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7화 (217/450)

39화. 호송 (2)

“몸은 어떻지?”

“...나쁘진 않습니다.”

가부좌를 틀고 있던 연가휘가 눈을 떴다.

희미하게 들이치는 달빛 사이로 보이는 얼굴은 여기저기 얻어맞은 것처럼 엉망이었다.

“붓기가 다 빠지진 않았군.”

“당문 의원들이 치료해줘서 많이 나았습니다.”

“존댓말은 왜 하는 거냐?”

“은공께 무례하게 굴면 세인들이 저희를 은혜도 모르는 짐승이라고 욕할 테니까요.”

“그런 이유로 욕하진 않겠지.”

편견에 사로잡힌 자들은 그들의 행실이 어떠하든 흑룡교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욕할 것이다.

“까놓고 말하지. 흑룡교는 마교다. 백도 정파의 잣대를 들이대지 않아도 그래.”

흑룡교 출신의 마인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누구보다 많이 아는 강엽이었다.

그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고, 대법의 제물로 삼고... 이런 짓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에게 공감해달라고 징징대면 정신이 나간 거지.”

“우리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너희 선조들은 했어.”

“....”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연가휘 자신이 구천호법의 후손인 만큼 선조들이 저지른 죄를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오십 년은 긴 세월이지만, 흑룡교의 난을 겪었던 노강호들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 거다.”

흑룡교가 무슨 짓을 했는지.

그들이 천하를 차지하기 위해 얼마나 잔인한 짓들을 일삼았는지.

“화산은 시작에 불과해. 무림맹에 가면 너희가 투항하든 뭘 하든 죽이라고 하는 여론이 빗발칠 거다.”

“진짜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시험 정도는 하겠지.”

“예...?”

“너희가 정말로 과거를 뉘우쳤는지, 무림맹의 편에서 싸울 의향이 있는지.”

“.......”

“표정을 보니 알아들은 것 같군. 내일 출발할 거다. 먼 길 가야 하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하남의 정주까지 가야 하는 여정.

눈을 내리감은 연가휘가 긴 한숨을 토해냈다.

* * *

조영옥을 위시로 한 태화문의 문도들은 무림맹에 동행하지 않기로 했다.

“그간 신세 졌소.”

“별말씀을. 노사께서도 보중하십시오.”

“고맙구려.”

풍도마장이 허허 웃었다.

수척해지긴 했어도 가는 동안 당문의 의원들이 보살피기로 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그간 조영옥과 좀 친해졌는지 백서희가 아쉬워했다.

“좀 더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이젠 돌아가봐야죠.”

태화문을 한 달이나 비웠다.

사정이 있었다지만 정세가 급변하는 만큼 자리를 오래 비우는 건 조영옥에게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태화문도들이 떠나고 얼마 뒤에 당우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도 이제 돌아가봐야 할 것 같구려.”

안 그래도 당문주가 부재한 마당에 당우경까지 가문을 오래 비워둘 수는 없었다.

강엽이 포권을 올려 예를 표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무림맹엔 형님이 계시오. 정아도 가니 형님을 뵙는 게 어렵진 않을 것이오.”

당우경과 달리 당묘정은 무림맹으로 가는 여정에 따라오기로 했다.

그녀만한 의원이 없기도 하거니와, 당문주의 도움을 받기 용이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적진인 만큼 한 명이라도 아군을 만들어야지.’

그렇게 당우경이 작별을 고할 때쯤, 매화 문양이 수놓인 연분홍색 도복의 무리가 찾아왔다.

“오래 기다리게 했군.”

당우경과 눈짓으로 인사를 나눈 옥청선자가 대마장에 모인 흑룡교도들을 쭉 둘러보았다.

대다수는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 연가휘 등 몇 명은 정도십대고수의 주목을 받고도 덤덤했다.

그 태도에 묘한 감흥을 느꼈는지 옥청선자가 물었다.

