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신녀 (7)
“사실이다. 귀주성의 비밀 분타. 구천호법인 당신이라면 안다고 생각하는데.”
“그에 대한 소문은 들었지. 하지만 교주의 망령이라는 말은 처음 듣네만.”
“흑룡교주는 혼백의 일부를 남겨 이혼대법으로 후손의 몸을 빼앗으려고 했다. 백서희의 몸을 노렸지. 그렇게 부활해서 흑룡교를 재건하려고 했고.”
“....”
유이강의 표정이 묘해졌다.
흑룡교를 등진 그로서는 교주가 부활을 꾀했다고 들으니 뭐라고 말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 기분이었다.
“안됐지만 자세히 얘기할 시간이 없어. 이젠 서둘러야 해.”
“...그래, 자네 말이 맞군.”
“내 말을 믿나?”
“솔직히 반반일세. 귀주성에 비밀 분타가 지어졌다는 건 알고 있었지. 자세한 위치나 기능은 몰랐지만... 그게 교주의 부활을 위해서였을 줄이야.”
구천호법이라고 모든 것을 알지는 못했다.
유이강은 전사한 구천호법 대신 그 자리에 올랐으니 내밀한 비밀에선 더더욱 거리가 멀었고 말이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하군. 내가 아는 교주라면 그런 짓을 하고도 남아.”
“날 원망하지는 않나?”
“자네를?”
유이강이 피식 웃었다.
“난 이미 교를 저버린 몸일세. 하물며 자네가 죽인 자는 교주도 아니고 그 망령이 아닌가.”
“....”
“설령 그자가 교주 본인이라면 더더욱 용서할 수 없지. 수천 명의 교도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자신은 언제든 부활할 수 있도록 뒷구멍을 판 것 아닌가?”
물론 옛날이었다면 감히 이런 역심을 품지 못했으리라.
그러나 반백 년이 지난 지금, 유이강은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사리를 판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네 말이 전부 맞다고 해도, 흑야만상환영진의 축을 넘겨받는 건 쉽지 않을 게야. 그건 술법진을 새로이 펼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니까. 뭐 하나 삐끗하면 전부 다 무너지고 말 터.”
유이강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단 일 푼의 오차도 없이 이 거대한 술법진을 이어받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을 부정이라고 여겼는지 유이강이 바람 빠지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객기로 어찌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당장 생로로 달려가게. 운이 좋다면 탈출할 수 있을....”
“지금까지 내 생각대로 된 건 거의 없었지.”
별안간 내뱉은 엉뚱한 말에 유이강이 눈가에 힘을 주고 강엽을 바라봤다.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이번 싸움만 해도 그래. 혈라분을 뿌리는 놈을 잡으러 온 게 이렇게 커질 줄은 몰랐다.”
비단 이번 싸움뿐만이 아니었다.
흑룡교의 비밀 분타, 흑접의 일, 그 이전의 사건들....
심지어 한낱 유생이었던 자신이 흡혈귀로서 무림인이 된 것까지.
“뭐 하나 내 마음대로 된 적이 없었지.”
언제나 변수가 발생했고, 임기응변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빌려 난관을 타파했을 뿐.
자신은 완벽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러니 십 할 확신하거나, 무조건 성공한다는 말은 하지 못해. 하지만....”
깊이 파인 우물처럼 우묵한 눈빛을 똑바로 응시하며, 한 자 한 자 똑바로 내뱉었다.
“당신이 도와준다면 가능성은 있다.”
이번엔 유이강이 입을 다물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씁쓸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실패한다고 뭔가 변하는 것도 아니겠지.”
쩌저저저저적......!
술법진의 축을 넘겼어도 한번 시작한 붕괴는 되돌아가는 일 없이 공간을 삼키고 있었다.
이미 신녀를 감싼 혈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지 오래.
“가부좌를 틀게. 명문혈로 술법진을 넘길 테니.”
요혈인 명문혈을 공격당하면 재생력이 있어도 생사를 장담할 수 없지만, 강엽은 가부좌를 틀었다.
곧 명문혈을 통해 막대한 주력의 덩어리가 들어오는 것을 느끼고 침음했다.
“큽...!”
초월적인 기감을 타고난 그조차 일순 버겁다고 느낄 만한 주력.
독맥을 비롯한 기경팔맥을 일주한 주력의 덩어리는 단박에 심장까지 올라왔다.
[중단전의 심상으로 다스리게.]
함께 진기 도인을 한 유이강은 강엽의 중단전을 감싼 여덟 마리의 혈룡을 발견했다.
[허어, 전륜구룡공에서 영감을 받았는가.]
흑룡교주의 독문무공.
그거야말로 강엽이 흑룡교주의 망령을 끝장내고 지식을 취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였다.
[역시 자네도 정파인은 아니군. 어쩌면 자네야말로 교맥을 이을 재목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
흑룡교의 유산이 끊기는 것은 유이강도 바라지 않았다.
