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삼파 (5)
휘몰아치는 태풍 속에서 뜨거운 열기가 춤추었다.
혈음마군의 폭거로 주변 일대의 나무들이 추풍낙엽마냥 잘려나간 텅 빈 하늘.
“으음, 오사도의 절초인가....”
그 하늘 너머로 치솟은 버섯 같은 불꽃구름을 발견한 옥청선자가 짧게 신음했다.
사도와 교왕이 얽히고설킨 전장에서 과연 강엽이 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까.
강엽이 강하다는 것은 알지만, 상대가 워낙 거물인 만큼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누굴 걱정할 계제는 아니지.’
일단 눈앞의 적부터 치우는 게 우선일 터.
사특한 비약을 복용하여 과분한 힘을 행사하는 마인이 그녀의 등에 일권을 퍼부었다.
이름 그대로 불꽃에 휘감긴 염권(炎拳).
그녀의 사부인 검성이 소싯적에 토벌한 청홍일마는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동시에 다루었다.
무당의 양의심공을 익힌 것도 아닌데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체질 덕에 이종진기를 익힐 수 있었던 것.
하지만 말년에 거둔 제자들은 그러하지 못했다. 각각 극양과 극음의 체질을 타고난 까닭이다.
다만 그렇다고 홍면의 무재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벽을 넘어 초절정의 경지에 발을 들였다는 사실이 그가 출중한 무재를 타고났다는 걸 방증했으니까.
그저 상대가 좋지 못했을 뿐이다.
여기저기 베이고 찔린 상처를 입은 홍면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네 상대는 나다, 검성의 제자!”
투아아아아앙!
열풍이 사방팔방을 에워싸는 가운데 자줏빛 꽃잎들이 흐드러지게 흩날린다.
짧은 보법으로 염권을 흘린 옥청선자의 매화검이 서릿발같은 기세로 두꺼운 팔뚝을 올려쳤다.
자하신기의 경력을 머금은 칼날은 삼 자 두께의 백련정강도 종잇장마냥 베어버리는 바.
열양지기를 감싼 홍면의 팔을 절단하진 못했으나, 근육과 주요 경맥이 잘리면서 피가 치솟았다.
“크읏...!”
“유감일세.”
담담하게 말을 건네는 옥청선자였다.
홍면이 실핏줄이 올라온 흉물스러운 눈동자로 노려보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벽을 넘은 초고수가 약에 의존하다니. 그렇다고 될 일이 아님을 잘 알지 않나?”
“닥쳐라-!”
화르르르륵...!
노도처럼 일어난 화염이 덮쳤지만 옥청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하다 못해 격공권을 기습적으로 찔러봤지만....
“똑같은 실수를 하는군.”
송곳처럼 세운 기파가 격공이 이루어지는 시점을 정확히 찌르면서 무위로 돌렸다.
진기의 운용을 방해받은 홍면이 가면 속에서 피를 한 바가지나 쏟으며 무릎을 꿇었다.
“커억!”
“벽을 넘어 초절정이니 삼화취정이니 하는 경지에 발을 들이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지.”
마치 제자에게 가르치는 듯한 조곤조곤한 목소리.
홍면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으르렁거렸지만, 그의 사지는 마비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뻔하게 공격하면 읽힐 수밖에. 공력이 늘어났다고 하나 누가 그런 수에 당해주겠나?”
사전에 격공이 이루어지는 지점을 포착하면 피하거나 역으로 받아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일찍이 벽을 깨기 전부터 격공을 습득했던 강엽은 당우경과의 비무에서 그 사실을 깨닫고,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도록 감각을 다듬었지만,
홍면은 삼화취정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인 것을 망각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막 그 경지를 밟은 것 같군. 자신의 한계를 아직 알지 못한 건가? 아니면 마음이 급한 건가?”
둘 다 아니면 혈라분의 효능으로 잠시나마 자신의 한계를 넘었다고 자신했던 걸까.
차라리 본래 자신의 무공으로만 상대했다면 조금은 더 시간을 끌 수도 있었던 것을.
서걱!
목을 가로지른 혈선을 따라 미끄러지는 머리.
붉은 가면이 떨어져나온 자리엔 분노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만이 존재했다.
수급 대신 가면을 주운 옥청선자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기려는 찰나.
“......!”
본능의 경고에 따라 즉시 몸을 뒤집었다.
쉬아아아아악!
심장을 겨냥한 날붙이를 간발의 차로 겨드랑이 사이로 흘리면서 매화검을 휘두르는 찰나, 괴인도 연격을 퍼부었다.
콩 볶는 소리가 요란하게 나며 경파의 반동으로 멀찍이 물러난 옥청선자는 낭패감에 찌든 얼굴로 시선을 멀리 향했다.
그녀를 향해 무표정하게 다가오는 네 사람의 모습.
성별도, 연배도, 수중에 쥔 병장기도 모두 다르지만 무감정한 얼굴 때문인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분위기에서 위화감과 익숙함을 느낀 옥청선자의 동공이 잘게 흔들리는 순간.
