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35화 (233/450)

44화. 밀담 (1)

무림맹이 들어선 뒤로 정주는 언제나 구경거리가 넘쳐났다.

무림맹에 드나드는 고수들만 해도 화려하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구파 장문인이나 팔가주가 온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날은 대로 양옆의 다루와 주루가 만석이 된다고 할까?

천하팔존인 무림맹주가 행차할 때도 마찬가지.

오늘은 그런 날이 아니지만, 무림맹 앞의 대로는 이른 아침부터 구경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호송단이 정말 오는 게 맞나?”

“허어, 이 친구가 속고만 살았나. 그들이 오늘 아침에 선강(線江)을 건넜다는 소문이 쫙 퍼졌거늘.”

“오십 리라... 살짝 애매한데. 아침에 출발했다면 신시(申時)쯤엔 도착할 수 있으려나?”

“그보다 바깥이나 보게.”

“바깥... 응?”

시키는 대로 바깥을 돌아본 사내가 눈가를 좁혔다.

맞은편 전각의 기왓장 지붕 위에 몇 사람이 서 있거나 앉은 채 주전부리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호송단을 보러 온 무림인들인 게지. 눈 마주치면 시비 걸지 모르니 너무 오래 보진 말게.”

“허, 무림인들도 구경을 나왔다니....”

“무림맹에 들어오는 마교도라. 그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필시 저 황하의 절경 못지않은 장관일 걸세. 우리 같은 장사치들도 타지로 가면 안줏거리로 써먹을 수 있을 게야.”

“과연...!”

나직이 감탄사를 토하는 일행을 힐끗 본 증년인이 실소하며 찻잔을 기울였다.

그윽한 차향이 콧속 점막을 자극하는데도 머릿속의 생각으로 인해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다.

‘본문을 이용해서 소문을 퍼뜨릴 생각을 하다니....’

눈앞의 일행은 몰랐지만 그는 무림맹의 앞마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하오문도였다. 기루를 운영하면서 무림맹의 정보를 수집하는 게 그의 임무였다.

하지만 얼마 전에 뜻밖의 임무가 내려왔다.

-귀영에게 전폭적으로 협조하라.

대체 윗선과 귀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몰라도 명령이 내려온 이상 거부할 순 없었다.

‘그런 이유로 당주가 몰래 귀영을 찾아갔다고 했었지.’

하남성을 총괄하는 당주가 받은 부탁은 한 가지였다.

호송단의 소문을 퍼뜨려달라는 것.

-정체불명의 마교도들이 전향했다!

-그들은 오는 동안 정파 무림인들의 도전을 받았고, 수십 번을 싸워 모조리 격퇴했다!

-광명마교의 사도가 그들에게 죽었다! 혈교의 교왕도 팔을 잃고 도망쳤다더라!

-녹림의 신물이 그들의 손에 있다!

이중 태반은 귀영이 한 일이지만, 흑룡교도들이 한 일로 교묘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군중은 자극적인 소문에 팔랑귀가 되는 법. 강호 무림에 대해 잘 모르는 자들도 혹할 만한 소문이다.’

하물며 무림맹 근처의 양민들은 강호 소식에 대해 어느 정도 정통한 편이었다. 무림맹이 옆에 붙어있다 보니 이런저런 소문들을 주워들은 것이다.

여기에 하오문에 의해 가공된 소문이 들불처럼 퍼져나갔으니 호기심이 안 생기고 배길까.

“이렇게 되면 무림맹에선 어떻게 나올지....”

“음? 방금 뭐라고 했나?”

“...아니, 혼잣말일세.”

“원 싱겁게스리.”

* * *

“온다!”

누군가 비명처럼 외친 고함.

하지만 굳이 목청을 높이지 않아도, 대로 양옆에서 호송단이 오기만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군중들은 저 멀리 성문이 있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말들이 다그닥다그닥 땅바닥을 밟는 소리가 깔리고, 그 위에 앉은 자들이 개선장군처럼 행차하는 모습에 군중들이 술렁거렸다.

“저치들이 마교도인가?”

“아니, 마교놈들이 말을 탈 리가 있나. 마교놈들을 데려온 분들이 아니겠나?”

