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20화 (220/450)

40화. 삼파 (1)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멀찍이 떨어진 채 도망치는 강엽과 전력으로 뒤를 쫓는 오사도의 숨바꼭질.

[혈산광호를 끼고 달리지 않는군. 기껏 봉합한 상처가 터질 걸 걱정하고 있나 보지?]

어둠 속을 쩌렁쩌렁 울리는 육합전성.

오사도의 살의가 등 뒤를 바짝 쫓아오는 것을 감지한 강엽의 입매가 살짝 굳어졌다.

‘경공술이 말도 안 되게 빠르군.’

삼백 장이 넘었던 거리가 반 각 만에 백 장으로 줄어든 상황.

암신으로 몸을 숨기고 허상을 뿌리는데도 오사도는 한 번도 놓치는 법이 없었다.

[소용없는 짓이야. 유능한 사냥꾼은 한번 점찍은 사냥감을 놓치지 않거든. 그 이상한 은신술로 별 짓을 다해도 못 도망칠 거다.]

처음엔 강엽의 존재를 까맣게 몰랐는데도 지금은 어디에 숨든 귀신같이 쫓아왔다.

‘놀라운 일은 아니지.’

강엽은 그러려니 했다. 이제껏 그와 비슷한 무위를 지녔거나 보다 강한 이들은 어둠 속에 숨은 그의 기척을 알아채지 않았던가?

다만 어둠 속에 숨으면 훨씬 빠르게 달릴 수 있기에 파훼됐다고 해서 암신을 풀진 않았다.

문제는 이렇게 해도 조금씩 거리가 줄고 있기에 언젠가는 따라잡힐 수 있다는 건데....

오싹!

섬뜩한 기운이 등골을 내달린다.

‘격공!’

거리가 줄자마자 오사도의 격공이 뒤통수에 작렬했다.

꾸아아아아아앙!

전사경의 묘리를 담은 경파가 큼직한 거목 다섯 그루를 한꺼번에 관통했다.

성인 장정 세 명이 어깨를 두를 만큼 큼지막한 나무들을 연달아 쳐부수는 일격.

그런 일격이 하나도 아니고 수십 발이나 쏟아지니 강엽도 정신이 없었다.

쿠콰콰콰콰콰......!

‘이만하면 불괴강시에 버금가겠는데?’

줄지어 울려 퍼지는 굉음. 말 그대로 숲 전체를 갈아엎는 무지막지한 무력 시위였다.

더 놀라운 점은 이 소나기가 무차별적인 파괴가 아니라 강엽을 노리고 쏘아졌다는 것이고.

무작정 등만 노리는 게 아니라 발을 디딜 곳을 사전에 포착하여 훼방을 놓는 솜씨.

그로 인해 강엽의 속도가 줄어들 때쯤, 경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법인걸. 나한테서 반 각이나 도망치다니.”

“...!”

어느새 옆에서 나란히 달리는 오사도의 모습.

거기서 더 나아가지 않은 채 강엽과 발을 맞추는 그녀가 어깨까지 내려온 단발을 흩날리며 웃었다.

“그래서 아까 질문에 대한 답은?”

“뭐?”

“누구냐고 물었는데. 녹림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했거든. 그럼 외부의 인물이란 뜻인데, 기파가 살벌하단 말이지. 혈귀 새끼들이랑 좀 가까운 것 같긴 한데... 그놈들이랑 다르게 잡스럽지 않아. 오히려 순수하게 느껴지는걸.”

“....”

잠깐 겨룬 것만으로 거기까지 파악했나.

“혈교의 고위 인사와 붙은 적이 있는 모양이군.”

“맞아. 교왕만 빼면 골고루 죽였지. 백골혈주(百骨血珠)라고 했던가? 악룡맹주 옆에서 알짱거리고 있길래 죽였는데 알고 보니 혈교의 교성이었지.”

강엽도 악룡맹의 이름은 알고 있었다.

해남도를 근거지로 남해 일대를 휘젓고 다니는 해적 선단. 호사가들은 녹림, 장강수로맹과 더불어 삼적(三賊)이라고 일컬을 만큼 강대한 세력을 자랑했다.