교주의 핏줄인 백서희가 수혜자가 된다면 바랄 나위가 없겠으나, 지금 상황에선 불가능한 일.
모종의 결심을 한 그는 술법진의 축을 넘기고도 강엽의 명문혈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강엽이 움찔하자 일갈했다.
[움직이면 우리 모두 죽어!]
단전을 이루는 내공과 선천지기가 흘러들어가고 있었다.
서로 상이한 심법을 익힌 만큼 유실되는 양도 많겠지만, 유이강은 개의치 않았다.
[자네에게 부족한 한 걸음. 내가 떠밀어주겠네.]
술법진의 균열로 인해 두 사람의 몸도 흔들렸지만, 유이강은 뚝심으로 격체전력(隔體傳力)을 버텼다.
‘조금이지만 술법진이 부서지는 속도가 느려졌다.’
이는 강엽이 술법진을 이해하고, 축을 중심으로 깨진 곳을 고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술법진의 이치를 간파했기에 가능한 일.
‘기대 이상의 그릇이다.’
수척한 안색은 밀린 세월을 청산하듯 빠르게 늙어졌다.
머리가 파뿌리처럼 허얘지고, 피부는 윤기를 잃고 메말라간다.
“후우....”
지친 기색이 완연한 유이강이 손을 떼며 물러났다.
급속도로 세월의 풍상을 맞은 그와 달리 강엽은 가부좌를 튼 채 눈부신 빛에 휩싸여 있었다.
후우우우웅!
“간신히 성공했는가.”
심상을 꺼내듯 선명한 붉은 기운이 강엽의 몸을 감싸며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하나, 둘, 셋... 여덟. 그리고....
“구룡.”
조금 떨어진 채 그 광경을 지켜보던 유이강이 흐뭇하게 웃는 순간.
강엽의 몸을 감싼 아홉 마리의 혈룡이 저들끼리 얽히면서 세 장의 꽃잎으로 화했다.
동백꽃처럼 선홍색을 띠는 삼화취정의 꽃잎들.
이내 그조차 산산이 흩어지며 정수리의 백회혈로 들어가자 강엽의 기파가 천천히 갈무리되었다.
* * *
강엽은 눈을 감은 채 스스로의 몸을 관조했다.
상중하 삼단전이 막힘없이 공명하여 정기신 합일을 이룬 몸에 크고 단단한 나무가 뿌리를 내렸다.
심상으로 빚어낸 거대한 혈목이 세맥과 낙맥 등에 잔뿌리를 뻗어 선천지기는 물론, 유이강이 전해준 내공마저 탐욕스럽게 빨아먹었다.
‘이것이 삼화취정.’
체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들여다보면서, 동시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도 관찰한다.
그동안 익힌 무리가 쪼개지고 합쳐지면서 새로운 경지로 도약하고 있었다.
한빙과 뇌정, 혈룡의 심상이 뒤섞이고,
삼재(三才)는 양의(兩儀)가 되고, 일원(一元)이 되더니 이내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혼돈이 되었다.
늙수레한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 것은 그때였다.
“삼화취정은 단순히 내공이 늘어나거나 감각이 예민해지는 경지가 아니네. 이는 자네의 무공관을 확립했다는 뜻. 이른바 종사의 자격을 갖춘 셈이지.”
“.......”
“물론 무공관을 확립했다고 끝이 아닐세. 자네는 이제 막 탑을 쌓기 시작한 게야. 다른 자들은 자네보다 더 크고 높은 탑을 쌓았지.”
일맥의 종사로서 이제 막 한 걸음을 내디뎠을 뿐.
어떤 의미에서는 출발선상에 선 것에 불과했다.
“살아남는다면 ‘성도전장’에 가보게나. 이 패를 가지고 내 이름을 대면 위탁한 걸 찾을 수 있을 터. 자네에게... 적잖은 도움이 될 걸세.”
무언가 쨍그랑 떨어지는 소리를 끝으로, 끊어질 듯 가느다란 호흡이 완전히 끊겼다.
“.......”
눈꺼풀을 들어올리자 붉은 안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몸을 돌린 곳엔 백발의 노인이 정갈하게 앉아 있었다.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옥패를 자신의 앞에 놓고 정자세로 가부좌를 튼 노인.
비록 생전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지만, 눈을 감은 노인의 입가엔 편안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자신이 할 일을 끝내고 삶을 마감한, 자신의 삶에 만족한 자만 지을 수 있는 후련한 표정.
“당신이 좋은 사람인지는 모르겠소.”
젊은 시절 구천호법으로서 수많은 사람을 죽인 자를 선인이라 부를 수는 없으리라.
“그렇지만 내게는 은인이지.”
바닥에서 올라온 혈목이 얽히고설키면서 노인이 누울 만한 공간을 마련했다. 안쪽에 망자를 안치하자 저 스스로 뚜껑을 닫는 붉은 목관.
