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2화 (212/450)
  • 38화. 전향 (1)

    당우경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설마 밖에서 올 줄이야. 강 무사는 매번 내 예상을 빗나가는구려.”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면목이 없어진 강엽은 먼 산을 돌아보았다.

    스무날이 넘게 암시장을 뒤지며 자신을 찾아다녔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훤했던 것이다.

    당우경이 부드럽게 웃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다만 단목 방주도 걱정을 많이 했다오.”

    단목정은 일행과 함께 싸우기엔 무공이 부족했기에 후방에 남아 숙정방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술법진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나, 자신이 한 일이 많지 않다는 생각에 자괴감을 느껴 백서희 못지않은 열정으로 수색에 임했던 것이다.

    “단목 방주하고는 따로 회포를 풀 겁니다.”

    “강 무사가 돌아왔으니 승전을 축하할 수 있겠구려. 이제야 싸움이 끝난 기분이 드오.”

    “축배를 들기엔 아직 이를지도 모릅니다.”

    “음?”

    “사실은....”

    강엽은 술법진에서 벗어난 일을 말해주었다.

    자세한 사정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러나 유이강의 도움으로 신녀를 쓰러트리고, 간신히 술법진을 탈출한 뒤에 화산파를 만났다는 얘기는 할 수 있었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당우경이 무겁게 침음했다.

    “으음, 화산파라....”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사천에 삼패가 있듯 섬서엔 ‘삼도(三道)’가 있소. 공교롭게도 구파만 셋이 있지.”

    화산, 종남, 공동.

    그 하나하나가 신선들이 사는 선경이나 다름없는, 강호 무림의 천외천이었다.

    “한중 무림은 알게 모르게 그들의 영향을 받고 있소. 본문이 한중에 들어온 시점에서 그들에게 연통이 가는 것은 시간문제였지.”

    반대로 저들 중 누군가가 사천에서 소란을 피웠다면 즉시 사천삼패에게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특히 마교와 연관된 일이라면 지급이 갔을 터. 이는 검성께서 섬서 무림에 널리 반포하신 뜻이오.”

    -삼가 섬서의 무림 동도들께, 섬서땅에 마교가 출현할 시 구파에 알릴 것을 서 모(某)가 부탁드리겠소.

    검성(劍聖) 매화신검(梅花神劍) 서화진.

    구도를 제일의 덕목으로 여기는 도문의 장문인답지 않게 속세의 강호에 깊이 관여하는 절대자였다.

    “검성의 성품에 대해 논하는 건 의미가 없겠지. 강 무사도 그분에 대한 호사가들의 평은 익히 들어봤을 것이오.”

    “몇 번 들어보긴 했습니다.”

    검성 서화진은 명암이 있는 자다.

    섬서 무림에 깊숙이 개입하면서도, 기련산맥 너머에서 힘을 기르는 일월신교를 오랜 세월 견제했다.

    젊은 시절엔 흑룡교의 난과 혈교의 난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기도 했다.

    “세간엔 검성을 노협객이라 칭하는 평과 구파답지 않게 패도를 지향한다는 평이 함께 공존하오. 하지만 이 일은 양쪽의 양상이 맞물린 것 같구려.”

    “.......”

    누구보다 사마외도를 경계하는 노강호의 뜻이었다.

    일평생 마교를 상대하면서 그들에겐 약간의 틈조차 주면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리라.

    “내가 흑룡교도들을 구금한 것은 혹 그 유이강이란 인물이 살아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이오. 그와 협상하려면 흑룡교도들이 살아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유이강은 죽었다.

    자신의 부하들을 새외로 보내달라는 유언을 남긴 채.

    “강 무사는 어떻게 할 생각이오?”

    “만약.”

    당문에 부담을 지울 수는 없다.

    강엽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물었다.

    “제가 흑룡교를 놔주고자 한다면 당 원주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명분이 있어야 할 거요.”

    흑룡교도들을 놔주려면 당문이 묵인해야 했다.

    세간에 알려지면 지탄받을 일.

    당장 유상문을 비롯한 한중의 문파들이 소란을 일으키는 판국에, 그런 일까지 일어난다면 이 논란은 강호 전역에 퍼질 것이다.

    “난 일단 강 무사가 흑룡교의 우두머리를 만나봤으면 하오.”

    “우두머릴 말입니까?”

    “생각보단 말이 통하는 인물이었소.”

    “알겠습니다.”

    당우경이 어떤 연유로 대화를 권했는지는 몰라도 강엽도 호기심이 일었기에 흔쾌히 수락했다.

    그렇게 대강 이야기를 마무리될 무렵 당우경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보내왔다.

    “이렇게 보니 느껴지는데... 마침내 이뤘구려.”

    삼화취정. 당우경은 초음 같은 재주가 없으나 강엽이 이룬 성취를 기감으로 가늠했다.

