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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05화 (205/450)
  • 36화. 신녀 (5)

    쌔애애애애앵!

    허공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궤적.

    절묘한 각도로 파고든 추명반의 톱니가 강엽을 베어버렸다.

    “이형환위인가?”

    산산이 흩어지는 허상에 심윤의 심기가 불편해진 순간, 이번엔 그의 배후에서 강엽이 나타났다.

    검이 심윤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지만, 심윤은 신기루처럼 사라지며 먼 곳에서 나타났다.

    “하하! 허상이 자네만의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헉!”

    잘난 척 조소하던 심윤의 눈이 화등잔 만해졌다.

    먼 곳에 있는 강엽이 면전에서 검을 내려치고 있었던 것이다.

    “알고 있다.”

    신공의 호흡을 담은 검격이었다.

    과장 한마디 보태지 않고, 붉은 벼락을 머금은 검격이 일도양단의 기세로 떨어졌다.

    자성검법 사초식.

    -뇌둔.

    꽈아아아아아아......!

    창백한 뇌광이 뜨겁게 타올랐다.

    어마어마한 경파에 휘말린 대나무들이 우수수 쓰러지면서 잎사귀와 돌조각을 마구 뿌려댔다.

    ‘이걸로 죽진 않겠지.’

    모산파 술법의 적통 계승자.

    쉬운 인물이 아니었다. 설령 의표를 찔렀어도 자기 목숨을 보전할 대비책 정도는 강구했을 터.

    뭣보다 손맛이 개운치 않았다.

    “제길, 죽을 뻔했군!”

    자욱한 먼지 사이로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가 들린 순간, 칼날과 추명반이 얽히며 불티를 튀겼다.

    -휘리리릭!

    동시에 찢어지는 휘파람이 고막을 파고들었다.

    ‘망혼소.’

    -휘이이이이익!

    “크흡!?”

    똑같이 망혼소로 맞받아치자 심윤이 답답한 신음을 흘렸다. 놀란 표정도 수습하지 못했다.

    어떻게 망혼소를 쓸 줄 아느냐는 질문이 나오려는 찰나,

    촤촤촤촤촤촤촥!

    강엽이 바로 가져간 출수가 입을 놀릴 틈새도 없이 심윤의 주변 여기저기를 속사처럼 꿰뚫었다.

    앞서보다 더한 경악성이 폐부에서 터져나왔다.

    “바보 같은! 술법을 완성하기도 전에 파훼하다니...!”

    그를 둘러싼 주력의 흐름을 읽고, 연결 고리를 정확히 찔러서 흐름을 끊어버린 것이다.

    무인으로 치면 무공 초식을 펼치기도 전에 파훼당한 것과 다름없다.

    차라리 술법으로 그런 짓을 했다면 모르겠는데, 검으로 했다는 게 황당할 뿐이었다.

    빛살처럼 치달은 검광 속에서 심윤의 몸 여기저기에 달렸던 호신부(護身符)가 조각조각 떨어졌다. 상당한 공력이 담긴 절초도 한 번쯤은 막을 수 있는 비장의 패.

    호신부가 있기에 강엽 같은 고수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던 것이다.

    ‘한 번 쓰면 더 이상 못 쓰긴 해도, 그래서 수십 장이나 챙겨왔던 건데...!’

    원래는 명도상인이 수틀려서 그를 죽이려 들거나, 불괴강시가 폭주하는 사태를 대비한 것.

    한데 호신부의 술법들이 강엽의 칼질 한 번에 어이없을만치 쉽게 파훼당하는 게 아닌가?

    “괴물 같은 놈!”

    치를 떤 심윤이 급하게 부적을 꺼내더니 수결을 맺지도 않고 급급여율령을 외쳤다.

    그러자 부적이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며 불길한 주력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나왔다.

    “어디 이 살주(殺呪)까지 없애봐라!”

    이름 그대로 표적을 죽이기 위한 저주. 강엽 자신도 아직은 온전히 쓸 자신이 없는 대술법이었다.

    그런 대술법을 수인도 맺지 않고 부적만으로 펼치는 솜씨는 과연 모산혈조의 대제자다웠지만....

    쫘아아아악!

