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밀담 (2)
무림맹에 들어온 직후 호송단은 뿔뿔이 흩어졌다.
당묘정과 청수 등 연고가 있는 이들은 사문의 어른들을 따라갔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무림맹의 객당에 짐을 풀었다.
“흑룡교도들은 집법원(執法院)의 조사를 받을 거예요. 조사가 끝나면 맹주님께서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서 처우를 결정하지 않을까 싶어요.”
“그건 당문주님의 말씀이오?”
“네. 아버지께서도 총군사님께 들으셨대요.”
객당에 찾아온 당묘정의 말.
차를 들이키는 강엽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적법한 조사가 그런 뜻이었나.’
연가휘가 단속을 했다지만 모든 흑룡교도가 진심으로 투항하는 것은 아닐 터.
취조와 심문에 이골이 난 집법원의 조사관들이라면 그 사실을 능히 눈치채고도 남겠지만....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들이 최대한 현명하게 처신하길 바랄 수밖에.’
어차피 투항하지 않는다면 투옥되는 결말밖에 남지 않는다.
무림맹에 굴복하느니 뇌옥을 가기를 선택할 만큼 흑룡교를 뼛속 깊이 추종한다면, 강엽도 그런 사람에게는 더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참, 아버지께서 호송단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하셨어요. 현운 도장님과 연 도고님을 비롯한 명숙들께서도 오실 거예요.”
각자 구파와 팔가를 대표하는 고수들.
그런 이들까지 불렀는데 단순히 먹고 마시기만 할 리가 만무했다.
“당문주님이 부르신다면 당연히 가야지.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하겠다고 말씀해주시오.”
“예, 그리고....”
용건이 끝났으니 돌아갈 일만 남았는데, 그녀는 좀처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식어가는 찻잔을 매만지면서 우물쭈물했다.
“...? 할 말이 남았소?”
“아, 그게... 노파심에 드리는 말씀인데, 아버지께서 약간 듣기 불편한 말씀을 하실지도 몰라요.”
“그렇군. 각오는 됐소.”
“예?”
자세히 듣지 않고도 납득하는 강엽의 모습.
오히려 당묘정이 놀라서 토끼눈을 뜨자 강엽이 설핏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귀한 딸을 위험한 곳에 데려가지 않았소. 당문주님이 역정을 내시는 게 당연하지.”
“하지만 그건 제가 원해서....”
“세상 어떤 부모도 자식이 위험한 곳에 가는 걸 반기지는 않소. 무가라고 특별히 다르진 않겠지.”
“전 당문의 후계자예요. 제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어찌 가문 사람들에게 싸우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 말도 맞소. 당문주님도 알고 계실 거요. 다만 문주의 입장과 부모의 입장이 언제나 일치하진 않소. 소저가 유일한 자식인 만큼 더욱 애타실 테고.”
“그래도....”
“당문주님께서 날 혼내셔도 내 편을 들진 마시오. 소저를 위험한 곳에 데려가서 알차게 써먹었으니 그 정도 잔소리는 들어야 하지 않겠소?”
“...제가 한 건 별로 없는데요.”
당묘정이 얼굴을 추욱 늘어뜨렸다.
팔가의 후계자라는 명함을 달고 있음에도 막상 싸움에 큰 도움이 됐다는 생각은 안 들었던 것이다.
“소저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건지지 않았소. 그건 다른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렇다고 당묘정의 활약이 미비한 것도 아니었다.
혈라분에 중독된 약쟁이들과 싸우면서 술법진을 탈출할 때도 독술로 활로를 열어주지 않았던가?
“소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몰라도, 난 소저와 동행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한 적 없소.”
시무룩했던 당묘정의 얼굴이 확 밝아지더니, 근심이 가신 듯 말간 미소가 떠올랐다.
“...푸훗, 힘낸 보람이 있네요.”
“그래서 언제까지 가면 되겠소?”
“가문에서 마차를 보낼 거예요. 무림맹 안에 있어도 거리상 좀 멀거든요. 걸어오시면 꽤 걸릴 거예요.”
