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삼파 (2)
정수리를 노리는 검격.
이제 와서 호신강기를 친들 몸이 양단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오사도도 죽음을 직감한 듯 창백하게 굳은 안색으로 옥청선자를 노려볼 뿐이었다.
그렇게 모두가 같은 결말을 생각하고 있을 때.
카앙...!
오사도를 내려치던 옥청선자의 칼날이 돌연 꺾이며 측면에서 날아온 암기를 쳐냈다.
“누구냐!”
“아...!”
뜻밖의 구원에 오사도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녀석들이 왔나 보군.”
비교적 부상이 경미했던 부하들은 혈산광호를 쫓기 위해 그녀와는 다른 방향으로 추격했던 것이다.
그녀는 부하들이 혈산광호를 확보하고 자신을 구하기 위해 달려왔을 거라 생각했지만, 고개를 돌린 곳에 있는 것은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오사도.”
존귀한 신분인 사도에게 대뜸 하대를 하는 자.
오사도가 눈썹을 치켜떴다.
“너는 누구지?”
지극히 평범한 사내였다. 옷차림도 후줄근하기 짝이 없고, 특별히 단련한 흔적도 안 보이는 촌부.
그러나 심연처럼 우묵한 눈동자를 마주한 오사도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괴뢰마(傀儡魔).”
“당신이?”
오사도뿐만 아니라 옥청선자도 흠칫했다.
‘이름도, 정체도 알려지지 않은 불가해의 마인....’
두 마교가 궐기한 작금의 강호에선 사마외도의 무리들도 덩달아 미쳐 날뛰고 있었다.
옛날부터 악명을 떨치고 있는 자들부터 죽었다고 알려진 자들, 아직 이름을 얻지 못한 자들까지.
괴뢰마는 오래전부터 천하 각지에서 살겁을 쌓으며 악명을 떨친 마인이었다.
그를 잡기 위해 구파의 무인들, 특히 무당파가 이를 갈고 추격했지만 실패했다. 심지어 무당제일검까지 나섰음에도 실패하고 말았다.
실력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괴뢰마를 죽여도, 어디선가 괴뢰마를 자처하는 또다른 마인이 나타나서 살겁을 이어갔던 것.
마치 끊임없이 퍼져나가는 역병처럼 죽여도 죽여도 계속해서 나타나는 불가해의 괴물.
‘그런 자가 광명마교의 사도를 도와주다니....’
옥청선자가 침중한 얼굴로 오사도를 힐끔거렸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도 괴뢰마가 정체를 밝히자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당신의 이름은 나도 알고 있어. 내가 궁금한 건 왜 당신이 나를 구해줬냐는 거다.”
“교주의 명령이다.”
“...뭐라고?”
“달포 전에 광명마교, 아니 광명교에 귀의했다. 그때 교주가 말했다. 너희들 사도를 도우라고.”
“...아니, 이건 뭔....”
“물론 그전부터 교주와 알고 지내긴 했었지. 교주는 칠사도가 죽고 얼마 뒤에 나를 그 지위에 봉했다. 넌 외부에 나가 있어서 못 들었나 보군.”
“.......”
한 달 전에 장강수로맹을 도모했던 칠사도가 객사하면서 그 자리가 붕 떠버리긴 했다.
하지만 외부인을 그 자리에 앉혔단 말인가?
‘이게 뭔... 팔사도도 십 년이나 걸렸는데....’
평소 그녀와 막역한 팔사도도 입교한 지 십 년이 넘게 지났는데도 출신 때문에 구설수에 시달렸다.
고작 달포 전에 입교한 외부인에게 존귀한 자리를 주는 건 말도 안 되었다.
“그 말... 진짜인가? 교주님께서 외부인에게 칠사도의 지위를 주셨다고?”
“못 믿는 것 같군.”
“말이 되는 소릴 해! 너 같으면 믿겠나!?”
실력이 문제가 아니다.
사도는 교주의 손발로서 그를 대행하는 존재.
교리도 모르는 외부인이 그 자리에 오르는 것은 교의 권위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짓이 아닌가?
“기어오르지 마라, 오사도.”
“뭐라고?”
“교도로서 살아온 세월은 네가 더 길지 몰라도 교주와 알고 지낸 세월은 내가 더 길다. 난 네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그와 알고 지냈다.”
“...교주님과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그렇다.”
오사도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교주와 알고 지냈다면 그 세월은 수십 년을 헤아릴 터.
그때부터 교주와 알고 지냈다면 이미 한참 전에 사도의 자리에 내정됐던 걸까?
한 달 전에 칠사도가 죽었을 당시, 교주는 그 자리에 내정한 자가 있다고 말했다.
칠사도의 죽음은 불행한 재난이었다는 말과 함께.
