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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27화 (227/450)
  • 41화. 기억 (2)

    “...그러니까 여기 촉도를 넘어가면 사명궁(邪冥宮)이 나오는 거지. 놈들을 치려면 이 길로 가야 하네.”

    푸른 장삼을 걸친 청년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일월성문(日月星門)이라는 무맥에서 사사한 유익이라는 청년으로 일행의 지낭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강엽은 그 사실을 알고 내심 의아하게 여겼다.

    ‘...일월신교와 관련이 있나?’

    천산 너머에 자리한 일월신교.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일월성신을 떠받드는 그들도 백도 정파가 치를 떠는 마교였다.

    광명마교와 흑룡교와 관련이 있는 인물들이 포진한 일행에 이런 인물이 있는 게 과연 우연일까?

    백무량이 턱을 만지며 물었다.

    “그러니까 촉도를 넘어가자?”

    “바로 그 말일세. 물론 촉도가 험난하긴 하지만 우리 여덟의 발놀림이라면 어렵지 않을 테니까.”

    일행의 총원은 여덟이었다.

    강엽은 가루라의 화신과 함께하면서 그들이 팔부중의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까지 알아냈다.

    딱히 그들이 스스로를 그렇게 부르는 건 아니고, 가루라의 화신이 제멋대로 부르는 것이지만.

    ‘백무량이 용(龍)이고, 유익은 천(天)인가.’

    그리고 강엽, 아니 진조는 수라였다.

    ‘그나저나 옛날이라는 건 알았지만....’

    대륙이 통일되기 전의 혼란한 시대.

    아예 성 단위로 쪼개진 전국시대는 지난 것 같지만, 강북과 강남에 각각 왕조가 들어선 시대였다.

    ‘이런 시대에서 뭘 하는 거지?’

    이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세상에서 이들과 함께한지도 며칠째였지만 거기까진 알지 못했다.

    아니, 다 떠나서 여길 언제 떠날 수 있을까?

    그렇게 일행과 함께 험준한 촉도를 넘어 사천땅, 이 시대엔 익주라 불리는 지역에 진입했다.

    사명궁은 대파산맥 깊숙한 곳에 똬리를 튼 마도 문파.

    정과 사의 개념이 불분명한 시대지만, 인신공양으로 힘을 기르는 사명궁은 명백한 마도였다.

    그러나 험준한 곳에 있는 데다 주변에 강대한 문파가 없기에 사명궁을 견제할 세력이 없는 마당.

    마지막 야영을 할 때가 되어서야 강엽은 비로소 이들이 왜 마도 문파를 적대하는지 알게 됐다.

    “근데 우리만으로 오백 명이 넘는 놈들을 상대하는 게 말이 되나? 진패선(陳覇先) 그자는 돈만 주고 제대로 지원을 안 해주네.”

    “입 조심해. 그래도 이 나라 승상이다.”

    “나라꼴이 개판이라 여기까지 군사도 못 보내는 주제에 승상은 무슨 얼어죽을 놈의 승상.”

    말을 들어보니 일행은 나라에서 돈을 받고 민생을 어지럽히는 사마외도를 토벌하는 듯했다.

    ‘진패선이라면 진무제인가? 남진의 황제?’

    일찍 죽는 바람에 재위 기간이 짧긴 해도 살아생전엔 명군으로 추앙받은 인물이다.

    승상이라 부르는 걸 보면 아직 양위를 받기 전인 것 같은데....

    ‘나라에서 돈을 받는다... 하긴 이들도 먹고 살려면 돈 나올 구석은 있어야겠지.’

    대개 한 지역의 유지인 무림 문파들은 소작이나 사업 등으로 돈을 벌지만, 일행은 일정한 주거지 없이 온 천하를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따지고 보면 낭인 아닌가?’

    물론 돈만 쫓는 낭인과는 살짝 다르지만, 골자만 보면 비슷한 면이 있었다.

    가루라의 화신, 진조의 연인이자 일행의 우두머리인 시천낭랑(始天娘娘) 예사란이 말했다.

    “이 일로 진 대인에게 황금 백 관을 받기로 했지.”

    스스로도 살아온 세월을 잊었다고 하는 진조를 제외하면 그녀는 모두에게 하대했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는 가운데 구시렁거렸던 인물이 눈을 치켜뜨며 따졌다.