“그렇군.”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당묘정이 방을 나서자 백서희가 교대하듯 들어왔다.
“당 소저가 왔었네? 무슨 얘길 한 거야?”
“당문주가 우릴 저녁 식사에 초대하겠다는데.”
“흐음.”
강엽의 뒤편에 돌아온 백서희가 콧소리를 내며 두 팔을 목에 감았다. 목욕을 해서 물기가 남은 살갗 위로 은은한 울금향이 올라왔다.
“무림맹에 온 소감이 어때? 설레진 않아?”
“딱히. 할 것만 하고 떠나야지.”
물론 그동안 뽑아먹을 것은 최대한 뽑아먹고 떠나야 하리라. 오사도의 피로 배를 채운 만큼 도중에 흡혈 충동이 폭발할 일도 없다는 게 다행이었다.
적어도 두어 달은 피를 안 마셔도 되겠지.
“돌아갈 때는 우리끼리만 갈까?”
“숙정방이랑 흑룡교도들은 어쩌고?”
“숙정방은 노주로 돌아가고, 흑룡교도들은 다른 길로 운남에 가면 되지. 다 같이 가면 눈에 띄니 인원을 나눠서 가는 게 나아.”
“도중에 다른 데도 들르게?”
“성도에도 볼일이 있고... 도중에 나쁜 놈이 보이면 잡고 가자고.”
그제야 백서희도 강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피식 실소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움직이면 흡혈하는 데 제약이 있으니 따로 움직이는 편이 낫긴 했다.
* * *
무림맹은 무인들의 대지다.
무인들의 생활 공간부터 업무를 보는 장소, 수련을 위한 연무장, 배를 채우는 식당까지 마련되어 있는 만큼 광대할 수밖에 없다.
하물며 무인들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처리할 수는 없다. 그들을 보좌하는 사람들까지 헤아린다면 무림맹에 상주하는 인구는 평상시에도 수천 명에 달했다.
양 마교의 준동으로 온 강호가 끓어오르는 작금의 사태에서 무림맹의 인구는 더욱 늘어난 추세.
무림맹을 방문하는 손님들이 머무르는 숙소는 구획별로 따로 지정되어 있었다.
맹방의 무인들이 기거하는 곳은 내성과 가까운 장원에, 맹방과 상관없는 손님들은 외성의 객당에.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맹방의 지위에 따라서 숙소가 다르다니. 너무 대놓고 차별하는 거 아냐?”
“구파나 팔가는 지원 규모가 다르니까요.”
맞은편에 앉은 단목정이 조용히 대답했다.
아무래도 방주의 신분이다 보니 사전에 이것저것 많이 조사해본 모양이었다.
“구파나 팔가 등 대문파들이 해마다 무림맹에 보내는 돈과 인력은 어마어마한 수준입니다. 구체적으로 알려진 건 없지만, 각 문파가 보내는 돈이 어지간한 군소방파의 일년 예산을 넘는다고 합니다.”
여기에 자파의 제자들까지 보내서 요직을 차지하니 자연히 대문파들의 위상이 높아질 수밖에.
백서희가 뜨악했다.
“그렇게 많다고?”
“그게 대문파의 저력일세.”
단목정의 옆에 앉은 야차마곤이 부연했다.
연회에서 술을 진탕 마실 생각에 신나서 달려온 그는 실실 쪼개는 낯짝을 숨기지 않았다.
“팔가는 각 성을 대표하는 대호족들일세. 그들이 버는 돈은 대상인들 못지않아. 구파 역시 그렇지. 승려들과 도사들이 청빈하게 산다지만, 그건 구파에 재물이 없어서가 아닐세. 황실이 하사하는 전답, 귀족들과 대상인들이 공양하는 재물, 속가 제자들이 바치는 성의까지... 알고 보면 구파야말로 숨겨진 알부자야.”
그렇게 모은 재물 중 일부가 무림맹에 흘러들어가서 무인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 쓰이는 것이다.
무림맹도 돈 나올 구석을 만들고 있지만, 대문파들의 협찬이 없다면 존속 자체가 불가능했다.
“중소방파들은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무림맹도 돈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한 게야.”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지요.”
