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9화 (247/450)
  • 46화. 심검 (3)

    “으음?”

    교주가 이채를 띠었다.

    절대고수의 감각 범위는 초월적이다. 반경 십 리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손금 보듯 헤아릴 수 있을 정도.

    정주 전체는 무리지만, 무림맹과 인근에서 일어난 일들 정도는 여반장처럼 알아낼 수 있었다.

    한데....

    ‘재밌는 짓을 하는군, 진조의 후예.’

    방금 전의 심검은 그도 꽤 무리한 일이었다.

    그에게 육신을 제공한 일사도가 심상절예의 반동을 버텨야 했으니까.

    그럼에도 억지로 심검을 쓴 것은 기본적으로는 검성을 제압하기 위해서였지만, 겸사겸사 교도들을 제거하는 무림맹의 고수들을 처리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런 수를 준비해뒀을 줄이야. 아직 덜 여물었어도 운명의 세 별이라 이건가?’

    언젠가 운명을 두고 다툴 흉성.

    아직음 교주 자신이나 혈마에 미치지 못한다 하나 장래의 대적자를 두고볼 수는 없었다.

    문제는 섣불리 건드릴 경우 저번처럼 진조가 튀어나오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는 건데....

    ‘반수 가량의 교도들이 몰살당했다. 힘을 아껴도 원영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은 일 각 남짓.’

    그조차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버틸 수 있는 시간이니,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짧을 터.

    검성을 죽음에 이르게 한 것만으로도 손해는 아니지만, 원하는 바를 이루지는 못했기에 아쉬웠다.

    촤아아아악!

    금빛 파문이 물결쳤다.

    태산같은 경력이 깃든 대도가 금빛 파문을 쪼개고 들어오는 것을 본 교주가 탄성을 흘렸다.

    “제법이군, 맹주. 본좌의 호신강기를 조금씩 부수고 있지 않은가?”

    교주가 손가락을 튕기자 허공에 나타난 수십 개의 강구가 화살처럼 날카롭게 빚어졌다.

    -폭염무간시.

    순식간에 맹주를 포위한 수십 발의 화살들이 일거에 터져나가며 막대한 열기와 섬광을 흩뿌린다.

    “죽은 오사도의 비기지. 맛이 어떤가?”

    “화끈하구만.”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

    도격이 들이닥친 것은 그보다 몇 배로 빨랐다.

    투아아아앙!

    다시 한번 물결친 금빛 파문이 도격을 막아냈으나, 이번엔 산산조각 깨져나가며 일격을 허용한다.

    완만하게 휘어진 맹주의 도격이 교주를 한 끗 차로 스쳐지나갔다.

    -만곡광역(彎曲光域).

    눈을 부릅뜬 맹주가 일갈했다.

    “갈! 이따위 사술을 부리다니!”

    굽이친 술법의 역장이 그의 경맥 흐름에 간섭해서 경력의 방향을 억지로 틀어버린 것이다.

    공력을 완전히 통제하는 절대고수의 의념을 뚫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유도하는 수완.

    술법과 무공, 어느 한쪽도 대성하기 어렵건만 교주는 그 모두를 능수능란하게 휘두르고 있었다.

    역수로 쥔 백금색 검날이 대도와 얽히고, 부드럽게 휘어진 일장이 맹주의 관자놀이를 향해 날아온다.

    호신강기만 믿고 있기엔 교주의 일격이 모두 개세적인 판국.

    위기를 직감한 맹주가 전신으로 발경을 폭출하려는 찰나, 교주가 돌연 옆으로 몸을 반전시켰다.

    막강한 도격 경파가 지면을 강타, 교주를 향해 검격이 짓쳐들어왔다.

    까아앙!

    급히 쳐낸 검이 튕겨져오르고,

    귀신같이 간합을 좁힌 낭왕이 교주의 면상을 향해 장대한 일권을 꽂아넣었다.

    교주의 신형이 무릎도 굽히지 않은 채 뒤로 물러났지만, 시기적절하게 발한 격공장으로 견제.

    숨 쉴 틈 없는 발경 백타로 교주의 전신을 미친 듯이 두들겨댔다.

    “역시 호신강기를 이전처럼 뽑아내진 못하는군. 아니면 한계에 다다른 건가?”