“청홍일마의 제자를 십초지적으로 격하시키다니. 차기 화산파 장문인다운 실력이다.”
“장래의 천하팔존이기도 하지. 살려두면 후환이 될 것이다. 미리 싹을 잘라둬야 해.”
“희생이 제법 클 텐데.”
“감수할 가치는 있다. 교주가 강호에서 광명마교를 적대하는 고수를 만나면 죽여달라고 하지 않았나.”
“죽이지 않고 사로잡는 건? 그녀를 생포하면 무림맹으로부터 제법 큰 양보를 받아낼 수 있을 텐데?”
“불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저들끼리 의견을 나누었던 괴인들이 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옥청선자를 향해 병장기를 겨누었다.
옥청선자의 이마 위로 땀방울이 흘러내렸다.
“...괴뢰마인가?”
중단전을 연 네 명의 괴인들 너머에서 수십 명의 군상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무공 수준은 천차만별이나 하나같이 무표정을 견지하는 자들.
앞서 암습을 가했던 괴인이 관절을 풀며 말했다.
“오사도가 절기를 썼으니 혈음마군은 죽거나 중상을 입었을 것이다. 그 귀영이라는 자도 마찬가지일 테고. 다치진 않았더라도 상당히 지쳤을 터.”
“옥청선자, 네가 방해하게 둘 수는 없다. 이 기회에 깔끔하게 둘 다 제거하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자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호흡과 말하는 속도도 정확히 일치한다.
하나이면서도 여럿이며, 여럿이면서 하나인 자.
괴뢰마가 선언했다.
“이 모습을 본 이상 살려둘 순 없다.”
* * *
“오사도.”
별안간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오사도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괴뢰마인가?”
수풀 사이에서 걸어나오는 여인.
처음에 봤던 모습과는 완전히 딴판이지만 기척은 놀랍도록 비슷했다.
“그렇다.”
“어떻게 된 거지?”
괴뢰마가 불가해의 괴물임은 알고 있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의 몸에서 부활한단 말인가.
“원래는 비밀인데... 같은 편이니 알려줘도 되겠지. 교주도 알고 있으니. 분혼마공(分魂魔功)이라고 한다.”
“분혼마공?”
“쉽게 말하면 혼백을 쪼개는 거다. 분혼대법이라는 술법에서 영감을 얻었지.”
만약 강엽이 그 말을 들었다면 지난날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서 만난 흑룡교의 망령을 떠올렸으리라.
오사도의 안색이 황망하게 변했다.
“그러니까... 자신의 혼백을 몇 개로 쪼개서 다른 사람의 몸에 심었다고?”
“아니.”
“뭐? 하지만 방금 전엔....”
“갯수가 틀렸다. 몇 개가 아니야. 그보다 훨씬 많다.”
“....”
“정확한 숫자는 말해주기 어렵지만, 대충 엄청나게 많다고 알면 된다. 설사 여기 있는 나를 모두 죽여도 진정으로 내가 죽는 일은 없지.”
“...이거 너무 엄청난 말을 들어버려서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오사도가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긴장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나오는 버릇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의문은 풀렸어. 당신이 수십 년간 악명을 쌓았으면서도 어떻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는지... 불사를 꿈꾸는 건가?”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본 거 아닌가.”
천하를 일통하여 만인지상의 권력을 손에 넣은 진시황조차 얻지 못한 불가능한 꿈.
괴뢰마는 그걸 자신이 창안한 마공을 통해서 실현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한데 그 귀영이라는 자는?”
“눈이 달렸으면 직접 보지 그래?”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괴뢰마는 감정을 드러내는 일 없이 침착하게 절벽 아래를 살폈다.
검은 잿가루들이 거센 기류를 따라 휘날리는 가운데 땅엔 용암 같은 열기가 들끓고 있었다.
“아무리 호신강기를 쳤어도 저 열기에 살아남진 못하겠지. 귀영과 혈음마군을 같이 처리했어.”
“나쁘지 않은걸. 이쪽은 옥청선자를 붙들고 있다. 혈음마군을 따르는 교성은 죽었고.”
“마을로 갔다는 교성은?”
“내버려두는 게 좋을 것 같군. 교성 한 명의 목을 더 취하자고 무리할 필요는 없겠지.”
지금까지 제거한 자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어마어마한 공로였다. 둘이 협력했다는 걸 감안해도 이에 비견되는 공적을 쌓은 사도들은 없을 터.
하지만 오사도는 한숨을 터뜨렸다.
“근데 저렇게 되면 혈산광호는 시체도 안 남았을걸. 녹림의 신물을 찾을 수 있을지....”
“그건 걱정하지 마라.”
괴뢰마가 손에 든 물건을 내밀자 오사도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표면에 녹광이 아른거리는 손도끼.
녹림 총표파자의 신물인 녹산혈부였다.
“오다가 돌무더기 사이에서 찾았다.”
“좋아. 교주님께서 내려주신 임무도 완수했군. 이제 옥청선자만 죽이면 끝나....”