강엽이 여상하게 중얼거리는 그때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리듯 마차가 덜컥 멈추었다.
마부가 문을 열자 일단의 무리가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여러분.”
화사한 궁장 차림에 꽃단장까지 한 당묘정이 당문의 무인들과 함께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절 만에 몰라보게 바뀐 모습에 일행의 눈이 휘둥그레지자 그녀가 뺨을 긁적이며 쑥스러워했다.
“좀 이상한가요?”
“전혀요. 예쁘기만 한데요. 이럴 줄 알았으면 우리도 좀 꾸미고 올 걸 그랬네.”
백서희가 그렇게 대꾸하면서 도끼눈을 뜨고 째려보자 강엽은 먼 산을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들처럼 그 역시 당묘정에게 잠시나마 눈길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빌미를 주면 두고 두고 책잡힌다.’
위기감을 감지한 그는 뻔뻔하게 철면피를 쓰고 나가기로 했다.
“흠흠, 다른 분을 좀 소개해주시겠소?”
“아, 이분은 무림맹의 장원을 관리하는 총관님이세요.”
“당여진이라고 합니다, 강 무사님.”
반백의 노파가 읍했다. 폐쇄적인 혈족답게 별장도 가문의 인물을 쓰는 것 같았다.
“강엽입니다. 신세를 지게 됐습니다.”
“무슨 말씀을. 이쪽으로 오십시오. 문주님께선 안쪽에 다른 분들과 함께 계십니다.”
“저희가 가장 늦게 온 모양입니다.”
“다른 분들도 막 도착하셨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가장 멀리 계시니까요.”
하긴 다른 사람들은 다 근처에서 머무르고 있을 테니 일행보다 늦게 출발해도 먼저 도착했으리라.
그렇게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어라?”
“당신은...!”
예상치 못한 사람의 등장에 다들 깜짝 놀랐다.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 여덟 살 남짓한 소년의 손을 잡은 채 무사들의 호종을 받고 있었다.
여인의 정체는 무림맹으로 오는 길에 연가휘와 비무를 치렀던 남궁상아였다.
일행을 발견한 남궁상아가 눈썹을 구붓하게 굽혔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포권을 쥐었다.
“오신다는 말씀은 들었습니다. 일전엔 제대로 인사를 못 드렸지요. 남궁가의 상아입니다. 그리고 이 아이는 제 동생입니다.”
낯을 가리는 듯 소년은 누이의 치맛자락 뒤로 쏙 들어가 있었다. 남궁상아의 시선을 받은 소년이 머뭇머뭇 나와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남궁유진이라고 합니다.”
“포권을 해야지.”
누이가 타이르자 남궁유진이 당황해서 조막만한 손을 모았다.
귀여운 얼굴의 소년이 어설프게 어른 흉내를 내자 일행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백서희가 무릎을 굽힌 자세로 눈을 마주쳤다.
“안녕, 누나는 백서희라고 해.”
“예쁘다....”
무심코 중얼거린 소년이 얼굴이 빨개져서 부끄러워하자 백서희가 깔깔 웃었다.
“솔직하네? 이 누나가 많이 예쁘긴 하지?”
백서희처럼 넉살 좋게 다가가진 못했지만 단목정도 남궁유진이 귀여운 듯 미소를 띠었다.
야차마곤도 험상궂은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푸근한 웃음을 터뜨렸는데, 그래봤자 더 흉악하게 보일 뿐이어서 남궁유진은 힉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야차마곤이 해탈한 얼굴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왜 애들은 내 얼굴만 보면 저럴까....”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 좀 하셔야겠네요.”
백서희가 키득거리자 야차마곤이 시무룩해져서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강엽은 남궁상아와 얘길 나누었다.
“동생과 나이 차이가 제법 나는 것 같소.”
“예. 어머니께서 느지막이 낳으셔서. 제가 열다섯 살 때 동생이 태어났습니다.”
왜 남궁세가주가 죽기 직전 그녀를 가문의 계승자로 삼았는지 알 수 있었다. 장자라 해도 저렇게 어리다면 가문을 부흥시키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것이리라.
