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58화 (255/450)

48화. 유품 (1)

정주에서 서안을 거쳐 성도까지.

자그마치 삼천오백 리가 넘는 거리. 뱃길을 이용해도 대륙의 절반을 가로지르는 긴 여정이었다.

평범하게 갔다면 한 달은 걸렸을 테지만, 서둘렀던 두 사람은 스무 날 만에 도착했다.

“아으, 배에만 있었더니 진짜 지긋지긋하네.”

백서희가 찌뿌둥한 몸을 쭉 폈다.

배를 타는 것도 며칠이지, 스무 날 내내 배만 탔더니 없던 배멀미까지 생기는 기분이었다.

잠시 팔다리를 주무른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침상 위에 가부좌를 튼 강엽이 양손을 낮게 들어올린 자세로 앞을 노려보고 있었다.

손바닥과 조금 떨어진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고 있는 자성검.

온 신경을 집중하자 턱선을 따라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어검술을 유지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집중력을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부럽게 바라보던 그녀는 자성검이 내려오자 얼른 물었다.

“그때처럼 잘 되진 않는 거야?”

“쉽지 않아.”

처음 어검술을 펼쳤을 때.

교주의 심상을 흡수한 이후엔 마치 높은 곳으로 도약하는 것 같았다.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고양감이 들끓었고, 실제로 지고한 경지로 여겨졌던 어검술을 완벽하게 펼치기까지 했다.

“감각은 선명한데... 그때만큼 잘 되진 않는군. 닿을 듯 말 듯한 기분이야.”

물체를 움직이는 허공섭물하고도 다른 느낌이었다.

손을 쓰지 않고도 물건을 움직이는 면에선 같지만, 허공섭물과는 달리 어검술엔 영성이 깃들었다.

격공이나 허공섭물이 기감의 선을 따라 공력을 보내는 느낌이라면 어검술은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갔다.

‘공력만 보내는 게 아니라 상단전의 영성을 함께 보내는 느낌... 이걸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수어검이니 목어검이니 나뉘는 거겠지.’

지금도 눈을 감으면 그때의 감각이 선명한데, 따라하려고 하면 이상하게 잘 닿지 않는 느낌.

손짓을 따라 검을 움직이는 수어검이 한계였다.

“...역시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나.”

휘리릭... 퍼억!

저 스스로 움직인 자성검이 벽에 박혔다.

강엽이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자 백서희가 기막히다는 얼굴로 이마를 감쌌다.

“맙소사, 어검술을 쓰는데도 불만이라니. 검강도 못 쓰는 사람은 서러워서 어떻게 살라고.”

“...영약을 복용하면 좀 낫지 않을까?”

말꼬리가 의문으로 끝난 건 강엽도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양질의 영약을 복용하면 기감이 확장되지만, 그렇다고 바로 무공이 상승하는 건 아니니까.

‘중단전을 완성했으니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상단전을 개통할 수 있을 텐데....’

중단전에 품은 심상. 백서희의 마음속엔 한 마리 비조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녀가 어째서 그러한 심상을 품었는지 짐작한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과거를 속박하는 족쇄에서 풀려나고 싶다는 열망이 그러한 심상을 그린 게 아닐까.

“음, 영약이라... 내공 문제는 아닌 것 같아. 엄청나게 장기전을 치르는 게 아니면 내공이 부족하다고 느낀 적은 없었거든. 경험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글쎄.”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말해봐. 넌 벽을 넘기 전부터 격공이니 허공섭물이니 썼잖아.”

“도움이 될지 모르겠는데. 나는 그냥 하다 보니 된 거라서.”

삼화취정의 고수들과 손속을 겨루는 과정에서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던 것이다.

‘진조에게 물려받은 영성 덕을 톡톡히 보기도 했고.’

말하자면 상단전이 깨어날 조짐이 이미 무공을 배우기 전부터 갖추어져 있던 셈.

강엽은 가루라의 화신이었던 예사란이나 초대 광명마교주도 비슷할 거라 추측했다.

거대한 영성을 타고났기에 삼화취정은 물론, 그 너머까지 엿볼 자질이 주어진 것이리라.

백서희가 입술을 삐죽였다.

“재능 없는 사람은 진짜 서럽네.”

그러나 질투하지는 않았다.

강엽이 그 재능을 얻은 대가로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사실 재능이 없다는 것도 강엽과 비교해서 그런 거지, 고작 스물넷의 나이에 중단전을 완성한 것도 충분히 대단한 재능이었다.

그녀보다 앞서 이 경지를 개척한 자들이 그 말을 들었다면 뒷목을 잡았겠지.

‘그래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강엽은 순간 떠올린 방안을 도로 삼켰다.

아예 방법이 없다면 몰라도, 검증되지 않은 방법을 무턱대고 쓸 수는 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요전부터 백서희가 침울해했기에 어물쩍 넘어가기도 그랬다.

