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호송 (3)
강엽과 옥청선자가 떠나려고 할 때, 뜻밖의 사람이 따라나설 뜻을 밝혔다.
“저도 가고 싶습니다.”
연가휘였다.
옥청선자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네는 왜?”
“상대가 정말 광명마교라면, 본교... 아니 제가 익힌 무공이 도움이 될 겁니다.”
“나름 신선한 경험이군. 지금 화산의 도사에게 마교의 도움을 받으라는 건가?”
옥청선자의 입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나왔지만 그녀의 눈동자는 칼날을 쥔 것마냥 싸늘하기만 했다.
그때 강엽이 끼어들었다.
“가야 하는 이유부터 말해봐라.”
“자네?”
“추종술을 익혔습니다.”
옥청선자가 놀란 얼굴로 강엽을 돌아볼 때 연가휘가 냉큼 말했다. 하나 그것만으론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황급히 덧붙였다.
“물론 두 분만 가셔도 되겠지만, 제가 동행하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으음....”
옥청선자가 침음했다.
도사인 그녀는 추종술 같은 기예와 거리가 멀었다.
적을 추적할 때를 대비해서 기본적인 지식은 숙지해두었을 뿐.
강엽은 삐뚜름하게 마을을 둘러봤다.
산적들의 피가 있다면 혈종술을 쓸 수 있을 텐데, 이놈들은 정말 식량만 빼앗고 내빼버렸기 때문에 피는커녕 머리카락조차 남지 않았다.
‘근데 추종술이 정말 필요한가?’
촌장의 말을 들어보면 한두 명도 아니고 수십 명의 산적들이 산길을 빠져나갔다. 놈들이 어디로 갔든 흔적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박한 표정을 짓는 연가휘와 눈을 마주친 순간, 강엽은 그가 어떤 생각으로 자원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 어떻게든 공을 세우고 싶겠지.’
위기는 곧 기회라고 하지 않나.
무림맹에 도착하기 전에 공을 세운다면 흑룡교도들의 입지가 조금은 나아질 수도 있으리라.
그렇다고 딱히 극적으로 변할 것 같진 않지만, 강엽은 애원하는 듯한 눈빛을 외면하지 않았다.
“괜찮지 않습니까?”
“진심인가?”
“저 친구가 같이 가면 적어도 흑룡교도들이 단체로 뭘 하진 못할 테니까요.”
두 사람이 빠져도 고수들이 워낙 많은 만큼 흑룡교도들이 저항을 하진 못하겠지만, 구심점인 연가휘가 빠진다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옥청선자도 부정하지 못했다.
“...음, 아예 일리 없는 말은 아닌데....”
강엽이 연가휘를 돌아봤다.
“따라올 수 있겠나?”
“문제 없습니다.”
연가휘의 대답을 들은 강엽은 백서희에게 무언의 시선을 보냈다. 따로 전음을 주고받지 않았는데도 백서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한 명의 흡혈귀와 백도 정파의 도고, 마교 출신의 사내가 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촌장은 산적들이 도망친 방향만 대충 기억하고 있었기에 추적은 온전히 연가휘의 몫이었다.
* * *
결과만 놓고 말하면 연가휘를 데려간 게 헛수고는 아니었다. 야심한 두메산골 속에서도 주변을 한번 쭉 훑어보는 것만으로 흔적을 찾아냈던 것이다.
밤눈은 강엽이 연가휘보다 더 좋았지만, 연가휘처럼 빨리 흔적을 찾진 못했다. 나름 열심히 주변을 살폈는데도 관찰력에서 밀린 것이다.
“이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야영을 했군.”
코끝을 스치는 희미한 냄새. 모닥불을 피운 냄새와 짙은 피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바로 근처에 물가를 면한 개활지.
비교적 평탄한 지형 위에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먹은 흔적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었다.
참혹하게 죽은 시체들과 함께.
“.......”