    지금 이 순간에도 교주의 전신은 해가 뜨면 사라지는 안개처럼 희미해지고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를 위해 가교 역할을 자처한 교도들이 죽을수록 원영신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것이다.

    “이젠 심상절예도 못 쓰겠지.”

    “흠, 확실히....”

    교주는 열세를 부정하지 않았다.

    이미 반쯤 투명해진 모습을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귀신이라고 오해했을 것이다.

    “계속 놔두면 좀 위험하겠군. 일의 우선 순위를 좀 바꿔야겠어. 그대들은 이제 뒷전에 밀렸다.”

    “누구 마음대로?”

    코웃음을 친 낭왕이 더욱 거세게 밀어붙였다.

    좌검우도, 두 자루의 검과 도가 살벌한 궤적을 그리며 양쪽에서 교주를 압박한다.

    “그러고 보니 낭왕 그대는 자력으로 양의(兩儀)를 깨우쳤지.”

    무당파의 비전 양의심공. 젊은 시절 무수한 비급을 접했던 낭왕은 양의를 다루는 무공 비급을 읽고, 자력으로 양의심공과 비슷한 공능을 손에 넣었던 것이다.

    그로써 천무병장이라는 별호를 손에 넣고, 천하팔존에 올라 낭인들의 왕이라고 불리지 않았던가.

    “상대가 또 있다는 걸 잊지 말게.”

    여기에 맹주까지 가세했다.

    기실 두 사람의 궁합이 좋다고 할 순 없었다. 호흡과 간합이 다른 건 둘째 치고라도, 두 사람 모두 공간을 넓게 가져가야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손발이 엇갈리지 않는 것은 순전히 두 사람의 견문이 풍부하기 때문이었다.

    그로써 함께 싸우는 이의 다음 수를 예측하며 차근차근 교주의 운신을 좁혀나간다.

    “시간을 끌 생각인가?”

    두 사람의 심리를 내다본 교주가 검을 던졌다.

    투카카카카캉...!

    낭왕의 좌검우도와 교주의 검이 별개의 생물마냥 미쳐 날뛰면서 정신없이 얽힌다.

    거듭되는 합공을 모두 비껴낸 교주의 눈동자가 뜨거운 광채를 발했다.

    [교도들이여, 시간을 벌어다오.]

    무림맹의 상공을 타고 천둥처럼 울려 퍼지는 전성.

    투명하게 너울지는 교주의 전신에서 묵직한 기도가 뿜어지자 맹주와 낭왕의 공세가 더욱 격해졌다.

    “수작을 부릴 틈을 줄 것 같으냐?”

    “그대들은 본좌를 막지 못한다.”

    바로 그 순간.

    돌연 교주의 몸 안쪽에서 뿜어져나온 찬란한 금빛 서광이 좌우에서 교차하는 공세를 튕겨냈다.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반탄지기의 위력이 워낙 강력한 탓에 두 사람은 잠시나마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교주의 손에서 뜨거운 열기를 발산하는 구체가 떠올라서 사위를 밝혔다.

    ‘강구? 아니, 강구보다 훨씬 강하다.’

    맹주와 낭왕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호신강기를 둘렀음에도 온몸이 불탈 것 같은 열기. 마치 교주의 손 위에 작은 태양이 강림한 듯했다.

    어린아이 몸통만큼 덩치를 키운 구체가 폭발하는 순간.

    -......!

    거대한 빛기둥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사방 삼십여 장의 공간이 빛과 열기에 휩싸여 그 자리에서 녹아내린다. 점점 약해지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전율적인 기습.

    “이걸로는 그대들을 못 죽이겠지. 하나 시간을 번 걸로 족하다.”

    국지적인 재난을 일으킨 교주 역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본신으로 싸웠어도 이만한 절기를 연속으로 쓰는 것은 꽤나 힘든 일이었다.

    원영신이 일사도에게 막대한 부담으로 작용하는 지금은 더더욱 힘에 부칠 수밖에.

    교주는 자신이 일으킨 막대한 재난의 결과를 확인하지도 않고 먼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붉은 거미줄이 펼쳐진 중심부.

    교도들을 격살하고 있는 강엽을 향해 사라졌다.

    * * *

    -크아악!

    -갑자기 웬 괴물이...!