    “돈을 받았으니 닥치고 일하라는 건가?”

    “어차피 평범한 병사들은 도움이 안 돼. 산길을 오르는 데만 허덕일 테니까. 짐밖에 안 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봤자 무슨 소용이겠어?”

    “으음, 그건....”

    “우리 사명은 그런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하지 못하는 것. 이 땅의 사마외도를 몰아내는 일.”

    그들 외의 사람들과 함께 싸우는 것은 무용하다.

    “차라리 대가가 적다고 하면 모를까, 지원이 없다고 불만을 갖는 건 자신이 범부와 다를 바 없다고 시인하는 꼴이지. 넌 범부인가?”

    “...미안. 내가 실언을 했다.”

    예사란의 언변에 허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언변이 힘을 얻으려면 내용보다는 누가 그 말을 하느냐가 더 중요한 법이니까.’

    당연한 말도 위대한 사람이 말하면 진리가 되는 법.

    간단하게 불평불만을 잠재운 그녀는 일행을 이끌고 사명궁으로 향했다.

    * * *

    당연히 사명궁도 바보는 아닌지라 곳곳에 경계 인원을 배치했다.

    하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감히 사명궁을 침입하다니 간덩이가... 크악!”

    “보잘 것 없는 놈들이군.”

    단숨에 사명궁의 무인들을 격살한 백무량이 손에 묻은 피를 털며 중얼거렸다.

    일행이 싸우는 모습에 강엽은 감탄했다.

    ‘대단하군. 전원이 삼화취정이라니.’

    무림은 제대로 태동하지도 않았고, 무학 역시 전반적으로 걸음마를 갓 뗀 시대였다.

    그런데도 이들은 강엽이 살던 시대에 던져둬도 정도십대고수나 사도십대고수에 오를 만한 기량을 지녔다.

    군사적인 지원이 없다고 볼멘소리를 뱉었던 게 엄살처럼 느껴질 정도.

    “대장, 놈들이 우리가 온 걸 안 것 같소.”

    문득 유익이 말했다.

    사방팔방 요란한 뿔피리 소리가 울려 퍼지는 게, 멀리 있는 적들에게 발각당한 듯싶었다.

    “상관없어. 정면으로 간다.”

    무모한 결정에도 반대 의견은 없다.

    일행은 곧장 단단한 성벽에 둘러싸인 사명궁으로 쳐들어갔고, 당당하게 정문을 부수고 들어갔다.

    “한창 재미 보고 계셨구만.”

    무인들이 집결한 현장.

    돌을 쌓아올린 거대한 제단 위에 헐벗은 사람들이 피를 흘리고 있었다.

    심장이 뻥 뚫린 채 고통에 찬 얼굴로 숨을 거둔 희생양들의 모습에 일행의 안색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이가 없군!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온몸의 거죽을 전부 벗겨주마!”

    무인들은 물론 술사들까지 나서서 일행을 막았지만....

    -혈무화(血霧化).

    육신이 통째로 핏빛의 안개로 화한 강엽이 적들이 차지한 공간을 뛰어넘어 술사들을 암습했다.

    사방에서 빗발치는 경력은 핏빛 안개를 태우지 못하고 그대로 통과하기만 할 뿐.

    유유하게 적들을 뛰어넘은 강엽은 혈목을 불러내서 술사들의 육신을 가차없이 꿰뚫었다.

    푸학!

    “끄아악!”

    “어, 어떻게...!”

    사명궁의 무인들이 동요했다.

    냉정한 눈으로 그들을 둘러본 강엽이 중얼거렸다.

    “죽어라.”

    심즉살의 언령(言令).

    절대고수의 의념이 일자 평무인들은 이렇다 할 저항도 못하고 울컥 피를 토해내며 쓰러진다.

    예사란을 포함한 다른 일행도 강했지만, 진조의 경지는 그야말로 하늘을 뒤흔드는 수준이었다.

    ‘대낮인데도 거칠 게 없군.’

    아마 이 시점에서 진조는 이미 흡혈귀로서 완전무결한 경지에 도달한 것이리라.

    삼화취정에 올랐을 당시에도 겪지 못한 고차원적인 감각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진다.

    “무슨 놈의 괴물이 이런...!”

    기를 쓰고 달려들어봤자 족족 격퇴당한다.