일부는 침을 뱉고 욕하기도 했다. 소문이 어떻든 마교도라는 꼬리표가 붙자 악감정을 품은 것.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흑룡교도들을 에워싼 채 눈빛을 희번덕거리지 않았다면 숫제 돌이라도 던졌을 기세였다.

흑룡교도들마저 긴장감에 목을 꼴깍 움직일 때 백서희가 은밀히 전음을 보냈다.

[소문을 냈는데도 이렇다니....]

[정주는 무림맹의 영향이 짙은 땅이니까. 무림과 상관없는 사람들도 마교라면 덮어놓고 싫어하겠지.]

알게 모르게 마교에 대한 험담을 들었을 테니 좋은 말이 나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나마 소문을 퍼뜨려서, 그리고 숙정방의 칼잡이들이 철통같이 방호하니 욕만 지껄이는 거지.

그렇게 전음을 주고받으면서 깅엽은 무림맹의 성벽 위를 주시했다.

호송단이 가시권에 들어올 때까지도 꿈쩍도 안 한 그들은, 거리가 백 장 안으로 줄어든 뒤에야 바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끼이익 경첩 돌아가는 소리를 냈다. 성문이 컸기 때문에 강건한 무인들 네 명이 달라붙고서야 열리기 시작했다.

호송단의 뒤를 따라들어온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안쪽에서 나온 사람들의 면면에 기함했다.

“총군사님께서 나오시다니...!”

“총군사님만이 아닐세. 함께 오신 분들을 보게! 당문주님과 무당제일검이 아니신가!”

“아미와 청성의 어른들도 계시오!”

호송단에 제자와 자식을 둔 구파와 팔가의 중추들이 총군사 제갈의현과 함께 나온 것이다!

무림맹의 인사들을 알아본 건 군중들도 마찬가지라서 아까와는 다른 소란이 일었다. 그런가 하면 곳곳에 포진한 하오문의 바람잡이들이 호송단의 업적을 떠들고 있었다.

한중의 암시장과 광명마교의 사도를 격살한 일, 도전한 정파 무림인들을 죽이지 않고 모두 제압했다는 말이 나돌자 거리는 도떼기 시장처럼 시끌벅적해졌다.

제갈의현과 함께 나온 각파의 고수들은 제자들의 공로가 군중들의 입을 타고 퍼져나가자 뿌듯한 심정을 감추지 못했다.

담담한 표정을 짓는 것은 총군사 제갈의현과 그의 양옆에 시립한 두 사람뿐.

마르고 건조한 인상의 중년인과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는 서글서글한 도사를 발견한 강엽의 눈에 기광이 일었다.

‘당문주와 무당제일검.’

정도십대고수로서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그들이 마중을 나오자 당묘정과 청수도 가슴 속에서 뜨거운 마음이 북받치는지 멀리서 포권을 올렸다.

두 사람의 고개가 가볍게 움직이는 것을 본 강엽이 목소리에 내공을 담아 말했다.

다행히 짙은 먹구름이 태양을 가린 덕에 진기를 움직이는 데는 하등 문제가 없었다.

[전원 하마(下馬).]

나직하지만 또렷한 전성이 맨 뒤의 후기지수들의 귀에까지 닿는다.

거물들의 등장과 호송단의 공로로 입방아를 찧고 있던 군중들도 입을 멈추고 침묵했다.

널리 울려 퍼진 목소리를 듣자 왠지 모르게 입을 다물어야 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혼란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돌아본 제갈의현이 이채를 띠었다.

“의념을 자유롭게 다루는 경지라. 필시 저 젊은이가 보고서에 적힌 귀영일 테지요.”

“옥청선자를 대신해서 지시를 내린 것만 봐도 그렇지 않겠소.”

당문주가 태연하게 말을 받았다.

-암독쌍절(暗毒雙節) 당천경.

사천 무림에 큰 영향을 행사하는 절세고수였다.

당문이 다소 폐쇄적인 가풍을 갖고 있다고 하나, 항간에선 당천경이 마음만 먹으면 태화문을 제외한 사천 무림 전체를 움직일 수 있다고 알려졌을 정도.

천하팔존인 검선 다음으로 호광 무림에서 영향력이 크다고 알려진 무당제일검 현운 도장이 첨언했다.

