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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57화 (254/450)
  • 47화. 용서 (7)

    후두두두두둑...!

    갑자기 빗발치는 빗줄기.

    마차를 몰고 있던 마부는 피부를 때린 빗방울에 깜짝 놀라 육두문자를 지껄이다, 뒤늦게 마차에 귀빈이 타고 있음을 떠올리고 사과했다.

    “헉, 죄송합니다. 쇤네가 실언을....”

    마부가 슬금슬금 눈치를 봤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정작 마차 안에 타고 있던 강엽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

    마부는 강엽이 자기 말을 못 들었을 거라 생각하여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사실은 조금 달랐다.

    들었지만 딱히 신경 쓰지 않는 것이었다.

    ‘이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검성은 강엽에게 흑룡교도들을 믿을 수 있냐고 물었지만, 사실 그리 큰 의미가 있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흑룡교도들은 행동으로 증명했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검성도 그걸 알기에 자신의 질문을 우문이라고 인정하고 지금까지 고수했던 입장을 바꾼 것이겠지.

    ‘그 자리에서 구체적인 약속을 받지 못한 건 아쉽지만... 그 정도면 충분하겠지.’

    무림맹의 맹방들이 흑룡교도들을 해코지하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 검성의 약속. 그가 강호를 떠나더라도 제자인 옥청선자가 이어받을 것이다.

    그렇게 상념을 이어가기를 한참.

    “...다, 다 왔습니다요.”

    문득 들리는 마부의 말에 강엽이 고개를 들었다.

    마차가 객당의 대문 앞에 멈춰서자마자 마부가 서둘러 나와서 마차의 문을 열어주었다.

    “수고했소.”

    은전 반 냥을 주자 마부의 안색이 밝아졌다.

    그 역시 무림맹에 고용된 몸이지만, 봉급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든 만큼 뒷돈이 큰 힘이 되었던 것이다.

    기실 일이 많은 날엔 봉급보다 이렇게 한 푼 두 푼 모은 뒷돈이 더 많을 정도.

    “살펴가십시오, 공자님!”

    희희낙락하는 마부를 뒤로하고 들어가자 백서희가 수건을 들고 나왔다.

    “밖에 무지하게 비 오더라. 젖진 않았어?”

    “마차 타고 와서 괜찮아.”

    “갔던 일은?”

    “그럭저럭 된 것 같은데.”

    검성과 나눈 대화를 말해주자 백서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럼 잘 해결된 거 아니야?”

    “일단 그렇긴 한데... 다들 몸져누웠으니까. 운남까지 데려가는 건 무리겠지.”

    흑룡교도들을 데려가려는 것은 그들의 힘이 필요해서만은 아니었다.

    한낮에 힘을 쓸 수 없는 강엽의 체질상 흑무암쇄진이 꼭 필요하기 때문.

    물론 흑무암쇄진을 공인받긴 했지만, 광명마교도 아니고 맹월림을 상대하는 데 쓴다면 백도 정파의 인물들이 이상하게 여기지 않겠는가?

    그러나 흑룡교도들이 동행한다면 설령 흑무암쇄진을 써도 그들이 했다고 전가할 수 있었다.

    “뭐, 그렇게 열심히 위장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한데... 정 안 되면 상황 봐가며 써먹어야지.”

    “사천을 통해서 갈 거지?”

    “성도전장에 들러야 하니까.”

    유이강이 남긴 물건을 찾으려면 성도를 경유해야 하니 사천을 통해 운남으로 가야 하리라.

    “언제 출발할 거야?”

    “몸이 나으면 바로. 넉넉잡고 사나흘 내로 출발할 생각이야.”

    “그럼 그전에 약속 잡아야겠네.”

    “약속?”

    “아까 전에 당 소저가 왔거든. 헤어지기 전에 송별회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하던데?”

    “송별회라....”

    “슬쩍 물어봤는데 청수 도장하고 야차마곤 선배뿐만 아니라 다들 척마대에 들어갈 생각인 것 같아.”

    당묘정과 소창후도 척마대에 들어간다는 말이겠지.