“얼추 이백 명쯤 되는가?”

“단목 방주.”

강엽의 말에 단목정이 나섰다.

천하에 이름을 떨친 고수들의 시선을 받은 그녀는 마른침을 꼴딱 삼켰지만, 아내 굳은 얼굴로 포권을 올리며 보고하기 시작했다.

“투항자들의 숫자는 이백육십구 명으로, 이중 거동이 불편한 서른세 명은 당 원주님과 함께 당문에 가기로 했습니다. 남은 이백삼십육 명은 무림맹에 가며, 전원 병장기를 압수했습니다.”

“따로 손을 묶진 않는가?”

“...불필요한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다 저들이 도망치면?”

“본방이 저들을 감시할 겁니다.”

“숙정방이라고 했던가?”

“아, 예.”

“내 자네들을 무시하려는 건 아니지만, 저들은 마교도일세. 정통 마공을 익힌 자들을 자네들이 감당할 수 있으리라 여기진 않네만?”

구구절절 옳은 지적이었다.

숙정방 입장에선 섭섭할지 몰라도 제삼자가 보기엔 그들만으로 흑룡교를 감시하는 건 무리가 있었으니.

하후진이 콧방귀를 킁 뀌었다.

“거참 걱정도 많으시네! 우리가 곳곳에 흩어져서 저놈들 감시할 거유. 엉뚱한 짓을 하는 놈은 그 자리에서 목을 쳐버릴 거니까 걱정일랑 붙들어 매쇼!”

“저자가 어느 안전이라고...!”

성격 급한 화산파 제자들이 무례한 태도에 발끈하는 찰나였다.

“아서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누구보다 빨리 하후진의 진가를 알아본 옥청선자가 소매 자락을 들어 제자들을 막아섰다.

일행의 면면을 찬찬히 살펴본 그녀가 재밌다는 듯이 입가를 올렸다.

“일전엔 미처 자세히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하나같이 대단한 무위를 지녔군. 이만한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한 사람의 지휘를 받는다라....”

강엽을 향해 길게 휘어진 눈꼬리.

감탄과 황당함이 반쯤 섞인 기색으로 칭찬을 늘어놓은 그녀가 다시 하후진을 주목했다.

“자네 이름을 물어도 되겠는가? 저번엔 스치듯이 봐서 누군지 모르겠군.”

“사자염도 하후진이우.”

“그래, 사자염도 하후진. 흑룡교도들이 도망치면 그 자리에서 목을 참할 거라고 했었지. 정주까지 가는 동안 그 말을 꼭 기억하고 있겠네.”

설전을 벌이는 건 무의미하다 판단했는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는 모습. 연분홍색 장삼 자락을 늘어뜨린 그녀가 제자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너희도 흩어져서 경계하려무나.”

* * *

“육로로 서안까지 올라가야 하네. 거기서 위수(渭水)를 끼고 동관(潼關)에 들어가면....”

주변 지리에 밝은 옥청선자가 설명했다.

섬서성 한중에서 하남성 정주까지의 여정은 이천 리가 훌쩍 넘는다. 아무리 섬서와 하남이 이웃한 성이라지만 절대 가까운 거리가 아닌 것이다.

다만 강엽은 그녀가 양피지에 그려온 그림을 보고 약간 애매한 표정으로 물었다.

“말씀은 알겠는데 이건 뭡니까?”

“...지도인데?”

옥청선자가 눈을 끔뻑였다.

왜 이런 당연한 걸 묻는지 모르겠다는 투였다.

하지만 강엽 일행이 보기엔 어린 아이가 괴발개발 그린 낙서가 따로 없었다. 아니, 어린아이가 대충 그린 낙서도 이것보다는 훨씬 알아보기 쉬우리라.

‘그림엔... 절망적으로 재주가 없으시구나.’

‘하긴 정도십대고수라고 다 잘하는 건 아니겠지.’

