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3화 (241/450)

45화. 사절 (3)

무림맹의 맹방은 수백을 헤아린다.

동서로 수만 리, 남북으로 수만 리를 헤아리는 강호 무림에 얼마나 많은 문파들이 있겠는가.

일개 현을 장악한 문파들만 수백일 텐데, 대도시의 문파들까지 합치면 그 수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기 마련.

‘흑도 사파나 구파의 속가 문파들, 폐쇄적이어서 입맹하지 않은 문파들을 빼도 오백이 넘는다.’

구파일방이나 팔가처럼 천 명이 넘는 제자들을 거느린 대문파들이 있는가 하면, 불과 수십 명밖에 없는 자그마한 군소방파들도 많다.

물론 그 모두가 대회합에 참석하는 것은 아니었다.

‘제자가 이백 명이 넘고, 해마다 내는 맹비(盟費)가 은전 삼천 냥 이상이어야 대회합의 의결권을 준다....’

혹자는 힘 세고 돈 많은 문파들만 의결권을 갖는다고 하소연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다.

그 많은 문파들이 제 목소리를 내면 어느 세월에 총의를 모으겠는가?

반대로 대문파들은 자신들이 제자들도 많고 맹비도 많이 내는데 일개 군소방파와 똑같은 한 표밖에 행사하지 못한다고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의결권 때문에라도 대문파들은 군소방파들의 여론을 살필 수밖에 없지. 현실적이면서도 여론을 두루 반영할 수 있는 묘안이야.’

아마 누군가 먼저 제안했다기보다는, 여러 세력들이 얽혀 합의를 이끌어낸 끝에 저런 맹규가 만들어진 거겠지.

그 증거로 특정 문파의 속가 문파들은 맹방으로 취급받는데도 대회합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다.

‘이렇게까지 자격을 제한했는데도 의결권을 가진 문파만 백 개가 넘는다는 말이군.’

맹방대회합. 호사가들은 이 거대한 회합에 참석하는 문파들을 정도백대문파라 부르며 경외했다.

정확히는 백 개가 조금 넘지만, 오차가 크지 않기에 편의상 정도백대문파라 부르는 것.

다만 대회합을 개최해도 거리나 시간 등의 문제로 전부 참석하는 경우는 없었고, 많이 참여해봤자 구십여 곳이 전부였다.

때문에 여유가 되는 대문파에선 상주 인원을 둬서 문주의 뜻을 대행시키기도 한다고 하던가.

당천경을 따라 대회합이 열리는 회당에 들어온 강엽은 부채꼴처럼 휘어진 탁자들과 그 안을 채운 어마어마한 존재감에 이채를 발했다.

“각파의 문주나 원로급, 혹은 대제자들일세.”

강엽의 호기심을 눈치챘는지 앞서가던 당천경이 불쑥 설명했다.

“맹주나 총군사를 비롯해서 무림맹의 인사들은 의결권이 없지. 하나 여기 있는 사람들이 뜻을 모으면, 무림맹 전체를 움직일 수 있네.”

“맹주도 거부할 수 없는 겁니까?”

“거부권을 행사할 수는 있지. 그게 맹주의 특권이기도 하고. 하지만 딱 한 번 뿐일세. 만약 같은 사안에 맹방들이 다시 의결권을 행사하면, 그땐 맹주도 방법이 없네. 사임하던가, 맹방들의 뜻을 받들어야지.”

“맹주도 제약이 많은 자리군요.”

“백도 정파 전체를 이끌어야 하는 자리일세. 맹주가 그릇된 선택을 못하도록 최소한의 견제 장치를 둔 게지. 원로회가 있지만 완벽하진 못하니까.”

“만약 대회합에서 맹주를 탄핵하기로 결정하면 내쫓을 수 있습니까?”

“가능하네. 과정은 훨씬 복잡하지만. 다만 맹주가 실책을 저질러도 탄핵안을 발동시키는 경우는 거의 없어. 보통은 그전에 맹주의 임기가 끝나버리니까.”

무림맹주는 늙어죽을 때까지 해먹는 종신직이 아니다.

대개는 십 년 주기로 바뀌었다.

“더 오래 집권한 맹주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이들도 몇 년 더 해먹는 게 한계였지.”

견제하는 자들이 내버려두질 않는 것이다.