    일전에 청수와 얘기를 나누면서 이런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만큼 놀랍지는 않았다.

    백서희가 귀밑머리를 꼬며 말했다.

    “그동안 굵직한 일을 많이 겪어서 그런가. 알고 지낸 지 오래되지 않았는데도 막상 헤어지려니 섭섭하네.”

    언제까지나 동행할 수는 없다.

    다들 사문이 있는 만큼 각자의 입장이 있었으니까. 그걸 자기 마음대로 강요할 수는 없었다.

    “약속 장소는?”

    “너만 괜찮으면 소월루에서 보자고 하더라. 전에 그런 일이 있어서 너만 못 갔잖아?”

    볼일을 끝내고 일행과 합류하러 가던 중에 황보진악과 시비가 붙어 그를 때려눕히지 않았던가?

    백서희가 그 일을 끄집어내자 강엽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번엔 별 일 없었으면 좋겠는데....”

    무림맹에 와서 예정에 없었던 사건을 몇 번이나 겪은 만큼 이번엔 조용히 넘어갔으면 싶었다.

    * * *

    “...왜 너까지 끼는 거냐?”

    강엽은 자리에 앉은 황보진악을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간의 여정을 기리고 무운을 빌어주기 위해 모인 자리에 황보진악이 끼어든 것이다.

    황보진악이 넉살 좋게 씩 웃었다.

    “그래도 함께 주먹을 나눈 사이 아니오? 그러지 말고 친하게 지냅시다, 강 형.”

    “또 시비 걸 생각은 아니겠지?”

    “으하하! 내가 단순하긴 해도 승복도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오. 뭐, 강 형 말고 저쪽하곤 한판 붙어보고 싶긴 한데....”

    황보진악의 시선이 향한 곳.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던 연가휘가 그 시선을 눈치채고 한쪽 눈썹을 구붓하게 들어올렸다.

    “나 말이오?”

    본래 거처에 연금되었던 연가휘였다.

    하나 흑룡교가 검성의 목숨을 구해준 공로를 인정받은 덕에 자유롭게 다닐 권한을 손에 넣었다.

    “그쪽이 교룡왕의 후손이라고 들어서. 처음 만났을 땐 남궁 소저에게 양보했지만....”

    거기까지 말한 황보진악이 잠시 말을 늦추면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은 여인들을 힐끔거렸다.

    남궁상아도 친분이 있는 당묘정과 소창후의 초청을 받고 자리에 참석했던 것.

    그녀들과 얘길 나누면서도 이쪽의 말을 듣고 있던 건지 남궁상아가 눈썹에 날을 세웠다.

    “황보 공자, 연 무사는 나와 선약이 있으니 나중을 기약하세요.”

    “어엉? 남궁 소저는 이미 붙지 않았소? 이번엔 나한테 양보하시오.”

    “공평한 조건에서 다시 붙고 싶거든요.”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양쪽에서 붙어보고 싶다고 하자 연가휘가 묘한 표정이 되었다.

    강엽이 피식 웃으며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인기 있어서 좋겠군.”

    “솔직히 이런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하진 못했습니다.”

    쓴웃음을 지으며 술을 받은 연가휘가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은공.”

    “언제까지 은공이라고 부를 거냐? 그 말도 계속 들으면 민망하니까 그냥 강 무사라고 불러.”

    “하지만....”

    “그게 내가 편해.”

    “...알겠습니다, 강 무사님.”

    “이제 너희들은 자유다. 흑룡교라는 이유만으로 공적 취급을 받을 일은 없어.”

    “....”

    연가휘는 목이 메이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태어났을 때부터 흑룡교의 일원으로 살았던 그에게 있어 백도 무림은 언제나 거대한 위협이었다.

    암시장에서도 자신들의 정체를 들키지 않을까 늘 조심해야 했다.

    “물론 흑룡교라는 이름은 더 이상 못 쓰겠지.”

    강호는 넓으니, 이들 말고도 흑룡교도들이 더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들이 무림맹의 일원이 되면 공식적으로 흑룡교는 완전히 멸문하는 게 된다.

