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41화 (239/450)
  • 45화. 사절 (1)

    이른 아침의 저잣거리는 부산스럽기 그지없었다.

    정주의 양민들은 갑자기 무림맹의 성문에서 푸른 무복을 걸친 무인들이 대거 대로의 양쪽에 시립하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다.

    무인들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상인들에게 양해를 구하자, 군중들은 구경거리가 생겼나 하는 호기심에 주변을 기웃거렸다.

    넉살 좋은 사람들이 무슨 일이냐고 물어봤지만, 삼엄한 기세를 풍기는 무인들은 입을 꾹 다물 뿐.

    그나마 눈썰미가 예리한 이들만 무인들의 정체가 무림맹의 의전을 책임지는 창화대(昌化隊)임을 알아보고 저들끼리 온갖 추측을 늘어놓았다.

    “.......”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미동도 않는 창화대 무인들의 뺨에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릴 무렵 또다른 무인들이 행진했다.

    좌우에서 높이 치켜든 노란 깃발이 힘차게 나부꼈다.

    깃발 한복판에 아로새겨진 용사비등한 글자를 발견한 이들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맹주기(盟主旗)다!”

    무림맹주가 공식적인 행사에 나설 때 내세우는 깃발.

    맹 내에선, 아니 강호 무림을 통틀어 오직 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깃발이 등장한 것이다.

    무의 대지를 이끄는 시대의 거인이, 무림맹에 찾아오는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몸소 나왔다.

    ‘뭐지? 왕후장상이라도 오나?’

    ‘관부나 조정에서 높으신 분이 오는 거라면 무림맹이 적어도 며칠 전에는 발표를 했을 텐데...?’

    계산 빠른 자들이 내심 주판알을 튕기고 있을 때, 굵직한 목소리가 저잣거리의 소요를 가라앉혔다.

    “슬슬 올 때가 되지 않았나?”

    무림맹주 멸도 팽무강.

    강건한 무인들조차 기가 질릴 정도로 장대한 거구를 지닌 노익장의 현현에 모두가 숨을 죽였다.

    하늘 높이 걸린 태양을 곁눈질한 총군사 제갈의현이 한쪽 눈썹을 굽히며 말을 받았다.

    “약속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습니다. 그래도 그분께서 약속에 늦은 적은 한 번도 없으시니....”

    무언가 깨달았는지 제갈의현이 말끝을 흐렸다.

    그와 동시에 맹주가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으며 텁석부리 수염을 길게 쓸어내렸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휘이이이이잉......!

    별안간 귓가를 사로잡는 소리와 함께 구름 한 점 없는 창공 위로 그어지는 길쭉한 직선.

    얼핏 구름처럼 보이는 하얀 빛줄기는 무림맹의 상공 위에서 유려하게 방향을 틀며 창화대의 위쪽으로 떨어졌다.

    “어어...!”

    “맹주님! 피, 피하셔야 합니다!”

    창화대의 무인들이 뒤늦게 비명 아닌 비명을 질렀지만, 정작 맹주와 총군사는 개의치 않았다.

    “손님이 오는 것뿐이니 소란 떨 것 없느니라.”

    타악-!

    무림맹주의 면전에 떨어지는 빛줄기.

    흙먼지도 일으키지 않고 가뿐하게 착지한 사람은 긴 도포 자락을 휘날리는 반백의 초로인이었다.

    날카로운 눈매에 고집스러운 인상을 풍기는 그는 대로에 가득한 군중들을 돌아보고는 조금 전까지 밟고 있던 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치 살아있는 것마냥 주인의 손에 착 감기는 검의 모습에 맹주가 껄껄 폭소했다.

    “참 화려하게 등장하시는구려. 어검비행으로 무림맹의 상공을 날아오시다니.”

    “가장 빠른 수단을 골랐을 뿐이외다.”

    천하팔존인 멸도 앞에서도 허리를 꼿꼿이 세우는 존재감.

    맹주와 시선이 얽힌 그가 정중하게 양손을 모았다.

    “화산의 장문이 삼가 맹주를 뵈오이다.”

    “어서 오시오, 검성.”

    검성 매화신검 서화진.

    무당의 검선, 남궁의 궁검과 더불어 백도 정파를 대표하는 절대검호의 현신에 뭇 군중들이 경악했다.

    화산의 무신이 강림했다느니, 팔존이 한 장소에 모였다느니 하는 수군거림이 물결처럼 퍼져나가자 맹주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먼 길을 오느라 여독이 많이 쌓이셨을 텐데 제자들이 있는 곳에서 좀 쉬시겠소?”

    “음, 아니. 아이들이 있는 곳은 나중에 가겠소. 맹주께서 당장 바쁜 일이 없다면....”

    “허허, 화산의 장문께서 오셨는데 내 어찌 바쁘다는 핑계를 대겠소? 없는 시간도 내야지요.”