“시신이 상하지 않도록 안전하게 지켜라.”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한 노인 앞에서 묵묵히 예를 갖춘 강엽이 몸을 돌렸다.
싸움을 끝내야 할 때였다.
* * *
“십년감수했구나.”
재생을 끝마친 신녀는 혈목에서 나왔다.
혈공독수로 인해 피를 보긴 했어도 삼화취정을 이룬 흡혈귀인 그녀에게는 큰 타격이 아니다.
단지 혈공독수의 기운을 몰아내느라 귀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
그것만 아니었다면 진작에 이 술법진을 빠져나갔을 텐데....
“대체 그놈은 누구란 말이냐.”
탄식처럼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생로를 여느라 수결을 맺지 않았다면 손톱을 깨물었을 것이다.
이틈에 어서 도망치지 않으면....
“...!”
불현듯 등줄기가 서늘해진 그녀는 허리를 꺾자 그 위로 조풍이 들이닥쳤다.
수결이 풀린 그녀가 노호성을 질렀다.
“어린 동족, 끝까지 방해하는구나!”
“누가 할 소릴.”
강엽이 코웃음을 쳤다.
“그리고 처음부터 거슬렸는데, 나를 왜 동족이라고 부르는 거냐? 똑같이 흡혈귀의 능력을 지녀서?”
“선문답을 싫어하진 않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구나. 싸우기 전에 주위부터 둘러보거....”
곤혹스럽게 말을 잇던 목소리가 뚝 끊기면서 고운 입술이 함지박 만하게 벌어졌다.
“그새 삼화취정에 올랐다고?”
“어떤 사람 덕분에.”
“그러고 보니 유이강이 없군. 어차피 가만 놔둬도 죽었겠지만... 그자의 피를 마신 게냐?”
“그래도 됐었겠지.”
아마 유이강의 피를 마셔도 삼화취정에 올랐으리라.
하지만 격체전력으로 받은 내공에서 강엽은 절세고수의 심상과 무공관을 느꼈다. 그것은 피만 마신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큰 영감으로 작용했다.
‘간만에 영성이 자극받았어.’
명도상인의 피를 마셨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흑룡교주의 망령을 죽이고 놈의 지식을 흡수했을 때 정도일까.
전륜구룡공과 흑무암쇄진을 비롯한 흑룡교의 비술들을 흡수하고 용환을 창안했을 때.
우우우우우우웅......!
잠에서 깨어난 아홉 마리의 혈룡.
용틀임을 시작한 혈룡들이 혈목을 감싸면서, 주변 수십 장의 공간을 완벽하게 장악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술법진이 무너질 일은 없을 거다. 당신이라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지.”
“설마 술법진의 축까지 넘겨받은 건가....”
강엽이 하는 짓만 보고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혜안.
필시 그녀 자신이 술법의 대가이기에, 강엽이 유이강에게 무엇을 받았는지 알아차린 것이겠지.
“본녀가 실수했구나. 무리를 하는 한이 있어도 그 자리에서 유이강을 해치워야 했거늘.”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 법이지.”
강엽이 걸음을 내딛자 신녀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잠시 주변을 둘러본 그녀는 술법진의 붕괴가 멈춘 것을 확인하고는 더는 망설이지 않았다.
“흠, 자신감이 과하구나. 가르침이 필요하겠어.”
쏴아아아아아...!
거대한 핏빛 피막의 날개를 등 뒤로 꺼내면서 차가운 눈빛으로 건방진 도전자를 응시했다.
-혈익천시공.
호신강기의 기파가 일진광풍을 일으켰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강엽 역시 호신강기를 꺼내들어 그에 대항했다. 그 형태를 본 신녀의 옥용에 짙은 의구심이 어렸다.
“이건...?”
강엽을 중심으로 사방에 퍼진 시뻘건 거미줄.
구궁팔괘의 이치에 따라 육합팔방을 아우르는 거대한 거미줄이 살아있는 심장처럼 펄떡거린다.
-혈라지망(血羅之網).
신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무슨 의도로 그렇게 만든 거냐?”
무릇 호신강기라면 주인을 지켜야 하는 법.
강엽의 호신강기는 빈틈투성이였다. 사방을 에워싸긴 하나 정작 강엽을 지키지는 않는 모양새.
‘설마 재생력을 믿고 뻗대는 건가?’
어린 동족이 자만심에 객기를 부리는구나.
내심 한심스럽게 중얼거리면서 격공을 발했다. 손짓을 하지 않고도 무수한 격공 소나기가 강엽을 둘러싸는 형태로 쏟아졌다.
그러나 하나도 닿지 않는다.
“엇?”
마치 흡자결처럼 격공의 기운을 쭈욱 빨아들이는 거미줄.
거미줄을 피해 펼쳤는데도 불구하고, 강엽을 노린 수십 줄기의 격공이 모조리 상쇄된다.
거미줄을 겹쳐 만든 발판 위에 올라선 강엽이 아연해하는 신녀를 오연하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제 격공은 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