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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06화 (206/450)
  • 36화. 신녀 (6)

    “교왕들이 그대를 만났으면 기뻐했을 것이다. 간만에 싸울 만한 자를 찾았다면서 말이야.”

    뭇 사내들의 넋을 빼놓을 절세미녀의 칭찬에도 유이강은 대답하지 못했다.

    호흡이 고르지 않다. 검을 쥔 손도 가늘게 떨렸다. 검파를 쥔 손아귀가 찢어져서 피가 흘러내렸다.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그가 끙 앓는 시늉을 했다.

    “괴물 같은 회복력이로고....”

    불괴강시, 아니, 정신을 되찾은 신녀는 난적이었다.

    술법은 비슷하나, 무공만 놓고 보면 유이강의 압승이었다.

    문제는 따로 있었다.

    ‘빌어먹을 재생력 같으니.’

    절세고수의 의념이 섞인 암경이 경혈을 억눌렀기에 처음보단 재생 속도가 더뎠지만, 신녀는 몸의 일부를 잃어도 회복할 수 있다.

    반면 유이강은 오른팔이 부러지고, 여기저기 심각한 부상을 채 피를 줄줄 게워내는 신세. 이미 그의 몸뚱이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만신창이였다.

    단전의 진기도 얼마 남지 않았다.

    “그대가 시간을 끌고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술법진의 공간을 통째로 무너뜨릴 셈이겠지. 스스로를 진법의 축으로 삼았으니 그대도 무사치 못할 텐데.”

    유이강은 대답하지 않았다.

    쉬아아아아악!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날아갔다.

    제 스스로 투로를 그리는 이기어검.

    왼팔을 잃고, 옆구리가 흉하게 파인 신녀는 피하는 대신 호신강기의 날개를 펼쳐 스스로를 감쌌다.

    “아아아아악......!”

    날개를 뚫고 심장을 찌른 이기어검.

    완전히 관통되지는 않았으나, 검날에 담긴 공력이 올올이 풀려나와 기혈을 증발시켰다.

    “커헉! 너, 너...!”

    “영혼까지 끌어모은 절초요.”

    부러진 손가락을 뻗은 유이강이 힘겹게 웃었다.

    억지로 단전을 쥐어짜는 바람에 기혈이 꼬였지만, 피를 울컥 토하면서도 손을 내리지 않았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작 죽였을 텐데.”

    씁쓸한 얼굴로 중얼거린다.

    가슴을 뚫고 심장까지 닿았으나, 이걸로 신녀가 죽지 않을 것을 직감한 것이다.

    “흐으으읍!”

    고통을 감내하며 검날을 뽑아내는 신녀의 모습.

    하나뿐인 손이 피투성이가 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검을 뽑아낸 그녀가 피를 웩 토했다.

    섬뜩한 핏빛 안광이 유이강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절대 곱게 죽이진 않겠다.”

    “쿨럭, 언제는 곱게 죽일 생각이었소?”

    “약속하마. 네놈의 몸뚱이를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고, 네 피로 축배를 들 것이다. 네놈의 부하들 역시 비참하게 죽여 황야에 버리고....”

    “마음대로, 해보시구려.”

    유이강은 검을 회수하지 않았다.

    ‘선천지기까지 불태우면 더 싸울 수 있겠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미 걷잡을 수 없이 커진 균열이 그와 신녀를 통째로 삼켜버리려고 하는 마당인데.

    얼마 남지 않은 진기로 간신히 장기와 경혈을 움직여서 목숨을 잇고 있을 뿐이었다.

    “하아, 이기려고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늘은 이 유이강을 낳고, 어찌하여 당신이란 괴물을 또 낳았는지... 정말 원망스럽소이다.”

    “웃기지 마라!”

    “농담을 모르는군.”

    해쓱한 안색으로 태연히 던지는 도발에 신녀의 눈알에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깊숙이 뚫린 가슴의 상처가 아물고, 곤죽이 된 왼팔이 떠올라 잘려진 단면에 붙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몸을 재생시킨 그녀는 점차 커지는 균열을 느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술법진이....”

    재생력이 있으니 쉽게 죽진 않겠지만, 괜히 폭주하는 주력에 휩쓸릴 이유는 없으리라.

    빠르게 이성을 되찾은 그녀가 손을 내리그었다.

    “네놈을 죽이지 못한 건 아쉬우나, 괜한 모험을 할 이유가 없구나. 본녀는 여길 나가야겠다.”

    “생로를... 쿨럭! 모르면서, 여길 나가겠다고?”

    “본녀를 뭘로 아는 것이냐.”

    신녀의 입가에 한 줄기 조소가 피어났다.

    “흑룡교의 흑야만상환영진(黑夜萬象幻影陣). 꽤 괜찮은 술법진이지. 하지만 요결을 알면 생로를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

    “말하지 않았느냐. 흑룡교가 망한 뒤에 무수한 유산이 본교로 흘러들어왔다고 말이다.”

