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1화 (211/450)

37화. 화산 (3)

강엽은 유이강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옥청선자를 설득했지만 그녀의 의지는 단호했다.

그녀 역시 화산파 장문인인 검성의 명을 받고 왔기 때문.

빈손으로 물러나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단단히 못 박았다.

-우리가 나눈 대화를 활수명의에게도 전해주게. 소식에 의하면 당문은 아직 한중에 남아 있다더군. 스무날이 넘도록 철수하지 않았어. 듣기로는 암시장의 잔해를 뒤적거리면서 뭔가를 찾고 있다던데....

거기까지 말한 옥청선자는 비로소 당문이 무엇을 찾는지 이해했다는 듯이 픽 웃었다.

싸움이 끝난 지 스무날이 지나도록 당문이 철수하지 않은 이유.

아마 그녀는 당문이 찾고 있는 것이 강엽이라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통찰한 것이리라.

별 소득은 거두지 못했지만 강엽은 옥청선자와 만난 일을 부정적으로만 생각하진 않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그렇게 산길을 내려와서 야음을 틈타 한중의 성벽을 넘어 도시로 들어갔고,

“.......”

암시장의 입구로 이어지는 표국이 폐허가 되어버린 것을 보고 일순 말문이 막혔다.

시체는 다 치운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난 지금도 싸움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있는 장원.

그나마 내부는 무사한 것 같지만 대문의 기왓장과 현판은 형편없이 무너져내렸다. 양옆의 담벼락 역시 고수들의 경파에 몸살을 앓은 듯 허물어진 상태.

하나 그보다 놀라운 것은 녹색 무복을 입은 당문의 무인들이 또다른 무리와 대치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후덕한 풍모를 지닌 노인이 시원하게 까진 이마를 핏줄이 터지도록 붉게 물들이며 외쳤다.

“정녕 이런 식으로 나올 텐가!”

“본문의 입장은 여전히 같습니다, 한 문주님.”

당문의 무인이 피로에 찌든 안색으로 말했다.

“원주님은 섬서의 문파들이 입은 피해에 대해서 유감을 표하고 갚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닐세! 대체 당문이 무엇 때문에 마교도들을 비호한단 말인가!”

“듣기 불편한 말씀이군요.”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이는 당문 무인의 눈동자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지나갔다.

“본문은 마교도들을 비호하지 않습니다. 만약을 대비해서 감시하고 있을 뿐.”

“그러니까 뭐하러 감시를 한단 말인가! 저잣거리 한복판에서 목을 쳐버려도 모자랄 판에!”

“.......”

당문의 무인은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것처럼 침묵을 견지했다.

침이 튀도록 항의했던 노인도 쇠귀에 경 읽기라는 것을 깨달았는지 씩씩거리는 태도로 물러났다.

“...당 원주께 전하게. 여긴 한중이고, 한중 무인들의 땅이라고. 우린 이 땅에서 마교도들이 숨 쉬고 사는 걸 관망하지 않을 걸세.”

콧방귀를 뀐 노인은 대답도 듣지 않고 건장한 가마꾼들이 짊어진 사인교에 훌쩍 올라탔다.

노인과 호종하는 무인들이 사라지자 그제서야 당문의 무인들이 침을 뱉으며 구시렁거렸다.

“고집불통 노인네 같으니... 정작 마교도들이 튀어나올 때는 숨어있던 작자가 입만 살았군요.”

“놔둬라. 똥개도 자기 앞마당에서 절반은 먹고 들어가는 법.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필요 없다.”

한중의 무인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성토한들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을 당문이었다. 이 도시가 그들의 영역이 아니기에 자중하고 있을 뿐.

그렇게 소란이 가라앉고서야 모습을 드러낸 강엽이 다가가자 당문의 무인들이 귀찮은 기색을 드러냈다.

“형장도 본문에 항의하러 왔소? 우리도 피곤하니 치도곤 치르기 싫으면 썩 돌아가시....”

“어엇!”

앞서 다른 무인들을 다독인 선임이 경악한 얼굴로 강엽을 훑어봤다.

“어, 어떻게...?”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안색에 다른 무인들이 의아해했지만 대답할 겨를도 없었다.

그전에 강엽이 물었던 것이다.

“날 아시오?”

“이, 일전에 본문을 방문하셨을 때 원주님과 겨루시는 걸 먼발치에서 뵌 적이 있습니다.”

“그렇군. 한데 방금 저자는?”

“유상문(流觴門)이라고, 근방에서 방귀 깨나 뀌는 문파의 주인인데... 아니, 근데 강 무사님이 맞습니까?”