    사명궁의 중추 고수들이 모습을 드러냈지만, 강엽의 좌우 눈동자가 다른 빛을 발하자 저들끼리 죽고 죽이기 시작했다.

    같은 정마안인데도 강엽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권능.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쿠르르르르릉......!

    청명한 하늘을 가로지른 날벼락이 지상을 강타했다.

    [네놈들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다. 스스로를 팔부중이라고 칭하는 모자란 것들. 피도 안 마른 애송이들이 본좌의 대지를 더럽히다니!]

    전성과 함께 하강한 노인.

    전신에 벼락을 두른 노인이 수염을 떨며 분노를 토하자 예사란이 싸늘하게 웃었다.

    “자칭 벽력신군(霹靂神君)이라고 주장하는 노망난 늙은이. 언제 오나 했더니 부하들이 다 죽고 나서 등장하셨나?”

    “갈-!”

    짐짓 역정을 낸 벽력신군이 포탄처럼 쏘아지는 것과 동시에 예사란의 신형도 사라졌다.

    스스로 빛살이 된 것처럼 드넓은 사명궁 곳곳을 누비며 벽력신군과 충돌했다.

    벽력신군 역시 정기신을 합일하여 벽을 뛰어넘은 초고수. 강엽이 봤을 땐 약간 낡은 부분이 있었지만, 현 무림의 강자들에게도 충분히 통할 만한 실력이었다.

    콰앙! 쿠르르르르르릉......!

    진각을 밟고 일수를 휘두를 때마다 새파란 뇌광이 성벽을 휩쓸고 둔중한 우렛소리가 대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일행에게 죽은 적들의 시체와 인신공양으로 희생된 자들의 시체가 벼락을 맞고 터져나간다.

    벽력신군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신위.

    그러나....

    ‘상대가 너무 안 좋아.’

    요란하게 들이치는 뇌격은 예사란을 건드리지 못했다.

    백금색의 광채에 둘러싸인 그녀는 언제나 벽력신군보다 한 박자 빨리 움직였으니까.

    초식은 연결점을 갖고 이어지며, 하나로 연결된 초식들의 집합이 곧 투로라 불린다.

    그러나 예사란의 무공은 그런 투로를 찾아볼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는 것도 보이지 않는다.

    시작과 과정을 건너뛰고 결과만이 존재했다.

    푸학!

    “윽...!”

    어떻게 움직였는지 볼 새도 없이 벽력신군의 어깻죽지부터 반대쪽 옆구리까지 길게 갈라졌다.

    가까스로 몸을 비튼 벽력신군의 복부 위로 또다시 붉은 혈선이 일며 피가 솟구쳤다.

    전신에 두른 뇌광은 조금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런 찢어죽일 년이!”

    꾸와아아아앙!

    들불처럼 팽창하는 강렬한 경파가 예사란은 물론 멀리 있는 일행의 몸까지 저 멀리 밀어냈다.

    “본좌가 순순히 물러날 거라 보느냐! 진원을 소모하는 한이 있어도 네놈들을 모조리 죽이리라!”

    부리부리한 눈동자 사이로 시퍼런 벼락을 뿜어내는 노인의 박력에 일행도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다만 강엽은 툭툭 빗발치는 뇌기를 아무렇지 않게 뛰어넘어 예사란의 곁에 다가갔다.

    굳이 호신강기를 쓰지 않아도 벽력신군의 뇌기는 그에게 조금도 피해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계속 혼자서 싸울 거냐?”

    “저런 놈 하나 못 당해내서 어떡하겠어요?”

    이런 상황에도 힘차게 웃는 예사란의 얼굴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강엽이 뒤로 물러났다.

    “그럼 마음대로 해봐라.”

    “다음 수로 끝낼게요.”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가 고막을 때렸지만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데는 문제가 없었다.

    마찬가지로 벽력신군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들었다.

    “건방진 연놈들! 내 너희들만큼은 반드시...!”

    그의 말은 끝까지 가지 못했다.

    그전에 한 줄기 빛살로 화한 예사란이 면전에 출현해서 그의 미간을 향해 방점을 찌르고 있었으니까.

    눈을 부릅뜬 그가 벼락을 두른 쌍장을 쏘았지만, 예사란은 반격을 허용하지 않았다.

    -심상절예....

