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10화 (210/450)

37화. 화산 (2)

한중 북쪽은 진령산맥의 일부.

머나먼 곤륜에서 발원하여 하남까지 이어지는 광활한 산맥답게 진령산맥 곳곳엔 수많은 절간과 도관, 이름 없는 암자들이 있었다.

화산파의 도사들이 하룻밤을 지내는 곳은 절에 딸린 암자였다.

사상과 가르침이 다르긴 하나 섬서땅에서 화산파의 명성은 유불도를 가리지 않는 만큼 양해를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허무량과 하윤, 두 화산파 제자를 따라간 강엽은 곳곳에서 이쪽을 관찰하는 시선을 감지했다.

산은 해가 빨리 저무는 만큼 태양은 이미 서녘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처음 두 사람을 만났을 때만 해도 환한 대낮이었지만, 지금은 시뻘건 작약을 덧칠한 것처럼 붉어진 상태.

동쪽에서부터 자색으로 물든 밤하늘이 산간을 덮자 흡혈귀의 감각도 예민해지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지만 화산파 제자들의 위치와 기도를 헤아릴 정도는 된다.

그때 장발 사내가 나무에서 뚝 떨어졌다.

“진 사형.”

“허 사제, 하 사매. 누굴 데려온 건가?”

“아, 이분은....”

허무량이 난감해하며 강엽을 돌아봤다.

오는 동안 강엽의 정체나 암시장에서 있던 일을 들었지만, 정작 신분을 입증하진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단 데려온 건데....

“게다가 저건 허 사제의 옷 같군. 도움이 필요하신 분이신가?”

돌려말하긴 했지만 요지는 거렁뱅이를 왜 데려왔냐는 뜻이었다.

“대답하게, 두 사람. 연 사고께서 계시는 곳에 어찌 외인을 데려온 건지. 자세나 걸음걸이를 보면 속세의 강호인 같은데.”

“진 사형,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해요. 이분은....”

서슬 퍼런 눈빛에 쩔쩔맨 하윤이 이유를 설명하려고 할 때, 뒤에 있던 강엽이 끼어들었다.

“암시장의 일 때문에 왔다고 들었소만.”

“...그게 도우와 상관이 있소?”

“내가 암시장의 일을 주도했소.”

“...!”

장발 사내뿐만 아니라 곳곳에 숨은 화산파 제자들이 놀란 기색으로 술렁거렸다.

실제로 육성을 낸 것은 아니고 전음을 나눈 것이지만, 강엽의 감각은 대기 중의 기파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을 어렵지 않게 포착했다.

“당문의 사람이었소?”

“당문?”

“아니오?”

“아, 그렇게 소문이 났나 보군.”

드러내고 암시장을 친 것도 아니고, 은밀히 잠입한 뒤에 당문의 도움을 받았으니.

항간에 당문이 암시장을 치는 일을 주도했다고 소문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겠지.

“도우가 누구길래?”

“진 사형, 그, 그게 이분은... 낭인전의 금패급 낭인인 귀영입니다!”

보다 못한 허무량이 에라 모르겠다는 얼굴로 강엽의 정체를 까발리자 장발 사내를 비롯한 화산파 제자들의 안색이 일변했다.

금패급 낭인이 나올 때마다 전국 각지의 분타를 중심으로 소문이 급속도로 퍼졌기에 구파의 제자들 역시 새로운 금패급 낭인의 출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발 사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제의 말이 진짜요?”

“싸우던 중에 낭인패를 잃어서 신분을 증명할 만한 건 없군. 이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은데.”

강엽이 손가락을 들어올리면서 진기를 끌어올리자 새빨간 불꽃이 일렁거렸다.

“삼매진화로군. 대단하긴 하지만 그 정도로는....”

무심코 중얼거린 장발 사내는 곧 자신이 잘못 봤다는 것을 깨닫고 목구멍을 쥐어짜냈다.

“강기!?”

“이 정도면 증명이 됐소?”

“.......”

나직한 질문에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흔히 삼화취정으로 일컬어지는 초절정고수들의 기예를 본 장발 사내는 기함했다.

내심 반신반의하면서 강엽을 여기까지 안내한 두 화산파 제자는 말할 것도 없었다.

경악한 걸 넘어 돌처럼 굳어진 좌중을 천천히 둘러본 강엽이 강기를 꺼트리며 물었다.

“좀 전에 당문을 언급했지. 그건 화산파가 암시장에서 일어난 내막을 거의 모른다고 해석해도 되겠소?”

화산파 도사들을 만난 김에 일행의 근황을 알아보려던 참이지만, 정작 이들이 아는 게 없다면 한중에 내려가서 알아보는 게 나으리라.

장발 사내가 금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자 강엽은 내심 쓴웃음을 흘리며 포권을 쥐었다.