“제 제자와 손속을 겨룬 것만으로 태극의 무리를 깨달은 젊은이입니다. 처음에 들었을 때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여기까지 올라왔군요.”

청수가 표주로 천하를 떠돌아다닌다지만, 사부인 그와는 연통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하면 현운 도장께선 맹에 오시기 전부터 저 친구에 대해 아셨겠군요. 귀띔 좀 해주시지 그러셨습니까.”

제갈의현이 짐짓 섭섭하다는 기색을 내비치자 현운 도장이 빙그레 웃었다.

“하하, 죄송합니다. 저도 저 친구는 이번에 처음 만나는지라... 설레발을 치면 총군사님이 저 친구를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데 염왕이 보이지 않는구려.”

“선자께서 전서를 보내셨습니다. 염왕께선 제자분을 데리고 잠시 떠나셨다고 하더군요. 무림맹이 체질상 맞지 않아서 오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잡답은 이쯤이면 족하다고 여겼는지 세 사람이 앞으로 나아갔다. 함께 온 고수들이 호종하듯 뒤를 따랐다.

다만 그들이 가장 먼저 인사를 나눈 사람은 강엽이 아니라 옥청선자였다.

“먼 길 고생하셨습니다, 선자.”

“총군사님이 마중을 나오실 줄은 몰랐군요. 게다가 당문주님과 현운 도장, 아미와 청성의 도우들까지....”

“호송단에 제자나 자식을 두시지 않았습니까. 청성은 그렇지 않지만, 젊은 호걸들을 보고 싶다고 하셔서 함께 오게 되었습니다.”

“저 젊은이들과는 연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선 것은 전날 강엽이 만난 청성파의 서하무량검 적운 도장이었다.

청수와도 인연이 있는 그가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자 강엽과 청수가 포권을 쥐었다.

아미파의 난풍혜검이 그윽한 미소를 품었다.

“빈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매도 있지만, 저 젊은이들과는 이전부터 알고 지냈지요.”

흑접을 토벌하는 작전에서 큰 도움을 준 난풍혜검이었다. 그녀가 합장하며 불호를 되뇌었기에 강엽 역시 고개를 숙이며 짧게나마 예를 표했다.

그제야 제갈의현이 강엽을 보며 미소를 띠었다.

“총군사 제갈의현일세.”

“무림 말학 귀영입니다. 저명하신 신기환사(神技幻士)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강호 제일의 지자이자 술법진의 종사.

신기환사 제갈의현의 뒤에 따라붙는 칭송이었다.

무림맹 총군사로서 맹주를 보필하고 있으나, 그 이전엔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술법과 진법 양쪽에서 일가를 이룬 정도십대고수.

‘백도의 술사를 보는 건 처음인가?’

생각해보면 지금껏 강엽이 겪은 술사들은 모산파 소속이거나 마교의 소속이었다.

제갈세가의 술법진이 마교의 술법진과 어떻게 다른지는 모르겠지만....

‘백도의 무공과 마도의 무공은 궤가 다르니 술법도 상당한 차이가 있겠지.’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술법에 대해 논하며 그 차이를 비교해보고 싶지만, 자리가 자리인지라 마음속 욕망을 조용히 갈무리한다.

“나 역시 자네 이름을 몇 번씩이나 들었네. 한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지. 오늘 이렇게 소원을 이루는군.”

선이 고운 이목구비 위로 떠오른 한 줄기 미소.

젊은 시절 절세의 미남으로 뭇 여인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던 무림맹 총군사는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매력적인 미소를 지으며 뒤편으로 시선을 주었다.

“일일이 인사를 나누면 끝이 없겠군. 자세한 얘기는 들어가서 하세나.”

“그전에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의아해하는 제갈의현과 무림 명숙들의 앞에 숙정방도가 나와서 길쭉한 목함을 바쳤다.

제갈의현을 호종하는 무인들이 그것을 받아서 뚜껑을 열자 대낮에도 환한 녹광이 뿜어져나왔다.

그 안에 든 것을 확인한 이들의 눈이 찢어져라 부릅뜨였다.

“이건...!”

“녹림의 신물입니다.”

