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용봉 (1)
하남성 정주.
성도인 개봉의 옆에 붙어있는 유구한 옛 도시는, 이른 아침부터 인파로 북적거렸다.
정주의 북쪽 외곽에 있는 광활한 대지.
어지간한 산성보다 훨씬 길고 높은 성벽이 외곽을 둘러싸고 있었다. 주변의 전각군을 굽어볼 정도로 높은 성벽 위엔 장대가 빼곡했는데, 녹색 글자가 수놓인 노란 깃발이 바람결에 펄럭 나부꼈다.
-무림맹(武林盟).
백도 무림의 심장부였다.
삼 장에 달하는 성문은 활짝 열려, 오가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무인들뿐 아니라 무림맹에 용무가 있는 상인들과 표사들이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짐마차가 검문을 받는 동안 한쪽에 물러나 있던 상인이 옆자리의 상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왕씨. 그 소문 들었나?”
“무슨 소문?”
“그 왜, 있잖은가. 화산파가 마교도들을 잡아서 무림맹으로 압송하고 있다는 소문 말일세.”
“아, 난 또 뭐라고. 당연히 들었지.”
“세월이 하수상한데 무림맹이 제 역할을 하는 것 같아서 다행일세. 도처에서 사마외도가 들끓고 있으니 안심할 수가 있나.”
“그렇지. 전쟁으로 돈을 버는 것도 윗사람들뿐이지, 우리 같은 아랫것들은 노상에서 고수를 만나면 죽은 목숨 아닌가. 아무리 표사들을 고용했다손 쳐도....”
광명마교가 대륙 동쪽에 세를 일구면서 비적질을 일삼는 무림인들이 많아졌다. 광명마교에게 쫓겨난 사파와 흑도 고수들이었다.
“한데 내가 들은 소문은 좀 다르구만.”
“어엉?”
“화산파가 마교도들을 압송하는 건 맞지만, 딱히 포로 취급은 안 한다고 하더구만. 또 그들이 오는 길에 온갖 기묘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하네.”
“...기묘한 일이라니?”
상인이 알쏭달쏭한 표정으로 묻자 왕씨가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마교도들이 온다는 소문이 떠들썩하게 퍼졌는데 무림인들이 가만히 있겠나? 구경하러 가지 않겠나? 상대가 마교니까 모욕도 퍼부어줄 테고 말일세.”
“그게 어쨌단 말인가?”
“어찌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죄다 깨졌다는 게야. 화산파도 아니고 마교도들한테 말일세.”
“아니, 그게 말이 되나? 압송당하고 있다면 몸이 묶였을 텐데?”
“실은 화산파가 병장기는 압수해도 손을 묶진 않았다고 하네. 또 무림인들이 도전하면 잠시나마 병장기를 돌려주기도 했고.”
“허어, 어찌 그런 일이...!”
“지금껏 도전한 무림인들이 수십을 헤아리네. 대부분이 한 명에게 깨졌다는군.”
“그게 누구인가?”
“이름은 모르겠고, ‘흑풍랑(黑風郞)’이라고 불리고 있네. 검을 쓰기도 하고 창을 쓰기도 한다던데, 아무튼 그 솜씨가 기똥차다더군.”
“마교에도 고수가 있었구만.”
창이 아니라 방천화극이지만, 상인들은 거기까진 몰랐고 차이를 구분할 재간도 없었다.
한데 목소리를 낮췄는데도 검문을 하던 무인들이 그 말을 들었는지 얼굴을 와락 찌푸렸다.
“조용히 하시오!”
“아, 미, 미안하오....”
두 상인이 객쩍은 미소를 흘리며 사과하자 무림맹의 무인들이 성난 콧김을 뿜으며 사라졌다.
“크흠, 검문 끝난 것 같구먼. 먼저 들어가보겠네.”
“그려, 수고하게나.”
그렇게 상인들의 짐마차는 성문을 지나 무인들의 대지로 들어갔다.
* * *
“훅! 후욱......!”
얼굴 가득 땀으로 범벅된 연가휘가 길게 새어나오는 내공 호흡을 갈무리하며 정면을 노려봤다.