    사방에서 메아리치는 비명.

    상당히 먼 곳에 떨어져 있는데도, 혈라지망의 공능으로 감각을 멀리 확장한 강엽은 적들이 토해내는 욕설과 악다구니를 생생히 들을 수 있었다.

    교주의 심검으로 박쥐들이 쓸려나간 지금, 그는 직접 혈목을 조종해서 교도들을 격살했던 것이다.

    ‘혈라지망으로 감각 범위를 비약적으로 확장시키고, 관영신창의 초식으로 기습한다. 현 시점에서 이보다 확실한 수를 찾을 순 없어.’

    혼자 싸운다면 쓸 수 없는 방법이다.

    감각을 확장해서 먼 곳에 있는 적들을 처리할 순 있지만, 정작 눈앞의 기습엔 취약해지고 말기 때문.

    정작 은신한 놈들은 잘 죽여놓고 지척까지 다가온 적에게 당하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이 순간, 네 명의 절세고수가 강엽을 호위하기 위해 동서남북 사방에서 싸우고 있었다.

    “막아! 저놈을 어떻게든 죽여야 교주님께 시간을 벌어드릴 수 있다!”

    “목숨을 아끼지 마라! 이교의 죄인을 죽이고 순교하는 자에겐 내세에서 복락이 따를지니!”

    반수 이상의 동료들을 잃은 교도들은 눈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옥쇄할 각오로 물량 공세를 퍼붓는데도 사방에서 강엽을 호위하는 절세고수들을 뚫지 못한다.

    마치 통곡의 벽처럼 그 자리에 단단히 못 박힌 채 각자의 절기로 교도들을 순살하는 모습.

    최후의 보루로서 강엽의 앞을 지키고 있는 백서희는 압도적인 광경에 목구멍을 꿀꺽 움직였다.

    그녀 역시 동년배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든 고수지만, 정도십대고수의 반열에 오른 절세고수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부족한 몸이었다.

    강엽에게 별 도움이 못 되고 있다는 자괴감이 가슴을 괴롭힌다.

    그러나 고뇌할 여유 따윈 없었다.

    콰아아아아아앙...!

    “백 소저, 그쪽에 한 명 간다!”

    폭음 뒤에 귓전을 때리는 경고.

    온몸에 벽력탄을 두른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자폭을 감행하는 동안, 빗발치는 열기를 교묘하게 피한 자가 기습적인 일격을 내질렀던 것이다.

    상대의 무기질적인 눈빛과 마주친 백서희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면서도 침착하게 대응했다.

    날카로운 파찰음이 대기를 떨치고, 한데 얽힌 쌍검과 소검이 불꽃을 튀기며 충격파를 흩뿌렸다.

    교차한 검 사이로 백서희를 내려다본 청년이 작게 속삭였다.

    “아까는 신세를 졌다. 미물 따위가 그만한 창술을 구현할 줄은 미처 몰랐군.”

    “큭...!”

    백서희가 이를 꽉 물었다.

    강엽과 괴뢰마가 충돌할 당시 그녀는 기절했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몰랐지만, 본능적으로 눈앞의 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불과 삼 장도 안 되는 거리.

    그녀의 뒤편엔 강엽이 혈목 다발을 걸상 삼아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아예 눈을 감고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는다. 지금 그의 감각은 눈앞의 전장이 아닌 적들이 은신한 어둠 속을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본 괴뢰마가 중얼거렸다.

    “교주가 경계할 만하군. 천하팔존 이상으로 까다로울 수 있다더니....”

    “닥쳐!”

    쉬아아아악!

    가까스로 괴뢰마를 떨쳐낸 백서희가 쌍검을 휘둘렀다.

    좌검과 우검이 서로 다른 호흡과 궤적으로 검로를 그리자 괴뢰마가 나직이 감탄했다.

    “타고난 양손잡이... 아니, 그런 수준을 벗어났군. 양의심공을 익혔다면 대성했을 재능이다.”

    몸을 좌우로 흔들어 백서희의 공세를 어렵지 않게 흘려낸 괴뢰마였다. 중단전을 개방한 분신인 만큼 백서희 같은 고수와 싸워도 밀리지 않는다.

    “이 싸움은 네게 불리하다.”