밥을 지어먹던 중에 기습을 당했는지 엎어진 솥단지에서는 설익은 쌀밥이 흘러나왔다.
또한 한쪽엔 마을 곳간에서 강탈한 걸로 짐작되는 쌀가마니들이 그득 쌓여 있었다.
“역시 자네 예상대로 놈들이 야영을 했군. 그러다 추적자들에게 허를 찔렸고.”
옥청선자가 허탈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서둘렀음에도 결국 광명마교로 짐작되는 무리를 놓친 게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때 시신들을 면밀히 살펴본 연가휘가 말했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 녹림이었군요.”
“어떻게 안 건가?”
“녹림도들은 몸 한구석에 자기들만의 독특한 문신을 새겨넣습니다. 자기들 딴에는 진짜 녹림과 뜨내기 산적들을 구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암시장에서 일하면서 녹림도를 만나본 적이 있는지 연가휘는 녹림의 생태에 대해서도 빠삭했다.
그가 시체의 소매를 젖히자 귀신의 얼굴 위로 칼과 도끼가 교차한 문신이 드러났다.
“녹림칠십이채(綠林七十二寨)가 전부 다른 문신을 새기는데, 이건 광살채(狂殺寨)의 문신입니다.”
“광살채라....”
“유명한 놈들인가?”
강엽이 고개를 갸웃했다.
일전에 귀주에 있는 흑룡교의 비밀 분타에 갔을 당시 녹림에 속한 폭산채주와 얽힌 적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걸 제외하면 녹림과는 연이 없었던 만큼 이제까진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호광 북쪽의 죽산(竹山)에 터를 잡은 놈들입니다. 녹림에서도 세력이 컸습니다. 채주인 혈산광호(血山狂虎)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고수고요. 총표파자의 총애를 받아 그의 오른팔이라고도 불렸습니다.”
“...그자의 시체도 있나?”
주변을 다시 한번 살펴본 연가휘는 없다고 말했다.
워낙 독특하게 생겨서 시체가 남았다면 금방 발견했을 거란 말을 덧붙이면서.
“다만 여기 있는 시체들이 산적들 전부는 아닌 것 같습니다. 뿔뿔이 흩어진 흔적이 있습니다.”
“불시의 기습을 당했으니 경황이 없었겠지.”
적이 강한 것은 알고 있었을 테니 맞서 싸울 엄두도 못 냈을 터. 도망치는 게 최선이었으리라.
“주변을 전부 뒤져봐야 하나?”
옥청선자가 물었지만 연가휘도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는지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때 강엽이 물었다.
“그 혈산광호라는 자, 성격이 어떻지?”
“으음, 흑도 무림에선 꽤나 교활하고 잔인한 작자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다만 저도 암시장에서 두어 번 본 게 전부라서 자세히는....”
연가휘도 확신이 없는 듯했지만, 강엽은 그것만으로도 족한지 고개를 끄덕였다.
“녹림의 총표파자가 광명마교의 일사도에게 죽었지.”
패력산군. 사도십대고수의 일좌에 꼽히는 총표파자가 일사도와 싸워 십초 만에 꺾였다고 했던가.
하오문주와의 대담을 떠올린 강엽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녹림도들의 시체를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생전에 자신을 아꼈던 주군이 적들의 손에 죽었는데 맞서 싸우기보다는 자기 보신을 택한 거다. 그게 정말 목숨이 아까워서인지, 아니면 훗날을 기약하고 몸을 피하려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가 무슨 생각으로 여기까지 왔는지는 대충 알 것 같군.”
“이것만 보고 알았다고?”
옥청선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같은 광경을 보고, 같은 설명을 들었음에도 그녀는 조금도 짐작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
연가휘도 궁금한지 목울대를 꼴깍 움직였다.
“혈산광호는 서쪽으로 가려고 했을 겁니다.”
“그야 호광에서 섬서까지 왔으니까.”
“더 서쪽으로 말입니다.”
“그보다 더...?”