    압도적인 의념이 사명궁 전체를 가득 채울 기세로 퍼져나가고,

    그녀가 무엇을 하려는지 깨달은 벽력신군의 얼굴이 처참히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네년, 설마 마음의 검을...!”

    -광세도래(光世到來).

    찰나 세상이 새하얗게 물들었다.

    압도적인 휘광이 사명궁 전체를 뒤덮은 가운데....

    ‘맙소사.’

    강엽은 혼백이 산산이 부서지는 충격에 빠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그런데도 아프지 않다.’

    전신을 태울 듯한 열기가 느껴지는데, 신기하리만치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놀랍도록 멀쩡했다.

    ‘다른 녀석들도 마찬가지고.’

    하지만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벽력신군은 물론, 마인들의 시신도 태양빛처럼 강렬한 휘광에 녹아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까.

    강엽은 어쩐지 이것과 비슷한 느낌을 어디선가 겪은 듯한 기시감이 들었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모든 일이 마무리된 뒤에 예사란이 이마를 닦았다. 식은땀 한 방울 안 났지만 절기를 쓴 여파로 낯빛은 약간 상기되었다.

    “심상절예... 언제 봐도 황당하군.”

    “그러게 말이오. 검으로 펼치면 심검, 권으로 펼치면 심권... 실제로 보기 전까진 난 저게 선맥(仙脈)의 도사들이 으레 떠드는 헛소리라고 생각했었소.”

    백무량과 유익이 저들끼리 쑥덕거렸다.

    강엽도 충격이 가시지 않아서 넋을 잃었지만, 그의 입은 본능과 상관없이 알아서 제 할 말을 떠들고 있었다.

    크게 휘청거리는 예사란의 등을 받치며 칭찬한다.

    “고생했다. 결국 완성했군.”

    “하핫, 당신 덕분이에요. 당신이 그 경지가 실존함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제가 어떻게 심상절예를 완성할 수 있었겠어요?”

    “그래도 그걸 완성한 건 오롯이 네 재능이다. 그렇게 따지면 나 역시 달마를 만나지 않았다면 심상절예를 완성할 수 없었겠지.”

    “아, 달마... 갈잎 하나로 강물을 건넜다는 신통한 승려 말이죠? 수십 년 전의 사람을 만났다고 하니 새삼 당신이 나이 많은 할아버지라는 게 실감나... 아얏!”

    “또, 또 까분다.”

    졸지에 꿀밤을 맞은 예사란이 툴툴거렸지만, 그것도 이내 엉망이 된 사명궁의 광경에 그쳤다.

    쓸쓸한 얼굴로 희생된 사람들의 주검을 둘러본 예사란이 하늘로 고개를 꺾었다.

    “...제대로 수습해주자.”

    “그럽시다.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생각하는 건데 어째 싸우는 것보다 사람들 묻는 일이 더 힘들구려.”

    유익은 너스레를 떨면서도 희생양들을 옮기는 걸 도왔고, 백무량과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강엽 역시 혈목을 시켜서 시신을 정중하게 옮겼다.

    * * *

    “으음....”

    강엽이 천천히 눈을 떴다.

    [정신이 드나?]

    귓가를 파고드는 더없이 익숙한 목소리.

    정신을 차린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겨우 돌아왔군.”

    사방이 어두컴컴한 이곳은 내면의 심상이었다.

    거대한 옥좌에 다리를 모로 꼬은 채 앉은 진조가 시큰둥한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럭저럭 멀쩡해 보이는구나. 어디 한구석은 망가져도 이상하지 않았는데.]

    “...당신의 기억을 봤다.”

    처음엔 꿈인지 환상인지 몰랐지만, 겪으면 겪을수록 진조의 기억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큭큭,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짐과 네놈은 강하게 이어져 있으니까. 그래서 뭘 봤지?]

    “당신이 팔부중이라는 자들과 함께 사명궁이라는 마도 문파를 아작냈던 기억.”

    [흐음....]

    “예사란, 백무량, 유익.”

    세 이름을 말한 강엽이 몸을 일으키며 진조의 눈을 쳐다보았다.

    정마안을 준 이후 그의 안구는 텅 비어버렸지만, 눈구멍 안쪽에선 붉은 귀화가 타오르고 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들이 광명마교와 흑룡교, 일월신교의 시조들인 것 같은데.”

    [.......]

    “그래서 이해가 안 돼. 마도를 적대했던 자들이 왜 마도가 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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