    그녀는 강엽에게 피해가 미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싸워야 하는 데 반해 괴뢰마는 그렇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백서희의 집중력을 흩뜨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강엽이 있는 곳을 향해 경파를 뿌렸다.

    투학!

    “윽.”

    허벅지를 훑고 지나가는 검풍.

    벌어진 상처를 중심으로 화끈한 열기가 번져나갔다. 공교롭게도 족양명위경맥이 지나는 요혈 근처였다.

    백서희는 검에 바른 독기가 경맥을 타고 곰팡이처럼 퍼져나가는 것을 내공으로 억눌렀다.

    “썅! 이 새끼, 비겁하게 독을....”

    “전쟁에 비겁하고 말고 할 게 어디 있나. 당장 저기 있는 당문주도 독을 쓰고 있거늘.”

    독을 쓴 건 확실하게 강엽의 숨통을 끊기 위해서겠지.

    ‘어떻게든 버티기만 하면 돼. 네 사람 중에서 한 명만이라도 도와주러 와준다면...!’

    콰콰콰콰콰콰쾅......!

    사방에서 밧발치는 열기와 굉음. 뜨거운 열풍이 호흡을 타고 목구멍까지 파고들어왔다.

    동귀어진을 각오한 교도들이 벽력탄을 터뜨리며 절세고수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그때 당문주의 손에서 검은 소나기가 쏟아져내렸다.

    -만천화우.

    사천당문에 전해져내려오는 최후의 비기.

    깡마른 몸 어디에 그 많은 암기들을 숨겨두었는지 의아할 만큼 수많은 암기들이 하늘을 수놓았다.

    이대로는 모두가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하고 난국을 타개하고자 구명절초를 꺼내든 것.

    수십, 수백 종의 암기들이 서로 다른 궤적과 방향, 속도를 그리며 공간을 장악한다.

    “크아아악!”

    “빌어먹을 암기들이...!”

    어떻게든 당문주와 함께 황천으로 갈 기세로 달려들었던 교도들이 암기를 맞고 고꾸라진다.

    개중 일부 암기는 백서희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던 괴뢰마의 뒤를 절묘한 각도로 날아들어왔다.

    안색이 변한 괴뢰마가 몸을 돌리며 암기를 쳐내고,

    푸헉!

    찰나를 놓치지 않은 백서희가 괴뢰마의 늑골 사이를 깊숙이 찔렀다.

    “큭! 계집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은빛의 궤적이 목을 베고 지나간다. 괴뢰마의 수급이 떨어지는 것까지 확인한 백서희는 숨을 크게 몰아쉬며 주저앉았다.

    급히 다가온 당문주가 푸르게 물든 허벅지의 상처를 빠르게 훑었다.

    “극독이군. 조금만 늦었으면 위험할 뻔했네.”

    “다행히 버틸 만해요.”

    당문의 불침단을 복용했던 덕분이었다. 독에 대한 내성이 극독이 퍼지는 걸 막아주고 있었으니까.

    “그래도 얼른 운기하는 게 좋겠군. 까딱하면 자네가 저 친구보다 먼저 죽겠어.”

    당천경이 종이로 감싼 요상약을 건네다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석고가 된 것마냥 뻣뻣해졌다.

    그를 따라 시선을 돌린 백서희도 창백해졌다.

    “아...!”

    두 사람과 강엽의 사이.

    여기저기 찢겨나간 하얀 장삼 자락을 휘날리는 광명마교의 교주가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교주...!”

    “놀라운 일이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한 두 사람을 목소리의 힘만으로 멈춰세운 교주가 쓴웃음을 흘렸다.

    “고작해야 사도급인 자가 천하팔존보다도 더 위협적이라니... 역시 진조의 후예구나. 다소 무리하더라도 빨리 제거해야겠다.”

    강엽의 미간을 겨누는 검결지.

    백서희와 당천경이 외치는 소리는 교주가 발한 압도적인 의념에 파묻혔다.

    -심상절예....

    내면에 불멸의 괴물을 품고 있다 한들 심검으로 목숨을 끊는다면 다른 수가 없을 터.

    하지만 교주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천....

    -일도무겁살.

    또다른 심상절예.

    심검을 발동하는 창졸간의 틈을 교묘하게 찔러들어온 염왕의 심도가 교주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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