“그나마 흑룡교와의 정마대전 당시 집권한 맹주가 오 년 정도 더 해먹긴 했군. 그땐 전쟁 때문에 신임 맹주를 뽑을 형편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당시의 맹주조차 흑룡교주에게 격살당하는 바람에 맹주가 바뀌었다는 말로 설명은 끝났다.

당천경의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하하, 이게 누구야? 당 형 아니시오?”

전설 속 탁탑천왕을 연상시키는 엄청난 거구.

머리가 반쯤 벗겨진 근육질의 거한이 보무도 당당하게 걸어오자 당천경이 눈매를 좁혔다.

“황보 형?”

“하하, 이게 몇 년 만인지 모르겠구려. 사 년... 아니, 오 년 만인가?”

“얼추 그렇게 된 것 같소. 한데....”

당천경이 정수리를 기점으로 슬금슬금 후퇴하는 이마로 곁눈질하자 거한이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큼, 다른 사람과 말할 땐 눈을 보고 얘기합시다.”

“아, 미안하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너무 달라졌는지라....”

황보 가주가 불편한 듯 마른 기침을 내뱉을 때 강엽은 그와 함께 온 황보진악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 저잣거리에서 시비를 걸다 만인이 지켜보는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경험 때문인지 황보진악은 묘하게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붓기는 그럭저럭 가라앉았군.’

목숨이 오락가락한 부상을 입히진 않았지만 가족도 몰라볼 정도로 얼굴이 퉁퉁 부었던 것이다.

아들의 낌새를 알아챈 황보 가주가 눈을 반짝였다.

“호오, 자네가 귀영이로군. 사람들 보는 앞에서 내 아들놈을 때려눕혔다면서?”

“그렇게 됐습니다.”

강엽이 덤덤하게 대꾸하자 당문주가 엄히 꾸짖었다.

“황보세가주께 그 무슨 결례인가? 사과드리게.”

“하하, 뭘 그런 거 가지고 그러시오? 사내놈들끼리 주먹다툼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냥 말만 그런 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지 황보세가주는 강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

“바닷길을 통해 들어오는 홍모귀(紅毛鬼)들이 이런 식으로 인사한다네. 서로 빈 손을 맞잡아 적의가 없다는 걸 알려주는 거라던데, 그네들 말로는 악수라고 하던가?”

한마디로 손을 맞잡아서 며칠 전의 일을 훌훌 털어버리자는 뜻.

덩치만큼이나 성격이 시원시원한 쾌남아인 것 같았다.

“악수라... 색목인들이 그런 인사를 나눈다고 얼핏 들은 것 같긴 하군요.”

강엽이 손을 맞잡자 황보세가주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면서 마주 잡은 손에 힘을 꽉 쥐었다.

단순히 덩치만 큰 게 아니라 태어날 때부터 범인을 능가하는 신력을 타고나는 황보 씨족이었다.

내공을 일으키지 않아도 어지간한 사람들은 손이 부러지는 고통에 비명부터 지를 터.

하지만 입꼬리를 올리며 마주 힘을 주자 오히려 황보세가주의 손이 창백하게 질렸다.

처음엔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을 지었던 황보세가주는 강엽이 악력 싸움에서 한 치도 밀리지 않자 입꼬리를 씰룩거리면서 짧게 내뱉었다.

“생각보다 억세구만. 아들놈이 당할 만해.”

“과찬이십니다.”

암묵적인 합의를 봤다는 듯 함께 떨어진 두 사람의 손은 핏기가 가셔서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인정하지. 자네는 자기 주장을 관철할 힘을 가졌네. 적어도 말만 앞선 애송이는 아니야.”

그건 방금 전의 힘싸움이 아닌, 강엽이 이제껏 걸어온 행보를 조사하고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리라.

황보세가주가 이어 말했다.

“본가는 광명마교와의 최전선에 있네. 놈들이 언제 쳐들어올지 몰라서 빨리 돌아가봐야 해. 가급적 대회합이 빨리 끝났으면 좋겠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강엽의 확답에 황보세가주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당기고는 아들과 함께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황보세가주가 간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당문주를 알아보고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당천경은 정중하게 화답했고, 덩달아서 강엽은 각 파의 문주들과 원로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여기 있는 이들이 모두 이쪽의 편은 아닐 테지.’