“녹산혈부!”

강호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녹림 총표파자의 상징.

녹림에선 옥새나 다름없는 신병이기의 등장에 제갈의현의 눈동자에서 뜨거운 기도가 뿜어졌다.

“내 선자께서 보내신 서찰을 읽어서 자네에게 녹산혈부가 있음을 알고 있었네만... 실제로 봐도 놀랍군.”

“무림맹에 드리는 선물입니다.”

“선물?”

“잘 좀 봐주셨으면 해서요.”

자칫 뇌물로 오해할 수 있는 말에도 제갈의현과 명숙들의 입술에선 너털웃음이 흘러나왔다.

“하하, 그래.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구만. 이 녹산혈부가 광명마교의 손에 들어갔으면 녹림칠십이채가 그들의 손에 떨어졌을 테지.”

일부러 알려주듯 내공을 돋워 목청을 높이는 말에 무림인들이 과연 그렇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무림을 잘 모르는 군중들도 호송단이 대단한 공로를 세웠다는 걸 알고 연신 감탄성을 터뜨렸다.

“안타깝게도 오사도의 시신을 광명마교가 거둬가서 수급을 가져오진 못했습니다. 다만.”

여지를 두면서 다시 뒤쪽으로 손을 휘젓자 멀리서도 잘 보일 만큼 커다란 각궁이 등장했다.

누군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작염마궁!”

“오사도의 독문병기입니다.”

이제 무림맹의 사람들 중에 오사도가 어떤 병장기를 썼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악룡맹주의 어깨를 꿰뚫고, 대력쇄 묵야강을 격살한 각궁이군요. 이걸 이렇게 보다니....”

무려 사도십대고수 두 명을 패퇴시킨 신병이기였다.

현운 도장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중얼거린 말에 제갈의현과 명숙들은 허허롭게 웃을 뿐이었다.

수급이 없다 해도 하나뿐인 독문병기를 빼앗아왔으니 오사도의 죽음은 확실해진 셈이었다.

“자네가 팔대교왕의 팔도 가져갔다고 들었네만.”

“예, 혈음마군이란 자의 것이었습니다.”

“그자의 이름은 무림맹의 경계망에도 올랐지. 홀로 독곡주와 휘하 고수들을 쓸어버린 절세고수.... 그런 자를 패퇴시켰다니 엄청난 공적일세.”

강엽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제갈의현이 보고서에 적힌 말을 꺼내놓으면서 공로를 치하했다.

사실 혈음마군이 한 팔을 잃고 도주했다는 건 강엽의 증언이었을 뿐 증거는 없었다.

혈음마군의 팔은 오사도의 절기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증발해버렸으니까.

한데 제갈의현은 혈음마군이 얼마나 위험한 인물인지 떠들면서 공치사를 늘어놓은 것이다.

“이는 무림맹의 누구도 이루지 못한 업적일세. 혹시 원하는 게 있는가?”

기실 상을 줄 거라면 공식적인 자리에서 포상을 주는 게 맞았다. 총군사인 제갈의현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일부러 이렇게 운을 뗀 것이다.

‘이건 우리에게 판을 깔아주는 거다.’

제갈의현의 의중을 헤아린 강엽이 고개를 숙였다.

“호송단의 공로는 누구 한 명의 공적이 아닙니다. 호송단 전체가 이룬 공적이지요. 특히 투항한 흑룡교도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습니다.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강엽의 입에서 그들이 무고한 마을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죽음을 불사하고 싸웠다는 말이 나왔다.

제갈의현과 명숙들의 시선이 옥청선자를 향하자 그녀가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즉답했다.

“강 무사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흑룡교도들은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옥청선자의 말씀이라면 믿을 수 있지요. 공을 세운 이들에게는 마땅한 대우를 해야 하는 법. 적법한 조사가 끝나면 그들은 마교도가 아닌 한 명의 무인으로 대우받을 겁니다.”

“와아아아아아아!”

총군사의 확언에 흑룡교도들과 군중들이 환호성을 지르고, 일행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심지어 일전에 연가휘와 말다툼을 했던 야차마곤도 작게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과 강경한 태도를 취했던 일부 군중들만 벌레 씹은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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