    그렇기에 술법진이 무너진다는 걸 알면서도 강엽 일행을 쫓는 대신 유이강을 상대했던 것이다.

    “네놈이 본녀를 막은 게 아니라, 본녀가 네놈의 장단에 어울려준 것이니라.”

    결국 유이강 혼자서 개죽음을 당할 뿐.

    수싸움에서 밀렸다는 것을 깨달은 유이강의 표정이 썩어문드러지는 꼴을 즐겁게 감상한 신녀가 손가락을 내리긋자 작은 구멍이 열렸다.

    “이후로 다시 보는 일은 없겠지.”

    그렇게 몸을 내던지는 찰나, 돌연 그녀가 몸을 돌리며 양 손바닥을 앞으로 뻗었다.

    한순간에 날아온 빛살이 손바닥 사이에 잡혔다.

    “...검?”

    이가 빠지고 금이 간 낡은 철검.

    절세고수의 어검술을 상대했던 그녀로서는 하품이 나올 만큼 느린 투검(投劍)이었다.

    문제는 한계에 이른 철검이 경력을 버티지 못하고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는 것. 한순간 꽝 터진 검조각들이 그녀를 덮쳤다.

    “너는...!”

    흩날리는 검조각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영.

    발을 단단히 딛고 선 채 전사경 일권을 뻗는 강엽의 모습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 * *

    강렬한 일권이 작렬한다.

    콰아앙!

    주먹이 묵직한 충격을 선사한다.

    ‘막혔다.’

    어느새 작은 손바닥이 강엽의 주먹을 막고 있었다.

    진기가 융통무애하게 흐르는 절세고수의 출수는 몹시 빠르다. 의념이 일면 즉시 행동으로 이어진다. 다음 수를 어떻게 가져갈지 고민하지도 않았다.

    쿠우우웅......!

    서로의 몸이 맞닿은 지점에서 동심원처럼 퍼져나가는 막대한 충격파.

    서로를 밀어내려는 막대한 반탄지기가 충돌, 허공에 불꽃이 튀고 땅이 쩌저적 갈라졌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거늘, 먼저 찾아올 줄이야. 하지만 때가 좋지 않구나.”

    신녀의 입가에 곤란한 미소가 걸렸다. 술법진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그녀도 확신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일 각, 아니 반 각. 그보다 더 짧을지도 모르지.”

    술사인 유이강이 술법진을 무너뜨린 시점에서, 건초 더미에 불을 붙인 것마냥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녀의 완맥을 잡아당기면서 팔꿈치 일격으로 그녀의 안면을 찍어버렸다. 야만적으로 보일 만큼 난폭했지만, 상대는 평범한 여인이 아니라 흡혈귀였다.

    ‘지금이 절호의 기회다.’

    멈추지 않고 연격을 쏟아부었다.

    아직 완전히 붙지 못한 왼팔의 어깻죽지를 내려치고, 무릎을 날렸다.

    지근거리에서 이루어지는 초근접 박투.

    최소한의 동작으로 연거푸 공세를 날렸지만, 실제로 몸에 닿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소용없는 짓이라니까.”

    불의의 기습을 받았음에도 신녀는 매우 평온한 목소리였다. 화를 내는 기색도 없었다.

    “본녀에 대한 무례는 넘어가주겠노라. 이렇듯 본녀의 앞에 찾아왔으니 말이다.”

    정신없이 뻗던 주먹이 턱 잡혔다.

    “하지만 더 이상은 안 돼.”

    하나 신녀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빠르게 사라졌다.

    붉고 푸른 광채로 물든 강엽의 눈동자.

    정마안을 모르는 그녀지만, 본능적으로 강엽이 꿍꿍이를 품었다는 것을 알고 불길함을 느꼈다.

    그 정체를 깨닫기도 전에 날카로운 고통이 뇌리를 헤집었다.

    콰앙!

    “컥.”

    강엽의 좌장이 관자놀이를 때린 것이다.

    “무슨...!”

    심지어 보지도 못했다.

    강엽의 몸짓 하나하나를 손금 보듯 들여다보고 있던 그녀가 그 사실에 경악하는 찰나.

    이번엔 옆구리에 둔중한 타격이 박혔다.

    터엉!

    그리고 어깨 견정혈 부위에 손날이 떨어졌다.

    촤아아악!

    날카로운 금나수가 살점을 뜯는다.

    하마터면 늑골이 뜯어나갈 뻔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오싹해진 그녀는 호신강기로 스스로를 감쌌다.

    투아아앙-!

    한 박자 늦게 들어온 일권은 날개를 뚫지 못했다. 대신 날개를 강제로 뜯어내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무식한 짓거리에 신녀는 어이가 없어졌다.

    ‘이게 무슨 진짜 날개도 아니고....’

    호신강기도 엄연한 강기. 방어를 위해 단단히 굳혔을 뿐, 함부로 잡아도 될 게 아니었다.

    방패로 사람 못 패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날카롭게 벼려낸 날개의 피막을 휘둘러 강엽의 손바닥을 베어내려던 때였다.

