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34화 (232/450)

43화. 용봉 (2)

적잖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군중들은 줄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고 있었다.

마교도와 남궁세가의 공녀가 한판 붙는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면서 군중들을 유인했던 것.

무림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부유한 상인들과 양민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유람객들까지 모이면서 관도 주변의 평야는 발 디딜 틈새 없이 번잡해졌다.

“하늘이 좀 거시기한데... 소나기가 내릴랑가?”

“얼른 비 오기 전에 붙었으면 좋겠구먼.”

조만간 비가 쏟아질 것처럼 꿀꿀한 회색빛 하늘에 군중들이 빨리 비무를 시작하라고 성토했다.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도 지루하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때 연가휘가 눈을 번쩍 떴다.

“후우....”

“대주님.”

운기조식을 했다고 피로가 말끔히 가신 건 아니다.

숨을 고르는 연가휘의 눈밑엔 아직도 짙은 피로감이 남아 있었다.

호법을 선 흑룡교도들이 염려하는 기색을 드러내자 연가휘가 씩 웃었다.

“원, 녀석들도. 걱정 붙들어 매라. 내가 누구냐? 이 정도로 쓰러지진 않는다.”

그때 강엽이 다가왔다.

“만전은 아니군.”

연가휘의 단전에 남은 공력은 삼 할 남짓.

몸에 쌓인 피로를 고려하면 비장의 절초를 연달아 퍼붓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연가휘는 결기를 다졌다.

“반드시 이기겠습니다.”

“검무화에 대해 좀 알아봤다. 남궁세가의 무공뿐 아니라 검각(劍閣)의 무공도 배웠다던데.”

절강성 동쪽 주산 군도에 자리한 신비검문.

아미파처럼 여인들만 받아들이는 전통을 갖고 있는데, 검각의 검법은 예로부터 무림 일절로 꼽혔다.

검각주인 검후(劍后)는 정도십대고수의 일좌로서, 아미파 장문인과 더불어 여중제일인의 자리를 놓고 경쟁할 만큼 출중한 절세고수였다.

“당 소저 말로는 용봉지회에서도 세 손가락에 드는 고수라더군. 중단전을 개방했으니 아무리 너라도 방심하면 한 방에 훅 갈 거다.”

“명심하겠습니다.”

궁검의 손녀이자 검후의 제자.

연가휘가 결연한 표정으로 나서자 저편에 있던 남궁상아도 가부좌를 풀고 일어났다.

뭇 군중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도와 마도를 대표하는 남녀가 삼 장 거리를 두고 마주쳤다.

멀긴 해도 그들 같은 고수들에게는 한 걸음에 닿을 수 있는 거리.

연가휘가 검을 역수로 잡고 손을 모았다.

“흑룡교의 연가휘요.”

“남궁상아입니다.”

긴 소개는 필요 없다는 걸까.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두 사람은 상대의 수중에 들린 병장기를 유심히 살폈다.

연가휘는 검병대의 흑검을, 남궁상아는 여인이 쓰기엔 다소 무거워보이는 중검을 들고 왔다.

남궁상아의 차가운 눈이 이채를 발했다.

“방천화극도 쓰신다고 들었습니다만.”

잘 모르는 사람들은 연가휘가 창을 쓴다고 알고 있었지만, 그녀는 마당발인 후개 덕분에 비교적 상세히 알고 있었다.

“이번엔 검을 쓸 생각이오. 검의 명가와 무를 논하는 데 방천화극을 쓰고 싶진 않군.”

여기엔 다른 이유가 더 있었다. 방천화극으로 구사하는 교룡왕의 무공은 내공을 잔뜩 잡아먹는다.

공력이 얼마 남지 않은 지금은 자칫 자충수로 작용할 수 있는 일.

남궁상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런가요?”

그 말이 끝이었다. 금세 입가의 미소를 지운 그녀가 기수식을 취하며 한 걸음 옮겼다.

연가휘가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듯이 흑검을 늘어뜨린 하단세를 취하자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쿠우우우우웅......!

돌연 귓가를 강타하는 굉음.

흑검과 중검이 교차하는 찰나, 연가휘는 완맥을 으스러뜨릴 듯한 충격을 받고 이를 악물었다.

“큭...!”

“제가 여인이라고 방심하면.”

서로의 호흡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남궁상아가 무덤덤하게 말을 이어간다.

“뭘 해보기도 전에 패할 겁니다.”

말과 함께 내공 호흡이 이어졌다. 중검에서 파생한 무채색의 공력 파동이 연가휘를 찍어눌렀다.

땅바닥의 풀들이 쥐포처럼 납작해지고, 연가휘 역시 휘청거렸다.

상대의 무게중심이 무너진 틈을 타서 남궁상아가 원심력을 실은 검격을 날렸다. 중검에 깃든 막강한 경력이 바람 찢는 소리를 냈다.

막기 힘들다고 판단한 연가휘는 흐트러진 자세를 역이용해서 뒤로 물러났다.

츠와악!

가슴 근육을 얕게 가르고 지나간 검기.

허공에 붉은 핏물이 튀어올랐다.