“실례했군. 그럼 조사 잘 하시오.”

“자, 잠깐! 기다려주시오!”

강엽이 등을 보이자 장발 사내가 급히 불렀다.

“왜 그러시오?”

“도우가 정말 귀영이고, 암시장의 일을 주도했다면 보낼 수 없소.”

“말이 좀 이상한데?”

강엽의 눈이 가늘어졌다.

“보낼 수 없다... 무슨 의도로 하는 말이오?”

자칫 오해를 살 수도 있는 말이었다. 상황에 따라선 힘으로 억류하겠다는 의미로 쓰일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런 의미에서 쓴 말은 아니겠지만.’

이들이 원하는 건 암시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확인하려는 것이리라. 그게 목적이라면 협조하지 못할 이유가 없겠지만....

‘문제는 한중이 섬서땅이라는 건데.’

무림 문파는 영역에 민감하다.

이는 백도와 흑도, 정과 사를 가리지 않고 무림 문파라면 대다수가 가진 속성이었다.

개방이나 낭인전처럼 전국 각지에 분타를 둔 문파들은 그런 개념이 희박하지만, 화산파는 섬서 각지에 수많은 속가를 거느린 대문파.

한중에도 꽤 많은 속가 문파를 둔 만큼, 당문이 사전에 협조를 구하지 않고 암시장을 뒤집은 일을 문제 삼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다.

‘조심할 필요는 있겠어.’

허무량과 하윤은 단순한 조사라고 했지만, 화산의 속가 문파들이 피해를 입은 게 확인되면 화산파도 그냥 넘어가진 않을 터.

‘설마 당문이 일부러 화산의 속가 문파들을 건드리진 않았겠지만....’

문제는 싸움 이후였다.

적들이 항복하지 않고 바깥으로 탈출하며 소란을 일으켰다면, 민간도 피해를 입을 수 있었으니까.

‘가장 큰 문제는 흑룡교겠지.’

만약 강엽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유이강의 유지를 전해주며 어떻게든 그들의 동요를 막았으리라.

하지만 유이강의 죽음에 분개한 그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무차별적인 저항을 이어갔다면....

[사질이 결례를 저질렀군.]

상념은 갑작스레 들린 청아한 목소리에 툭 끊겼다.

자신의 정체를 밝히진 않았지만 화산파의 제자를 꾸짖을 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손님께 사과드리거라.]

꾸지람을 들은 장발 사내는 정신이 아득해지는지 눈을 감으며 짧게 심호흡을 했다.

“...죄송합니다, 도우.”

“뭐, 됐소.”

강엽도 끝까지 꼬투리를 잡을 생각은 없었다. 그보다는 전성의 주인에게 더 관심이 가기도 했고.

‘역시 정도십대고수.’

항렬만 놓고 보면 아미의 난풍혜검이나 청성의 서하무량검과 비슷한 위치.

그러나 위상은 비교를 불허했다.

[사질의 실수는 나도 사과하겠네. 심성이 나쁜 아이는 아니니 관용을 베풀어줬으면 하는군.]

장발 사내의 안면이 썩어문드러졌지만,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님을 알기에 얌전히 닥치고 있었다.

그를 슬쩍 돌아본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별로 마음에 두진 않습니다. 한데 기왕이면 얼굴 맞대고 얘기했으면 합니다만.”

암벽 사이에 숨겨진 암자.

주변을 에워싼 소나무 군락 때문에 얼핏 보면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전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지. 마침 차를 끓여두었다네.]

* * *

“화산의 연선하일세.”

암자 안쪽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고아한 미인.

매화가 수놓인 도포를 입고 있는 도고(道姑)는 얼핏 보면 이대제자로 착각할 만큼 젊었다.

물론 실제 나이도 그다지 많지 않다고 알려졌지만, 강엽은 그녀의 내공이 노화를 비껴갈 만큼 깊다는 것을 초음으로 알아밨다.

‘생각해보면 정도십대고수를 만나는 건 처음이군.’

정도십대고수와 사도십대고수.

천하팔존을 제외하면, 사실상 강호 무림을 대표하는 스무 명의 절세고수들이었다.

전원 삼화취정의 경지에 오른 것은 물론, 일부는 천하팔존이 공석이 될 시 그 자리를 채울 수 있을 만큼 고강하다고 알려진 초강자들.

강엽도 무림인이 된 지 상당한 시간이 지난 만큼 그들의 위명은 익히 들었지만, 정작 그들 중 한 명을 만나보는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낭인전의 강엽입니다.”

상대가 무림의 선배인 만큼 예를 갖추었다.

주전자에서 엽차를 따른 그녀가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강엽에게 건넸다.

딱히 젖지도 않았는데 오동나무 탁자를 쭉 미끄러진 찻잔은 정확히 강엽의 앞에서 멈추었다.