    갑자기 날개를 잡은 힘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대신 날개가 들린 찰나를 노리고 일 자로 모은 관수가 안면을 향해 짓쳐들었다.

    절세고수의 감이 경고했다.

    ‘이건 맞으면 위험하다.’

    고개를 젖히려던 그녀는 다음 순간 묘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분명 강엽의 관수는 미간을 노리는데, 또다른 관수가 가슴골을 향해서 날아드는 게 아닌가?

    “환술...!”

    다급히 강엽의 손을 쳐낸 그녀가 무릎도 굽히지 않고 밀려났다.

    절세고수답지 않게 혼란에 물든 낯빛이었다.

    “환술로 본녀의 감각을 비틀었구나. 그래서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거야!”

    멀리 있던 강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대답이 나왔다.

    투앙!

    기어이 옆구리에 박힌 일권.

    암신으로 어둠 속에 녹아들었던 강엽이 기어이 그녀를 따라잡아 다시 한번 주먹을 날린 것이다.

    다만 충격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녀의 입장에선 툭 친 수준에 가까울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번엔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웨에엑!”

    이제까지 여유만만했던 신녀가 피를 토한 것이다.

    끝장을 보려고 재차 달려든 강엽은 그녀가 내지른 일장에 맞아 땅을 나뒹굴었다.

    “큭...!”

    “이건... 혈독인가? 혈독과 진기를 합쳤군!”

    혈교의 주요인사인 만큼 그녀는 모산파의 술법에 대해서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과거 모산혈조와 교류하면서 모산파에 어떤 술법이 있는지 들었기 때문.

    “...이제야 겨우 닿았군.”

    혈공독수에 맞았다고 삼화취정이 깨지진 않았다. 오히려 막대한 진기로 혈공독수를 몰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승기를 가져왔다.

    ‘혈공독수를 쓸 수 있는 횟수는 끽해야 세 번.’

    팔룡환에 이르렀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쓸 때마다 부담감을 느꼈다. 심지어 남은 세 번을 모두 때려박아야 이길까 말까였다.

    쩌어어어억......!

    하늘을 새카맣게 덮은 술법진의 균열.

    혈공독수를 맞고 비틀거리는 신녀 역시 그걸 느꼈는지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생로를 만드는 것도 어려울 거다.”

    “...그래, 몸을 간수하는 것도 벅차구나. 하나 술법진이 무너지면 그대도 죽는다. 흡혈귀라서 죽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게냐?”

    “....”

    강엽이 대답하지 않자 그녀는 헛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짚었다.

    “생로를 만드는 건 어려워도...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지면을 뚫고 올라온 무수한 혈목 다발이 그녀를 알처럼 감싸고 돌았다. 세상 모든 풍파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려는 것처럼 말이다.

    강엽이 튀어나가려고 했을 때.

    “그만두게.”

    별안간 끼어든 목소리가 섣부른 행동을 제지시켰다.

    “그녀를 죽이기 전에 술법진이 깨질 게야. 지금은 살 길을 찾아야지, 동귀어진을 노릴 때가 아닐세.”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킨 유이강이 퍽 복잡한 표정으로 강엽을 쳐다봤다.

    “쯧쯧, 기껏 살 길을 열어주었는데....”

    눈빛에 힐난의 기색이 담겨 있었지만, 강엽은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대꾸했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저 여자는 진작에 술법진을 나갔을 거다. 그리고 우리 일행을 덮쳤겠지.”

    원래는 유이강과 협력해서 신녀를 쓰러트리려고 했지만 그가 왔을 땐 다 죽어가고 있었다.

    심지어 지금도 좋지 않았다. 또렷한 목소리와 편안한 안색은 일시적일 뿐이었다.

    ‘회광반조.’

    태양이 지기 전에 가장 밝게 빛나듯, 유이강 역시 숨이 넘어가기 전에 생명의 불씨를 태우는 것에 불과했다.

    큰 상처만 다섯 군데가 넘는다. 특히 복부에 입은 자상과 짓이겨진 내장이 치명타였다. 절세의 내공 화후로 통증을 누르고 있으나 이미 귀천이 예정된 운명.

    “이제 어쩔 텐가. 술법진이 무너지면 우리 모두 끝날 텐데.”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음?”

    “술법진의 축을 나한테 넘겨. 나를 중심으로 술법진을 다시 짜면 잠깐은 시간을 벌 수 있을 거다. 당신과 달리 나는 멀쩡하니까.”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는지 유이강이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건 술법진에 정통해야... 아니, 설령 자네가 술법을 잘 알고 있어도 흑룡교의 술법은 강호의 술법과 궤를 달리하네. 넘겨받지 못할 텐데.”

    “흑룡교의 술법도 안다.”

    “....”

    “흑룡교주의 망령을 죽이고 지식을 넘겨받았거든.”

    “....”

    유이강이 눈을 껌뻑였다.

    그러다가 무척이나 의심스럽다는 말투로 물었다.

    “자네 혹시... 허언증을 앓나?”

    강엽의 얼굴이 처참하게 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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