    강엽의 입가에 쓰디쓴 미소가 걸렸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유이강의 도움을 받지 못했다면 삼화취정에 오르지 못했을 터였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을 거머쥐는 것도 실력이오. 이립도 안 된 나이에 삼화취정에 오른다... 직접 보지 않았다면 나도 믿지 못했을 것이오.”

    고개를 설설 내젓는다. 새삼 눈앞의 청년이 괴이처럼 다가왔던 탓에. 그러면서 내심 아쉬워했다.

    ‘강 무사가 정아의 짝이 된다면 본가에도 큰 홍복이 될 것을.’

    사천당문은 딸을 시집보내지 않는다. 데릴사위를 들여와서 가문의 호적에 이름을 올리기 때문.

    하지만 강엽은 이미 연인이 있는 데다, 다른 가문의 데릴사위가 될 성품도 아니었다.

    * * *

    “얘기는 잘 됐어?”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백서희가 옆으로 와서 묻는 질문에 강엽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흑룡교의 우두머리를 만나보라고 하시던데.”

    “아하, 그놈.”

    “아는 놈인가?”

    “너도 알걸. 부하들을 우르르 데리고 왔던 그 자식 말이야.”

    “호오.”

    그렇게 말하니 기억이 났다.

    수백 명의 검수들을 이끌고 그들의 앞에 나타나서 시비를 걸었던 젊은 사내. 무위만 보면 하후진이나 청수에 비견되는 절정고수였다.

    “그때 봤을 땐 말이 통할 것 같은 인상은 아니었는데....”

    “우리가 밖에 나왔을 때는 이미 당 원주님이 흑룡교도들을 전부 제압한 뒤였어.”

    “하긴 유이강 같은 고수가 또 있지 않는 한 당문에 맞설 순 없었겠지.”

    백서희도 유이강이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강엽은 유이강이 그녀를 보고 흑룡교의 신녀를 떠올렸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가 핏줄에 얽힌 이야기를 꺼려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백서희가 안내한 곳은 국주 전용의 연공실이었다.

    “숫자가 많아서 한 군데에 집어넣진 못하고 여기저기 따로 가둬놨어. 이 인간만 여기 넣은 거야.”

    본래는 안에서 문을 잠그는 구조지만, 문짝을 바꿔 달아서 바깥에서 잠그도록 되어 있었다.

    그곳에도 당문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는데 두 사람이 오자 얼른 예를 갖추었다.

    “어서 오십시오, 두 분.”

    이미 강엽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장원에 쫙 퍼졌는지 강엽을 보고도 놀라워하지 않았다.

    다만 정말 살아돌아온 게 신기하긴 한지 미녀인 백서희가 있는데도 강엽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당 원주님께서 안에 있는 자를 만나보라고 하셔서 왔소.”

    “바로 열어드리겠습니다.”

    당문의 무인이 열쇠를 꽂고 자물쇠를 돌리자 덜컥 소리가 나면서 문이 열렸다. 건장한 무인들이 달라붙고서야 열릴 만큼 두꺼운 석문.

    “난 여기서 기다릴게.”

    “그래.”

    구태여 백서희까지 동석할 필요는 없었다.

    강엽은 의념을 집중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힘을 일으켰다. 당문의 무인들이 낑낑대면서 열었던 석문을 허공섭물의 수법으로 간단히 닫고는 안쪽을 돌아봤다.

    천장에 박힌 야명주에 의존해 간신히 빛을 밝히고 있는 어두운 실내. 평범한 사람이 암순응을 하려면 시간이 꽤 걸리리라.

    정중앙에서 가부좌를 튼 사내를 발견한 강엽이 걸음을 옮기자 사내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우리 구면 아닌가?”

    “저번에 한 번 봤었지.”

    “그랬지. 혈교의 편은 아닌 줄 알았지만, 양쪽을 다 잡아버릴 줄은 몰랐어.”

    입술을 씰룩거린 사내가 손짓했다.

    “앉아라. 내 집이면 대접해줄 텐데,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개털이라서 말이야.”

    당연하지만 병장기도 빼앗긴 신세라서 입고 있는 옷을 빼면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뭐, 특별히 불만을 가진 건 아니야. 당문은 음흉하고 독랄하다고 들었는데 의외로 밥은 잘 챙겨주더군. 하루에 두 끼씩 꼬박꼬박 나와.”

    그가 마교도임을 감안하면 호사였다. 다른 문파에게 잡혔다면 이런 인간적인 대우는 받지 못했으리라.

    “물론 내공을 봉인당한 건 유감이지만. 봉맥술인지 뭔지 대침 몇 방 맞으니까 단전이 돌덩이가 되더군.”

    갇힌 동안은 일반인이나 다름없는 신세.

    너스레를 떠는 사내를 가만히 들여다본 강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유이강은 죽었다.”

    그러면서 품에서 유이강이 남겨준 패를 꺼내자 사내의 눈동자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흔들렸다.

    “어떻게 그걸...!”