아마 결심을 내리지 못한 자들이나, 속마음을 숨기고 접근하는 자들도 적지 않으리라.

주인을 찾지 못한 자리가 드문드문 눈에 띄는 가운데, 총군사 제갈의현을 비롯한 무림맹의 주요 인사들이 들어왔다.

대앵-

제갈의현이 들고 온 종을 치는 것과 동시에 회당 가득 울려 퍼진 청아한 전성.

[맹주님께서 드십니다.]

* * *

방금까지 웃고 떠들던 자들이 정숙하자 조금 전 제갈의현이 나온 문에서 발소리가 들려온다.

황보세가주 못지않게 꽉 찬 근육을 지닌 노인의 등장에, 어느덧 자리에서 일어난 좌중의 얼굴에도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유일하게 아무렇지 않은 것은 강엽과 멀리 떨어진 검성뿐.

대회합의 맹규에 따라 검을 풀고 왔음에도 꼿꼿한 자세에선 보검처럼 날선 기도가 풍긴다.

천하팔존 두 명의 존재감이 장내를 꽉 메우자 좌중도 이번 대회합의 무게를 실감했는지 연신 마른침을 들이켰다.

‘멸도 혼원도왕 팽무강.’

하북팽가의 태상가주로서 맹주에 오른 이. 머리는 허옇게 샜는데도 늙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단상 위에 오른 맹주는 맹방의 인사들을 두루 둘러보며 양손을 모아 포권의 예를 갖추었다.

“무림맹주 팽 모가 삼가 무림 동도들을 뵙소. 귀한 걸음을 해주신 동도 여러분께 감사드리오.”

“무림맹주를 뵙습니다!”

지진이 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강한 충격이 장내를 강타했다. 백도 고수들의 웅혼한 공력이 목소리에 담겨 동심원처럼 퍼져나간 것.

하수들은 감히 감당할 수 없는 압도적인 존재감이었다.

‘이 정도는 버텨야 대회합에 참석할 수 있다는 건가?’

강엽도 약간은 울렁감을 느낄 만큼 압도적인 기파의 향연 속에서 맹주가 제갈의현을 돌아봤다.

고개를 살짝 숙인 제갈의현이 다시 종을 치자 장내를 가득 메웠던 기파가 죽은 듯이 가라앉는다.

그제서야 숨통이 트였다는 듯 일부 사람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가운데 제갈의현이 발언했다.

“맹주님의 요청과 원로회의 재가로 제 이백사십칠회 무림맹 맹방대회합이 개최되었음을 선언하는 바입니다. 이번 대회합의 안건은 총 열여섯 개로, 각각의 안건에 대해선 미리 공지를 받으셨을 겁니다.”

열여섯 개의 안건.

개중엔 광명마교에 대한 사안은 물론, 강엽이 데려온 흑룡교도들의 처우 문제도 있었다.

“가장 먼저 논의할 안건은....”

“이럴 시간이 없소!”

대담하게 총군사의 발언을 자른 노인의 외침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기함했다.

“이런 미친! 제정신인가? 어느 안전이라고...!”

주변에 앉아있던 자들이 옷깃을 당기며 말렸지만 난입한 자는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뭇 좌중의 비난과 호기심을 한 몸에 받은 노인이 홀로 일어나서 두 손을 모으고 외쳤다.

“총군사님,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이 늙은이는 복건성의 우문가에서 온 총관 우문제신입니다!”

“가만. 우문 성씨를 쓴다면... 우문세가인가?”

“광명마교에 복속된 자들이 아닌가. 그런 자들이 신성한 대회합에 들어왔다고?”

뒤늦게 노인의 정체를 깨달은 자들이 끌어내려야 하는 게 아니냐며 손가락질을 했다.

강엽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우문세가라....’

지난날 황산에서 싸웠던 금패급 낭인.

배다른 형제를 죽여 가주의 위를 찬탈했던 신무검 우문극이 자신과 싸우다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하나 사정을 모르는 자들은 우문세가가 광명마교에 복속된 줄로만 알고 있으니, 우문세가의 총관을 향한 눈길이 사나운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장내가 시끌벅적해지자 제갈의현이 묵직한 전성을 발했다.

[정숙하시지요.]

“.......”

