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호송 (1)
“그래서 화산 아줌마가 알겠대?”
“생각 좀 해보겠다던데.”
강엽과 걸음을 맞추는 백서희가 빙당호로를 씹으며 히죽 웃었다.
“생각하긴 개뿔. 그 자리에서 넙죽 받긴 쪽팔려서 말미 좀 달라고 한 거구만.”
강엽이 건넨 정보는 양날의 검이다.
마교를 배척하는 그들이 정작 자신과 연이 있는 자들을 내버려둔다면 명분이 희미해질 테니까.
“그나저나 날씨 참 좋다. 그렇지?”
“...그렇지.”
강엽의 고개가 올라갔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어두컴컴한 밤이나 흐린 날에만 밖에 나올 수 있었건만.
비록 기감도 온전하지 않고 무공도 못 쓰지만, 태양 아래 멀쩡히 다닐 수 있는 것만으로도 지난날의 고생이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순 없지.’
이런 때 누가 기습하면 꼼짝없이 당한다.
재생력도 막힌 지금은 뒷골목 파락호가 휘두르는 칼날만 맞아도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백서희가 있으니 그런 일은 없겠지만, 태양볕에 취약한 약점 자체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다.
한낮에도 전력을 발휘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태양을 극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터.
“그런데 괜찮나?”
“응? 뭐가?”
“흑룡교 말이야.”
강엽이 목소리를 낮췄다.
저잣거리의 사람들이 들어서 좋을 게 없었다.
“아, 그거....”
백서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렸을 때부터 핏줄 탓에 고생했던 만큼 정파인들 이상으로 흑룡교를 혐오하는 그녀였다.
한데 강엽이 흑룡교도들을 받아들였으니 심정이 복잡할 수밖에.
“아무렇지 않은 건 아니야. 어쨌든 내 조상이란 작자들은 죽어 마땅한 개자식이었으니까. 그 인간들 때문에 내가 태어난 거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흑룡교를 좋아할 순 없다.
백서희가 코밑을 슥 훔치며 말했다.
“그래도 흑룡교도들이 무림맹에 끌려가서 처형당하는 걸 보고 싶진 않네. 그 사람들, 정마대전 이후에 태어난 사람들이잖아? 물론 그 사람들도 암시장에서 오랫동안 살았으니 완전히 무고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정마대전을 일으킨 원흉도 아닌데... 선조의 잘못으로 처형당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정마대전 이전에 태어난 자들도 있겠지만, 그땐 어려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치들이 흑접처럼 흑룡교를 재건하려고 했다면 얘기는 완전 다르겠지만.”
“그건 아니지.”
그들의 수장이었던 유이강은 흑룡교와 연을 끊었다.
흑룡교의 교리를 믿는 사람은 남아있을지언정 교를 재건하겠다고 하는 자들은 없었다.
“뭐, 이렇게 말하는 나도 깨끗하게 살진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되도록 탓하지 않으려고.”
완전히 남남으로 사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백서희가 배시시 웃자 강엽의 입가에도 짙은 쓴웃음이 떠올랐다.
“고맙다.”
“괜찮아. 유이강한테 진 빚을 갚으려고 그러는 거잖아. 나도 그 사람 덕에 살았으니 갚는 셈칠게.”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저자를 활보한 두 사람은 이윽고 백서희의 제안에 따라 한갓진 길로 빠졌다.
민가를 벗어나서 산 속에 들어오기를 한참.
“끙, 분명 이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백서희가 길을 못 찾고 전전긍긍하자 강엽이 턱으로 먼 곳을 가리켰다.
“저쪽에 있는 것 같은데.”
“어, 정말. 희미하게 물소리가 들리네. 낮에는 힘 못 쓴다면서 묘하게 잘 찾는다?”
“여긴 햇볕이 덜 드니까.”
사실 산 속은 볕이 잘 드는 양지와 응달진 음지가 뒤섞이다 보니 감각이 오락가락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 두 사람 앞에 이윽고 까마득한 절벽과 그 위로 흐르는 폭포가 등장했다.
스무 장은 족히 되는 낭떠러지에 강엽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백서희를 돌아보았다.
“여기서 뭘 어쩐다고?”
“남녀가 뛰어내리면 백년해로한대!”
“...저승에서 백년해로할 것 같은데? 저승길 길동무를 백년해로로 착각한 거 아닌가?”
“죽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닐까?”
명색이 무림 고수인 두 사람이 이 정도 높이에서 떨어진다고 죽을 일은 없었다. 아래는 커다란 용소도 있으니 충격을 줄일 수 있을 테고.
“한밤이면 몰라도 지금 떨어지면 난 죽어.”
폭포 앞쪽은 가리는 게 없었기 때문에 태양볕이 훤히 비추었던 것.
백서희가 입맛을 다셨다.
“해 뜰 때 떨어져야 효과가 있다고 하던데.”