그가 말한 강 무사라는 말에 다른 무인들도 강엽의 정체를 깨달은 듯 충격받은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 멍청하게 중얼거렸다.

“죽은 게 아니었다니....”

“어허, 이놈이 어느 안전이라고!”

후임의 입을 막은 무인이 강엽의 눈치를 살피며 사과했다.

“송구합니다, 강 무사님.”

“다들 내가 죽은 걸로 아나 보군.”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강 무사님의 친구분들께선 지금도 암시장을 뒤지고 계십니다. 저희 아가씨께서도 그분들과 함께하시고요. 가문의 무인들도 뒤지고 있는데... 한데 어찌 밖에서 오시는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소.”

“이럴 게 아니라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원주님께 바로 기별하겠습니다!”

“물론 원주님도 뵐 건데... 근데 우리 일행이 아직도 암시장에 있소?”

“아, 아뇨. 잠시 나오신 걸로 압니다.”

“그럼 일행부터 만나겠소.”

* * *

일행은 초상집 분위기였다.

처음에 강엽이 희생을 자처하고 남았을 때만 해도 다들 걱정할지언정 희망을 가졌다.

아무리 힘든 싸움이어도 극복했으니까. 어떤 강적을 만나든 결국 쓰러트렸으니까.

그래서 술법진의 입구에서 잿더미가 쏟아져도 강엽이 금방 살아돌아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젠장, 내가 남았어야 했어.”

하후진이 호리병을 쾅 내리쳤다.

미처 목구멍에 집어넣지 못한 액체가 앞섶을 적시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 개자식이 그딴 돼먹잖은 짓을 할 줄 알았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막았을 거라고!”

“....”

주변에 있던 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다들 침울한 낯빛. 이제 와서 후회한들 늦었다고 하지도 못했다.

“빌어먹을 새끼, 엿 같은 새끼, 지 여자 두고 혼자 뒈져버리는 머저리 새끼....”

“...백 소저는 어디 가셨습니까?”

“방에 들어갔어요.”

청수의 물음에 당묘정이 콧잔등을 주무르며 대답했다. 오랫동안 잠을 못 잔 것처럼 퀭한 얼굴이었다.

비단 그녀뿐만 아니라 다들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소창후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또 혼자서 내려가는 거 아닌지... 지난번에도 그랬었고, 이러다 탈이 나진 않을지 걱정됩니다.”

“우리 중에서 가장 초조할 테니까요. 억지로 끌고 오지 않았으면 계속 거기 남았을 거예요.”

조영옥이 말을 받았다.

본래 강엽의 일행이 아닌 그녀가 이 자리에 있을 이유는 없지만, 깊은 내상을 입은 풍도마장을 당우경에게 맡기고 일행과 함께 지하를 수색하고 있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일행과 함께 강엽을 찾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때 코끝을 스치는 냄새에 일행의 얼굴에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건... 향냄새 아닌가요?”

일행이 밖으로 나가자 칠척 거한이 목탁을 두들기고 있었다.

“마하가로 니가야 옴 살바 바예수 다라나 가라야....”

거한의 정체는 야차마곤이었다. 자나 깨나 몸에서 떨어트리지 않던 흑곤과 호리병까지 내려놓고, 정말 승려처럼 염불을 외우는 모습.

문제는 염불을 외우는 저의가 뭐냐는 거다.

하후진이 빽 소리쳤다.

“에라이, 이 미친 파계승놈아! 지금 강엽 그놈이 죽었다고 극락왕생 빌어주는 거냐!?”

단순히 욕만 내뱉는 게 아니라 뒤통수를 향해 발길을 날리자 기겁하며 몸을 트는 야차마곤이었다.

졸지에 발을 맞고 나가떨어진 향로가 안에 든 내용물을 게워내자 야차마곤이 쌍심지를 돋웠다.

“이게 무슨 짓인가!”

“내가 할 말이다, 땡중!”

남은 뭣 빠지게 실종된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혼자서 향을 피우고 염불을 외운다니?

열심히 찾는 입장에서는 맥 빠지는 짓이었다.

“왜, 아주 그냥 강엽 그놈이 죽었다고 제사상 차리고 고사를 지내지 그러셔?”

“어허, 이자가 정녕...!”

그때 난감한 표정을 지었던 소창후가 얼굴을 붉히는 두 사람 가운데 끼어들어 진실을 알려주었다.

“저, 하후 시주... 야차마곤 선배님은 강 시주의 극락왕생을 빌어주신 게 아닙니다.”