“우와아아아아아아!”

군중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이번에야말로 시건방진 마교도를 무릎 꿇릴 수 있으리라!

“괜찮을까? 너무 밀리는 거 아냐?”

백서희가 인상을 썼지만, 강엽은 여상히 대답했다.

“지켜보면 알겠지.”

사실 비무의 내용보다는 다른 데 더 관심이 갔다.

남궁상아의 검력에 담긴 신공의 요체.

팔가 중에서도 수위에 꼽힌다는 남궁세가의 신공을 먼발치에서 느끼며 저변에 깔린 심상을 헤아린다.

‘지금껏 내가 익힌 무공과는 결이 달라.’

강검(强劍)이라는 면에서는 자성검법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지만, 쾌(快)와 섬(閃)을 중시하는 자성검법과 달리 남궁상아의 검법은 무겁고 완만하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저런 검에 맞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연가휘가 고전하는 이유.

콰아아아아아앙......!

남궁상아의 몸에서 올올이 흘러나오는 검압이, 연가휘의 주변 일대를 찍어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제왕검형(帝王劍形)이다.”

별안간 귓가를 파고드는 목소리.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팔짱을 낀 자세로 비무를 구경하고 있는 염왕의 모습이 보였다.

지금껏 일행과 함께 움직였는데도,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관심도 안 보였던 염왕이다.

그런 그가 까마득한 무림 말학들의 비무를 유심히 지켜보는 것은 필시 제왕검형 때문이겠지.

백서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왕검형이라면 남궁세가를 상징하는 신공 아니에요? 가주만 익힐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정확히는 가주와 소가주만 익힐 수 있지. 직계라고 다 익힐 수 있는 게 아니다.”

“저 여자가 소가주라고요?”

“글쎄, 남궁세가의 사정은 나도 잘 모르겠구나. 그런 건 잘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지 않겠느냐?”

그러면서 뒤쪽을 힐끔거리자 옥청선자가 착잡하게 대답했다.

“무 사제의 말로는 남궁 가주가 타계하기 전 그녀를 소가주로 임명하고 격체전력으로 모든 내공을 물려줬다고 합니다.”

남궁세가의 후계자는 아직 어리다. 가주가 늦게 득남을 했기 때문에 열 살밖에 되지 않았다.

가문이 멸문할 위기에 처하자 가주는 무재가 출중한 딸을 소가주로 임명하는 파격을 단행하고, 자신의 내공과 제왕검형을 물려준 것이다.

“당시엔 남궁 가주가 사경을 헤맸기 때문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자칫하면 가문의 무맥이 끊길 위기였으니....”

“흐음.”

염왕이 매끈한 턱을 매만졌다.

“말하자면 쫄딱 망한 문파의 후예들끼리 싸우는 셈인가? 이건 이것대로 흥미롭군. 누가 이길 것 같으냐?”

보이는 양상만으로는 남궁상아의 우위였다. 아무래도 만전으로 비무에 임한 남궁상아가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강엽은 정반대의 결과를 예측했다.

“이대로라면 연가휘가 이길 겁니다.”

“근거는?”

“구멍이 숭숭 뚫리지 않았습니까?”

“잘 봤구나.”

일행도 두 사람의 대화를 한마디도 빼놓지 않고 들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진 못했다. 옥청선자만 말없이 쓴웃음을 머금을 뿐.

하후진이 급하게 물었다.

“사부, 그게 무슨 뜻입니까? 구멍이라뇨?”

“모르겠느냐?”

“끄응, 전혀....”

“기감 수련이 덜 됐군. 감각을 활짝 열고 다시 살펴봐라.”

그 말에 일행이 감각을 집중했다.

상대적으로 무공이 낮은 이들은 염왕의 설명을 듣고도 뭐가 뭔지 알아채지 못했지만, 하후진과 백서희 등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들은 경악성을 터뜨렸다.

“검압이 고르지 못한데?”

“그냥 고르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가면 갈수록 뒤죽박죽이 되고 있어요. 이건......!”

“물려받은 내공의 폐해지.”

염왕이 한마디 뱉었다.

옥청선자가 부연을 더했다.

“남궁상아가 내공을 물려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네. 그녀가 이전에 쌓은 공력을 아득히 넘는 내공이 갑자기 주어진 셈이지. 냉정하게 말하면 분에 넘치는 보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덜컥 생긴다면 어떻게 되겠나?”

그 힘에 휘둘리고 만다.

하물며 그녀는 익숙하지 않은 제왕검형을 펼치고 있으니 갈수록 파탄이 드러날 수밖에.

“몇 년, 아니 몇 달만이라도 시간이 주어졌다면 좀 달라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저 상태로 비무에 임한 건 그녀의 실수일세.”

옥청선자의 말마따나 합이 길어질수록 남궁상아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러워졌다.

막대한 힘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세가 흐트러지는가 하면, 경파의 흐름이 급격하게 비틀리면서 반응이 조금씩 늦어졌다.

외부에서도 훤히 알 수 있는데 당사자라고 모를까.

남궁상아가 낭패감에 사로잡힌 얼굴로 입술을 깨물자 연가휘가 뒤로 십 보 물러났다.

