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용서 (6)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아침이었다.
짹-! 짹-!
창틀 너머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깊은 잠에 빠졌던 검성이 눈가를 파르르 떨며 무거운 시름을 흘리자 병수발을 들던 제자들이 반응했다.
“장문인! 정신이 드십니까!?”
“이, 이럴 게 아니야! 얼른 어른들께 알려!”
제자들이 후다닥 달려가는 소리에도 그는 바로 정신을 차리진 못했다.
어둠 속을 헤매듯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반쯤 깨어난 상태에서도 그는 조급한 뜀박질 소리와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조금씩 정신이 명료해지는 것을 느꼈다.
문득 방황하던 그의 앞에 한 줄기 서광이 내리쬐었다.
[내게 오라.]
빛 속에서 언뜻 모습을 비춘 인영이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검성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함께 가자. 이 더럽고 혼란스러운 예토를 벗어나 복락을 누리자꾸나.]
귓가를 달콤하게 간질이는 감언.
검성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홀린 듯이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다 돌연 위화감에 사로잡혔다.
‘왜 내 손이 하나뿐인가?’
이상하게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꿈에 취한 기분 탓인지 아프다는 느낌도 없었다.
그저 멍해져서 손을 내밀었을 뿐.
-사부님.
빛과 닿을 뻔한 손이 움찔 떨렸다.
-저희에겐 사부님이 필요합니다.
귓가를 파고드는 익숙한 목소리.
어렸을 때부터 기른 제자였다.
‘아아.’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화산에 오르던 아이. 겁먹은 얼굴로 어른들의 눈치를 봤었지.
어린 제자의 똘망똘망한 눈망울을 떠올린 검성이 저도 모르게 웃자 빛의 인영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러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검성의 눈이 크게 뜨였다.
더 이상 그의 눈은 미망을 헤매지 않았다. 평생을 갈고 닦은 검도(劍道)처럼 날선 눈빛.
검성이 입매를 비죽거렸다.
“광명마교의 교주.”
[.......]
“끈질긴 놈. 지독하게 함정을 파놨구나. 심상절예도 모자라서 이따위 수작을 부리다니.”
[후....]
손을 거둔 빛의 인영이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시늉을 하며 한숨 쉬는 소리를 내뱉었다.
[아쉽군. 그대만큼은 데려가려고 했건만.]
“내 비록 네놈에게 패했으나 혼백마저 넘겨줄 성싶더냐. 꺼져라.”
검결지가 빛의 인영을 벤다.
평생을 고련해서 한 몸이 된 매화검의 출수.
산산조각난 빛덩이는 그렇게 흩어졌다. 마지막까지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었던 교주의 사념도.
* * *
“장문인...!”
“...그만 좀 소리치거라.”
네 녀석들이 하도 소리쳐서 귀청이 떨어지겠다.
미처 하지 못한 뒷말이 목구멍을 맴돌았지만, 잔뜩 쉬고 갈라진 탓에 숨소리만 나올 따름이었다.
쿨럭하고 마른 기침을 몇 번이나 뱉은 검성이 간신히 고개만 돌려 옆에 선 옥청선자를 바라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제자의 속눈썹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사부님.”
“...선하냐.”
“다행입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눈을 붉힌 옥청선자가 늙고 마른 손을 꼭 잡고 연신 같은 말을 되뇌었다.
검성이 쓰게 웃으며 마주 잡은 손을 토닥일 때였다.
“난 보이지도 않나 보오.”
“맹주...!”
화산파 제자들 사이로 나온 맹주.
검성은 언제나 건장했던 맹주가 혈색이 나쁜 얼굴로 나타나자 깜짝 놀랐다.
볼살이 움푹 빠지고 풍채도 약간은 줄어든 것이, 몇 년을 병으로 고생한 사람 같았다.
“대체...?”
“아, 이건 신경 쓰지 마시오. 한동안 잘 먹고 잘 쉬면 낫거든. 물론 그럴 시간이 없다는 게 문제지만....”
“맹주께서도... 크흠.”
하마터면 교주에게 당했냐고 물으려다가 뒤늦게 삼갔다. 아무리 그가 거칠 것 없는 성미라지만 맹주에게 하기에 적절한 언사는 아니었다.
옥청선자가 사정을 설명했다.
“맹주님께서 사부님을 살리기 위해 고생하셨습니다.”
그녀를 통해서 지난 며칠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들은 검성의 표정이 수시로 변했다.
흑룡교도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대법을 펼쳤다는 말까지 나왔을 땐 아연해졌다.
“콜록, 그들이... 그런 일을 했다고?”
“장문인을 살리기 위함이었소. 덕분에 그들 역시 몸져누운 상태요.”