“대체 누구한테 그런 낭설을....”
“내가 안고 떨어지면 되잖아.”
“....”
순간 백서희의 품에 쏙 들어간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 강엽은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썩어문드러진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는 그를 향해 백서희가 음흉하게 웃으며 퇴로를 막았다.
“후후, 어차피 막다른 골목이야. 무의미한 반항은 그만두고 이 누님 품에 안기렴.”
“....”
강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리고 잠시 후.
“우와아아아아!”
“젠장, 너무 높아! 너무 높다고!”
어쩐지 즐거워하는 여인의 환호성과 비탄에 찬 사내의 절규가 폭포 가득 울려 퍼졌다.
* * *
폭포에서 떨어졌으니 젖는 것은 당연지사.
머리부터 발끝까지 쫄딱 젖은 몰골로 간신히 빠져나온 두 사람은 대 자로 뻗어서 하늘을 올려다봤다.
“...너, 바른 대로 말해. 폭포에서 떨어지면 백년해로하는 거 다 지어낸 거지?”
“그걸 이제 눈치챘어?”
키득거린 백서희가 뒹굴면서 강엽의 몸에 달라붙었다. 땅바닥의 흙먼지가 묻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젖은 물기와 탄력적인 몸이 강엽의 몸에 와닿았다.
매혹적인 눈웃음에 어린 열기를 감지한 강엽이 헛웃음을 흘렸다.
“오늘 왜 이렇게 적극적이야?”
“주변에 미인들이 워낙 많아야지.”
“내가 다른 여자한테 눈 돌린 적 있던가?”
“그래서 내가 이러는 거 싫어?”
“싫긴.”
곧이어 젖은 옷을 모두 벗어버린 두 사람은 한 몸이 되어 엉켰다. 잡아먹을 것처럼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상대의 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엔 거침이 없었다.
“하아, 하아... 더, 더...!”
두 사람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 * *
장원에 돌아온 강엽은 거처에 가지 못했다.
태화문도들이 주춤주춤 다가와서 풍도마장이 만나고 싶어 한다는 부탁을 전한 것이다.
“...느지막한 시간에 불러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강엽이 돌아오고 며칠이나 지났지만, 그동안 너무 바빴기에 풍도마장과 만날 겨를이 없었다.
비무를 준비하고, 하오문에 부탁해서 소문을 퍼뜨리고, 그 뒤처리를 하고....
오늘은 잠깐 쉬긴 했지만 사실 몸이 두 개라도 부족했다.
‘그래도 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현 시점에서 조영옥은 중요한 동맹이다.
그녀가 극진히 생각하는 사람인 만큼 조금 더 신경 썼어야 했을 것을.
풍도마장이 백염을 쓸며 웃었지만, 폐에 구멍이 난 것처럼 바람 빠지는 소리만 섞여 나왔다.
“노부는 괜찮네. 잘 먹고 잘 쉬고, 사천제일의 명의가 돌봐주는데 안 괜찮을 턱이 있나.”
“그렇습니까.”
강엽은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지만, 풍도마장의 몸 상태는 전혀 좋지 않았다.
암시장의 싸움이 끝난 지 스무날이 넘게 지났는데도 혈색이 안 좋고 눈밑엔 어둠이 그늘졌다. 쭉 빠진 볼살 때문에 광대뼈까지 드러났다.
일전의 싸움이 그에게 남은 세월을 앞당긴 걸까.
‘삼화취정이 완전히 깨졌다. 전성기의 무공은 되찾지 못하겠지.’
암시장에서 그에게 죽은 소마동 이상으로 심각한 상태였다. 기혈의 부상이 중단전까지 미쳤다.
이런 몸으로는 절정고수도 당해낼 수 없을 터.
“태화문에 돌아가면 금분세수를 할 생각일세. 이젠 초야로 돌아갈 때가 된 것 같으이.”
“공녀가 슬퍼하겠군요.”
“허허, 떠날 때가 되면 떠나야지. 욕심 같아선 공녀가 일가를 이루는 것까진 보고 싶지만... 사람일이 마음 먹은대로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어르신의 빈자리를 누가 채우겠습니까?”
조영옥의 진영에서 풍도마장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클 것이다.
문주의 오른팔이 그녀를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이 달라졌을 터였다.
“누군가는 채울 걸세. 공녀의 곁엔 인재가 많아. 이 늙은이 하나 빠진다고 삐걱대지는 않네.”
“대문파의 저력이군요. 누구 하나 빠져도 대체할 사람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지, 그렇지. 그래서 대문파가 무서운 걸세. 그들은 고수 한두 명 죽는 걸론 무너지지 않거든.”
물론 풍도마장쯤 되면 그저 그런 고수로 치부할 순 없었다.
그가 태화문을 떠난다면 사람들은 오랫동안 그의 빈자리에서 공허함을 느끼리라.