    “...!”

    강엽은 정안으로 주력의 흐름을 면밀히 관찰하여 물극필반의 이치로 다스렸다.

    비장의 술법이 태극반에 빨려들어가는 광경에 심윤의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고, 심맥이 파열되는 충격에 피를 한 바가지나 토해냈다.

    “우웨웨에에엑!”

    “일이 귀찮아졌군.”

    본래 상대의 신체 일부를 제물로 바치고, 복잡한 진언을 외우면서 천천히 상대를 말려죽이는 것이 살주의 요결.

    그러한 과정을 생략한 것은 놀랍지만, 그럴수록 술법을 실패했을 때의 대가는 무시무시한 법이었다.

    “곤란하게 됐어. 가급적이면 널 살려둬서 모산혈조의 꿍꿍이를 알아낼 작정이었는데.”

    “크흐흐흐.”

    본인이 쏟은 피웅덩이 위에서 무릎 꿇은 심윤이 낄낄거렸다.

    안구를 비롯해 얼굴 전체에 푸른 핏줄이 돋아 흉물스럽기 그지없는 몰골인데도 그 얼굴엔 득의양양한 기색이 역력했다.

    “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해. 끄윽!”

    살주의 반동을 받은 이상 살아남지 못하는데도, 구태여 마지막 남은 힘을 모아 혀를 깨물었다.

    핏물을 토해내면서 웃는 꼬락서니에 강엽이 어깨를 으쓱였다.

    “고문할 생각이라면 당연히 그렇겠지.”

    살주가 실패한 이상 심윤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 죽어갈 뿐이다. 그러니 본인 딴에는 고통에서 벗어나고, 사부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결을 택한 것이리라.

    “근데 네 입으로 들을 생각은 없었다.”

    “커억!”

    우악스러운 힘에 하관이 잡힌 심윤이 발버둥을 쳤지만, 내공 없이 강철조차 우그러뜨리는 흡혈귀의 악력을 벗어나기는 요원한 일.

    핏발이 선 눈을 가만히 내려다본 강엽의 좌안에 붉은 안광이 맺히기 시작했다.

    “흐으으읍!”

    신경을 타고 뇌를 침범하는 환술을 견디지 못한 심윤이 그대로 눈을 까뒤집었다.

    강엽은 정마안을 각성한 순간부터, 심윤을 생포하면 환술을 이용해 기억을 뜯어낼 작정이었던 것이다.

    본래는 암시장을 빠져나간 뒤에 여유롭게 알아볼 생각이었지만....

    “모든 계획은 시작 일 각 만에 쓰레기가 된다더니.”

    심윤의 명줄이 끊기기 전에 기억을 빼내야 한다.

    새삼 유이강이 남긴 말을 실감하며 마안을 끌어올리는 순간.

    강엽의 의식이 심윤의 뇌리에 침투했다.

    * * *

    칠흑처럼 어둑한 공간이었다.

    ‘여기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는데, 문득 수십 명이 웅얼거리는 소리가 귓전에 꽂혔다.

    본능적으로 그게 술사들의 진언임을 깨달은 강엽은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나아갔다.

    심윤과 모산파의 제자들이 있는 곳.

    그들은 다른 술사들이 진언을 외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번이 몇 번째 시도인가?”

    “일흔 번쯤 될 겁니다, 대사형.”

    “정확히는 일흔다섯 번째입니다, 이사형.”

    모산파의 제자들이라고 모두가 모산혈조에게 사사한 것은 아니다.

    심윤을 포함한 극소수의 직전제자들만 그 혜택을 누리고 있었으며, 다른 술사들은 그들에게 가르침을 받는 입장이었다.

    “일흔다섯 번이라... 십팔호와 오십오호가 가장 오래 버텼지. 이번엔 얼마나 버틸는지.”

    심윤의 중얼거림이 끝나기도 전에 낮게 이어졌던 술사들의 진언이 갑자기 뚝 끊겼다.

    자연히 대화를 멈춘 제자들도 희미한 기대감과 우려가 담긴 얼굴로 시선을 내렸다.

    어두컴컴한 공간 최심부의 중앙에 있는 석관.