족히 절반 이상이 침상 신세를 지고 있었다.
“원래는 귀영을 따라 운남으로 보내려고 했는데, 이래서야 갈 수 있을지 의문이군.”
“.......”
검성은 말이 없었다.
평생을 사마외도와 맞서 싸웠던 그가 사마외도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함받은 것이다. 그 심정을 어찌 한마디 말로 정의할 수 있을까.
맹주는 복잡한 감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검성을 슬쩍 쳐다보고는 그의 어깨로 손을 올렸다.
“장문인이 사마외도를 어찌 생각하는지 알고 있소. 특히 흑룡교라면 이를 간다는 사실도.”
“맹주, 나는....”
“세월이 오래 지나지 않았소. 때론 과거의 기억을 강물 저편으로 흐르게 둬야 하는 법이외다.”
“....”
“흑룡교를 받아들이는 게 장문인의 신념과 어긋난다는 점은 잘 알고 있소. 하나 선조의 죄를 후손에게 묻는 것도 너무 가혹하지 않겠소.”
맹주는 그 이상 말하지 않았다.
이제 판단은 검성의 몫이라는 듯한 태도.
장내의 사람들이 아무 말도 못하는 가운데, 검성은 복잡한 얼굴로 떠듬떠듬 말을 이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대답하지는, 못하겠소. 조금만... 쿨럭, 시간을 주시오.”
맹주는 그것이면 족하다는 듯이 다시 한번 어깨를 두들겨주고 화산파 제자들을 둘러보았다.
“아픈 사람을 붙잡고 너무 오래 얘기했군. 난 가보겠네. 자네들도 너무 오래 있진 말고. 장문인께 잠시 생각할 시간을 드리는 게 좋을 듯하이.”
“감사합니다, 맹주님.”
옥청선자가 대표로 포권을 올리자 화산파의 제자들도 잇따라 예를 갖추었다. 죽어가는 장문인을 살리기 위해 맹주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아는 것이다.
그들과 눈을 마주친 맹주는 굳게 고개를 주억인 다음 밖으로 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뒤따르고, 다시 화산파 제자들의 시선이 장문인을 향할 무렵.
창을 통해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녹음을 바라보던 검성이 옥청선자에게 말했다.
“...귀영을 불러다오.”
* * *
강엽이 방문한 때는 늦은 밤이었다.
검성이 만나길 원한다는 화산파 제자의 부탁을 받고 화산파의 장원을 찾아간 것이다.
‘몸상태가 정상은 아니지만....’
염왕과 부딪친 뒤 닷새가 지났지만, 심상절예를 쓴 반동은 아직도 그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심상절예를 쓸 때의 감각이 선명하게 남아 있기에, 강엽은 그 위험성을 뼈저리게 실감했다.
‘그나마 심상절예가 불완전해서 목숨을 건진 거지.’
만약 심상절예가 완전했다면, 그걸 쓴 시점에서 온몸이 통째로 증발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염왕 역시 어설프게 심상지경에 도달한 옛 고수들이 그대로 몸을 잃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육신이 통째로 증발했기 때문에 진실을 모르는 자들은 등선과 헷갈려했다고 하던가.
엄밀히 말하면 강엽이 펼친 심상절예는 반쪽자리였기에 온몸이 박살난 걸로 끝난 것이다.
물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것만으로도 삼도천을 건넜겠지만, 이번엔 심흔을 입었을 때와 달리 재생력으로 치료할 수 있었다.
걸을 때마다 근육이나 관절이 삐거덕거리긴 해도 그럭저럭 거동은 가능한 수준.
다행히 화산파가 마차를 보내주었기에 굳이 먼 길을 걷진 않았다.
“몸은 불편하지 않은가?”
대문 밖에서 제자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던 옥청선자가 강엽을 걱정스레 살폈다.
혈색이나 걸음걸이는 나쁘지 않았지만, 마차에서 내릴 때 관절이 잠시 경련했던 것이다.
“버틸 만합니다.”
“한참 쉬어야 할 텐데 불러내서 미안하네.”
“며칠 쉬면 괜찮아질 겁니다. 그보다 장문인께서 깨어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안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솔직히 깨어나자마자 절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강엽과 맹주가 절반씩 심상을 거둬갔다고 해도 검성의 용태가 좋을 리가 없었다.
옥청선자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시간이 지나면 마음이 변할지도 모른다고 하시더군.”
“.......”
옥청선자는 자세한 사정을 말해주진 않았지만 뒷말을 짐작한 강엽의 눈빛은 깊이 가라앉았다.
굳이 이 시점에서 검성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하나밖에 없지 않을까.
