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9화 (219/450)

39화. 호송 (4)

강엽은 비호처럼 산길을 주파했다.

기습을 당한 산적들이 사방으로 도주한 흔적이 남아 있었기에 옥청선자와는 잠시 헤어진 상황.

아예 연가휘까지 흩어졌다면 더 효과적으로 찾을 수 있겠지만, 옥청선자가 그를 신뢰하지 않았기에 감시의 명목으로 동행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엽이 우뚝 멈추었다.

‘이 냄새....’

삼화취정에 올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흡혈귀로서 더욱 완성에 가까워졌기 때문일까.

흐릿하게 풍기는 피냄새에서 다른 피냄새와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농밀한 선천지기가 느껴졌다.

피에 향유된 선천지기의 농도는 이전에도 감별할 수 있었지만, 이토록 희미한 피냄새로 알아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여기로 왔었군.”

급격한 오르막길에 삐죽 돋아난 관목.

나뭇가지를 잡고 오르막길을 오른 듯 피가 묻은 손자국이 버젓이 찍혀 있었다.

녹림에서 다섯 손가락에 들어간다는 고수가 이깟 오르막길에 쩔쩔매서 나무를 잡았을 리는 만무.

나뭇가지에 묻은 핏자국이나 허공에 풍기는 피냄새로 유추해보건대 중상을 입은 듯싶었다.

‘아마 가슴이나 복부, 혹은 허벅지 쪽이겠지.’

연가휘가 썼던 추종술을 흉내내며 흙바닥에 난 발자국을 면밀히 관찰했다.

연가휘의 눈썰미를 따라잡지는 못해도 발자국을 보고 상황을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발자국이 고르지 않다. 하지만 깊이는 일정해. 다리를 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이렇게 다쳤다면 얼마 도망가지 못했겠지.’

그러던 중 강엽의 눈이 이채를 발했다.

허겁지겁 도망친 발자국 사이로 또다른 흔적을 발견했기 때문.

수풀 위로 미세하게 남은 공력의 잔향.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냥 넘어갔을 정도로 사소한 흔적이었지만, 진조의 후예로서 타고난 기감은 사소한 오차를 알아차렸다.

‘초상비(草上飛)...!’

경신술의 상승 기예 중 하나였다.

절정고수만 되어도 쓸 수 있으나, 경신의 수준에 따라 풀이 꺾인 각도가 미세하게 차이가 난다.

그러나 약간의 공력 파동이 남은 것을 제하면, 풀에 남은 흔적은 전무하다시피 했다.

‘이만하면 이미 잡혔겠어.’

혈산광호가 부상을 입지 않았다면 도망쳤을 가능성이 조금은 있었겠지만, 크게 다친 몸으로 덜미를 잡혔다면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일단 시체만이라도 확인하자는 마음으로 흔적을 따라간 강엽은 사람이 쓰러진 흔적을 찾아냈다.

흙바닥에 고인 피만 봐도 얼마나 심각하게 다쳤는지 알 만했다.

‘시체가 없는 걸 보면 끌고 간 것 같은데....’

대충 긁어낸 피를 자신의 피와 섞어 양피지에 떨어트리자 큼지막한 혈점이 떠오른다.

다행히 그리 멀지 않았다.

“.......”

계곡 근처의 커다란 너럭바위.

그 위에 혈산광호로 짐작되는 자를 올려둔 자들이 모여 있었다.

밤바람을 맞은 하얀 도복이 펄럭이는 가운데, 몸에 딱 달라붙는 검은 가죽경장을 입은 단발머리 여인이 눈에 띄었다.

등 뒤에 큼지막한 각궁을 메고 있었는데, 어떤 짐승의 뿔로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불그스름한 빛깔이 도는 게 범상한 물건은 아니었다.

암신으로 몸을 숨기며 초음을 내보낸 강엽의 표정이 굳어졌다.

‘삼화취정?’

만만치 않을 줄은 알았지만 예상 외의 거물이었다.

‘옥청선자는 반대쪽으로 갔다. 신호탄을 쏴도 오려면 시간이 걸려.’

그때까지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대충 봐도 명도상인 이상의 축기량을 지닌 여인을 상대하는 동안 혈산광호가 무사할까.

그깟 산도적이 죽든 말든 알 바는 아니지만, 일단 살려놔야 왜 광명마교에게 쫓겼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광명마교의 교도들이 알아서 입을 털고 있었다.

“상처는 봉합했습니다, 오사도님.”

“좋아. 수고했다.”

강엽의 눈매가 좁혀졌다.

‘오사도?’

일전에 황산을 방문한 팔사도의 모습이 뇌리에 아른거렸다.

그때 광명마교도 한 명이 우물쭈물하며 물었다.

“저, 오사도님.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뭐지?”

“녹림을 병탄하는 데 꼭 신물이 필요한가 싶습니다. 일사도님께서 패력산군을 패사시키지 않았습니까? 신물의 권위를 기대지 않아도 녹림을 제압하는 건....”

“흠, 너희도 궁금한가?”