    “넘겨받았거든. 성도전장에 가보라고 하던데. 나한테 도움이 될 물건이 있다면서.”

    “그것까지 알고 있다니....”

    단순히 패만 갖고 있다면 훔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성도전장에 대한 것까지 알고 있다면 유이강이 알려주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왜 어르신이 당신에게 유지를 맡긴 거지?”

    사내의 눈에 경악과 당혹감, 의심 등 오만 감정이 교차했다. 그중 단연 가장 강하게 내비치는 감정은 다름 아닌 질투였다.

    상황이 급박했다지만 흑룡교도 아닌 놈에게 자신의 유산을 물려주겠다니....

    온갖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얼굴을 들여다본 강엽이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군.”

    유이강이 어떤 심정으로 유산을 물려준 건지는 강엽도 알 수 없었다. 흑룡교주의 무공을 익힌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뿐.

    흑룡교를 등졌어도 뿌리를 잊진 못했던 걸까.

    “이제 어쩔 거냐?”

    “...뭘 말이냐.”

    충격 때문인지 잔뜩 갈라진 목소리였다.

    “아는지 모르겠지만 바깥엔 한중의 무인들이 너희들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이다. 조만간 화산파도 당도할 테고. 지금은 당문이 너흴 보호하고 있지만, 화산파가 무림맹의 맹규를 들먹이면 내줄 수밖에 없어.”

    “......!”

    무림맹에 끌려간다는 말에 사내의 눈이 번쩍 뜨였다.

    “운이 좋으면 뇌옥에서 썩겠지. 하지만 십중팔구는 맹원들이 보는 앞에서 극형을 당할 거다.”

    다른 때라면 목숨을 잃는 사태까진 가지 않을지도 모른다. 흑룡교가 멸문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까.

    그러나 작금의 강호는 혈교와 광명마교가 날뛰는 난세였다. 일월신교도 언제 발호할지 모른다.

    “무림맹 입장에선 본보기를 보일 필요가 있어.”

    만약 유이강이 살아있었다면 당문에 와서 협상을 통해 부하들을 돌려받았겠지만, 유이강이 없는 지금 그들을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딱 한 사람, 강엽을 제외하면.

    “인제 와서 너희를 풀어주진 못해. 화산파의 입장이 너무 강경하더군. 유이강이 살아있었어도 그들은 입장을 고수했을 거다.”

    “...그렇겠지. 검성이 뒤에 있는데 뭐가 두렵겠나.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싸우는 건데....”

    상대가 당문이라도 끝까지 싸웠다면 소수는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뒤늦게 자책하는 사내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뭐라고?”

    “반드시 성공한다고는 못해. 변수가 워낙 많아서. 그래도 손 놓고 있는 것보단 낫겠지.”

    사내가 가만히 강엽을 노려봤다. 적으로 만났던 그가 살 길을 터주는 게 믿기지 않는 것이겠지.

    사내의 눈빛에 어린 의혹을 읽은 강엽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딱히 너흴 동정하는 건 아니다. 유이강에겐 빚을 졌으니까. 그걸 갚으려고 이러는 거지.”

    “...좋아. 말해봐라.”

    “그건....”

    이후 강엽의 입에서 구명의 길이 나오자 사내는 어처구니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그럼 다른 방법 있나?”

    사내는 말문이 막힌 듯 입을 닫았다.

    당문의 조치로 내공까지 막힌 지금 그들이 자력으로 장원을 탈출할 수는 없었다.

    설사 탈출을 시도한들 당우경이라는 태산을 어떻게 넘는단 말인가?

    “그나마 다행인 건 당 원주도 너희를 무작정 죽이려는 건 아니라는 거지.”

    “그래, 그 점은 고맙게 생각한다. 그가 살심을 품었다면 우린 진작에 형장의 이슬이 됐겠지.”

    강엽이 살 길을 제시했으나 사내는 바로 결정하진 못했다. 천장을 보며 한숨을 쉬는가 하면, 피곤한 얼굴로 콧잔등을 주무르거나 이마를 쓸어올렸다.

    “만약 당신 말대로 된다고 해도... 우리도 명분이 필요해. 말로만 해선 될 일이 아니야.”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지.”

    “아니, 당신의 도움이 필요하다.”

    “뭐?”

    “만인 앞에서 당신에게 도전하겠다. 우리 교도들과 당문, 화산파가 보는 앞에서 날 굴복시켜라.”

    “굴욕을 감수하겠다는 거냐.”

    “그게 우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면.”

    강엽은 가만히 사내의 눈을 들여다봤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각오로 날카롭게 벼려낸 눈빛.

    그건 자신의 사람들을 위해 오욕조차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사나이의 결의였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묻지 않았군.”

    “연가휘.”

    자신의 이름을 밝힌 사내가 덧붙였다.

    “흑룡교 제일의 구천호법 교룡왕(蛟龍王)의 증손자이자 무맥의 유일한 계승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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