“진 사질의 무례는 다시 사과하겠네. 본가가 한중에 있어서 신경이 과민해진 모양이야.”

“그 건은 이미 잊었습니다.”

차를 한 모금 들이킨 강엽은 연선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상대의 신분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이.

그 태도에서 강엽이 단도직입적인 이야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옥청선자가 빙그레 웃었다.

“직설적이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는 건가?”

“단순히 암시장의 일을 조사하거나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출도하신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게 보기엔 너무 과한 인선이었다.

마교가 엮인 만큼 중요인사를 보낸 건 이해되지만, 이미 다 끝난 싸움에 매화검수의 수장을 보낸다니?

“염치 불고하고 여쭙겠습니다. 혹시 화산파는 당문과 충돌하는 걸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암시장의 일로 속가 문파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하하, 자네가 뭘 오해했는지 알겠군.”

생긴 것 답지 않게 장부처럼 호탕하게 웃은 옥청선자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물론 속가 제자들이 피해를 입었다면 따로 조사해야겠지만... 그 정도 일로 당문과 척을 지진 않네.”

“제가 착각했군요. 괜한 억측을 입에 담아서 선자의 귀를 어지럽혔습니다.”

“아닐세. 그 아이들이 자세한 얘기를 하진 않았을 테니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다만 소문이 사실이라면 활수명의와 좀 진지하게 얘기를 해볼 생각일세.”

“...?”

“음, 모르나? 자네도 그 일에 참여했다면서? 아예 자네가 주도했다고 말하지 않았나?”

“일이 생겨서 일행과 잠시 떨어졌습니다.”

대체 어떤 소문이길래 화산이 매화검수의 수장을 보낸단 말인가?

“흑룡교.”

옥청선자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강엽의 가슴 속에 깊은 파문을 일으켰다.

“당문이 흑룡교의 잔당을 비호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네. 우린 그 소문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어찌하여 당문이 그들을 비호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산문을 나온 걸세.”

“.......”

“뭔가 알고 있는 눈빛이군.”

옥청선자의 입술에 어린 미소가 짙어졌다.

강엽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일이 이렇게 됐나....’

아무래도 흑룡교의 잔당들은 유이강이 사망한 시점에서 항복을 택한 듯했다.

상대가 마도라도 무저항인 상대를 베는 것은 당문으로서도 꽤나 꺼려지는 일이리라.

그렇다고 무작정 풀어줄 수도 없으니 일단 억류하고 봤는데 화산파가 개입하려는 것이다.

“당문이 흑룡교의 잔당들을 내어주지 않는다면 어찌하실 겁니까?”

“설득해야겠지. 마교도를 비호하는 건 백도의 일원으로서는 해선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럼 흑룡교의 잔당들은 어떻게 됩니까?”

“당문과 협의해야겠지만, 아마 무림맹으로 압송할 걸세. 무림맹의 맹규가 그러하네.”

당문 역시 무림맹의 맹방. 화산파가 맹규를 들먹이면 흑룡교를 보호할 명분이 사라진다.

“흑룡교가 멸문한 지 반백 년이 넘었지만 아직 무림은 그들의 만행을 잊지 않았네. 혈교와 광명마교가 기승을 부리는 지금은 더욱 그렇지. 사람들은 정마대전이 다시 일어나는 게 아닌지 두려워하고 있어.”

“흑룡교의 잔당들이 새외로 떠난다고 해도 무림맹으로 압송하시겠습니까?”

“...잘 모른다더니 전혀 아니군.”

“그들의 수괴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흑상이라는 자 말인가?”

“구천호법이라고 하더군요.”

“......!”

옥청선자의 봉목이 찢어질 듯 크게 뜨였다.

“어찌 그런... 구천호법은 전멸했을 터인데?”

“살아남은 자가 있었습니다. 귀산자라고 하던데... 당시엔 죽음을 위장했을 겁니다. 아무튼 혈교과 싸우느라 잠시 손을 잡았는데, 지금은 행방이 묘연합니다.”

지금은 유이강의 죽음을 숨겨야 할 때였다.

그가 살아있다고 믿어야 화산파가 조금이라도 부담감을 느낄 테니까.

“그는 자신이 살아남으면 부하들을 데리고 새외로 갈 거라고 말했습니다. 화산파가 흑룡교의 잔당들을 압송하면 구천호법의 원한을 살 텐데요.”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이지.”

다 식은 엽차를 호로록 마신 옥청선자는 새삼 쓴맛을 느끼는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상대가 누구든 본산은 두려워하지 않네. 자네야말로 본산의 장문인이 어떤 분인지 잊은 게 아닌가?”

정도십대고수를 제자로 둔 섬서 무림의 절대자.

옥청선자의 스승이자 화산파의 장문인은 당대 천하팔존의 반열에 오른 검성(劍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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