특히 가운데에 낀 큰 선은 뱀인지 지렁이인지 모를 정도로 괴상했다.

일행이 화산파 제자들을 스리슬쩍 돌아보자 다들 장원에 왔을 때의 위세는 어디다 팔아치웠는지 딴청을 피운다.

그녀가 가져온 그림을 뚫어지게 응시한 강엽은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에 큰 선을 가리켰다.

“혹시 이거 황하입니까?”

“오, 역시 한눈에 알아보는군. 섬서 지리에 익숙한 우리 제자들도 못 알아봤는데. 똑똑한 사람과 일하면 이래서 좋아.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거든.”

엄지를 치켜세우면서 새삼스레 감탄하는 언행에 이번엔 강엽도 말문이 막혔다.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어쨌든 대강은 알아들었다.

굳이 황하를 그린 이유는 단순히 지형을 표시하기 위함만은 아닐 터.

“황하를 끼자는 말씀이군요.”

“그렇네. 시일을 훨씬 단축할 수 있어. 순풍만 받으면 보름은 빨리 도착할 걸세.”

“이 많은 사람이 다 탈 만한 배는 없을 테니 나눠서 가야겠군요. 배편을 구하는 게 일이겠습니다.”

“위수와 황하의 조운방들은 본산과 연이 깊네. 이미 조치를 취했으니 편의를 얻을 수 있을 게야.”

아마 화산과 연통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검성의 허락을 얻고, 호송 경로를 짠 것이겠지.

섬서는 화산의 텃밭인 만큼 그녀가 장담한 대로 배를 구하는 게 어렵지는 않을 터.

하지만 일행이 생각했던 이상으로 무림맹으로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한수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관도를 따라 북상해서 진령산맥 깊숙이 들어가는 길.

큰 도시라면 몰라도 작은 산간 마을에선 이만한 인원을 수용할 수 없기에 양해를 구하고 노숙을 했다.

거기까지는 괜찮은데 식량이 문제였다.

한중을 떠날 당시 넉넉하게 챙겼음에도 불구하고 나흘 만에 바닥을 드러낸 것.

‘한 번에 휴대할 수 있는 식량은 한계가 있으니까.’

장장 수천 리의 여정을 가는 동안 사냥이나 낚시로만 식량을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마을에 들러 식량을 사려고 했는데, 제값을 주겠다는 말에도 마을 사람들은 선뜻 미곡을 내놓기를 꺼려했다. 화산파의 위신을 앞세워도 마찬가지.

“이상하군. 올 때도 들른 마을인데 그땐 이렇지 않았는데....?”

옥청선자의 이마에 깊은 고랑이 파였다. 예쁜 얼굴에 주름살 생긴다고 걱정하는 하윤의 말에도 한껏 찌푸려진 이맛살은 펴질 줄 몰랐다.

쭈뼛쭈뼛 나온 촌장이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나서야 일행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았다.

“산적들이라고요?”

“어이구, 그렇습니다! 그 흉악한 것들이 어제 저희 마을의 미곡을 몽땅 빼앗아갔습지요.”

굶주린 산적들이 식량을 내놓지 않으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데 무슨 재간이 있어 저항하겠나.

촌장이 가슴을 쿵쿵 치면서 답답하다는 듯이 하소연하자 옥청선자를 비롯한 화산파 제자들의 얼굴에 황망한 감정이 떠올랐다.

“어찌 이런 일이... 아무리 진령산맥 한복판이라도 서안이 지척이거늘.”

서안의 동쪽엔 화산이, 남쪽엔 종남이 있다.

구파가 둘이나 들어선 땅이기에 인근 수십 리는 도적떼가 출현한 적이 없었건만.

옥청선자가 급히 물었다.

“산적들이 어디로 간 지 아십니까?”

“그건 잘... 식량만 빼앗고 도망쳤습니다. 누군가 쫓아오기 전에 튀어야 한다고 한 것 같습니다.”