오사도의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퍼억!
불현듯 괴뢰마의 머리가 수박처럼 쪼개지며 걸쭉한 핏물과 뇌의 파편들이 쏟아졌기 때문.
무심코 돌이 날아온 곳으로 시선을 돌린 그녀의 눈에 열기를 뚫고 나오는 무언가가 보였다.
국부를 가린 바지 일부를 제외하면 맨몸이나 다름없는 몰골. 본디 옷과 함께 새카맣게 타버렸을 육신은 그을음만 빼면 놀랍도록 멀쩡했다.
“...그걸 맞고 살았다고?”
대체 어떻게.
어찌나 놀랐는지 표정도 간수하지 못했다.
자신을 올려다보는 강엽을 시야에 담으며 일신의 경악을 고스란히 드러낼 따름.
그 순간, 증발하듯 사라진 강엽의 신형이 그녀의 면전에 나타났다.
깜짝 놀라서 화살을 쐈지만 강엽은 가볍게 상체를 흔들어 화살을 피해냈다.
경련하는 팔근육 탓에 조준이 정확하지 않았다.
‘이런, 무간시를 쓴 반동이....’
폭염무간시는 그냥 화살이 아니었다. 내장된 폭약을 바탕으로 진기를 연쇄적으로 폭발시키는 절기.
문제는 시위를 놓기 전까지 진기를 한계까지 응축하기 때문에 반동이 심하고, 도중에 격발하지 않도록 세밀히 통제해야 하는 어려움도 따른다는 것.
평상시라면 능히 버텨냈겠지만 앞서 또다른 절기를 쓴 여파와 혈음마군에게 입은 내상 탓에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사아아악...!
날카로운 용조(龍爪)가 밤하늘의 야음을 갈랐다.
종이 한 장 차이, 아슬아슬하게 조풍이 살갗을 스치자 오사도는 섬뜩한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나 티내지 않기 위해 애써 입술을 핥았다.
“어떻게 살아남았지?”
설사 혈음마군이 살아남더라도 강엽은 죽었어야 했는데, 결과는 반대가 되어버렸다.
그녀를 찬찬히 살펴보던 강엽이 피식 웃었다.
“광명마교라고 했던가.”
“음?”
“가루라의 후신이 마교를 만들 줄이야. 그녀가 저승에서 땅을 치고 통곡하겠군. 고결하게 빛났던 샛별은 추락하고 사마(邪魔)만이 남았구나.”
“네놈 뭐라는....”
“짐은.”
강엽이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반사적으로 한 발짝 물러선 오사도는 뒤늦게 자신의 실책을 깨닫고 수치심에 얼굴을 붉혔다.
“개탄을 금할 수 없다. 옛 친구의 후인들은 시조의 고결함을 잊고 사마외도가 되었는가.”
“그러니까 뭐라고 지껄이는 거냐고-!”
울컥한 오사도가 기습적으로 화살을 쐈다.
그러나 섬전같은 화살은 강엽의 몸을 꿰뚫기는커녕 못 박힌 것마냥 허공에 고정되어 삐그덕거릴 뿐.
“...허공섭물!? 아니, 그럴 리가...!”
지쳤다고 하나 경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었다.
설령 혈음마군, 아니 교주가 이 자리에 있어도 쏘아진 화살을 허공섭물로 잡을 수는 없을진대.
“그 혈음인지 뭔지 하는 놈은 팔 한 짝만 놔두고 도망쳤지. 아쉬운 대로 네년을 통해서 후계자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수밖에 없겠구나.”
강엽, 아니, 그의 껍질을 뒤집어쓴 존재가 자신을 물끄러미 응시하자 오사도는 온몸의 솜털이 쭈뼛 돋았다.
기파를 드러낸 것도 아니고, 살의를 드러낸 것도 아니건만 무언가 일어나려 하고 있었다.
흑요석처럼 요사한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녀는 등골이 오싹해지는 공포에 사로잡혔다.
‘위험해. 얼른 도망쳐야...!’
사도의 자존심이고 뭐고 이대로 있으면 죽는다는 위기감에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는 찰나.
불현듯 눈앞에서 나타난 손아귀가 목을 붙잡았다.
꽈악!
“끄윽!”
움직이는 것도 보지 못했다.
안법과 경신술로는 누구에게도 뒤처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던 그녀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이대로 목뼈를 부러뜨릴 수도 있겠지만 더 재밌는 걸 보여주마. 안에서 잘 보거라, 후계자야.”
입꼬리를 말아올린 괴물의 입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흘러나왔다.
“죽어라.”
커헉!
칠공에서 뿜어져나오는 핏줄기.
사시나무처럼 경련한 오사도의 몸뚱이는 이내 실 끊어진 인형처럼 사지가 축 늘어졌다.
“이것이 심즉살(心卽殺)이니라.”
심맥이 끊긴 절세고수의 시신. 날카로운 송곳니를 세운 흡혈귀가 하얀 목으로 입을 가져갔다.
콰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