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9화 (228/450)
  • 42화. 맹행 (1)

    부상자들을 추스르기 위해 호송단은 산중에 있는 중도객잔(中道客棧)에 자리를 잡았다.

    험한 진령산맥을 넘나드는 행객들을 상대하는 객잔답게 상당한 규모를 자랑했기에 이백 명이 넘는 호송단도 머무를 수 있었다.

    자신이 정신을 잃는 나흘 동안 어떤 일이 들었는지 알게 된 강엽의 신색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스물일곱 명이 죽고 마흔두 명이 다쳤다....’

    교성이 쳐들어왔다는 걸 감안하면 사상자가 적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람이 죽은 것은 사실.

    죽은 사람들은 흑룡교도와 숙정방도였지만, 화산파 제자들도 세 명이 부상을 입었다.

    당묘정 등 의술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 부상자들을 돌보고 있지만, 중상자들은 당분간 고된 여정에 동행할 수 없었다.

    ‘숙정방도들이야 서안으로 후송하면 되지만 흑룡교도들은 힘들겠지. 따로 표국을 알아봐야 하나?’

    그렇게 생각을 이어가기를 한참.

    굽이친 산길과 울창한 수림을 지나 마침내 전성이 들린 곳에 왔다.

    그런데....

    “...니들 뭐하냐?”

    강엽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가, 강 도우!? 깨어나셨습... 크억!”

    “마, 말 시키지 마! 우리 죽어...!”

    웃통을 벗은 청수와 하후진이 바닥에 드러누운 채 애벌레처럼 기어다니고 있는 게 아닌가?

    딱히 부상도 없는데 안색이 창백하고 땀이 비오듯이 흐르고, 호흡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크흡, 폐 터질 것 같.... 끄윽!”

    말 시키지 말라고 한 주제에 혼잣말로 고통을 호소한 하후진이 엉금엉금 기어다닌다.

    그때 청수가 외쳤다.

    “강 도우, 도와주십시오!”

    “뭐?”

    “하, 하후 도우를 막아주세요!”

    “...?”

    이해하지 못할 말에 고개를 갸웃하는데, 하후진이 대뜸 쌍욕을 내뱉으며 외쳤다.

    “큭! 저 치사한 말코 새끼 말은 듣지 마!”

    이를 빠드득 갈며 팔뚝으로 땅을 짚으며 기어간다.

    실핏줄이 터질 듯 충혈된 눈빛은 무슨 수를 써도 이겨먹고 말겠다는 욕망으로 이글거렸다.

    그리고 바로 그때.

    “으아아아아! 아미타불! 아미타불!”

    괴성 대신 염불을 외는 칠 척 거구의 거한이 실로 무시무시한 기세로 두 사람을 쫓아왔다.

    역시나 눈알이 벌겋게 달아오른 게 숫제 지옥에서 올라온 야차처럼 보일 지경.

    “저리 가! 꺼지라고!”

    “아, 안 돼!”

    경기가 들린 하후진과 청수의 뒤를 맹렬하게 쫓아온 야차마곤이 힘겹게 입꼬리를 올렸다.

    물론 그도 엉금엉금 포복하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크흐흐, 일등은 내 몫! 후배들은 장유유서의 정신으로 이쯤에서 포기하게나!”

    “지랄하고 자빠졌네!”

    하지만 야차마곤의 질주(?)는 복병으로 인해 제동이 걸렸다.

    수풀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물귀신처럼 그의 발목을 잡아챈 것.

    그 정체는 연가휘였다.

    “이 비겁한 마구니가...!”

    “잘했다, 연가놈아!”

    야차마곤은 당혹스러워하고, 하후진은 반색하며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연가휘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외쳤다.

    “약속, 잊지 마시오...!”

    “그야 당연...!”

    말을 할 기운도 없는지 둘 다 매가리가 없다.

    야차마곤이 탄식했다.

    “헉! 헉! 이 사악한 마구니들이 작당모의를 하다니! 강호의 도리가 땅에 떨어졌구나!”