    제자들을 따라서 석관을 발견한 강엽은 불괴강시를 떠올렸지만, 석관의 뚜껑이 열리면서 나온 것은 아름다운 적발의 여인이 아니었다.

    갓 약관이 넘은 듯한 젊은 남자.

    핏물이 잠긴 석관 안에 누워 있던 사내가 건장한 몸을 일으키자 긴 흑발이 허리까지 내려왔다.

    재빨리 난간 아래로 내려온 제자들이 한쪽 무릎을 꿇고 극상의 예를 갖추었다.

    “사부님!”

    ‘뭐?’

    제자들이 사부라고 부른 젊은 사내는 말없이 주먹을 쥐었다 펴고, 사지의 관절을 움직여봤다.

    심지어 사타구니까지 살피며 신체가 정상적으로 움직이는지 꼼꼼이 확인한다.

    심윤이 마른침을 삼키며 물었다.

    “새로운 몸은 어떠십니까?”

    “나쁘지는 않구나. 지금까지 갈아탔던 몸 중에선 가장 잘 맞는 것 같다.”

    “역시 핏줄에 가장 큰 영향을 받는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일절 상관없는 사람의 몸으로 갈아타봤자 얼마 못 가 붕괴할 뿐. 영혼백육이 일치하지 않으니... 그나마 핏줄은 조금 낫구나. 강호를 질타하던 시절에 사생아들을 만들어둔 게 이리 도움이 될 줄이야....”

    “사부님의 손주뻘인 자의 육신입니다.”

    “알고 있다. 이전엔 아무것도 아닌 놈팡이였지. 술 마시고 계집질이나 하던 한량이었다. 내 핏줄이지만 참으로 무의미한 인생이었어.”

    “그래도 지금은 의미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이혼대법(移魂大法)이 성공해야 의미가 있는 법. 결국 이 몸도 거부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만약 그 몸마저 사부님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되도록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게 좋겠지. 불괴강시의 건은 어찌 되었느냐?”

    “전에 보고드렸던 대로입니다.”

    “결국 실패인가....”

    모산혈조의 얼굴에 아쉬워하는 기색이 스쳐지나가자 심윤이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너무 심려치 마십시오. 비록 그녀가 실패작이라고 하나, 그동안 알아낸 것을 토대로 ‘진혈강림대법(眞血降臨大法)’을 펼칠 수 있습니다. 맹월림주가 점창파를 본산에 가둬놓고 주변 부족들을 병탄하고 있으니... 제물은 충분할 것입니다.”

    “그 말은 제법 기껍구나.”

    모산혈조가 껄껄 웃자 하얀 송곳니가 언뜻 드러났다.

    “신녀는 결국 흡혈귀가 되지 못하겠지. 하지만 나는 반드시 흡혈귀가 될 것이다.”

    석관에 잠긴 핏물을 모공으로 받아들이며 모산혈조가 섬뜩한 핏빛 안광을 흩뿌렸다.

    “세상 어딘가에 진조의 후계자가 있다. 놈은 나를 완성할 마지막 조각. 너희들은 각 교성의 밑에 들어가서 천하를 두루 살피도록. 밤에만 움직이는 데다 피를 마셔야 살 수 있는 놈이니 찾을 수 있을 거다.”

    * * *

    “이혼대법이라....”

    환술을 펼친 시간은 극히 짧았으나, 심윤의 정신 속에서 보고 들은 것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가장 큰 수확은 모산혈조를 찾아낼 단서를 손에 쥐었다는 것.

    ‘맹월림.’

    놈들의 말대로라면 맹월림이 주변 부족들을 복속한 것은 단순히 운남 무림을 병탄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이혼대법으로 타인의 몸을 빼앗고, 진혈강림대법을 펼쳐 흡혈귀가 되려고 했던 건가....’

    어찌 보면 지난날 흑룡교주가 백서희의 몸을 강탈하고자 했던 시도와 비슷했다.

    차이가 있다면 강엽을 흡혈귀로 만든 진혈강림대법을 끼얹어 완전한 흡혈귀가 되려고 한 것이고.

    비록 목숨을 연명하고자 하는 집착은 추하기 그지없지만, 발상만은 인정해줄 만했다.