‘광명마교는 복건에서 발호했지. 악룡맹이 복건의 해안을 약탈했을 때 충돌한 건가.’

오사도가 악룡맹주의 어깨를 한 발의 화살로 꿰뚫은 일화는 동해 일대에 널리 퍼졌지만, 사천에서 주로 활동했던 강엽은 거기까진 몰랐다.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은?”

“녹림과 장강수로맹을 복속시켜 뭘 할 셈이지?”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다니. 아주 안 좋은 버릇이야. 지금 본인의 입장을 잊어먹은 모양인데....”

살짝 치켜올린 눈꼬리에서 서늘한 살기가 흘러나오는 것과 동시에 사라지는 오사도의 신형.

강엽이 미처 움직일 새도 없이 묵직한 충격이 전신을 강타했다.

“...질문은 나만 한다, 애송이.”

십 장 가까이 내동댕이쳐진 뒤에야 이어진 뒷말.

나무를 박살낸 것도 모자라 땅을 몇 번이나 튕긴 강엽은 그 말을 듣기도 전에 아래로 떨어졌다.

깊이 우거진 녹음 사이에 숨겨져 있던 협곡.

어지간한 사람은 전신의 뼈가 으스러졌을 높이였지만, 강엽은 추락 직전 몸을 반전하며 착지했다.

몸을 일으키며 피 섞인 침을 퉤 뱉었다. 급하게 끌어올린 호신기로 막았는데도 오사도의 족격은 방어를 뚫고 내상을 입혔다.

“후우....”

피내음이 나는 호흡 위로 신공의 들숨이 섞였다.

재생력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아서 선천지기를 쓰는 활명술을 쓴 뒤에야 깨끗이 아물었다.

“확실히 교성과는 다르군.”

“말했을 텐데?”

머리 위에서 울리는 비아냥거리는 목소리. 직후 어마어마한 파공성이 허공을 찢어발겼다.

폭우처럼 쏟아지는 난사.

화살촉과 화살대 모두 현철(玄鐵)로 만든 시커먼 화살 세례가, 이전처럼 강엽이 회피할 방향을 예측하고 한 박자 앞서 떨어졌다.

강엽이 신들린 보법으로 간신히 범위를 벗어날 때였다.

타앙!

‘탄자결?’

기이한 각도로 암벽을 튕긴 작은 화살이 강엽의 옆구리를 노린다.

수십 발의 화살 속에 한 자도 안 되는 작은 편전(片箭)을 대여섯 발씩 섞어둔 수법.

일반적으로 편전이 덧살을 대고 쏴야 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엄청난 신기였다.

당금의 천하팔존 중엔 궁을 쓰는 인물이 없으니 그녀야말로 천하제일궁이라 할 만하리라.

그러나 사방에서 짓쳐든 편전은 강엽을 둘러싼 벼락을 뚫지 못하고 튕겨졌다.

그 순간 강엽이 날아오는 철시를 쳐냈다.

쿠와아아앙!

흡사 화탄이 폭발하는 듯한 굉음.

화살대에 매달아둔 소량의 폭약이 뇌기를 만나면서 뜨거운 불벼락을 뿌린 것이다.

“뇌공이 네 성명절기인가 보군. 뇌력을 쓰는 자는 이사도 외엔 못 봤는데 말이야.”

고지대 위에서 오사도가 말했다.

세 발의 화살을 겨눈 그녀가 시위를 놓자 쾅쾅 터지는 소리와 함께 협곡 위로 시뻘건 불길이 뿜어졌다.

황실이 금한 폭약을 아무렇지 않게 퍼붓는 폭거.

그러던 순간 시뻘건 불꽃을 뚫고 수십 줄기의 실타래가 협곡 주변을 빼곡하게 에워쌌다.

그 하나하나가 강기라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미간을 좁히기도 전에 반격이 시작되었다.

-혈라지망.

술법과 무공이 합쳐진 공방일체의 호신강기.