딱히 노여움이 깃들지 않았음에도 도떼기 시장을 방불케 했던 소란이 한순간에 가라앉는다.

[대회합에 참여한 분들께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권리가 있습니다. 하나 그건 정당한 절차를 거쳐야 가능한 일. 발언권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소란을 일으키면 총군사의 권한으로 퇴장을 명할 수 있습니다.]

이어 우문세가의 총관을 향해서도 조용히 일갈했다.

[우문세가의 총관께서도 앉아주시지요.]

따르지 않으면 내쫓겠다는 의지가 전해지자 늙은 총관도 감히 억지를 쓰지 못했다.

“아, 알겠습니다. 이 늙은이가 실언했습니다. 부디 용서해주십시오, 총군사님.”

한바탕 소란이 가라앉은 뒤에야 제갈의현이 맹주에게 눈짓으로 허락을 구해 다시 논의를 재개했다.

작고 가벼운 사안부터 시작해서 점차 크고 무거운 사안으로 넘어간다.

‘그렇다 해도 전부 전쟁과 관련된 일이지만.’

이를테면 각 맹방이 운영하는 철방에서 병장기를 대량으로 생산해 무림맹에 보내면, 전쟁이 끝난 뒤에 대금을 지급하는 건이 있었다.

기실 대부분 사전에 논의를 끝냈는지라 형식적인 절차만 따르고 빠르게 넘어가고 있었다.

최종적으로 남은 사안은 세 건.

“열네 번째 사안은 새로운 타격대를 창설하는 계획안입니다.”

“새로운 타격대라.... 이미 십이전대(十二戰隊)가 있는데 또 만들 이유가 있습니까? 외려 오합지졸이 되진 않을까 우려됩니다만.”

십이전대. 무림맹이 보유한 타격대로, 전 병력을 동원하면 오천 명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들 전원이 고수임을 감안하면 어지간한 대문파 네다섯과 자웅을 겨뤄볼 만한 전력.

그런 십이전대를 놔두고 다른 타격대를 조직하겠다는 말에 참석자들이 회의감을 드러냈다.

“지금 창설해도 제대로 된 인재들이 들어올지도 의문이거니와, 훈련은 어떻게 한답니까? 손발을 맞춰보지도 않았으니 오합지졸일 텐데요.”

“옳은 말씀. 전적으로 동의하오. 차라리 십이전대의 인원을 확충하는 게 낫지 않겠소?”

여러 사람들이 고개를 저었지만, 찬성 의사도 만만치 않게 많았다.

“광명마교에게 침탈당한 고장에서 탈출한 생존자들로 편성된 조직이외다. 그들을 십이전대에 배속시켜봤자 다시 손발을 맞춰야 할 텐데, 차라리 한 군데에 집어넣는 게 효율적이지 않겠소?”

“하지만 무공 수준이 들쭉날쭉할 텐데....”

“찬성합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수군거림을 집어삼켰다.

앞선 소란의 원흉으로 지목된 우문세가의 늙은 총관이 손을 번쩍 들고 찬동을 표하고 있었다.

“우문가의 생존자들은 새로운 타격대 조직에 찬성합니다. 이 늙은이가 가장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또 저자인가. 우문세가는 그전에 자신들이 무고하다는 것부터 소명해야....”

다른 자들이 쯧쯧 혀를 찰 때였다.

“남궁가도 지원하겠습니다.”

지금껏 조용히 있던 남궁상아가 차분한 목소리로 발언하자 장내는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시끄러워졌다.

우문세가 역시 복건을 대표하는 대가문이지만, 천하팔존을 배출한 팔대세가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바.

“남직례, 절강, 강서, 복건. 광명마교에게 터전을 짓밟힌 우리는 고향을 잃고 도망쳤습니다. 우리는 어떤 난관이 있어도 고향을 되찾을 겁니다.”

목소리에 깃든 강인한 의지를 느낀 생존자들이 남궁상아의 이름을 연호하기 시작한다.

비웃었던 자들이 분위기에 짓눌려 입을 다물자 자연히 찬동하는 쪽으로 기울어졌다.

맹주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린 것도 그때였다.

“고향을 잃은 동도들로만 ‘척마대(斥魔隊)’의 숫자를 채우진 않을 거요. 지원자를 받겠소.”

척마대. 이름 그대로 마를 물리친다는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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