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쾌남 (3)
쾅! 쾅! 콰앙!
곳곳에서 폭음이 빗발쳤다.
화마가 일대를 휩쓸고 매캐한 연기가 하늘을 가린다.
“이런 썅, 맹월림 이 개새끼들이...!”
“대놓고 화탄을 써? 막나가자는 건가!?”
포구에 집결한 상관세가의 무인들과 낭인전의 낭인들은 목구멍까지 치솟은 욕을 참지 않았다.
더러는 불을 끄려고 급하게 구한 바구니나 물주머니에 강물을 길었지만, 그래봤자 언 발에 오줌 누는 격.
강물의 습기로 인해 눅눅한데도 불구하고 화마는 금세 덩치를 키워 선착장과 선박들을 태우기 시작했다.
“젠장, 거기 낭인들! 어떻게 좀 해봐!”
“하긴 뭘 어떻게 해! 포구는 포기한다! 튀어!”
낭인들이 일찌감치 물러난 데 반면 상관세가의 무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장강을 면한 포구는 그들의 주요한 수입원 중 하나였다.
조급한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지만 맹화유를 삼킨 불길은 손을 쓸 수 있는 단계를 넘어섰다.
그때였다.
“큭큭큭....”
난리통 속에서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린 것은.
상관세가의 무인들이 얼굴을 구겼다.
“이 더러운 새끼들이...!”
“멍청한 놈들! 나라에서 금하는 화기를 썼으니 네놈들은 역도로 몰려 몰살당할 거다!”
상관세가의 무인들이 욕설과 저주를 퍼부었지만 맹월림의 전사는 개의치 않았다.
이미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불길이 옷과 머리카락을 태우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크흐흐, 네놈들은 끝났어. 곧, 괴물들이... 깨어난다.”
죽어가면서도 적들을 비웃었던 맹월림의 전사는 그렇게 온몸에 불이 붙어 숨이 끊겼다.
상관세가의 무인들이 질린 표정을 지었다.
“지독한 놈들. 자기들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하지만 이내 정신을 다잡았다.
적들이 최후의 수단으로 자폭을 택했든 뭘 했든 포구의 불을 끄는 게 급선무였으니까.
그렇게 다시 움직이려 할 때였다.
쿵!
불현듯 지면을 찍어누르는 듯한 둔중한 소성.
“.......”
때마침 장강에서 불어온 오싹한 바람이 등골을 훑고 지나갔다.
욕설을 뱉었던 이들조차 입을 다문 채 불길 저편을 바라보았다.
끼이이이익...! 쿠웅-!
불길에 타버린 돛대가 쓰러지고, 기형적일 만큼 큼지막한 그림자가 화마와 연기를 뚫고 솟구친다.
과연 저것을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괴물...!”
새파랗게 질린 누군가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잿빛의 몸뚱이는 곰처럼 컸고, 핏줄이 불거진 몸엔 종양인지 혹인지 모를 것들이 여럿 달려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예 없거나, 있다 해도 몇 가닥 남지 않아서 휑했다.
마치 녹아버린 촛농처럼 살가죽이 흉하게 흘러내린 몰골.
군데군데 뼈가 드러난 얼굴에선 썩어빠진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다.
살가죽에 달라붙은 불길을 무시하고 비척거린 걸음을 옮긴 괴물들의 모습에, 혐오감과 두려움에 빠진 무인들이 저도 모르게 물러났다.
“물러서지 마라! 놈들의 정체가 뭐든 여기서 무찔러야...!”
호기롭게 외친 상관세가의 무인은 별안간 머리 위를 드리운 그림자를 알아차리고 침을 꿀꺽 삼켰다.
백태가 낀 괴물의 눈알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제기랄..!”
그가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괴물의 손아귀가 그의 머리를 잡아 위로 뽑아버렸다.
“......!”
“조장님!”
산 채로 뽑힌 머리가 척추와 함께 딸려나온다.
죽음에 익숙한 무인들마저 욕지기를 이기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지만, 진짜 충격은 따로 있었다.
콰직!
괴물이 조장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받아먹었던 것이다.
다른 괴물들이 남아있는 시신에 손을 가져가려고 했다.
-크르르...!
원숭이처럼 길쭉한 팔이 손을 뻗은 다른 괴물을 채찍처럼 후려친다.
졸지에 안면을 맞고 쓰러진 괴물이 으르렁거리며 흉성을 드러내자 조장을 죽인 괴물이 포효했다.
-우워어어어어어어!
결국 기싸움에서 진 괴물은 심통이 난 얼굴로 동료 괴물과 조장의 시체를 외면했다.
검은자위 없이 허연 눈알이 눈앞에 가득한 먹잇감들을 훑어본다. 끝없는 탐욕이 넘실거리는 얼굴이 흉측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키아아아아아아아!
다른 괴물들도 호응하듯 아우성을 치며 달려들었다.