    “.......”

    네 사람의 물고 물리는 추태.

    멍하니 입을 벌린 채 그 광경을 보던 강엽은, 문득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좀 보기 그렇지요?”

    소창후가 곤란한 미소를 지으며 볼을 긁적였다.

    “보기는 좀 추해도 수련하는 겁니다. 하후 시주의 사부님께서 고안하신 수련법이지요.”

    “수련이라....”

    넷 다 절정고수인데 저렇게 땅을 기어다니는 게 말이 되나.

    그늘진 곳에서 기감을 회복한 강엽은 곧 어찌된 영문인지 깨달았다.

    “공기가 다르군.”

    주변을 찍어누르는 묵직한 압력.

    강엽과 소창후가 있는 곳은 영향을 받지 않았지만, 네 사람이 기어다니는 곳은 무겁고 끈끈한 기운이 네 사람을 찍어누르고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들어가면 쥐포가 되겠어.’

    다만 절정고수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공이 봉인된 거요?”

    “그렇지요.”

    소창후가 긍정했다.

    내공을 봉인당했기 때문에 본래의 무공을 발휘할 수 없었다. 염왕이 혈도를 푹푹 찌르자 단전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진 것이다.

    “저도 해보려고 했는데 염왕께선 제게 당장 필요한 수련이 아니라면서 배제하셨어요.”

    “흐음.”

    섭섭함이 어린 말에 강엽은 네 사람을 조금 더 면밀히 관찰했다.

    “왜 그런지 알 것 같소.”

    단순히 근육을 쥐어짜거나 정신력을 고취하는 수련이 아니었다.

    ‘봉인한 건 하단전뿐이다. 중단전은 봉인하지 않았어.’

    중단전에 깃든 심상.

    육신의 힘만으로는 몇 걸음 내딛기도 힘든 압력 속에서 결승점에 도달하려면, 중단전의 심상을 움직여 몸의 활력을 북돋아주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심상의 기운이 사지백해로 뻗어나가 경맥과 연동해야 수월하게 움직일 수 있을 터.

    이는 중단전의 발달로 이어진다.

    ‘과연. 이런 식으로 꾸준히 수련하면 중단전은 빨리 완성되겠지. 삼화취정에 오르는 시간도 상당 부분 단축될 테고.’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수련법.

    강엽이 그 혜안을 고찰하며 마음 깊이 감탄할 때, 소창후가 어색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저분들이 저렇게 경쟁하는 건 끼니 때문에 그렇습니다.”

    “꼴등은 굶기라도 하오?”

    “예. 삼등이 소채(蔬菜), 이등이 만두와 소면, 일등이 오리구이와 반주를 곁들인 한상 차림이고요. 그리고 다른 사람이 먹는 걸 앞에서 지켜봐야 하지요.”

    “....”

    꼴등이 되면 다른 사람이 신나게 먹는 것을 구경만 해야 한다.

    딱히 식욕이 없는 자신이라 해도 쌍욕이 나오지 않을까?

    “악랄하군.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몰라도 참 치사하다는 생각이 드오.”

    “그래야 경쟁 의식이 고취되는 법.”

    별안간 소창후 옆에 뚝 떨어진 장발의 사내.

    서른을 넘겼을까 싶을 만큼 젊은 얼굴은 수염 하나 없이 매끈했다.

    ‘반로환동을 했다더니.’

    일찍이 흑룡교주를 격살했던 강호의 절대자.

    젊음을 되찾아서 더욱 고강해진 절대고수가 강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흠, ‘서로’ 민낯을 보는 건 처음인가?”

    “...그렇군요.”

    경매장에서 봤을 땐 서로 가면을 쓰고 있던 만큼 얼굴을 맞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땐 누군지 몰라 반말을 지껄였지만, 지금은 누군지 아는 만큼 강엽이 먼저 예를 갖추었다.

    “무림 말학 강엽입니다. 일전엔 신세를 졌습니다.”

