 보검이 머리카락을 베고 강엽의 수중에 잡혔다.
파지지지직...!
하얗게 타오르는 뇌기에 휩싸여 길쭉한 광검으로 화한 자성검이 어깻죽지의 혈갑을 베어낸다.
그러나 소년도 순순히 당해주진 않았다. 혈갑이 부풀어오르듯 커지더니 막강한 반탄지력을 토해낸 것.
“그어어어어어어...!”
불쑥 커진 승모근 위로 핏빛 강기로 만든 팔이 일어나서, 자성검의 검면을 후려쳤다.
악력이라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강엽도 손아귀가 찢어질 만큼 강한 괴력.
그러나 핏방울이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재생한 강엽은 유려하게 신형을 돌렸다.
빛살로 승화한 검격이 혈수를 친다. 혈기와 뇌기가 격돌하는 충격. 동심원처럼 너울진 충격파가 모래자갈을 날려버렸다.
삼 장 뒤편으로 밀려난 강엽은 그보다 훨씬 긴 거리를 늘어난 머리카락을 절묘하게 낚아챘다.
“꽤 빨리 자라는걸. 머리카락만 팔아도 굶어죽을 일은 없겠는데?”
“캬악-!”
대답 대신 괴성을 토하며 몸부림리는 소년.
강엽에게 잡힌 머리카락을 통해 은밀한 암경이 침투,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머리카락을 무기로 쓴 게 패착이었다.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고 만사형통은 아니야.”
무림 고수라도 머리카락을 무기로 써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아마 소년이 특별한 무공을 익혔기에 모근으로 진기를 보낼 수 있는 것이겠지.
하지만 적에게 머리카락이 잡힐 경우엔 양날의 검처럼 작용한다.
뿌드드득!
억지로 몸을 비틀며 머리카락을 송두리째 뽑아낸 소년이 거리를 벌렸다.
강엽을 노려보는 눈엔 실로 살벌한 안광이 일렁거렸지만, 그 이전에 짙은 두려움이 묻어났다.
‘종합적으로 보면 교성과도 싸울 만해.’
낮에도 활동할 수 있는 데다 재생력도 강엽과 맞먹을 만큼 준수하다.
그걸 감안하면 훨씬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신녀와는 달리 말을 못한다는 건데... 돌이켜보면 신녀도 원래는 백치였지.’
암시장에서 싸운 혈교의 신녀. 스스로 불괴강시가 되었던 그녀도 처음엔 이지를 잃지 않았던가.
흡혈귀의 피를 먹고 이지를 되찾은 그녀처럼 이 소년도 피를 먹는다면 이지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러면 더 상대하기 골치 아픈 만큼 일단은 제압이 우선이었다.
-태극반 괴뢰무경(太極反 傀儡舞境).
진기에 담은 의념을 따라 움직이는 모래. 거대한 모래사장 한복판에 돌고 도는 나선의 폭풍이 일대를 감싸고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한다.
“크륵...!”
심상치 않은 기세를 느낀 건지, 짐승처럼 자세를 낮춘 소년이 허둥댔다.
그래도 학습능력이 없는 건 아닌지 성급하게 머리카락을 휘두르는 대신 박투전을 노리고 몸을 날렸지만,
“크헥!”
채 열 걸음을 내딛기도 전에 맨땅에 안면을 처박았다.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안간힘을 쓰지만, 그럴수록 관절은 제멋대로 꼬여서 제 스스로를 속박할 뿐.
휘우우우우우웅...!
속절없이 무너지는 꼬락서니. 그럼에도 소년은 강기의 혈수를 땅에 박으면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으으... 으아아아아아아!”
실핏줄이 터진 눈으로 강엽을 노려보며 서서히 몸을 일으킨다.
억지로 움직일 때마다 뼈가 갈라지고 근육이 압착되면서 피를 쥐어짜나, 그 안쪽에서 새살이 돋아나며 점차 기형적인 몰골로 변해갔다.
핏빛 갑주와 뭉개진 살점, 긴 머리카락이 뒤섞인 채 혐오스러워진 형상이 된 저걸 뭐라고 불러야 할까.