오사도가 교도들을 쭉 돌아보자 다들 비슷한 심정인지 공손한 태도로 대답을 청했다.

“좋아. 알려주지. 방금 질문한 형제의 말대로 본교의 힘이라면 녹림을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힘으로는 한계가 있어. 산채 몇 개 정도면 모를까, 칠십이채 전부를 복속하는 건 무리다. 놈들은 숨어버리겠지.”

광명마교의 힘이 천하를 아우른다 해도 산적 몇 놈 잡자고 온 산천초목을 뒤질 수는 없는 노릇.

당장 무림맹과 대치하고 있는 마당에 그런 데까지 할애할 인력은 없었다.

“그래서 신물이 필요한 거다. 제멋대로 구는 산도적 새끼들도 신물은 부담스러워하니까. 신물의 권위를 무시하면 다시는 녹림의 이름을 쓰지 못하지. 매장당하거든. 패력산군이 살아있던 시절에 그런 일이 벌어졌다면 반역도로 몰렸을 거다.”

즉, 신물의 권위를 무시한 자들은 녹림의 공적이 된다.

“물론 형식적인 권위니까 실제로는 무시하는 놈들도 있겠지만... 본교는 녹림을 병탄하려는 게 아니야. 놈들을 꼭두각시로 부리려는 것뿐이지. 새로운 총표파자를 뽑을 테니 모월 모일에 모이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아! 총표파자의 자리에 욕심을 가진 놈들이라면 모일 수밖에 없겠군요!”

“...라고 이사도가 말하더라.”

“....”

솔직담백한 고백에 갈피를 잡지 못한 교도들이 눈알을 뒤루룩 굴리자 오사도가 씨익 웃었다.

“눈치 볼 것 없어. 머리 굴리는 건 나랑 안 맞거든. 그쪽은 이사도의 소관이지.”

오사도야 교도들의 궁금증을 풀어준 것이지만, 그 덕분에 강엽도 일의 전말을 알게 됐다.

‘녹림을 꼭두각시로 삼는다....’

하기야 장강수로맹도 건드린 놈들이 녹림이라고 건드리지 못하겠나.

아마 패력산군을 격살한 것도 훗날 녹림을 복속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저지른 일이겠지.

막상 혈산광호를 잡아놓고 치료하는 것을 보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지 못한 모양이지만, 그것도 혈산광호를 심문하면 어찌 될지 몰랐다.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혈산광호가 언제까지나 비밀을 지킬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결심을 내린 강엽이 수중의 신호탄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휘유우우우웅...... 퍼어엉-!

밤하늘을 가로지른 길쭉한 섬광이 사방에 불씨를 뿌려대는 광경.

광명마교의 교도들은 안색이 딱딱해지다 못해 돌처럼 경직됐다.

“신호탄...!”

“웬 놈의 쥐새끼냐!”

불시의 사태에도 병장기를 뽑았지만, 이미 그들의 머리 위엔 수십 줄기의 낙뢰가 쏟아지고 있었다.

한순간에 쏟아진 벼락이 시야를 하얗게 태워버리자 교도들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경파를 쏟아붓고 호신기로 스스로를 보호해서 충격을 줄였으나, 자잘하게 튀는 뇌력이 지면을 내달렸다.

“크읍!”

“끄어어어억...!”

근육과 혈도를 타고 흐르는 짜릿한 충격. 호신기로 보호하는데도 강엽이 내쏜 벼락은 내가중수법의 묘리처럼 안쪽으로 파고들어 하체를 마비시켰다.

동시에 어둠 속에 은신한 채 접근한 강엽의 일장이 그들을 덮쳤다.

하지만,

“대단한 은신술이군. 나도 깜빡 속았어!”

허벅지의 칼집에서 비수를 빼든 오사도가 일 자로 칼날을 휘두르자 장력이 찢겨나갔다.

호종하는 교도들과 달리 뇌격에 직격당했음에도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공력을 받아넘겼다.

콰콰콰콰콰콰콰쾅!

투명하게 물결치는 무형의 경파가 연쇄적으로 폭발, 그 반발력으로 교도들을 밀어냈다.

뇌격으로 인해 사지가 마비됐던 교도들이 경파의 바람에 휘말려 훨훨 날아가는 모습.

‘깔끔한 운용법이군.’

일부러 격공권의 위력을 줄여 교도들을 살짝 튕겨내는 실력에 강엽도 적잖이 감탄했다.

그녀 자신은 머리 쓰는 일에 자신이 없다고 했지만, 한순간에 내린 판단을 보건대 적어도 싸울 때는 머리가 영민해지는 듯했다.

“부하들을 아끼는군.”

“나름 유능한 애들이거든.”

강엽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자성검법의 오초식인 뇌망은 일전에 혈라분에 중독된 절정고수들도 격살했던 절초.

혈산광호에게 피해가 미칠 것을 우려해서 위력을 다소 죽였다고 해도, 그걸 큰 피해 없이 막아냈다는 점에서는 점수를 줄 만했다.

투타타타타탕......!

짧게 한마디 나누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간합 사이로 무수한 경파가 부딪쳤다.