    “신세?”

    “혈교의 교성을 쓰러트리지 않으셨습니까.”

    “별 거 아니니 신경 쓸 필요 없다. 벌레가 알짱거려서 치웠을 뿐이다.”

    다른 사람이 이런 말을 했다면 비웃음을 샀겠지만, 염왕은 오만할 자격이 있었다.

    실제로 교성을 모기 잡듯 쉽게 죽이기도 했고.

    “네놈도 해볼 테냐?”

    “저 수련 말입니까?”

    “삼화취정에 올랐어도 중단전을 수련하는 건 중요하지.”

    “꼴등하면 저도 굶습니까?”

    “궁금한 게 많을 텐데. 일등을 하면 알려주마.”

    “....”

    강엽의 입가에 쓴웃음이 어렸다.

    염왕의 말마따나 궁금한 게 한둘이 아니었으니까.

    그가 왜 나타났는지, 호송단을 찾아온 목적이 뭔지, 진조와 싸우고도 왜 아무 말도 없는지....

    ‘알고 싶다면 일단 이기라는 건가.’

    염왕이 선심 쓰듯 덧붙였다.

    “질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저놈들은 아직 절반밖에 오지 못했으니까.”

    뒤집어 말하면 절반이나 뒤쳐진 상태에서 네 사람을 따라잡아야 한다는 건데.

    “헉! 허억! 사부, 정말 저 녀석도 합니까!? 저 녀석이 꼴등하면 우리가 굶을 필요는 없죠!?”

    정말 어지간히 굶은 게 싫은지 사인방 모두 새로운 희생양을 찾은 것마냥 눈을 희번뜩하게 빛냈다.

    땀 빼며 고단하게 수련했는데 굶는 게 억울하지 않겠는가?

    염왕이 어깨를 으쓱였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의 시선이 모이자 강엽이 피식 웃었다.

    “출발선이 어딥니까?”

    * * *

    “이건 말도 안 돼!”

    사인방은 현실에 절망했다.

    그들보다 한참이나 늦게 출발한 강엽이 그들을 앞질러 결승점에 도착해버린 것이다!

    “큭, 지름길로 온 게 아니고서야....”

    “비겁한 변명이구나, 제자야. 아미파의 비구니에게 물어봐라. 저 녀석이 야료를 부렸는지 말이다.”

    사인방이 간절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소창후는 차마 양심을 배신하지 못하고 떨떠름하게 말했다.

    “염왕 대선배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강 시주는 여러분이 지났던 길로 왔습니다. 다만 여러분과는 달리 멀쩡히 걸어서 갔지요.”

    “그러니까 그게 말이 되냐고....”

    단전이 봉인된 것은 강엽도 마찬가지 아닌가?

    염왕이 실소했다.

    “저 녀석은 삼화취정에 올랐으니 풀려면 못 풀 것도 없었겠지. 하지만 정직하게 경쟁에 임했다.”

    “엥? 삼화취정에 오르면 풀 수 있는 겁니까?”

    “정기신을 합일하면 진기 운행에 막힘이 없으니까. 가만히 있어도 천천히 대주천을 한다. 점혈을 당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풀 수 있어.”

    “어쨌든 내공이 봉인됐다는 거잖습니까. 근데 어떻게 걸어온 겁니까?”

    하후진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궁금해하는 눈초리였다.

    염왕이 딱하다는 듯 혀를 찼다.

    “저 녀석은 네놈들과 달리 중단전의 심상을 완벽히 통제하니까. 중단전의 심상으로 세맥과 낙맥에 남아있는 기운을 끌어모은 거다.”

    “...아?”

    “아무렴 내가 변태도 아니고 네놈들이 고생하는 꼴이 보는 게 즐거워서 이런 수련을 시켰겠느냐? 다 뜻이 있어서 시킨 것이니라.”

    “그런 거 아니었습... 꿱!”