“솔직히 당신을 믿진 못하겠다. 하지만 당신이 정말 교에 귀의했다면 증명해 봐. 나와 함께 저 여자를 죽이고 수급을 들고 가자고.”
괴뢰마가 시간을 벌어주는 동안 전력을 회복하고, 협공해서 옥청선자의 수급을 취한다.
그러나 괴뢰마의 반응은 미적지근했다.
“글쎄,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겁먹은 건가?”
“저쪽이 가만있을 것 같지 않군.”
“음?”
괴뢰마의 눈길이 향한 곳.
오사도가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눈부신 벼락이 질주했다.
위기를 깨달았을 때는 이미 면전에 다다른 검격이 그녀의 목을 노리고 쇄도하는 마당.
그러나 시기적절하게 터져나온 불꽃이, 뇌력이 담긴 검격을 상쇄하고 습격자를 튕겨낸다.
“허, 그걸 버텨냈다고?”
강엽의 모습을 본 오사도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상의가 찢겨지고 피부가 그을린 것을 빼면 강엽의 신색이 놀랍도록 멀쩡했기 때문.
옥청선자 역시 놀란 토끼눈이 되어서 강엽을 위아래로 살폈다.
“귀영, 자네 정말 괜찮은 건가?”
“덕분에 말입니다.”
옥청선자가 시간을 벌어주었기에 재생력으로 상처를 치료하고 기혈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만약 그녀가 오사도의 주의를 돌리지 않았다면 태세를 정비할 수 없었겠지.
“조심하게. 저자는 괴뢰마라는 자야.”
“그게 누굽니까?”
“죽여도 죽여도 죽지 않는 마인일세. 죽여도 매번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지. 수십 년간 그래왔네. 무당을 비롯한 구파와 팔가가 그를 오랫동안 추적했지만, 결국 근절하는 덴 실패했어.”
“그럼 집단이 아닙니까?”
“본인은 언제나 자신이 혼자라고 주장하더군.”
“좀 이상하군요.”
그 말에 의문을 느낀 강엽은 초음의 파동으로 괴뢰마를 샅샅이 관찰했다.
옥청선자가 거창하게 소개한 것치고는 하단전과 중단전은 평범했다. 정기신을 합일해서 삼화취정을 이룬 것도 아니다.
다만 이상한 점도 있긴 했다.
“흠.”
“왜 그러나?”
“저자의 상단전이 기이하게 발달했군요. 정기신을 합일한 건 아닌데 상단전만 비대합니다. 그리고 거기에 웬 씨앗 같은 게 느껴지는데....”
“씨앗?”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괴뢰마 쪽으로 눈길을 돌린 옥청선자는 그의 반응에 크게 놀랐다.
목석처럼 표정 변화가 없었던 괴뢰마가 놀란 듯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아닌가?
“...넌 뭐냐?”
“잠깐, 아까 저 화산파 말코 계집이 귀영이라고 불렀어. 얼마 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짓던 오사도가 아 하고 탄성했다.
“그래. 어디서 들었나 했더니... 팔사도가 말했던 놈이군. 낭인전의 새로운 금패급. 팔사도의 신경을 참 어지간히 긁었다고 하더니만.”
오사도의 입가에 살기 어린 미소가 흘러나왔다.
“팔사도가 체면을 구겼지. 이제 보니 그럴 만하네. 낭인전에 너 같은 놈이 있었을 줄이야.”
그녀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팔사도를 만났을 당시의 강엽은 지금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라는 것을.
“어쨌든 이로써 이 대 이로군. 괴뢰마, 이렇게 된 이상 날 도와서 저 연놈들을 쓰러트려야겠어.”
“아까도 말했지만 좋은 생각은 아니다.”
“사도의 지위를 받았으면서 약한 소리를 하는군. 매화검수의 수장과 낭인전의 금패를 잡을 기회야.”
“저 둘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가 있다. 절기를 쓴 여파로 집중력이 살짝 흐려진 것 같은데... 기감의 범위를 좀 더 넓혀봐라.”
이해하지 못할 주문에 의아해하면서도 오사도는 괴뢰마가 시키는 대로 기감의 범위를 넓혔다.
순간 무언가를 포착한 그녀가 눈썹 사이의 간격을 좁히며 입매를 실룩거렸다.
“...이건 또 무슨 지랄맞은 상황이지?”
“여기엔 우리만 있는 게 아니다. 저들도 그 점을 눈치채고 더 이상 덤비지 않는 걸 테지.”
괴뢰마의 말대로 강엽과 옥청선자는 저돌적으로 덤벼들었던 게 거짓말처럼 느껴질 만큼 고요했다.
괴뢰마 때문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오사도가 먼 곳을 뚫어지게 보며 말했다.
“거기 숨은 놈, 나와라.”
* * *
차가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강엽과 옥청선자, 광명마교의 두 사도가 대치하는 가운데 제삼자가 틈을 엿보고 있는 상황.