초음의 파동을 통해서 그 모든 변화를 지켜본 강엽은, 소년의 진기가 폭주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맙소사, 저거 그 꼬맹이인가?”
그때 강엽의 옆에 온 정무악이 경악성을 드러냈다.
강엽은 괴물들의 피를 뒤집어쓴 듯 온몸이 붉게 물든 그를 곁눈질하며 짧게 물었다.
“괴물들은?”
“모두 죽였네. 자네 말대로 최대한 시체를 온전하게 남겨두려고 처음엔 점혈을 했는데... 전혀 안 통하더군. 혈도가 있긴 한 건지 모르겠어.”
“뒤틀린 과정에서 바뀐 거겠지.”
“...뒤틀려?”
강엽이 괴물이 된 소년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자세히 알려면 해부를 해봐야겠지만... 계속 재생하면서 뭔가 문제가 발생한 거다.”
“주화입마인가...!”
“그 정도가 아니야. 정기신이 한꺼번에 무너졌어.”
놀랍게도 소년은 삼화취정에 이르렀다. 한데 재생과 파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기신의 균형이 무너졌다.
‘제 스스로 경혈을 다스리지 못하는군. 그 때문에 진기가 제멋대로 날뛰고 있고.’
그 원인이 조금 전 그가 발한 ‘태극반 괴뢰무경’이라는 것은 명확했다.
태극의 심상과 외기를 동조해서 상대의 운신을 억제하는 신법.
단순히 힘으로 옥죄는 게 아니라 태극의 흐름을 이용해서 상대의 근골과 신경에 간섭하는 무공이다.
저항하면 할수록 근골이 비틀리면서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인해 다치게 되지만, 소년은 재생력을 믿고 우격다짐으로 저항했던 것이다.
‘그래도 이런 결말을 맞이할 줄은 몰랐는데....’
태양 아래에서도 멀쩡한 것과는 별개로 너무도 불안정한 재생력.
지난날 필사적으로 싸운 끝에 간신히 쓰러트렸던 혈교의 신녀와 비교하면 지나치게 뒤떨어졌다.
“...설마 그 이전의 실험작이었나?”
“그건 무슨 말인가?”
“설명은 나중에. 그보다 저놈을 제압하는 게 먼저야.”
“허, 저런 지경이 됐는데도 안 죽이겠다고?”
괴물이 된 소년을 보고서도 목적을 우선시하는 태도에 정무악은 질린 표정을 지었다.
“...정 안 된다면 죽여야겠지만, 살려놔야 더 많은 정보를 뽑아낼 수 있으니까.”
어쩌면 태양에 저항하는 능력과 불안정한 재생력 사이에 상관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걸 알아낼 수 있다면 태양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키에에에에에에......!]
괴물이 된 흡혈귀가 포효했다.
* * *
과연 저걸 뭐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확실하군.”
정무악이 침음하듯 중얼거렸다.
“저건 내가 아는 그 어떤 짐승과도 닮지 않았네.”
곱추처럼 구붓하게 휘어진 등과 사슴처럼 길쭉한 목, 짐승처럼 역으로 꺾인 사지의 관절.
안면은 길게 자라났고, 크게 찢어진 아가리는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몇 겹으로 돋아났다.
심지어 본래 사람에게 없는 꼬리와 전신을 뒤덮는 붉은 비늘까지....
“굳이 말하면 뱀과 사람을 반쯤 섞어둔 것 같군.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할 때 뱀왕이 사십구일 간 석가모니를 비바람으로부터 지켜줬다고 하던데.”
“저 괴물놈이 부처를 호위한 호법룡(護法龍)이라고?”
“그냥 닮았다는 거다. 오히려 호법룡보다는....”
강엽이 말을 줄이는 그때, 두 사람을 노려보던 괴물이 진녹색의 독액을 웨엑 토해냈다.
멀리서도 확연히 느껴질 만큼 지독한 기운에 강엽이 차갑게 말했다.
“독룡(毒龍)에 가깝겠지.”
[키아아아아아-!]