한순간에 전열이 뚫리며 아수라장이 벌어졌다.
“정신 차려! 우리가 뚫리면...!”
“아아아악!”
전장을 가로지르는 처절한 비명과 악다구니.
상관세가의 무인들이 잔인하게 도살되는 참상에 낭인들도 다급해졌다.
“후퇴한다! 우리가 감당할 놈들이 아니야!”
말상을 지닌 은천패의 낭인이 소리쳤다.
‘형님께 가야 한다!’
그 역시 절정고수라 불렸지만 당적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하나 진멸신권이라면...!
“크아악!”
“뭣!?”
바로 근처에서 들려온 비명.
급히 방향을 확인하자 바닥까지 끌릴 만큼 긴 머리를 지닌 소년이 한 손에 낭인의 팔을 쥐고 있었다.
가공할 악력으로 뜯어낸 팔을 입으로 가져가며 피를 꿀꺽 빨아마신다.
산발한 머리만 아니었다면 귀공자라 생각했을 만큼 고귀한 용모의 소년이 피로 점철된 모습.
이질적이다 못해 소름끼치는 광경에 전율하면서도 은천패의 낭인은 칼을 내질렀다.
까앙!
쇠끼리 부딪치는 파찰음. 칼날은 소년의 손등을 맞고 튕겨져 나왔다.
“...외공?”
황망하게 중얼거리던 순간, 미역처럼 흐물거린 소년의 머리카락이 예측할 수 없는 궤적으로 뻗어와서 사지와 목을 칭칭 동여맸다.
“으읍!? 커억...!”
“잔섬 형님!”
주변의 낭인들이 달려들었다.
상관세가를 도울 의리는 없어서 내버려뒀지만, 그들이 믿고 따르는 사람까지 모른 척할 순 없었으니까.
잔섬이 비명을 질렀다.
‘오지 마, 이것들아!’
하나 목을 조르는 힘 때문에 비명은 목구멍만 맴돌 뿐이었다.
예리하게 벼려진 머리카락들이 낭인들을 훑고 지나가자 온 사방에 피와 내장조각들이 낭자한다.
눈이 터질 듯이 충혈된 잔섬이 울부짖으면서 입을 막은 머리카락을 질근질근 씹었지만, 혓바닥과 잇몸만 엉망진창이 될 뿐.
그 꼬락서니가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들어올린 소년이 손을 들어 주먹을 움켜쥐는 시늉을 했다.
찰나 날카로운 예기가 그와 잔섬 사이의 공간을 훑고 지나가더니 머리카락들을 썩둑 잘라냈다.
“콜록! 케엑!”
가까스로 구명받은 잔섬이 눈물 콧물을 쏟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혀, 형님.”
넓고 단단한 등이 그를 굳건하게 지켜주고 있었다.
* * *
“빨리 오지 못해 미안하다.”
진멸신권 정무악.
사천의 낭인들을 대표하는 절세고수가 납덩이처럼 굳은 안색으로 사위를 돌아보았다.
깍둑 썰려서 토막이 난 낭인들의 시신과 화마에 휩싸인 선착장, 그리고 정체 모를 괴물들에게 뜯어먹히고 있는 상관세가의 무인들....
“형님! 저것들, 맹월림의 배에서 나왔습니다! 그놈들이 갑자기 화탄을 터뜨리더니 저것들이...!”
“...그러냐.”
아무 이유도 없이 화탄을 터뜨리진 않았을 테고, 폭발의 충격으로 저 괴물들을 깨울 작심이었던 걸까.
바람결에 펄럭이는 갈색 장삼을 벗은 정무악이 소년을 돌아보았다. 잔섬을 죽이지 못했는데도 불구하고 소년은 해맑게 웃고 있었다.
정무악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재밌냐?”
소년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묵직한 격공이 머리통을 인정사정없이 강타한 것이다.
“어리다고 봐주진 않겠다. 속에 든 건 상종 못 할 괴물인 것 같으니까.”
열다섯이나 됐을까. 이만큼 어린 나이에 절정고수를 가지고 놀 만큼 강한 게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정무악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놈들의 정체가 무엇이든 일단 두들겨팬 다음에 생각해볼 일.
“....”
입가로 흘러나온 피를 대충 닦은 소년이 얼굴을 찌푸렸다. 잘린 머리카락들이 도로 자라나며 사방으로 펄럭거린다.
발끝으로 땅을 툭툭 친 소년의 신형이 사라졌다.
투아앙!
포탄처럼 날아와서 강하게 걷어찬다. 파공성이 일기 전부터 면전에 도달한 쾌속한 족격.
정무악은 당황하지 않았다. 족격은 한 치 앞에서 손바닥에 막혔다. 용천혈에 어린 무지막지한 경파가 산들바람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소년의 눈이 놀람의 감정을 품고 크게 뜨이는 순간.