“무슨 짓이죠?”

남궁상아가 눈꼬리를 치켜떴다.

조금 전에 그녀는 허점을 드러냈다. 공략당하면 속수무책으로 패하는 치명적인 허점.

한데 연가휘가 기회를 포착했는데도 봐준 것이다.

“아까 했던 말을 돌려주겠소.”

“뭐라고요?”

“내가 지쳤다고 방심했다간 호되게 당할 거요. 익숙하지 않은 무공으로 싸우지 마시오.”

“큭...!”

남궁상아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연가휘의 말을 반박할 수는 없는지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 제왕검형을 선보여서 남궁의 기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그녀다. 한데 본인의 힘에 휘둘려서 좋은 기회를 날려먹다니....

“...인정합니다. 제가 오만했어요.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오시오.”

중검을 버리고 손을 높게 치켜들자 후기지수들이 있는 곳에서 한 자루 검이 날아들었다.

앞서 휘두른 검보다 훨씬 얇은 검이 눈부신 빛을 토해내면서 검집에서 빠져나온다.

-천예비상검법(千鷖飛上劍法).

또다른 사문인 검각의 절학이다.

수천 마리의 갈매기들이 바닷바람을 따라 활개를 치는 광경에서 깨달음을 얻어 창안한 검법.

검후가 광명마교의 육사도에게 패해 봉문을 선언했기에, 이제 무림에서 이 검법을 구사하는 이는 속가제자인 남궁상아 한 명뿐이었다.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기세.

연가휘 역시 성치 않은 몸이었기에 오래 싸울 수는 없었다.

‘한 수로 승부가 갈린다.’

서로가 똑같은 생각을 했음을 안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상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빛살이 서로를 스쳐지나간 순간 승자와 패자가 나위어지고, 군중은 함성을 질렀다.

* * *

“내가 졌소.”

연가휘는 깔끔하게 승복했다.

그가 이길 거라는 강엽의 예측과 달리 남궁상아의 검이 턱 아래에 맞닿은 것이다.

남궁상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제대로 싸웠다면 제가 졌을 거예요.”

그녀는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연가휘의 내공이 모자라서 그녀의 검식을 다 쳐내지 못했다는 것을.

만약 온전한 내공을 갖춘 채 도전했다면 결과는 뒤바뀌었으리라. 아니, 도중에 연가휘가 그녀의 허점만 찔렀어도 그가 이겼겠지.

이기긴 했지만 기분 좋은 승리는 아니었다.

남궁상아의 복잡한 표정을 뒤로한 연가휘는 강엽에게 걸어와서 허리를 넙죽 숙였다.

“죄송합니다, 은공.”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지.”

강엽의 입가에 아쉬움이 묻어났다.

남궁상아를 이겼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나쁜 결과는 아니야. 오히려 이겼다면 분위기가 이상해졌을 수도 있어.’

만약 남궁상아가 패했다면 군중들은 승자를 환호하기보다는 패자를 동정했을 것이다.

한데 연가휘가 졌는데도 그를 향한 백도 고수들의 눈길은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마교도답지 않게 호방한 사내로군. 검무화를 이길 기회가 있었는데도 아량을 베풀지 않았는가?”

“심지어 지친 몸으로 싸웠는데도 검무화를 몰아붙였소. 전력으로 싸웠다면 승패가 바뀌었을지도....”

“저자의 별호가 뭐라고?”

“흑풍랑이라고 하더이다.”

“흑풍랑, 흑풍랑... 기억해둬야겠군. 무림맹이 저들을 어찌 대우할지는 몰라도, 투항을 받아준다면 마교와의 전쟁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도 있겠어.”

패자가 도리어 칭송을 받는 요상한 사태에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남궁상아가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그들의 의도와는 한참 다른 결과가 벌어진 것이다.

정작 남궁상아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했지만, 배후에서 모든 일을 주도한 무일기는 허탈감을 감추지 못했다.

문득 어깨를 덮는 손길을 느낀 그가 소스라치게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강엽의 얼굴이 보였다.

“아쉽게 됐군.”

“...뭐요?”

“연가휘가 이겼다면 당신에게 도전했을 텐데. 남궁상아가 이기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지 뭐요.”

“강 무사, 당신....”

“원래 세상일이란 게 그런 거지. 내 마음대로만 되는 일이 얼마나 있겠소? 내가 수싸움에서 졌소. 귀하의 심계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군.”

“.......”

강엽이 짐짓 과장되게 호들갑을 떨자 무일기의 잘생긴 얼굴이 형편없이 구겨졌다.

‘이 망할 작자가...!’

지금 자신을 놀리는 거냐고 욕할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남궁상아가 비무에서 승리하지 않았는가?

굴욕감을 곱씹는 그의 속을 강엽이 은근한 어조로 긁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음에도 좋은 자리 좀 마련해주시오. 그땐 ‘내가’ 몸소 나설 테니까.”

입꼬리는 올라가 있으나 눈은 얼음장처럼 싸늘하기 그지없다.

한기가 서린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무일기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기분에 흠칫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