“일월신교!”
대답은 연가휘의 입에서 터졌다.
옥청선자도 강엽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고 옥용을 찡그렸다.
“일월신교... 아니, 일월마교(日月魔敎)에 의탁한다고?”
“암시장에서 소마동이란 마인을 만난 적 있습니다. 그가 말하길 많은 사마외도의 무림인들이 강호를 떠나 일월신교로 망명한다고 하더군요.”
굳이 화산과 종남의 턱밑을 지나는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서쪽으로 가려는 이유.
“호광에서 섬서로 넘어온 것도 모자라 장기적인 여정을 대비해서 짐이 무거워지는 걸 감수했습니다. 훨씬 더 멀리 간다는 뜻입니다.”
“근데 꼭 일월마교로 간다는 보장은 없지 않은가?”
“예, 그래서 서쪽으로 간다고 말씀드린 겁니다. 옥문관을 넘어 마적이 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강엽은 일월신교에 투신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개버릇 남 못 준다고, 남의 재물을 빼앗으며 권세를 누린 자가 도적질을 포기할 수 있겠는가?
“일월신교로 가든 옥문관으로 가든 혈산광호는 광명마교로부터 멀어지려고 했을 겁니다. 문제는 결국 덜미를 잡혔다는 거지요.”
하지만 혈산광호는 죽지 않았다.
어쩌면 적들의 손에 일찌감치 죽고, 시체가 통째로 넘어갔을지도 모르지만....
‘수급이면 몰라도 시체를 통째로 가져갈 이유는 없어. 그럴 바엔 생포해서 데려가는 게 낫지.’
그러니 혈산광호는 명줄이 붙어있을 것이다.
급습을 당한 시점에서는 말이다.
“세간에 알려진 대로 놈의 성격이 교활하다면 기습을 당했을 때도 무턱대고 도망치진 않았을 겁니다. 부하들을 버리고 혼자서 도망쳤겠지요.”
“하나 교활한 것과 별개로 그가 부하들을 아끼는 성품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우르르 몰려가면 눈에 띄니까요. 각자도생하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으로선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할 따름.
상황이 급박했던 만큼 혈산광호가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그 선택이 성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오히려 적들이 광명마교라는 것을 감안하면 생포당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는 바.
“잡혔다면 이미 끝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가 아직 붙잡히지 않았다면....”
“근처에 있을 수 있겠군.”
옥청선자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광살채의 동선과 그들이 약탈한 미곡의 양, 혈산광호의 성격 등 일견 전혀 상관이 없는 파편적인 정보로 여기까지 알아낸 발상이 놀랍지 않은가?
하지만 강엽의 고민은 그치지 않았다.
‘왜 광명마교가 광살채를 노린 거지?’
패력산군과 싸웠던 것은 이해가 된다. 패력산군의 세력이 광명마교의 활동 영역과 겹쳤으니까.
그러나 광살채는 호광에 터전을 뒀기 때문에 광명마교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혈산광호가 교활한 성격이라면 총표파자의 원수를 갚겠답시고 광명마교와 적대하지도 않았을 터.
‘섬서까지 쫓아올 정도라면 그놈이 광명마교가 원하는 것을 가졌기 때문일 텐데....’
* * *
“후욱! 후욱!”
적갈색의 피부를 지닌 건장한 사내.
한 손에 단창을 쥔 사내는 정신없이 수풀을 헤치면서 산길을 헤매고 있었다.
‘찰거머리 같은 새끼들,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강엽의 짐작대로 그는 살았다. 다만 사정은 강엽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좋지 않았다.
복부를 움켜쥔 손 사이로 끊임없이 핏물이 배어나왔다.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구릿빛으로 그을린 얼굴조차 창백하게 굳어졌다.
“제기랄,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너무 억울해서 육성으로 울분을 토했다.
의형인 패력산군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는 한편, 내심 이것을 기회라고 보았다.