이마의 영웅건이 찢겨져나간 중년 사내가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었다.
“패배를 인정하시겠소?”
“...하아.”
십초지적.
믿기지 않는 패배에 망연해하던 상대는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길게 찢어진 손바닥을 따라 피가 뚝뚝 떨어졌다. 쇄도하는 검을 억지로 받아내려다가 찢어진 것.
주변에서 사내의 패배를 목도한 군중들이 안타까운 마음에 장탄식을 터뜨렸다.
“구발도(九潑刀)가 십 초를 못 버티는군. 하남 무림에서 열 손가락에 꼽히는 도객인데....”
“흑풍랑의 무공이 범상치 않다더니. 이게 몇 번째 상대인가?”
“열일곱 명째일세. 절정이라 알려진 고수들을 열일곱 명이나 패퇴시킨 거지. 쉬지도 않고.”
“대단하군.”
순수한 감탄사였다. 마교도라는 신분과 별개로 연가휘의 무공은 찬사받을 자격이 있었다.
구발도라는 사내가 칼을 챙겨서 물러나자 쩌렁쩌렁한 외침이 관도 한복판을 강타했다.
“도전하실 분은 나오시오-!”
산간도 아닌데 메아리가 울릴 지경.
지친 기색이 완연하긴 해도 아직 여력이 있음을 직감한 고수들이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한낱 마교도 따위가 건방지게...!”
하남은 예로부터 백도가 성세를 구가한 땅.
정주엔 무림맹이 있고, 개봉엔 개방 총타가 있다. 그런가 하면 무림의 태산북두인 소림도 있다.
사마외도가 발 들일 수가 없다. 포박당해 끌려가는 것 외엔 어떤 행동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런데....
“다음 도전하실 분은 안 계신 거요!?”
“.......”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한다.
앞선 고수들이 어찌 패하는지 똑똑이 보지 않았나.
마교도라면서 욕하고 헐뜯어도 막상 그 앞에 나설 용기 따위는 나지 않을 수밖에.
“뭐야? 이제 끝난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전하고 있던 백서희가 혀를 찼다. 기껏 돗자리 깔고 술과 육포도 챙겼는데.
함께 앉아서 육포를 우물거리고 있던 강엽이 주변을 넓게 둘러보다 눈을 빛냈다.
“몇 명 더 남은 것 같은데.”
“응? 누구?”
강엽이 턱짓으로 군중을 가리키자, 구름처럼 몰린 군중들이 좌우로 갈라지면서 일단의 무리가 나왔다.
인중용봉(人中龍鳳)이라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빼어난 젊은이들이었다. 단지 용모만 뛰어난 게 아니라 그에 맞는 품격을 갖춘 이들.
범상치 않은 후기지수들의 등장에 군중들이 경탄성을 터뜨렸다.
“용봉지회(龍鳳之會)다!”
“정파 제일의 후기지수들이 왔다!”
군중들이 떠드는 말을 통해 강엽은 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백도 무림을 대표하는 후기지수들. 전원이 구파와 팔가 등 대문파의 제자들이었다.
일행 중에도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이런, 하필이면 저들이....”
“화산검룡(華山劍龍), 도룡일패(刀龍一覇), 운중신룡(雲中身龍), 진산권(振山拳), 검무화(劍武花), 비만개....”
전원이 구파와 팔가의 후기지수들. 유명한 후기지수들이 준마를 타고 군중들 사이를 여유롭게 통과하고 있었다.
“화산 제자 무일기, 사저를 뵙습니다.”
하얀 장삼에 매화 수실을 새긴 헌앙한 청년이 말에서 내려 옥청선자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그녀를 사저라 불렀다는 것은 그가 일대제자의 신분임을 의미했다.
“하마터면 몰라볼 뻔했구만. 일 년 만인가?”
“딱 그쯤 된 것 같군요. 사저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들과 함께 마중 나왔습니다.”
옥청선자의 눈길이 뒤편에 줄지어 선 후기지수들을 향하자 그들 모두 하마해서 예를 갖추었다.
“옥청선자 선배님을 뵙습니다!”
“목청도 좋군. 그래, 다들 만나서 반갑네. 아는 얼굴들도 있고 모르는 얼굴들도 있군. 그리고....”