    아마 모산혈조가 그동안 구축한 대법으로 불괴강시가 탄생했을 터.

    모산혈조는 불괴강시를 만들면서 보완한 대법으로 스스로 흡혈귀가 되려는 것이겠지.

    마음 같아선 운남에 가서 모산혈조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지만, 당장은 도망치는 게 급선무였다.

    -쩌저저저저적......!

    하늘이 갈라지고 있었다.

    평범한 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는, 오직 정안으로만 관찰할 수 있는 큼지막한 균열.

    그것은 두 절세고수가 충돌한 지점에서 시작되어 술법진 외곽까지 거미줄처럼 퍼지고 있었다.

    ‘술법진을 파괴하려는 건가?’

    이런 거대한 술법진이 무너지면 안에 갇힌 자들은 빠져나가지 못한다. 폭주한 주력에 휩쓸려서 뼈도 못 추릴 게 뻔했다.

    심윤의 시체를 던져버린 강엽은 저 멀리서 혈라분의 약쟁이들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일행을 향해 몸을 날리면서 철검에 공력을 쏟아부었다.

    워낙 강맹한 초식인 만큼 철검이 망가지겠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계제가 아니었다.

    자성검법 오초식.

    -뇌망(雷網).

    파파파파파파팟!

    수십 개의 그림자로 분절한 검격이 적들의 몸을 관통하고, 팔다리를 날려버린다.

    그리고....

    꽈지지지직...!

    시뻘건 뇌광이 검로를 따라 내달리며 격자(格子)를 이루며, 그 안에 갇힌 약쟁이들을 그물질했다.

    찰나의 뇌광 검격에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피를 뿌리며 죽거나 까맣게 타죽는 약쟁이들의 몰골.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무시무시한 검격을 쏟아붓는 강엽의 신위에 일행이 흠칫 굳어지는 찰나, 강엽이 한 박자 빠르게 외쳤다.

    “시간 없어! 빠르게 돌파한다!”

    “뭐?”

    “술법진이 무너질 거야!”

    강엽과 달리 아무 이상도 느끼지 못한 일행은 퍽 당황했지만, 강엽이 괜한 말을 할 리 없다는 걸 알기에 이를 악물고 포위망을 돌파했다.

    가급적 살수를 지양하던 청수와 소창후도 중독자들의 급소를 노리며 살계를 열 지경.

    그때 당묘정의 결연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모두 피독주를 꺼내세요-!”

    가죽으로 만든 수투를 낀 당묘정이 혁대의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허공 높이 던졌다.

    피독주를 입에 문 일행은 수십 마리의 작은 나비들이 날갯짓을 하는 광경을 보고 멍해졌다.

    마치 꽃가루를 뿌리듯 날아가는 나비의 모습.

    ‘독접!’

    당묘정이 장력을 내지르자 수십 마리의 나비들이 일행의 앞길을 막은 약쟁이들의 몸에 들러붙었다.

    약쟁이들이 나비들이 뿌린 독가루를 뒤집어쓴 모습에 하후진이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이보쇼,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좀 기다려보세요!”

    -크아아아아악!

    과연 그녀의 말대로 열을 셀 시간이 지나자 약쟁이들이 괴로운 듯 바닥을 뒹굴면서 괴성을 질렀다. 일부는 눈이 돌아가고 입에 게거품을 문 채 실신하기까지.

    “뭐야? 이런 게 있으면 진작에 쓰지!”

    “딱 한 번 쓸 양밖에 없어요. 효과도 길지 않고요!”

    어쨌든 당묘정의 활약 덕분에 앞길이 뻥 뚫렸지만, 아직 좌우엔 약쟁이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동료들이 쓰러진 것을 봤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드는 자들 중엔 무림 고수도 있어 일행도 무시할 수가 없었다.

    “키히잇! 여자, 여자다! 여자를 내놔... 카학!”

    투앙!

    일행을 덮친 고수가 작살 맞은 물고기처럼 파르르 떨었다.

    철푸덕 엎어진 그의 뒤로 강엽이 나오며 사방에서 몰려드는 고수들을 향해 그물을 뿌렸다.