    “총군사가 말하더군. 너희를 척마대의 일원으로 받고 싶다고 말이야.”

    본래는 강엽을 따라 운남으로 가려고 했으나, 절반 이상이 몸져누운 지금 그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어쩌면 혈교보다는 광명마교를 상대하는 게 나을 거다. 그편이 너희들이 유용하다는 걸 증명하는 데는 훨씬 도움이 될 거야.”

    “그래도 되는 겁니까? 저희가 빠지면 강 무사님께서는....”

    “너희를 데려가지 못하는 대신 무림맹이 지원을 해준다고 했거든.”

    “예에?”

    연가휘뿐 아니라 다른 일행들도 놀라서 강엽을 돌아보았다.

    당묘정이 뜻밖이라는 듯이 중얼거렸다.

    “지금 십이전대에는 여유가 없을 텐데....”

    “점창을 구하는 건 중요하니까요. 그래도 맹월림 같은 대방파와 맞서 싸우려면 최소 넷은 보내야 할 텐데, 어딜 보낼지 모르겠네요.”

    소창후가 말을 받았다. 십이전대 넷이 모이면 어지간한 대방파와도 자웅을 겨뤄볼 만하다면서.

    무림맹의 윗선과 맞닿아 있는 황보진악과 남궁상아도 처음 듣는 소식인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세한 건 나도 몰라. 총군사도 세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고. 당일이 되면 알 수 있겠지.”

    이미 제갈의현에게는 사흘 내로 출발할 거라고 말해두었으니 그때까진 정리가 될 터.

    이야기를 들은 일행이 아쉬워했다.

    “결국 무림맹에 와서 헤어지는 거군요.”

    “하하하!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잖나.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고, 이별이 있으면 만남이 있는 거지. 오늘 헤어져도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을 걸세.”

    야차마곤이 술을 벌컥벌컥 들이마시고는 두툼한 입술을 슥 닦으며 호탕하게 웃었다.

    “이보게, 강엽. 자네가 대장이니 송별사라도 읊어주게.”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강엽의 얼굴로 모였다.

    다들 종용하진 않았지만 크게 기대하는 눈초리.

    “거창하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실소를 흘린 강엽이 술잔을 높이 들어올리자, 일행 역시 술을 가득 채워서 하늘로 치켜들었다.

    “모두들.”

    일행 모두의 눈을 마주치면서 힘주어 말한다.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건승해라. 오늘처럼 웃으면서 술잔을 나눌 수 있도록.”

    “그땐 하후 도우도 같이 모이죠.”

    청수의 첨언에 다들 고개를 주억였다.

    다시 만나는 그날엔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동료로 함께 싸울 수 있도록 강해지리라. 상석에 앉은 강엽을 보며 일행은 속으로 결의했다.

    * * *

    무림맹을 떠나는 날.

    미리 약속 장소에 나와있던 강엽과 백서희는 푸른 도포를 휘날리는 사내의 등장에 눈을 껌뻑였다.

    강엽이 설마 하면서 물었다.

    “지원군이 오기로 들었습니다만.”

    “내가 그 지원군일세.”

    무당이 배출한 절세의 검객.

    삼청검 현운 도장이 엄지를 들어 자신을 가리키자 두 사람 모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전엔 여러 가지 일이 겹쳐서 말하지 못했지. 청수에게 들었네. 혈음마군의 정체가 오래전에 본산에서 도망친 사형이라지?”

    “운남에 혈음마군이 있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래도 단서는 찾을 수 있겠지. 사형에 관한 일은 어찌 다른 사람에게 맡길까.”

    결자해지라고 했다. 무당의 제자가 마도에 물들었으니 무당이 매듭을 짓겠다는 선언.

    “설령 단서를 찾지 못해도 자네들을 끝까지 돕겠네. 내 동행을 허락해주겠는가?”

    백서희가 어쩔 거냐는 듯이 눈짓을 보냈다.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무당제일검이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성도에 들렀다 갈 생각인데 괜찮으시겠습니까?”

    하남의 아래엔 무당이 있는 호광이 있다. 현운 도장이 무당산에 볼일이 있다면 호광을 지나쳐야 했다.