강한 악력이 소년의 발목을 잡고 맨바닥에 패대기쳤다. 돌부리가 깨지고 바닥이 갈라지는 충격이 지면을 타고 선착장까지 내달렸다.
콰아아아아아아......!
무채색의 충격파가 일대를 훑는다.
-크르럭...!
포식에 여념이 없던 괴물들도 그에 담긴 힘을 느낀 듯 몸을 웅크렸다.
장대한 사자후가 허공을 강타했다.
“전부 내 뒤로 와라!”
소속을 구분하지 않는 말. 상관세가의 무인들과 낭인전의 낭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정무악의 뒤로 도망쳤다.
“형님! 저희도 돕겠습니다!”
잔섬을 비롯한 낭인들이 전의를 불태웠으나 정무악은 대답하지 않았다.
키득거리는 웃음과 함께 소년이 일어나고 있었다.
“맙소사...!”
박살난 등뼈와 곤죽이 된 내장이 다시 소년의 몸 안에 수습되는 광경에 다들 혼비백산한다.
정무악도 침음했다.
“재생의 공능을 지닌 마공인가.”
하지만 그걸 감안해도 너무 빨리 회복한다.
이만하면 불사의 공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수준 아닌가.
붉게 물든 소년의 눈이 전장을 훑은 순간, 보이지 않는 손이 현신해서 흙바닥에 고인 핏물을 퍼올렸다.
“허, 내가 그냥 보고만 있겠나?”
바로 격공을 쳐서 피를 운반하는 힘을 와해시켰다.
못마땅하는 듯이 미간을 찌푸린 소년을 향해 섬전처럼 쇄도했다.
앞서 당랑산군을 죽일 뻔한 일권.
이전처럼 타인의 방해로 무산되는 일 없이 온전히 전개되었다. 소년이 찰나에 세운 머리카락의 벽은 무력하게 분쇄되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대지를 가로지른 깊고 넓은 고랑.
소년을 삼킨 빛기둥은 저 멀리 포구까지 뻗어나갔다.
선착장을 불사르는 화마 한복판에 거대한 구멍이 뚫리고, 장강의 표면까지 둥글게 파이는 장관.
“와아아아아아아!”
용기백배한 낭인들이 함성을 지르고, 상관세가의 무인들도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절세고수라더니 과연!”
“낭왕의 후계자로 불릴 만하군. 명불허전이 아닌가.”
그러나 정무악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걸 맞았는데도....”
빛기둥에 휩쓸린 소년이 꺼진 불길 위로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옷은 가루가 되어 알몸이 훤히 드러났지만, 정작 그 몸엔 아무런 상처도 없는 마당.
더하여 전장에 고여있는 피웅덩이에서 점점이 올라온 핏방울들이 소년을 감싸기 시작했다.
빈틈없이 몸을 감싼 핏덩이는 질감을 갖춘 것처럼 단단히 응고되었다.
-혈정호신갑(血精護身鉀).
핏빛 투구 뒤로 긴 머리카락을 나부끼는 혈갑의 악귀.
그때 소년이 깜짝 놀란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그 시선을 쫓아간 정무악이 연기 속에 있는 남자를 보고 이채를 띠었다.
“귀영?”
아까는 검은 안개를 두르고 있었기에 진짜 얼굴은 처음 본다.
왜 지금은 안개를 풀고 나온 걸까.
정무악의 내면에서 그러한 의문이 샘솟았지만, 그 생각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강엽을 본 소년이 주춤주춤 물러나고 있었던 것이다.
투구로 얼굴을 가렸기 때문에 표정을 알아볼 순 없었지만, 한눈에 봐도 짙은 두려움이 묻어나는 기색.
아니, 소년뿐만 아니라 역겹게 새긴 괴물들도 단단히 겁에 질린 눈초리였다.
하늘을 가득 메운 검은 연기를 곁눈으로 올려다본 강엽이 고개를 내렸다.
회색 괴물들과 온몸에 핏빛 갑주를 두른 소년을 번갈아돌아본 그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뭔 새로운 혼종을....”
화마로 인한 연기가 하늘을 가리긴 해도 전력을 발휘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다.
한데 소년은 물론 흡혈귀인지 뭔지 모를 괴물들까지 햇볕 아래에서 멀쩡히 싸우고 있는 게 아닌가.
삼화취정에 이르고서도 아직 태양을 완벽하게 극복하지 못한 강엽으로선 위화감이 드는 광경.
혹시 놈들의 피에 뭔가 다른 공능이 있는 걸까.
“잡아다 확인해보면 알겠지.”
-흑무암쇄진 산개.
거뭇한 연기가 하늘 전체를 뒤덮을 기세로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다.
온 사방에 야음처럼 어두운 그늘이 드리우고,
-뇌벽.
붉게 명멸하는 벼락이, 고점을 넘어 새하얗게 타오르면서 강엽의 전신을 물샐 틈 없이 에워쌌다.
“어디 얼마나 재생력이 뛰어난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