촌장의 입장에선 그나마 지금이 겨울이 지나간 초봄이라는 것이 다행이었다. 날씨가 풀렸으니 온 산천초목을 돌아다니면 입에 풀칠은 할 수 있을 것이다.

“쫓아오는 사람이라.”

“그 사람은 오늘 아침에 왔습지요. 가죽옷에 단발 머리를 한 여인이었는데, 등엔 커다란 활을 메고 있었습니다. 오자마자 산적들이 어디 갔는지 물었지요.”

“그 사람 한 명이었습니까?”

“아랫사람들을 몇 명 거느렸습니다. 다들 하얀 옷을 입고 있었는데 좀 이상했었지요.”

“이상하다고요?”

“예, 옷에 용도 아니고 새도 아니고... 꼭 태양처럼 생긴 노란 자수를 새겼지 뭡니까?”

“...!”

하얀 옷에 태양의 자수.

무언가 짐작가는 바가 있는지 옥청선자의 눈썹이 잘게 흔들렸다.

“더 아시는 건 없습니까?”

“소, 송구합니다. 그게 아무리 봐도 무림인들 같아서... 자세히 묻지는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산적들이 도망친 방향만 알려주십시오.”

모종의 결심을 한 걸까. 산적들이 도망친 방향에 대해 들은 옥청선자의 얼굴엔 결기가 가득했다.

“이보게, 귀영. 잠시 얘기 좀 나눌 수 있겠나?”

“산적들을 쫓으실 겁니까?”

“동행하는 입장에서 이런 돌발행동을 하는 게 결례라는 것을 알고 있네. 하지만....”

말꼬리를 흐리는 옥청선자의 모습에 강엽이 그녀가 하지 못한 말을 짚어주었다.

“광명마교를 염려하시는 겁니까?”

“들었군.”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닙니다.”

“하긴 먼 거리도 아니었으니 자네쯤 되는 고수라면 능히 들을 만하지. 자네 말대로 난 산적들을 추격하는 자들이 광명마교라고 의심하고 있네.”

광명마교가 어째서 산적들을 쫓는지는 현장을 급습해야 알아낼 수 있으리라.

밤이 내려앉기 시작한 하늘을 올려다본 강엽이 물었다.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동이 틀 때까진 돌아오겠네.”

정도십대고수인 그녀의 경공이라면 수십 리 길도 한달음이었다. 산적들이 준마를 타고 평탄한 관도를 내달린 게 아니라면 따라잡을 수 있었다.

턱을 매만진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가시지요.”

“이건 내 독단적인 결정일세. 자네까지 따라올 필요 없어. 마을에서 기다리고 있게.”

“적들이 광명마교라는 것 외엔 아무것도 모르지 않습니까. 만약을 대비해야지요. 그리고 제 생각이 맞다면 산적들도 멀리 도망가진 못했을 겁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미곡을 약탈했다는 건 놈들이 밥을 지어먹을 생각을 했다는 뜻입니다. 추격자를 무서워하는 것과는 별개로 어디까지 쫓아왔는지는 몰랐던 거지요.”

아무리 쫄쫄 굶었어도 저승사자가 등 뒤에 따라붙었다면 마을 곳간을 털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도망치는 입장에선 자기 몸만 무거워질 뿐이니까.

“서두르면 쫓을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렇게 서두른 끝에 산적들의 시체만 발견할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쫓을 가치는 있었다.

옥청선자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럼 부탁하네. 내 자네 기척을 이정표 삼아 마을로 돌아오려고 했건만, 자네가 같이 간다면 굳이 그럴 필요 없으니 편하긴 하겠군.”

“이정표...?”

강엽이 미심쩍다는 시선을 보내자 옥청선자가 먼 산을 돌아보며 조그맣게 말했다.

“허험, 그게 내가 길을 찾는 눈이 조금 어두워서....”

“....”

정도십대고수이자 매화검수의 수장인 옥청선자.

그녀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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