당묘정이 말을 받았다.
“남궁 소저, 아니 소가주도 아버지의 초청을 받고 오셨어요. 남궁세가의 대표로요.”
당묘정이 조금 어색해하며 그녀가 온 경위를 설명하자 강엽이 이채를 발했다.
“대표라고 했소?”
“네. 아버지께서는 차후 무림맹의 지원을 받기 위해선 남궁세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셨거든요.”
“맹방대회합(盟邦大會合)...!”
야차마곤이 신음처럼 목구멍을 쥐어짜내자 당묘정이 맞다는 듯 긍정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제서야 강엽도 어찌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그렇군. 무림맹은 중요한 안건을 맹주가 독단적으로 처리할 수 없었지. 맹에 속한 문파의 사람들이 모여서 논의를 벌인다고 들었소.”
“그게 맹방대회합이에요.”
말하자면 의결권을 지닌 문파들이 중요한 안건을 논의하고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다.
“지금 무림맹은 준 전시체제예요. 다만 광명마교와 전쟁을 하려면 맹방들의 총의가 필요해서....”
그것은 무림맹이 연맹의 성격을 지닌 이상 어쩔 수 없이 짊어지고 가야 할 숙명이었다.
‘모든 문파들이 전쟁을 원하는 건 아닐 테니까.’
광명마교의 영역과 붙어있는 문파들은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만, 비교적 멀리 떨어진 문파들은 그 위협이 피부에 와닿지 않을 터.
물론 광명마교의 위협을 두고만 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문파 전체가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는 것은 원치 않을 것이다.
‘문제는 광명마교 때문에 혈교가 뒷전으로 밀리고 있다는 건데....’
광명마교에 의해 가문을 짓밟힌 남궁상아가 과연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도움을 줄 의향이 있긴 한 걸까?
‘두고 보면 알겠지.’
* * *
당문주가 주최한 저녁 식사엔 일행과 남궁세가 말고도 낮에 봤던 명숙들도 대부분 자리하고 있었다.
무당의 현운 도장과 아미의 난풍혜검 혜정 사태, 그리고 서하무량검 적운 도장까지.
여기에 강엽과 함께 호송단을 이끈 옥청선자 연선하가 참석하자 꽉 찬 듯한 존재감이 풍겼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악공이나 무희를 부르지는 않았으나 자리 가득한 산해진미는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육식을 하지 않는 불가와 도가의 사람들 앞엔 정갈한 소채 요리들이 놓여 있었다.
“와주어서 고맙네. 당천경일세.”
고목처럼 건조하고 강퍅한 인상의 중년인.
무인치고는 조금 마른 것 같았지만, 팔가주의 일인으로서 풍기는 존재감은 실로 묵직했다.
“강엽입니다. 고명하신 암독쌍절을 뵙습니다.”
당묘정이 염려했던 것처럼 당문주가 강엽을 혼내는 일은 없었다.
우묵한 눈빛으로 강엽을 응시하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
“자네 얘기는 아우가 보낸 서찰로 읽었지. 다만 직접 만나보고 싶어서 이렇게 부른 걸세.”
“...당 소저를 고생시켜서 죄송할 뿐합니다.”
“그게 왜 자네가 미안해할 일인가. 저 망아지 같은 녀석이 멋대로 따라나간 것을. 책임을 져야 한다면 자네가 아니라 저 아이와 아우가 져야겠지. 오히려 호송단에 폐를 끼치지 않았는지 걱정이군.”
“당 소저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그녀가 없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겁니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만.”
당천경은 담담하게 말했지만 당묘정이 잘못됐다면 강엽도 그 책임에서 자유롭진 못했을 것이다.
그때 당천경이 전음으로 속삭였다.
[자네들의 노고를 치하하고자 부르긴 했지만, 더 중요한 용건이 있네.]
당연히 짐작하고 있었다. 단지 먹고 마시려고 이 많은 사람들을 부르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이어지는 말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총군사께서도 오실 걸세.]
총군사 제갈의현.
무림맹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그가 방문할 거라는 말에 강엽도 잠시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