    현운 도장이 곤란한 기색으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급한 일인가?”

    “예. 급하기도 하고, 꼭 필요하기도 한 일입니다.”

    “으음, 그럼 곤명에서 합류하는 게 좋겠구만. 난 저 친구와 함께 가겠네.”

    “...?”

    현운 도장의 눈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웬 청년이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헉! 헉! 늦게 와서 죄송합니다!”

    “다행히 시간에 맞춰 왔으니 너무 괘념치 말게. 바쁘게 뛰어온 것 같은데 숨 좀 돌리고.”

    “휴우, 감사합니다.”

    물주머니를 꺼내서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청년이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두 손을 모았다.

    땀에 절은 얼굴 위로 결연한 각오가 떠올랐다.

    “점창 제자 척무경이라고 합니다. 강호 친구들에겐 사일관룡(射日貫龍)이라는 별호로 불립니다.”

    “용봉지회 소속이오?”

    일전에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조우했을 때는 보지 못했던 얼굴. 하지만 별호에 용 자가 들어가는 이라면 용봉지회 소속일 가능성이 높았다.

    척무경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장문인의 소식은 유감이오.”

    “...감사합니다.”

    새삼 감정이 복받치는지 척무경이 울컥하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현운 도장이 개입했다.

    “여기 척 도우는 운남성 길잡이로 따라왔네. 자네들이 사천에 들르겠다고 하니 난 이 친구와 함께 남하해서 귀주를 통해 곤명에 들어가야겠군. 겸사겸사 본산에 들러 법구도 좀 빌리고 말이야.”

    운남엔 혈교와 모산파의 술사들이 득실거린다.

    현운 도장이 정도십대고수 중에서도 특출난 무력을 지녔다지만, 아무 대책 없이 사특한 술사들과 맞서 싸우는 것은 섶을 지고 불에 들어가는 격이었다.

    “입하(立夏)까지 만나는 게 어떤가?”

    “좋습니다. 그럼 장소는....”

    세부적인 사항을 논하고 재회를 약속했다.

    새롭게 모인 일행은, 다시 둘로 찢어져 서쪽과 남쪽으로 나아갔다.

    * * *

    “...갔군요.”

    “그렇군.”

    낭왕과 염왕.

    각각 현 시대와 전 시대를 상징하는 팔존들은 높은 성벽 위에서 떠나는 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도 북해에 볼일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미적거릴 때가 아닐 텐데?”

    “슬슬 출발해야지요. 안 그래도 광명마교가 북해로 교군을 보내서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이 북해에?”

    “필시 빙궁이 목표일 겁니다.”

    “빙궁과 동맹을 맺는 게 목적이라고 했었지. 제갈의현의 생각이겠군.”

    “흑무암쇄진만 믿을 순 없으니까요. 제갈세가가 흑무암쇄진을 분석해서 부적에 새겨놓고 있다지만,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릅니다.”

    거기까지 말한 염왕이 한숨을 내쉬었다.

    “문제는 하오문과 무림맹의 비선을 전부 가동했는데도 놈들의 동기를 알아내지 못했다는 겁니다.”

    빙궁의 음공이 광명마교의 무공과 상극이긴 하지만, 먼 곳에 있는 빙궁을 노릴 이유가 뭐란 말인가.

    낭왕의 하소연에 염왕이 뒷짐을 진 채 광명마교가 있는 머나먼 동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의외로 전쟁과는 별로 상관없는 이유일지도 모르지.”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나라고 어찌 전부 알까. 단지 그런 예감이 들 뿐이다. 북해에 교주가 신경 쓸 만한 뭔가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천기를 엿보는 염왕이다. 그가 이런 예감을 느꼈다면 정말로 뭔가 있을 공산이 컸다.

    낭왕이 굳은 얼굴로 구시렁거렸다.

    “설마 북해에도 교주같은 괴물이 있는 건 아니겠지요?”

    “모르지.”

    염왕이 입꼬리를 당겼다.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많다고 하지 않나.”

    “말이 씨가 되는 법입니다, 선배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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