    근래 난세에 접어든 강호의 일로 눈 코 뜰 새도 없이 바빴지만, 화산의 장문인이자 천하팔존인 검성이 방문했다면 온전히 그를 위해 시간을 비워둬야 마땅했다.

    두 절대자가 어깨를 나란히 하며 성문에 들어가자 창화대의 무인들이 두 사람을 호종했다.

    * * *

    “소식은 들었겠지?”

    당천경이 눈매를 세웠다.

    맞은편에 앉은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께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워낙 요란하게 등장했기에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검을 타고 날아왔다고 하던가.

    무공을 잘 모르는 사람들, 아니 무림맹의 고수들조차 신선이 하산했다면서 호들갑을 떨고 있었다.

    ‘어검비행을 봤으면 그럴 만하지.’

    강엽도 진조가 자신의 몸으로 쓰기 전에는 그런 게 정말 가능할 줄 모르지 않았던가.

    “검성께선 사마외도에 단호하신 강경파. 이달 초파일에 맹방대회합이 열리면 전쟁을 주장하실 걸세.”

    “흑룡교도들의 문제는 덤이겠군요.”

    “이제 어찌할 텐가?”

    “집법원의 조사가 끝나면 풀려날 텐데 따로 걱정할 게 있겠습니까?”

    “정말 모르고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맹방대회합의 결정은 절대적일세. 무림맹주라 해도 뒤집기는 힘들어.”

    “맹방대회합을 통해 흑룡교도들을 징벌하려고 할 거란 말씀이군요.”

    느긋하게 대답하면서 차를 마시는 강엽의 모습.

    당천경이 그런 강엽을 묘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동안 그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헤아렸다.

    ‘흑룡교도들의 처우는 이미 총군사와 협의된 사항이다. 그걸 검성이 마음대로 뒤집으려고 하면 총군사는 물론 맹주의 입장도 난처해져.’

    하물며 흑무암쇄진의 거래가 걸린 만큼 맹주 측에서도 순순히 물러날 수는 없었다.

    맹주가 그 점을 들어 검성을 설득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검성도 자기 주관이 뚜렷하니 뜻을 굽히진 않겠지. 맹의 화합을 위해선 흑룡교를 배격해야 한다고 나올 가능성이 높다.’

    그런 걸 생각하면 일전에 진산권 황보진악이 주장했던 말도 일부 일리가 있었다.

    호송단이 분란거리를 무림맹에 끌고 왔다고 했던가.

    강엽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지만, 만약 맹방대회합에서 과반의 문파들이 검성에게 동조한다면 정국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광명마교와의 전쟁을 앞두고 여론이 분열되는 게 옳지는 않을 터.

    당천경도 그걸 알고 있으니 이리 강엽을 불러 대책이 있냐고 다그치는 것이리라.

    “천하팔존의 영향력은 자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방대하네. 설령 흑룡교에 악감정이 없다 할지라도 검성께서 주장하시면 돌아설 자들이 생길 게야.”

    “흑무암쇄진이 걸려도 말입니까?”

    “...흑무암쇄진이 광명마교의 천적이기는 하지. 하나 그들을 막을 방법이 하나뿐이라고 생각하진 말게.”

    당연히 그럴 것이다. 광명마교가 갑자기 툭 튀어나온 것도 아니고, 옛날부터 존재했던 곳인데 대비책을 마련하려는 시도가 없었을까.

    다만 흑무암쇄진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

    “낭왕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천하팔존은 천하팔존으로 맞서겠다? 하나 낭왕은 무림맹의 일원이 아닐세. 낭왕을 무시하는 자는 없겠지만, 검성과 비교하면....”

    “제가 낭왕께 부탁을 드린 건 검성이 무력이나 위상으로 저를 찍어누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절 맹방대회합에 데려가주십시오.”

    “...!”

    한마디로 모든 맹방들의 앞에서 검성과 일대일로 설검(舌劍)을 주고받겠다는 뜻.

    근자에 명성을 얻었다고 하나, 아직 새파랗게 젊은 강엽이 수십 년간 강호에 군림한 절대자와 설전을 벌이겠다는 포부를 밝히자 당천경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자네 혓바닥이 제법 날카롭긴 하지만 그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나?”

    “생각만 하고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이 문제를 무림맹에 가져왔으니 당사자로서 매듭을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말은 청산유수로군. 이길 자신은 있나?”

    비록 검성이 타고난 언변꾼은 아니라지만 오랫동안 팔존의 일인으로 살아온 화산 장문인을 설전으로 이길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마지막 패가 있긴 합니다.”

    이어지는 강엽의 말을 들은 당천경은 한동안 말문이 막힌 것처럼 입을 굳게 다물었다.

    열을 셀 즈음에야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음, 확실히 그 방법이라면....”

    마지막의 마지막에 가서야 쓰려고 했을 만큼 제법 큰 출혈을 각오해야 하는 수.

    당천경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하기는 했지만, 강엽도 가급적 이 방법만은 쓰고 싶지 않았다.