괴물이 포효하는 것과 동시에 운신을 막았던 태극반의 기파가 종잇장처럼 찢어발겨졌다.
그 피해를 몸으로 감당한 강엽이 은은히 기혈을 울리는 격통에 눈살을 찌푸릴 때, 정무악이 한 발 앞서며 바위처럼 굴강한 팔을 들어올렸다.
“어쨌든 저게 풀려나면 무림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큰 피해를 끼치겠군. 여기서 막아야겠어.”
직후 무지막지한 격공의 폭풍이 괴물의 전신을 강타, 놈을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한차례 새된 비명을 지른 괴물이 두 팔로 상체와 머리를 가리며 장강을 향해 돌진했다.
손톱과 발톱 사이에 얇은 갈퀴가 달린 걸로 봐선 물 속을 자유롭게 헤엄칠 수도 있을 터.
“안 되지. 도망가게 두진 않겠다.”
강엽의 말과 함께 괴물이 뛰어들려던 물이 나선으로 휘어졌다.
뻐어엉-!
갑자기 튀어나온 물대포에 맞은 괴물이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그 순간 괴물의 대가리를 강타하는 정무악의 족격.
두개골이 부러졌음에도 괴물은 정무악의 다리를 잡아챘다.
압도적인 악력에 정무악이 이를 꽉 물었다.
“이놈 힘이 장난이 아니...!”
콰앙!
말을 끝낼 새도 없이 땅에 처박혔다.
쾅! 콰앙! 콰앙!
그것도 연달아서.
[우오오오오!]
탁한 독액을 줄줄이 흘려낸 괴물이 노릿한 눈동자를 둥글게 말았다.
마치 넌 안 된다고 조소하는 듯한 눈빛.
하지만 그 눈빛이 경악으로 바뀌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둔중한 폭음과 함께 괴물의 상반신 절반에 비대한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정무악이 괴물의 대가리를 잡고 권강에 휩싸인 호쾌한 일격을 내질렀다.
“우랴아아아압!”
그리고 괴물의 꼬리를 맞고 나가떨어졌다.
[크르르륵...!]
어느덧 재생이 끝난 괴물이 아가리를 벌렸다.
독기가 섞인 기파가 일대를 강타, 부채꼴의 형상으로 지면을 휩쓸어버린다. 모래사장 너머에 있던 숲이 독기를 맞고 순식간에 시들어버렸다.
“귀찮은 놈.”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허공을 가득 채운 독기가 내공 호흡을 방해하고 있었다.
‘피독주로도 안 되는 독인가?’
늘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피독주가 새까맣게 변색되더니 표면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재생력 덕분에 독을 걱정할 필요는 없지만, 은근히 귀찮은 것도 사실.
스각! 촤아아악!
[키헥!]
어검술에 의해 다리가 잘린 괴물이 엎어졌으나, 그 다리는 눈 깜짝할 새에 이어진다. 어째 괴물이 되고 나서 재생력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웬만하면 생포하고 싶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정무악의 말마따나 죽이는 게 나을지도....
터엉!
그때 다시 달려든 정무악이 괴물의 아가리에 찰진 일권을 꽂아넣었다.
“으랴아!”
[크아아!]
괴물 역시 포효하며 손톱을 휘두르고 꼬리로 후려쳤지만, 정무악은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때리든 말든, 독을 뿜든 말든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는 피 말리는 근접 백타.
회피 따위는 머릿속에서 지운 듯한 무식한 박투전에 멀리서 지켜보던 강엽도 말문이 막혔다.
‘...그래도 효과가 있긴 한가?’
처맞고 또 처맞고 무한히 처맞는 챗바퀴 같은 지옥에서 괴물이 구슬프게 울었던 것이다.
이윽고 그 몸이 형편없이 쪼그라들고, 소년으로 되돌아가더니 울음기 섞인 애원을 쏟아냈다.
“제, 제발 그만 때려라!”
“...!”
소년의 입에서 처음으로 인간다운 말이 나오자 두 사람 모두 경악했다.
소년이 다시 억울하게 외쳤다.
“나, 난 독곡의 곡주란 말이다, 이 극악무도한 중원 쌍놈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