“물방울로 바위를 뚫는 느낌이라고 하더군.”

“응?”

“당 원주가 한 말이다.”

“...아, 당우경 원주님?”

활수명의 당우경. 암시장을 치기 전에 당문을 들렀을 때, 그와 대련을 하고 나서 받은 조언이었다.

백서희가 멍하니 중얼거렸다.

“물방울로 바위를 뚫는다....”

액면 그대로 들으면 요령 따윈 없으니 인내심을 가지라는 말 같았다.

그러나 백서희는 무언가를 느꼈는지 사색에 잠긴 기색을 띠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그녀를 뒤로한 강엽은 조용히 벽에 박힌 자성검을 회수했다.

* * *

낭인전 성도 분타.

강엽이 사천에서 제법 오래 낭인 노릇을 하면서도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곳이었다.

‘평범한 낭인이었다면 은패 시험 때문에라도 한 번쯤 들렀을 텐데.’

성도 분타는 사천 전역의 낭인전 분타를 총괄하며, 은패 시험을 주관하는 역할도 맡고 있었다.

다만 강엽은 비정상적으로 빠른 성장과 낭왕의 호의 등 여러 요인들이 겹치는 바람에 성도 분타에 들르는 일도 없이 단숨에 금패에 올랐다. 때문에 성도 분타에 방문한 것은 이번이 처음인 셈.

이제 와서 찾아온 것은 이곳 성도 분타의 지하실에 볼일이 있어서였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설마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는걸.”

“...능정각.”

금파검 능정각.

성도 분타가 간판으로 내세우는 금패급 낭인이 등불을 들고 어두운 지하실에 들어왔다.

주변을 가득 채운 서가를 둘러본 능정각이 탁자 위에 놓인 책들을 보고 눈을 반짝였다.

“무공 서적이 아니군. 운남 무림에 대한 기록이라... 맹월림에 대해 알아보려고 온 건가?”

낭인전의 무고엔 무공 서적뿐만 아니라 강호의 소문이나 비사를 기록한 서적들도 꽤 많았다.

동패무고에 보관된 서적은 이미 널리 알려진 지식이나 근거도 없는 뜬소문 등 별 영양가 없는 일화만 소개했지만, 은패무고의 서적에 적힌 정보는 그래도 꽤 정확했다.

전부 다 맞진 않아도 허무맹랑한 거짓부렁을 적어놓진 않은 것이다.

“운남 무림은 점창파 빼고는 알려진 게 서의 없어. 끽해야 좀 강성한 부족의 무공 정도? 그것도 점창파의 영향을 짙게 받았지.”

“그쪽에 대해 잘 아나 보군.”

강엽이 책을 덮고 묻자 능정각이 어깨를 으쓱였다.

“겉핥기만 아는 수준이지. 예전에 의뢰를 수행하러 몇 번 갔었거든.”

주로 사천 무림에서 활동하는 그였지만, 마땅한 의뢰가 없는 경우엔 성의 경계를 넘어가기도 했다.

“운남은 관부나 조정의 영향이 희미해. 대신 옛 왕조의 후손들이나 강한 부족의 족장들이 토사(土司) 벼슬을 해먹고 있는데, 그들은 전부 점창파의 속가제자야. 점창파의 색채가 그만큼 짙은 거지.”

“그럼 맹월림에 적대적이겠군.”

“원래는 그래야 하는데... 깨끗한 기득권이 얼마나 되겠어. 꼴에 유지랍시고 거들먹거리면서 힘없는 사람들이나 괴롭히는 쓰레기들도 많아.”

맹월림은 그 점을 파고들었다.

권력자들이 점창과 나라를 등에 업고 동족들을 핍박하고 있다면서, 운남의 모든 부족이 하나로 뭉쳐야 그들의 압제를 떨쳐낼 수 있다면서.

“맹월림은 불만을 가진 자들에게 힘을 줬지. 내부에서 권력자들을 무너뜨린 거야.”

당연히 맹월림의 도움을 받은 자들은 충성을 맹세했고, 점창파를 적으로 돌렸다.

“그래도 예전엔 세력이 이렇게까지 크지 않았는데... 지금은 사천땅까지 넘보고 있군.”

능정각의 말에 강엽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말이지?”

“처음 듣나? 소문이 쫙 퍼졌는데?”

“성도에 들어온 지 하루밖에 안 됐어. 그나마 배를 타고 와서 사람들도 거의 만나지 못했고.”

“아, 그럼 못 들을 만하군. 얼마 전에 맹월림 놈들이 대대적으로 량산을 넘었다.”

“.......”

강엽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흑접을 멸문시키고 얼마 후, 하후진이 수행을 떠났다가 맹월림의 전사들과 조우한 적이 있었다.

당시 량산에서 하후진과 싸운 맹월림의 전사들은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도망쳤고, 이후엔 금사강의 뱃길을 따라 노주로 와서 숙정방을 공격하지 않았던가.