상대가 격공 공방에 능숙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오사도의 콧잔등이 살짝 찡그려졌다.

“누구지? 녹림에 너 같은 놈이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은 없는데?”

패력산군의 사후 녹림엔 삼화취정의 고수가 없었다.

그 근처까지 간 자들은 꽤 많지만 그들 중에도 강엽과 외양이 일치하는 사람은 없다.

강엽이 대답 대신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을 휘두르자 그녀가 코웃음을 치며 응수했다.

투아아아아아앙......!

두 절세고수의 충돌에 큼지막한 거암들이 쩍쩍 갈라지고, 저 멀리 있는 폭포마저 일순 멎는다.

그런데도 가까이에 죽은 듯이 누워있는 혈산광호의 몸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두 사람이 격하게 부딪치면서도 내심 혈산광호의 생사에 신경 쓰고 있다는 증거였다.

“역시 혈산광호가 목적이었군!”

강엽의 목적을 알아챈 오사도가 기습적인 족격으로 그의 하복부를 강타했다.

흐름을 타고 파고든 일격은 깃털처럼 가벼웠지만, 성벽도 부숴버릴 공력이 담겨 있었다.

강엽이 똑같이 맞대응을 하는 대신 손목 관절을 빙글 돌려 부드럽게 받아내자 오사도가 눈을 반짝였다.

‘이화접목이라... 무당의 말코들도 이렇게 쉽게 받아내진 못할 텐데.’

무당 장문인이나 무당제일검이라면 몰라도.

꾸아앙!

강엽이 흘린 공력은 교도들이 있는 곳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아름드리나무들을 부수었다.

직격당했다면 호신기고 뭐고 몸뚱이가 산산조각 부서졌을 위력.

순간적인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넘긴 강엽은 손목을 울리는 얼얼한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은밀하게 파고든 잔여 공력이 완맥의 근육과 혈도를 갉아먹으면서 재생을 방해했던 것.

그러나 충격을 해소할 틈도 없이 오사도가 쥔 유엽비도가 눈부신 광채를 내뿜었다.

‘도강!’

칼날 위로 석 자나 되는 강기를 뽑아서 도법을 구사한다.

강엽은 붉은 벼락을 두른 자성검을 비스듬히 세워 오사도의 도강을 가까스로 막아냈다.

쿠르르르르르릉......!

두 절세고수의 강기가 부딪치는 충격을 이기지 못한 돌덩이들이 잘게 부서지고 계곡물이 뒤집혔다.

이번엔 혈산광호가 누운 너럭바위도 피하지 못해서 그 위에 축 늘어진 몸뚱이가 튕겨 올라갔다.

아무리 혈산광호가 고수라도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추락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터.

하지만 오사도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은 없었다.

그녀가 강엽을 붙들고 있는 사이 운신의 자유를 되찾은 교도들이 훌쩍 뛰어올라 추락하는 혈산광호를 낚아채려고 했으니까.

“네가 누군지는 몰라도 저놈만은 못 내... 어?”

자신만만하게 웃은 오사도가 돌연 흠칫했다.

쿠왕!

“키엑!”

“...저게 뭐야?”

오사도가 입을 벌렸다.

어디선가 튀어나온 붉은 줄기가 교도들의 낯짝을 호쾌하게 후려치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혈산광호의 몸뚱이를 포대기 말듯 칭칭 감으며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쳤다.

코앞에서 혈산광호를 놓친 오사도가 멍한 얼굴로 강엽을 돌아보는데, 강엽이 절초를 쏟아부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벼락.

자성검법의 사초식. 둔중한 뇌둔이 오사도의 전신을 삼킬 듯한 기세로 떨어지며 지면을 강타했다.

콰아아아아아아-!

태양이 뜬 게 아닌가 싶을 만큼 휘황한 광채가 망막을 태우고 굉음이 고막을 두들긴다.

멀리 있던 광명마교도들이 튕겨날 만큼 강대한 위력이었음에도 강엽은 안심하지 않았다.

‘아직 전력을 다하지 않았겠지.’

다섯 번째 사도의 지위를 차지한 초고수의 실력이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 여기서는 사력을 다해 싸우기보다는 옥청선자와 합류하는 게 합리적이겠지.

냉철하게 판단한 강엽은 모종의 조치를 취하며 어둠 속에 몸을 내맡겼다.

“제길, 이 녀석 꼼수를 부리...!”

지극히 멀쩡한 몸으로 뇌둔의 전권에서 벗어난 오사도가 강엽을 찾았을 때.

“...응?”

문득 발밑에서 이상한 느낌을 받은 그녀는 계곡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부적 다발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괴황지에 기름을 먹였기에 물에 녹는 일 없이 온전히 빛을 발하는 붉은색의 경문.

점멸하듯 빛나는 광채를 본 순간, 오사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감하고 표정을 구겼다.

“이 망할 새끼가 사람 빡치게...!”

콰아아아아아앙!

그러나 말을 끝낼 새도 없이, 부적 다발이 일으킨 장대한 폭발이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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