옥청선자를 따라 장원의 문턱을 넘자 태상노군이나 원시천존을 모시는 사당이 눈에 들어왔다.
옥청선자가 데려간 곳은 장원에서도 깊숙한 곳에 있는 월동문 바깥의 담벼락이었다.
“내원에서 기다리고 계시네.”
그러면서 한쪽으로 물러나는 옥청선자였다.
강엽이 들어가려는 순간, 조금 머뭇거리던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쥐어짜냈다.
“...그때 구해줘서 고맙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강엽이 그녀의 몸에서 심상을 빼내지 않았다면 위험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은혜는 절대로 잊지 않겠네.”
딱히 옥청선자를 도울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당시엔 그녀나 맹주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반쯤은 무의식적으로 저지른 짓이었기 때문이다.
하나 결과적으로는 빚을 지워둔 셈.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 그렇지.”
옥청선자가 쓰게 웃었다.
‘나중에 내 정체가 밝혀진다면 오늘의 일이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흡혈귀라는 사실이 언젠가는 탄로날지도 모른다.
광명마교의 교주가 강엽의 정체를 알고 있는 만큼 가능성이 없다고 할 수는 없는 바.
‘사실이 밝혀져도 무림맹이 날 적대하는 걸 막거나 늦추려면 미리 아군을 만들어둬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화산파에 빚을 지우고 호의를 쌓은 것은 강엽 입장에서도 큰 수확이었다.
* * *
“왔는가.”
사당에 가득 퍼진 향내.
향을 피운 검성이 사당에 모신 위패를 향해 묵념을 하고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어깻죽지부터 잘려나가 헐렁한 소매가 가장 눈에 띄었지만, 강엽은 그보다 다른 손을 주시했다. 살거죽만 남은 손이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있었다.
“지팡이 없이는 몸도 가누지 못하는 형편이라네. 검성이라는 별호가 우습게 됐어.”
“곧 회복하실 겁니다.”
“그렇지 않다는 걸 잘 알지 않나?”
“.......”
검성의 말대로 입에 발린 말이었다.
사당에 들어오자마자 초음의 파동으로 그의 체내를 샅샅이 훑어봤던 것이다.
“삼화취정이 깨졌네. 팔을 잃은 건 그렇다 쳐도... 단전을 다친 게 치명적이었지.”
완전히 깨진 것은 아니다. 하나 하단전의 기해혈을 중심으로 주변 경맥이 가닥가닥 끊겨 있었다.
“그래도 내공을 완전히 잃은 건 아니어서 간신히 버틸 만하네만, 오래 가진 않겠지. 교주의 말이 맞아. 심상절예에 당한 순간부터 죽을 운명이었던 게야.”
“...은퇴하실 생각이십니까?”
“금분세수를 해야겠지.”
고희를 조금 넘긴 검성이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은퇴할 나이지만, 일문의 장문인으로서는 한창이었다.
도가무공을 익힌 수행자들이 평범한 사람들보다 장수한다는 걸 생각하면 십 년은 거뜬할 터.
하지만 교주의 심상절예가 그에게 남은 세월을 뜯어가버렸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면 우습게 들리겠지만, 난 자네가 데려온 흑룡교도들을 특별히 증오하진 않았네.”
다시 사당의 안쪽으로 고개를 돌린 검성이 말했다.
그제서야 강엽은 그가 향을 피우며 예를 표한 대상이 태상노군이나 원시천존 같은 도교의 신들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족히 수십 개는 될 듯한 위패들.
“내가 증오한 건 나였네. 흑룡교도들에게 속아 멍청하게 굴었던 나 자신.”
“...!”
“나중에서야 알았지. 내가 붙잡았던 흑룡교도들 중에 흑룡교의 신녀가 있었다는 걸. 그들이 순순히 항복했던 건 흑룡교의 신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네. 옥쇄할 각오로 항전하면 신녀가 죽을까 봐 차마 싸우지 못했던 게야.”
그때는 흑룡교도라고만 알았지, 상대의 정확한 신분을 몰랐다.
그리고 알았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흑룡교주가 신녀를 구하기 위해 정예들을 끌고 왔지.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제자들이 죽고, 도관이 불탔네. 만약 그 여자가 신녀라는 걸 알았다면....”
검성이 백서희를 보고 놀랐던 이유.
강엽은 그의 고백을 듣고서야 왜 그런지 깨달았다. 검성이 흑룡교의 신녀를 기억하고 있다면, 신녀와 빼닮은 백서희를 보고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런 생각을 해봤자 의미는 없겠지. 그저 젊었던 시절의 어리석음을 탓할 뿐일세.”
“....”
“자넨 그들을 믿는가?”
검성이 질문을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