옥청선자가 후기지수들 사이에 있는 여인을 발견하고 씁쓸한 기색을 내비쳤다.
“남궁 소저, 가문의 일은 유감이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얗고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백서희와 당묘정 못지않게 아름다운 여인이 처연하게 대답하자 군중들이 그녀의 정체를 깨닫고 수군수군 떠들어댔다.
그 덕분에 강엽도 대강 알 수 있었다.
‘남궁세가의 공녀라.......’
죽은 궁검의 손녀였다.
광명마교에 의해 가문을 잃고 무림맹에 의탁한 그녀가 중인환시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화산검룡 무일기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사저, 외람되지만 한 가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말해보거라.”
“저 마교도가 정파 동도들의 도전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도 꺾은 사람이 없다지요.”
무일기의 사실 적시에 군중들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러면서도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라면 뭔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에 눈을 빛냈다.
“사실이다. 오늘만 열일곱 명을 상대했느니라.”
“괜찮다면 저희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너희 모두가 말이냐?”
“저희가 어찌 차륜의 수치를 범하겠습니까? 검무화가 대표로 나설 것입니다.”
“흐음....”
옥청선자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연가휘를 보고, 강엽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렇다는데 어쩌겠나?”
순간 무일기 등 후기지수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명성은 물론 배분도 가장 높은 옥청선자가 그들과 동년배로 보이는 청년의 의사를 묻다니?
‘지금까진 계획대로 됐었지.’
연가휘와 무림인들의 비무를 허락했던 이유.
단순히 무림인들이 시비를 걸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을 증인으로 삼아 흑룡교의 힘이 만만치 않음을 온 강호에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투항한 것과는 별개로 이만한 능력이 있다는 걸 알려야 전력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지친 상태에서도 계속 연전을 거듭한 것 역시 극적인 효과를 노렸기 때문이었다.
하나 이번 상대는 달랐다.
“이길 수 있습니다!”
강엽의 얼굴에 고심하는 기색이 어리자 연가휘가 얼른 외쳤다.
강엽이 검무화를 돌아봤다.
“남궁 소저라고 부르면 되겠소?”
“남궁상아라고 합니다, 공자.”
“강엽이오. 사천 무림에선 귀영이라는 별호로 불리고 있소.”
“귀영... 그렇군요. 후개에게 많이 들었습니다.”
“후개라.”
강엽이 시선을 멀리 던지자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 한가운데 있던 후개가 어색하게 인사했다.
“하, 하하하! 강 형, 그간 격조했소이다!”
“한 번 만난 주제에 격조는 무슨.”
백서희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한마디 던지자 후개가 끙 소리를 내며 떡진 머리를 긁었다. 허연 비듬이 눈처럼 떨어지자 후기지수들이 기겁해서 멀찍이 도망쳤다.
“후개, 좀 씻고 다니시오!”
“에이, 거지 새끼가 씻어서 뭐하려고... 으하하! 안 그렇소, 강 형?”
“씻고 다녀라, 후개.”
“....”
후개가 상처받은 표정으로 어깨를 늘어뜨리자 강엽이 코웃음 치고는 남궁상아를 돌아봤다.
“비무를 받아들이겠소. 다만 연가휘는 지쳤소. 끼니도 거르고 연전을 치렀지.”
당장 싸우는 건 어려우니 시간을 달라는 뜻이었다.
남궁상아는 기꺼이 수락했다.
“저 역시 지친 상대와 겨루고 싶진 않습니다.”
“한 시진이면 충분할 거요.”
그러면서 강엽이 연가휘를 곁눈질하자 그가 감사의 의미로 두 손을 모았다.
* * *
흑룡교도들이 호법을 서는 동안 일행은 따로 모였다.
“용봉지회가 왜 나타난 걸까요?”
당묘정이 곤혹스러워했다.
청수와 소창후도 마찬가지. 일행과 함께하고 있지만 기실 그들 역시 용봉지회의 일원이다. 한데도 용봉지회가 무슨 연유로 비무를 청했는지 감도 안 잡혔다.