지형을 가리기 때문에 도망칠 때는 쓰지 못했으나, 협곡처럼 좁은 지형에서는 최상의 위력을 발휘한다.

일찌감치 오사도에게 따라잡히기 전부터, 협곡을 발견했던 강엽은 여기서 승부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창졸간에 교차한 수십 줄기의 거미줄이 술법을 짜내면서 오사도의 움직임에 제약을 건다.

마치 깊은 물 속에 들어온 것처럼 전신을 내리찍는 압력에 오사도가 눈썹을 치켜떴다.

“하, 대기의 흐름을 조절해서 궁격의 궤적을 틀겠다?”

-중압대역진(重壓大逆陣).

흑룡교주의 기억 속에 있던 술법으로, 대기의 흐름을 조절하는 용도로 쓰인다.

본디 호풍환우의 술법을 익히기 전의 전 단계지만, 흑룡교주는 과거 이 술법으로 대규모 전장에서 아군에게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이 술법을 이렇게 쓸 줄은 몰랐는데....’

언젠가 쓸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익혀두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은 강엽도 예상 못했다.

진조의 영성 덕분에 영감이 번뜩이지 않았다면 익혀두고도 제때 꺼내지 못했을 터.

‘하지만 이 여자에게 얼마나 통할지는 미지수다.’

평범한 궁수라면 쉽게 무력화될 것이다. 화살을 쏴도 엉뚱한 방향으로 튈 테니까.

그러나 상대가 천하제일궁이라면 중압대역진의 흐름을 역산해서 의표를 찔러도 이상하지 않다.

과연 불길한 예상은 언제나 들어맞는다고, 복잡하게 뒤엉킨 대기의 흐름을 타고 화살이 빙글빙글 회전하더니 강엽의 뒷목을 향해 쑥 떨어졌다.

타아아앙!

다행히 호신의 술법으로 막았지만 오사도의 한 수엔 강엽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짜증나는군. 싸우는 방식이 사람의 신경을 긁어.”

강엽은 오사도의 궁술에 경이감을 느꼈지만, 오사도 역시 사정이 안 좋기는 매한가지였다.

중압대역진의 술법이 대기의 흐름을 어그러뜨리는 바람에 이전처럼 자유롭게 화살을 쏠 수 없었다.

정기신 합일을 이뤄 천지와 호흡하는 경지에 다다르지 않았다면 내공 호흡마저 방해받았겠지.

“어처구니가 없어. 적을 약화시키고, 감각을 희롱하고. 너처럼 더럽게 싸우는 놈은 사도 인생 처음이다. 아주 그냥 욕이 나오려고 하네.”

“칭찬 고맙군.”

강엽의 심드렁한 대답에 콧방귀를 뀌는 소리로 응수한 오사도가 손을 휘저었다.

암벽과 땅바닥을 깊숙이 관통한 화살들이 허공섭물에 끌려나와 강엽을 겨누었다.

-폭예작염기(爆藝炸炎技).

절세고수의 오의가 깃든 절기였다. 의념으로 연결된 화살들에 절세고수의 공력이 주입된다.

그야말로 눈 깜빡할 새에 이루어진 찰나의 기예.

방해할 틈새도 주지 않고 절기를 완성한 그녀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름 모를 애송이, 칭찬해주마. 넌 내가 강호에서 만난 적들 중에 가장 엿 같은 녀석이다.”

악룡맹주보다도 까다로운 적. 오사도는 강엽이 사도십대고수 이상의 강적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기억해라. 폭발은 예술이라는 걸.”

“뭔 개소리를....”

뜬금없는 말에 강엽이 어이없어하는 사이 사방에서 짓쳐든 화살 세례가 대기의 흐름을 우격다짐으로 뚫고 와서 폭발했다.

그것은 일찍이 강엽이 그녀를 떼어놓기 위해 부적을 썼던 것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화력이었다.

* * *

쿠구구구구구구구......!

협곡 전체가 흔들리고 암벽이 갈라지며, 그 사이로 뜨거운 열기와 자욱한 연기가 높이 치솟는다.