패력산군의 그늘에서 벗어나 녹림의 우두머리로서 총표파자에 오를 기회.
그래서 황급히 몸을 의탁한 패력산군의 아들을 죽이고 총표파자의 신물을 빼앗았다.
구파로 치면 장문령부(掌門令符)와 같은 물건이다. 천하 곳곳에 흩어진 녹림도들을 동원할 수 있는.
신물의 권위를 무시한 녹림도들은 공적이 되는 만큼 이는 장차 총표파자가 될 때 어마어마한 명분이 되어줄 것이다. 다만 지금은 시기가 좋지 않으니 먼 훗날을 기약하며 은인자중하려고 했는데....
‘왜 하필이면 광명마교가 끼어들어서!’
총표파자의 아들이 광살채로 향했다는 소식을 입수한 광명마교가 기습한 것이다.
그놈들을 죽이고 나서야 광명마교가 총표파자를 격살한 게 세력 다툼 때문이 아님을 알았다.
‘미친놈들. 장강수로맹도 모자라서 녹림까지 먹어치우려고... 미쳐도 단단히 미친 게야.’
서로 노는 곳은 달라도 똑같은 도적이다 보니 의식할 수밖에 없었다. 녹림은 은밀히 심어놓은 첩자로 광명마교가 장강수로맹을 장악했음을 알았다.
사도십대고수인 장강수로맹주가 삼사도라는 자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했던가.
실은 칠사도가 죽는 바람에 삼사도가 급히 투입된 거지만, 혈산광호는 거기까지 알지는 못했다.
그저 조금이라도 추격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입에서 단내가 풍기도록 달리고 달릴 뿐.
‘어떻게든 섬서의 경내를 빠져나가서 몸을 숨겨야 한다. 녹림을 일통하는 건 그다음이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포기하랴.
죽을 만큼 피를 흘리면서도 혈산광호는 비단처럼 고운 미래를 꿈꾸며 의지를 다잡았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이었다.
쐐애애액-!
별안간 바람을 찢는 한 줄기의 파공성.
그 정체가 등 뒤에서 날아온 화살의 소리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늦었다.
둔부를 관통한 화살이 골반을 부서뜨렸으니까.
“아아아악!”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른 혈산광호는 발을 헛디뎠다. 가파른 경사를 굴러떨어졌다.
둔부를 파고든 철시가 더욱 깊숙이 꽂히면서 반대쪽의 살갗을 뚫고 나온 건 덤이었다.
“끄윽! 끄으윽...!”
충혈된 눈으로 눈물을 질질 흘리는 혈산광호의 등 뒤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울렸다.
“족제비 같은 새끼. 드디어 잡았구나.”
쓰러진 혈산광호의 복부 위를 지긋이 밟는 가죽신. 찢겨진 부위에서 고통을 느낀 혈산광호는 감히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덜덜 떨기만 했다.
가죽옷을 입은 단발머리의 궁사 여인.
얼굴은 아름다웠지만 입가를 따라 피어난 가학적인 미소는 오싹하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사도인 내가 뒤쫓고 있는데 며칠이나 도망친 건 칭찬해주지. 마지막에 방심해서 야영만 안 했다면 하루는 더 연명했을 텐데.”
창백해진 혈산광호를 밟은 채 손을 내밀었다. 절세고수의 의념이 일자 투명한 기운이 움텄다.
허공섭물로 혈산광호의 허리춤에 걸린 손도끼를 빼낸 오사도가 입꼬리를 말아올렸다.
“훗, 어차피 이렇게 될 것을 뭐하러....”
하나 입가의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뭐야? 녹산혈부(綠山血斧)가 아니잖아?”
질 좋은 철로 만들긴 했어도 평범한 손도끼였다. 신병이기라 불리는 녹림의 신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혈산광호를 밟은 발에 힘을 꽉 준 그녀가 으르렁거리듯이 추궁했다.
“녹림의 신물은 어디 숨겨놨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