“...아니라고?”

“예, 천수경(千手經)의 구절인데 악업을 그치고 깨달음을 얻도록 해주는 거라서....”

그제서야 자신이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은 하후진이 벙찐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그런 걸 왜 외우는데?”

“그야 마교도들의 악업이 끝나길 바라서지! 이 모든 게 마구니들이 탐욕과 분노를 버리지 못하고 일을 벌였기 때문이 아닌가? 오히려 나야말로 귀영 후배의 무사 생존을 간절히 바라고 있단 말일세!”

야차마곤이 역정을 내자 할 말이 없어진 하후진은 끙 앓기만 했다.

조영옥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후 무사가 성급하긴 했지만, 야차마곤 선배님도 때와 장소가 좋지 않았군요.”

안 그래도 강엽이 정말로 죽은 게 아닌지 걱정하는 때에 향을 피운다면 오해를 살 만하지 않은가.

그녀가 조용히 나무라자 이번엔 야마차곤이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는 시선을 피했다.

“쩝, 그 친구가 쉽게 죽을 친구인가....”

한바탕 소란이 가시자 누구도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다들 강엽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암시장에서 뒤질 만한 곳은 모두 뒤진 것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당문과 숙정방의 무인들 수백 명이 암시장을 샅샅이 수색하지 않았던가?

어쩌면 정말 강엽은 그들을 술법진에서 내보내고 자신을 희생했을지도 몰랐다.

“그 새끼... 살아돌아오면 죽여버린다.”

“살아온 사람을 왜 또 죽입니까?”

“아, 몰라! 아무튼 안 돌아오면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 돌아와도 한 방 먹여줘야겠다!”

“...하긴, 명색이 일행인데 상의도 안 하고 마음대로 결정한 건 화가 나는군요.”

청수도 답지 않게 정색하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내 씁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용서할 텐데.”

모두가 감히 대답하지 못할 때 전각 안쪽에서 거친 소리가 나면서 하얀 인영이 나왔다.

피풍의로 몸을 감싼 백서희였다.

본디 눈처럼 하얗던 피풍의는 흙먼지로 인해 곳곳이 얼룩덜룩해진 상태.

잘 먹지도, 쉬지도 못해서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당묘정이 다가가서 팔을 잡았다.

“백 소저, 지금은....”

“비켜요.”

날카롭게 파고드는 눈빛에도 당묘정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백서희의 팔을 꽉 붙들었다.

“원기가 많이 상했어요. 하루 종일 먹은 것도 거의 없이 지하만 뒤졌잖아요. 이러다 쓰러져요.”

워낙 강건하다 보니 운기만 하면 피로를 물리칠 수 있다지만 그것도 며칠이 한계였다. 무림 고수도 제때 휴식하지 못하면 기력이 쇠하는 것이다.

“난 상관없어요.”

“전 상관이 있어요. 의원이니까요.”

“...조금만 더 찾아볼게요. 그럼 되잖아요.”

“그 말을 여섯 시진 전에도 한 거는 기억해요? 백 소저만 찾는 것도 지하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본문과 숙정방의 무인들도 아래에 있으니까....”

백서희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이 고집을 부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머리로는 당묘정의 말이 옳다는 걸 알아도 따르기는 쉽지 않았다. 일행이 억지로 붙잡고 끌고 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어두운 지하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무어라 말을 하려고 한 그녀가 멍해졌다.

월동문을 넘어오는 단삼 청년.

걱정으로 밤잠을 설치는 그녀와 달리 어디서 뭘 처먹었는지 때깔이 고운 놈팡이 새끼가 서 있었다.

다른 일행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내가 지금 헛것을 보나?”

“우리 모두 단체로 눈알이 잘못됐나 봅니다. 아니면 강 도우가 혼백이 되어 찾아왔거나.”

“...나 멀쩡히 살아있다.”

청수의 넋두리에 강엽은 한숨을 쉬면서도, 이내 면목이 없다는 듯이 쓰게 웃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하다. 모두들 무사해서 다행....”

“야, 이 간나 새끼야아아아!”

발작적으로 튀어나간 하후진이 강엽의 면상을 향해 주먹을 뻗었다.

그러나 강엽의 얼굴에 닿기도 전에 반사적으로 뻗어나온 금나수에 잡혀 땅에 메쳐졌다.

꽝 소리를 내며 땅에 처박힌 하후진이 꿱 비명을 지르는 꼬락서니에 강엽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아니, 놀라서 나도 모르게 그만....”

“.......”

일행의 입이 떡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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