한데 그새를 못 참고 다시 량산을 넘은 모양이다.

“그나마 진멸신권이 막아서 다행이지.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젠 눈에 뵈는 게 없는 것 같아.”

능정각과 함께 사천 무림을 대표하는 금패급 낭인.

능정각보다 한 끗발 높은 금지패급 낭인인 진멸신권이라면 맹월림의 예봉을 꺾을 만했다.

‘놈들이 량산을 넘었다면 금사강을 통해 다시 한번 노주를 노릴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단목정을 비롯한 숙정방의 방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무림맹으로 가던 길에 부상으로 이탈한 방도들까지 챙겨야 하는 만큼 시간이 걸렸다.

맹월림이 노주가 무주공산임을 알고 쳐들어온다면 이번에야말로 막을 길이 없을 터.

강엽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지자 능정각도 자연히 입을 다물었다.

“...말해줘서 고맙다. 운남에 가기 전에 노주부터 들러야겠군.”

“으음, 그래. 안 그래도 우리 분타주도 낭인들 모아서 운남에 가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던데... 네가 미리 가서 정리 좀 해놓으면 편하겠지.”

* * *

강엽이 은패무고를 뒤적거리는 동안 백서희도 나름대로 정세를 조사하고 다녔다.

홍가려가 알려준 대로 사천을 담당하는 하오문의 당주와 접촉했던 것.

“다행히 노주는 아직 별 피해가 없는 것 같아. 의빈의 상관세가가 뱃길을 틀어막았다나?”

노주가 뚫리면 의빈도 위험해진다. 숙정방이 흑도 방파여도 상관세가로선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강옂이 고개를 살살 가로저었다.

“그래도 한번 가보긴 해야 해.”

맹월림이 노주를 노리는 까닭은 원활한 보급로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반대로 사천에서도 노주를 통해 병력이나 물자를 보낼 수 있다는 뜻.

“여기 일만 마치면 노주로 가야지.”

강엽이 시선을 들어 대장원의 현판에 걸린 네 글자를 찬찬히 훑어갔다.

-성도전장(成都錢莊).

유이강의 유품이 보관된 곳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이 패의 주인이 맡긴 물건을 찾고 싶소.”

유이강이 맡긴 패. 가늘게 뜬 눈으로 패를 자세히 살펴본 전장 직원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엇, 이건...! 자,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기함한 직원이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고, 얼마 안 있어 후덕한 중년인이 버선발로 달려왔다.

스스로를 총관이라 밝힌 중년인이 급히 물었다.

“헉! 헉! 이 패의 주인이 맞으십니까?”

“그렇소. 혹시 문제가 생긴 거요?”

“아,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다만 이 패는 본장에서도 최고 등급인지라... 혹시 패의 주인이 누군지 확인을 해도 되겠습니까?”

“한중의 유이강 대인이시오.”

“...그렇군요. 확인되었습니다. 유 대인께서는 본장에 물건을 맡기시기 전에, 누가 찾아오든 패만 갖고 있다면 당신의 물건을 돌려주라고 하셨습니다.”

일부러 그런 요청을 하지 않았다면 패만 가져온 걸로는 물건을 돌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전장에선 혹여 패를 도둑맞을 경우를 대비해서 주인의 도장이 찍힌 위임장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게 그분께서 맡기신 겁니다.”

“...향로?”

손바닥보다 약간 큰 청동향로.

관리를 잘해서 녹슬지는 않았지만, 이렇다 할 무늬도 없고 화려한 조각이 달린 것도 아니었다.

하나 유이강이 보관료까지 주면서 하찮은 물건을 맡기지는 않았을 터.

그렇게 향로를 챙기는데, 총관이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두툼한 볼살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았다.

“현물은 이게 전부입니다. 나머지는 본장에 맡겨두신 돈이지요.”

“얼마요?”

“이백만 냥입니다.”

“헉!”

살상을 초월하는 액수에 백서희가 헛바람을 삼켰다. 평범한 사람들은 만져볼 수도 없는 거금이 아닌가?

강엽도 놀라기는 매한가지였다. 지금까지 낭인으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지만, 유이강이 남긴 돈에 비하면 발끝에도 못 미쳤다.

‘몇 대가 놀고 먹어도 되겠어.’

왜 거대한 전장의 총관이 저리 안절부절못하는지 단숨에 이해되었다.

“돈은 전장에 다시 맡기겠소. 다만 유 대인의 이름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맡기고 싶소만.”

총관을 비롯한 전장 직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백만 냥은 그들에게도 엄청난 돈이었다.

“하하하! 이를 말씀입니까! 당연히 되고 말고요! 아, 근데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

“강엽.”

그 말에 총관이 긴가민가한 표정이 되었다. 어디서 들어봤는데 도통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깨닫고는 눈매가 서서히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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