두 무리는 동시에 직감했다.
‘저자는 우리에게 우호적인 자가 아니다.’
같은 편이라면 합류하거나 귀띔을 줄 만한데 숨죽이고 싸움을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나보다 먼저 알아챘다니.’
옥청선자는 강엽이 자신보다도 빨리 그 존재를 눈치채고 알려주었다는 사실에 묘한 감흥을 느꼈다.
먼저 알아챘다고 해서 강엽의 무공이 반드시 그녀보다 앞선 것은 아니다. 강엽이 그녀보다 나은 부분도 있지만 못한 부분도 있을 테니까.
그래도 적의 기척을 감지하고 위치를 특정하는 영역에선 명백히 앞서 있는 게 사실.
불과 며칠 전까진 강엽을 몰랐던 그녀지만, 지금은 등을 맞댈 만한 대등한 무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경계심을 돋우는 가운데, 허공에서 나른한 저음이 울려 퍼졌다.
[이런,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도 쉽지 않군.]
대기를 떨치는 전성과 함께 뚝 떨어지는 인영.
저 멀리 있던 인영이 한순간 흐려지더니 네 사람을 굽어볼 만큼 높은 거목 위에 걸터 앉았다.
턱수염을 짧게 기른 사내. 네 사람을 오시하는 준수한 얼굴엔 오만함과 나른함이 묻어나왔다. 눈앞에 매화검수의 수장과 광명마교의 사도 둘을 두고도 그랬다.
오사도가 쌍심지를 돋았다.
“건방진 놈이네. 당장 내려오지 못해....”
“오사도, 저자의 등을 봐라.”
붉은 빛깔이 도는 거대한 혈륜(血輪).
괴뢰마가 경계하는 얼굴로 병장기의 정체를 밝혔다.
“저건 혈교의 진마혈륜(眞魔血輪)이다.”
“뭣이?”
“남만에서 저 남자에 대한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남만의 독곡을 저 남자가 무너뜨렸지. 혈음마군(血陰魔君)... 혈교의 팔대교왕 중 한 사람이다.”
“...!”
“...!”
“...!”
예상을 초월하는 말에 오사도는 물론, 강엽과 옥청선자도 근육이 긴장으로 뻣뻣해질 정도로 놀랐다.
광명마교의 사도와 괴뢰마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혈교의 교왕까지 현현하다니?
“원래는 신녀를 죽인 흉수를 처단하려고 온 것이다. 광명마교의 사도와 괴뢰마를 볼 줄은 몰랐다. 사이 좋게 공멸했으면 힘을 덜었을 것을.”
“...우리를 쫓아왔나?”
“동료들이 걱정되나 보군.”
“.......”
강엽이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자리를 비운 사이 교왕이 들이닥쳤다면 전멸은 시간문제였다.
“제법 반항했었지. 무당제일검의 제자와 아미의 비구니는 열심히 싸우더군. 당문의 계집도 그렇고. 저승에 가면 상봉할 수 있을 거다.”
“거짓말하지 마라.”
“거짓말이라고 믿고 싶겠지. 하지만 네 동료들은 전멸했다. 너와 검성의 제자밖에 없다.”
“아니, 하필이면 세 사람을 언급한 게 실수였다.”
“무슨 말이냐?”
“청수 도장은 그렇다 치고, 소창후와 독접화는 우리 일행 중에서 가장 최약체거든.”
“....”
만약 정말로 일행을 맞닥뜨렸다면 하후진이나 야차마곤, 백서희를 입에 담았겠지.
강엽이 파악한 바로는 하후진이 가장 강하고, 야차마곤과 백서희가 그 뒤를 잇는다. 청수는 두 사람보다 반 수 가량 밀리고.
“우릴 쫓아온 걸 보면 미리 정보를 들은 모양인데, 정보통의 일처리가 엉성하군. 유명한 사람들만 나불거리는 걸 보면 말이야.”
“하아....”
짐짓 한숨을 내쉰 혈음마군이 뒷목을 긁었다.
“이거야 원, 말 한마디에 허실을 파악하다니. 보통내기가 아니구만.”
“어설프게 아니까 그렇지.”
“반박할 수 없어서 슬프군. 하지만 내 말이 모두 거짓은 아니다. 저승에 가면 상봉할 수 있을 거라고 했었지. 내 부하들이 놈들을 처리하러 갔다.”
교왕의 병력이라면 교성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강엽이 뭐라 하기도 전에 등 뒤의 혈륜을 꺼낸 혈음마군이 싸늘하게 뇌까렸다.
“신녀의 원수와 정도십대고수, 광명마교의 사도 둘. 너희를 죽이면 대계에 큰 도움이 되겠지.”
그리고 핏빛의 섬광이 네 사람을 휩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