“호승심이 아닐까요? 흑룡교의 잔당들이 비무에서 연승을 하고 있으니 우리가 꺾어주자...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라면 해볼 만한 생각입니다.”
소창후의 말에 하후진이 그럴 듯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흐음, 맞는 것 같은데? 왠지 나였어도 비슷한 생각을 할 것 같거든.”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이번엔 이견을 제시한 청수에게 시선이 몰렸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화산검룡은 호승심이나 호기심으로만 움직이진 않을 겁니다. 심계가 깊은 사람이니 다른 의도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 무사님의 생각은 어떠세요?”
당묘정이 다시 물었다.
“청수 도장의 추측이 맞을 거요.”
“정말 다른 목적이 있다고요?”
“비무를 청한 사람이 검무화니까.”
다들 긴가민가한 낯빛이었다.
야차마곤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두들겼다.
“거참, 선문답 하자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해도 모르니 시원하게 말해주게.”
“무를 견주는 게 목적이라면 우리가 무림맹에 들어가고 나서 조용히 찾아왔어도 됐을 겁니다.”
“공명심 아닌가?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교도를 이기면 명성을 날리지 않겠나.”
“연가휘는 마교도로서는 무명소졸입니다. 실력을 증명하긴 했지만 명성만 따지면 저기 있는 후기지수들이 더 앞설 터. 연가휘를 이긴다고 그들이 얻는 건 없습니다. 반대로 패하면 잃을 게 많지요.”
개인과 사문의 명예. 오래전에 멸망한 마교의 잔당에게 패한다면 비웃음을 사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검무화는 다릅니다. 그녀는 조부를 잃었습니다. 부친까지 잃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오는 동안 소문 들었어. 남궁세가주는 광명마교의 육사도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더라.”
백서희가 한마디 보태자 강엽이 팔짱을 꼈다.
“가문을 대표하는 고수들이 줄초상이 났다면 남궁세가는 사실상 몰락한 셈이군.”
부자는 망해도 삼 년은 간다지만 가문의 고수들과 터전을 잃었다면 부활하기조차 어려울 터.
“하지만 야차마곤 선배께서 말씀하신 대로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교도를 꺾는다면 얘기는 다르지. 아니, 달라질 거라고 믿고 싶겠지.”
“...남궁세가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고 싶은 거군요.”
당묘정이 안쓰럽다는 듯이 한숨을 쉬면서 저 멀리 있는 남궁상아를 돌아봤다.
마침 남궁상아도 이쪽을 보고 있었기에 두 여인의 눈길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그때 무일기가 옥청선자와 함께 다가왔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 인사드리지 못했소. 당 소저, 혜심 스님, 청수 아우.”
“무 소협, 오랜만에 뵈어요.”
화산파가 도문이긴 하나 속세의 성격이 짙기 때문에 당묘정은 도장이라 칭하지 않았다.
무일기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구려. 한데 이쪽 분들은 초면인데 소개해주실 수 있는지....”
“그러지요.”
당묘정이 차례차례 일행을 소개하자 무일기는 정성껏 예를 갖춰 포권을 취했다.
“여러분의 활약은 우리도 익히 들었소. 특히 강 무사의 일화는 큰 귀감이 되었소이다.”
“그렇소?”
강엽이 가볍게 대꾸하면서 남궁상아를 돌아보자 무일기는 조금 무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때 강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용봉지회의 우애가 참 깊은 것 같소. 친구를 위해 다 같이 나서주다니 말이오.”
“하하, 어려울 땐 서로 도와야지 않겠소?”
“패배는 염두에 두지 않으시오?”
“물론 남궁 소저가 질 수도 있을 거요. 하나 무인들의 비무에서 패배는 상사(常事)가 아니겠소?”
사실 남궁상아가 져도 용봉지회의 후기지수들이 손해 보는 일은 없었다. 그녀가 이긴다면 백도 전체의 승리지만, 패한다면 남궁세가의 패배일 뿐.
그러자 강엽이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틀어올렸다.
“이쪽을 이용하려고 했으니 이쪽도 그에 맞춰 화답해줘야겠군. 준비하시오.”
“음?”
“남궁상아 다음은 당신이오.”
“...!”
무일기가 석상처럼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