    격공장에 뒤통수를 맞은 하후진은 염왕이 지긋이 노려보며 주먹을 쥐자 얼른 눈깔을 깔았다.

    한 방에 제자의 반항을 진압한 염왕이 고개를 돌렸다.

    “소감이 어떤가?”

    “만만치 않군요.”

    가장 먼저 결승점을 통과하긴 했지만 강엽도 숨이 찼다. 옷은 완전히 젖었고, 굵직한 땀방울이 턱선을 따라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너희들은 먼저 내려가도록. 그리고 하후진과 연가휘 네놈들은 밥 없다.”

    “아니, 왜요! 내가 이등으로 통과했구만!”

    “짜고 쳤으니까. 수련의 의미를 헤아리지 못하고 얕은 수작을 부렸으니 벌을 받아야지.”

    졸지에 공동 꼴등으로 쫄쫄 굶게 된 하후진과 연가휘의 안색은 흙색이 되고, 반대로 청수와 야차마곤은 환하게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강엽만 쓰게 웃으며 염왕을 따라갔다.

    * * *

    “에둘러 얘기하는 것은 싫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난 네놈을 찾아왔다.”

    “절 말입니까?”

    염왕이 왜 자신을 찾아왔단 말인가.

    설명이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염왕이 입맛을 다셨다.

    “내가 강호로 나온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하나는 제자놈 때문이었지. 이쯤 되면 슬슬 중단전을 개방할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암시장에 들러 대환단을 노렸던 것이다.

    대환단의 농밀한 영기를 취한다면 막대한 기운을 축기할 수 있는 건 물론이고, 운이 따른다면 한 단계 높은 경지로 도약할 수 있을 테니까.

    “대환단은 다른 사람의 손에 들어갔지. 본디 보물은 임자가 있는 법. 제자놈에게는 처음부터 신외지물이었던 게야.”

    “...두 번째 이유가 저와 연관이 있겠군요.”

    “천기가 요동치고 있다.”

    “천기?”

    “몇 년 전부터였지. 본래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 개의 흉성이 떴다.”

    무릇 별은 영웅의 운명을 상징하는 법.

    하지만 천기를 흐트러뜨리는 별은 영웅의 별이 아니었노라고 염왕은 무덤덤하게 이야기했다.

    “나는 삼대마교가 준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실제로 혈교와 광명마교는 미쳐 날뛰고 있지. 일월신교가 내분을 수습하고 강호에 나온다면, 운명의 세 별이 모두 세상에 나온다고 생각했던 거다.”

    그렇지만, 이라고 작게 읊조리며 고개를 저었다.

    “암시장에 와서 직감했다.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근거 따윈 없지만 운명의 세 별 중 하나가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이 들었거든. 그리고 네놈을 봤었지. 다른 두 별보다는 미약하지만, 점점 밝게 빛나는 요성(妖星).”

    “.......”

    “유이강은 편히 갔나?”

    모든 것을 넘겨주고 눈을 감은 망자의 마지막이 떠올랐다.

    “...웃으면서 떠났습니다.”

    “그런가.”

    고갯짓을 하는 입가에 씁쓸한 기색이 소슬바람처럼 스쳐지나갔다.

    “운명의 별이 네놈인지, 네놈 안에 있는 그 괴물인지는 모르겠군. 다만 그게 네놈이라면... 넌 나머지 두 놈과 같은 하늘을 짊어지고 살지 못할 거다. 너희들은 서로를 잡아먹을 운명이니까.”

    세 별은 양립할 수 없다.

    한쪽만 남을 때까지 서로를 죽일 운명이리라.

    감히 상상하지도 못한 이야기를 들은 강엽이 아무 말도 못할 때, 염왕이 나지막이 말했다.

    “넌 운명의 수레바퀴에 올랐고, 그건 막는다고 막아지는 게 아니다. 억지로 막으려고 하면 더 급격하게 뒤틀릴 뿐.”

    “.......”

    “언젠가 네 선택에 따라 많은 것이 바뀔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부디 현명한 선택을 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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