“하지만 때론 한 명의 인재가 조직을 떠받치는 법일세.”
“어르신.”
“공녀를 도와주시게.”
“지금도 잘 하지 않습니까?”
“대공자가 혈교와 손을 잡았네.”
“...!”
“외인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심히 부끄럽네만, 태화문은 자정 작용을 잃었네. 문주께선 병을 앓고 계시네.”
“번천광야가 말입니까?”
사도십대고수. 옥청선자와 비견될 만한 삼화취정의 초고수가 병을 앓고 있다니?
“세간엔 알려지지 않았지. 그래도 입단속은 하니까. 하나 언젠가는 알려질 게야.”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
안 그래도 후계자 경쟁으로 두 쪽으로 나뉘었는데 문주가 와병 중이라는 풍문까지 퍼진다면?
‘내우외환... 태화문이라도 휘청거리겠지.’
고금을 통틀어 모든 제국은 외부의 힘만으로 무너지지 않았다. 내부의 혼란이 겹쳐서 무너졌다.
태화문이 사천삼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대문파라도 안팎으로 혼란스러우면 어찌 될지 모른다.
“대공자가 반역을 도모하고 있는 겁니까?”
“증좌는 없네.”
“상대의 의중을 모를 땐 최악의 가능성을 가정해야 합니다.”
풍도마장이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 말이 맞네. 하지만 반역이라니...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는 건지 모르겠네.”
아들이 아비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은 흑도 사파라도 지탄받을 일.
혈교가 연루된 사실이 밝혀지면 태화문 내에서 끝날 일이 아니다.
“사천 무림을 적으로 돌릴 텐데....”
“거기까지만 하세요, 노사.”
말을 끊는 한기 어린 목소리.
강엽은 놀라지 않았다. 반역 운운했을 때부터 조영옥의 기척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정자에 올라온 조영옥의 얼굴은 정색하는 것을 넘어 얼음처럼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강 무사가 동맹이라지만 엄연한 외인. 본문의 치부를 이리 기탄없이 말씀하실 줄은 몰랐군요.”
“대비해야 하오. 대공자가 혈교와 손을 잡았다면....”
“그건 제가 결정할 일입니다.”
굳건한 의지를 느낀 풍도마장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늘어뜨렸다.
“...공녀의 말씀이 맞소. 이 늙은이가 노망이 나서 앞서나갔구려.”
“지치신 것 같군요. 너희는 노사를 처소까지 모셔다드려라.”
지팡이에 의존해서 힘겨운 걸음을 옮긴 노인은, 곧 태화문도들에게 부축받으면서 전각으로 들어갔다.
풍도마장이 사라지고 나서야 조영옥이 털썩 앉으며 탄식했다.
“하아, 못난 꼴을 보였군요.”
“그게 어찌 공녀의 잘못이겠소?”
강엽도 풍도마장이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은 몰랐다.
아마 삼화취정이 깨진 충격이 그의 심신에 영향을 끼친 것이겠지.
“하긴 이제 와서 숨긴들 소용없겠죠. 노사의 말씀대로 대공자, 제 오라비는 혈교와 손을 잡았어요.”
“대비해야 할 것 같은데.”
“해야죠.”
“조언을 해도 되겠소?”
조영옥 본인이 말했듯이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는 건 그녀가 결정할 일이었다.
조영옥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사천삼패와 손을 잡으라는 건가요?”
“이미 생각해두고 있었군.”
“여기서 강 무사만 찾았던 건 아니니까요. 당 원주와 얘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물론 내부의 사정을 알리진 않았다. 작금의 위기 의식을 공유하고 대략적인 대응책을 강구했다.
“혈교의 위협에 공동대응하는 협약... 가닥은 그렇게 잡고 있어요.”
“공녀에겐 권한이 없을 텐데. 문주가 되는 게 우선 아니오?”
“그건 걱정할 필요 없어요.”
바깥의 태화문도들을 향해 손짓을 하자 한 명이 안에서 비단 보퉁이를 가져왔다. 매듭을 풀자 옥을 깎아만든 해태상이 등장했다.
“...이거 내가 생각하는 그거 맞소?”
“맞아요.”
조영옥이 고개를 주억였다.
“태화문주의 직인입니다.”
“....”
아무리 강엽이라도 태화문주의 직인을 꺼내놓는 사태 앞에선 아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태화문주가 중병을 앓고 있는 지금 그녀의 손에 문주의 직인이 들어갔다는 게 무슨 의미겠는가?
“국가로 치면 옥새를 넘긴 격이군.”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데 훔친 건 아니에요. 아버지께서 잠깐 정신을 차리셨을 때 넘겨주신 거죠.”
훔쳤는지 넘겨받았는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녀의 손에 태화문주의 직인이 들어갔다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정식으로 취임식을 한 건 아니지만, 전 이미 태화문의 문주예요.”
조영옥의 눈이 요요하게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