강엽이 두른 호신강기를 파훼하는 게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직감한 오사도는, 아예 통째로 어그러뜨릴 작정을 하고 필살의 절기를 꺼내든 것이다.

단전이 공허해질 만큼 공력이 쑥 빠져나간 만큼 안색은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만하면 제아무리 불가해의 괴물이어도 죽거나 치명상을 입었을....

쐐애애애애액!

“헉!”

창졸간에 찌르고 들어오는 검격에 섬찟함을 느낀 그녀는 있는 힘껏 몸을 비틀었다.

연분홍색의 도포 자락이 흩날리며, 그 위로 드러난 맑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도포 자락에서 매화 문양을 발견한 오사도가 낭패감이 역력한 얼굴로 신음했다.

“화산파...!”

“뜻밖의 월척이 걸렸군.”

옥청선자. 화산파를 대표하는 정도십대고수가 오사도를 향해 날카로운 살의를 드러냈다.

“폭발이 예술이라고 했나? 진짜 예술이 무엇인지 내 오늘 견문을 넓혀주겠네.”

강엽이 내쏜 신호탄을 받자마자 달려왔다. 멀리서 심상치 않은 기파가 충돌하는 것을 느꼈을 땐 열심히 감시했던 연가휘도 냅두고 전력으로 내달렸다.

오사도에게 한 방 먹은 강엽의 안위가 걱정됐지만, 오사도를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놓치면 큰 후환이 될 것이다.’

달려오는 도중 감지한 절기의 기파는 옥청선자도 심장이 떨릴 만큼 강렬했다. 호신강기를 둘러도 살아남는다고 장담하지 못할 정도로.

오사도가 강엽을 상대하느라 지친 지금이야말로 그녀를 잡을 절호의 기회였다.

“젠장, 정파라는 년이 비겁하게...!”

“겸허히 받아들이겠네.”

옥청선자는 시원하게 수긍했다. 지친 상대를 기습하는 것은 정정당당하지 않다고.

“하지만 전쟁에 비겁한 게 어딨겠나?”

수중에 들린 검이 버들잎처럼 낭창낭창 휘어졌다. 사람을 벨 수 있을지 의문이 들 정도.

그러나 검로를 따라 무궁무진하게 변화하는 검식은 그런 생각을 지워버릴 만큼 강건했다.

촤라라라라라락!

화산을 상징하는 이십사수매화검법(二十四手梅花劍法). 빠르면서도 유연하게, 간결하면서도 현란하게 팔방의 방위를 점해서 오사도를 압박했다.

본디 화산의 검은 심상에 품은 매화나무에 천지자연의 조화를 담는다.

옥청선자는 그 오의를 충실히 구현했다. 자하신공(紫霞神功)의 호흡과 함께 흘러나온 자줏빛 기운에서 짙은 매화향이 풍겨나왔다.

촤아아아악!

“큭...!”

허공에 핏줄기가 튀고, 오사도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탈력감에 시달리는 그녀는 분분히 물러나는 데 급급했다. 가까스로 쥐어짠 공력을 각궁에 담아 휘두르면서, 호신강기를 펼치는 게 전부.

옥청선자는 그 시도를 사전에 차단했다.

“호신강기를 짜낼 틈은 주지 않겠네. 오늘 자네는 죽던가 사로잡히던가 둘 중 하나야.”

“...!”

검로를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난 매화.

길게 갈라진 어깻죽지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자 오사도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조금만 깊었다면 심장이 베였을 상처였다.

가벼운 격공으로 혈도를 점해 혈행을 막은 그녀는 활대로 매화검의 타점을 비껴내며 반격을 꾀했다.

옥청선자의 심장을 향해 찌르는 화살.

길쭉하게 치솟은 경파가 앞섶을 찌르는 찰나, 자줏빛의 꽃잎들이 오사도의 시야를 가렸다.

화살은 꽃잎들 사이를 허무하게 꿰뚫을 뿐.

“암향표(暗香飄)...!”

화산을 상징하는 경신공.

자줏빛 검광이 눈을 부릅뜬 오사도의 정수리 위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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