    ‘검성의 말솜씨가 떨어지기를 바랄 수밖에.’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무림맹의 맹방들이 참여하는 대회합이 열렸다.

    * * *

    따사로운 햇살이 눈꺼풀을 찌르고 들어오자 강엽은 반사적으로 인상을 찌푸리며 이불을 끌어올렸다.

    몸이 타진 않더라도 바늘로 찌르는 것마냥 따끔했던 것.

    그러다 문득 몸에 닿는 부드러운 느낌에 멈칫했다.

    탄탄한 가슴팍에 뺨을 부비적거리는 백서희가 그를 올려다보며 입술 끝매를 당기고 있었다.

    “일어났네?”

    “...나 때문에 깬 건가?”

    “아니, 더 일찍 깨서 보고 있었지. 끙끙거리는 게 은근 귀엽더라.”

    “너는 진짜....”

    강엽이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속살을 부대끼고 있기 때문에 굉장한 자극이 느껴졌는데, 백서희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얘도 안녕한가 봐. 어제 그렇게 기운차게 놀았는데도 안 죽었네.”

    “흠흠, 아침이니까....”

    “하긴 이렇게 예쁜 여자가 벌거벗고 있는데 지가 분기탱천하지 않고 배겨?”

    그 순간 음흉한 미소를 지은 백서희가 몸을 끌어올리며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그런 의미에서 한 판 더 할까?”

    짓궂게 웃으면서 귓불을 살짝 깨문다. 꽉 찬 뭉클함이 맨살을 건드리자 강엽이 벌떡 일어났다.

    “어제 제발 살려달라고 한 주제에 뭐?”

    “풋, 뭐래. 밤엔 네가 이겨도 낮엔 내가 이기거든? 누가 이기는지 한번 해봐?”

    하지만 애석하게도 두 사람이 침대 위에서 다시 승부를 겨루는 일은 없었다. 그전에 복도 저편에서 두 사람의 방으로 걸어오는 기척이 다가왔던 것이다.

    “두 분, 기침하셨습니까?”

    차분한 목소리로 묻는 여인은 객당에서 일하는 시비였다.

    “강 무사님을 찾는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백서희가 새치름한 얼굴로 강엽을 흘겨보았다.

    “대회합은 오후에 있는 거 아니었어?”

    “그전에 이것저것 맞춰볼 게 있으니까. 사람들도 만나봐야 하니 일찍 준비해야지.”

    “승부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네.”

    아쉬워하면서도 순순히 강엽을 놔주는 그녀였다. 이불이 떨어져내리며 하얀 피부가 드러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고혹적인 몸이 욕망을 부채질했지만, 강엽은 애써 누르며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시비에게 말했다.

    “곧 준비할 테니 기다려달라고 전해주시오.”

    “알겠습니다. 다만 손님들께선 식당에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준비해도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에 서로를 돌아보는 두 사람. 시비가 돌아가자 백서희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맺혔다.

    “그렇다는데 어쩔래?”

    강엽이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 * *

    짧지만 뜨거웠던 거사를 치른 뒤 백서희가 강엽의 옷매무새를 정리해주며 물었다.

    “긴장되진 않아?”

    “글쎄, 너는?”

    “아무렇지 않다고 말하고 싶은데... 상대가 워낙 거물이라 그런지 심장이 벌렁거리네.”

    “별 일은 없을 거야.”

    강엽이라고 긴장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모든 게 계획대로 된다는 생각은 오만이었다.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다.’

    이제 남은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실전에 임하는 것뿐.

    비록 손발을 움직여서 싸우는 건 아닐지라도 천하팔존의 일인과 겨루어야 한다. 백 명이 넘는 흑룡교도들의 목숨이 걸린 일이었다.

    그렇게 말끔히 차려입은 두 사람이 식당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시비가 가운데 자리를 가리켰다.

    “저분들이십니다.”

    “....”

    주변 사람들이 곁눈질을 주는 곳.

    붉은색 궁장을 입은 여인이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리긴 했으나 그 위로 드러난 이목구비만으로도 보기 드문 미인임을 알 수 있는 용모.

    다만 쉽사리 말을 붙이는 자는 없었다. 옆자리에 방만하게 앉아있는 중년 사내 때문이다.

    훤히 벌어진 앞섶 사이로 잘 발달한 근육이 여과없이 드러난 사내.

    아침 나절부터 술병을 쭉쭉 들이키고 있는 모습이 선 굵은 턱선과 맞물려서 거친 흥취를 자아냈다.

    “어르신, 이 시간에 술은 좀....”

    “하하, 괜찮다. 이 정도로 내가 취하겠느냐?”

    “그래도 술냄새가 풍기는데요.”

    “그것도 날려버리면 그만이지.”

    그러면서 우두커니 선 강엽을 향해 이쪽으로 오라는 듯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백서희가 어이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 사람들이 왜 여기서 나와?”

    거친 인상의 중년 사내와 화사한 궁장 미인.

    그들은 낭왕과 홍가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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