    간합을 초월해서 쏟아진 격공의 소나기가 심장과 머리를 쳐서 단번에 침묵시키고,

    촤아아아아악!

    허공을 질주하는 시뻘건 뇌광이 운 좋게 격공을 피한 자들의 몸통을 인정사정없이 갈라버린다.

    눈 깜짝할 새에 십수 명의 절정고수들을 쓰러트린 강엽이 다시 한번 일갈했다.

    “삼십 장 남았다. 달려!”

    보신경의 고수에게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 그 한마디에 정신을 차린 일행은 내공 호흡에 단내가 풍기는 것도 개의치 않고 달렸다.

    그렇게 달리고 죽이면서 길을 열어젖힌 끝에.

    마침내 기암괴석 사이에 난 자그마한 출구가 일행의 앞에 조금씩 모습을 드러났다.

    “이런 썩을! 뭔 놈의 출구가 저리 작단 말인가! 저건 숫제 개구멍이 아닌가!”

    “기어서 가면 되잖습니까!”

    일행 중 가장 장대한 체격을 지닌 야차마곤이 구시렁거리고, 소창후가 핀잔을 준다. 그러나 두 사람 모두 볼멘소리를 내뱉으면서도 발은 멈추지 않았다.

    “나 먼저 들어간다!”

    선두의 하후진이 불길을 뿜으며 달려갔다. 약쟁이들을 열양지기로 살라버리고 길을 열었다.

    하후진이 먼저 들어가고, 뒤를 이어 소창후와 야차마곤, 조영옥이 들어갔다. 풍도마장을 호종하는 태화문도들이 그 뒤를 따랐다.

    청수의 뒤를 이어 구멍으로 들어가려고 한 백서희가 무심코 고개를 돌렸을 때.

    터엉!

    “너...!”

    결코 아프지 않은, 그러나 항거할 수 없는 장력이 그녀의 등을 밀어버렸다.

    경악한 그녀의 눈에 장심을 내민 강엽과, 그 뒤에서 맹렬하게 쫓아오는 명도상인이 보였다.

    “강엽 이 멍청아! 안 돼!”

    “먼저 가라.”

    손을 뻗었지만 잡히는 건 없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구멍을 통과한 백서희를 향해 흐릿하게 웃은 강엽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때쯤엔 냉막한 기운만 감돌았다.

    “당신도 참 끈질기군. 질리지도 않나?”

    “네놈...!”

    강시가 됐어도 여전히 상당한 고수인 명도상인이다. 정안은 없으나 술법진의 공간이 무너지고 있는 것 정도는 알아차렸다.

    “시간 없으니 빨리 끝내자고.”

    “...놈, 처음부터 나갈 생각이 없던 것이냐.”

    “유이강이 술법진을 무너뜨렸지만, 불괴강시가 죽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술법진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

    바깥에 있는 당우경과 협력한다고 그녀를 쓰러트릴 수 있다는 보장도 없는 마당이었다.

    그러니 무조건 술법진 안에서 끝낸다.

    화아아아아아악!

    여덟 고리의 용환이 고속으로 회전, 하단전과 공명하면서 일대의 기운을 장악한다.

    강엽의 배후에 신기루처럼 어린 세 장의 꽃잎을 발견한 명도상인의 눈이 쥐방울처럼 커졌다.

    “너...! 삼화취정을...!”

    “슬슬 감을 잡았거든.”

    일전에 소마동이 말했듯, 중단전을 완성한다고 삼화취정에 오르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초월적인 감각을 타고난 이들은, 때론 거쳐야 할 과정을 당연하다는 듯 생략해버린다.

    이미 초절정의 기예를 다루는 강엽에게 있어 삼화취정은 결코 닿을 수 없는 신외지물이 아닌 바.

    진조의 영성이 깃든 상단전과 팔룡환의 중단전, 이 갑자의 공력이 담긴 하단전이 막힘없이 소통한다.

    “이제 딱 한 걸음 남았다.”

    “큭......!”

    삼화취정을 목전에 둔 자와 삼화취정이 깨진 자.

    두 사람이 함께 출수했고....

    콰직!

    죽지 못해 사는 강시의 심장을 뽑아낸 흡혈귀는, 시커멓게 굳은 심장을 그대로 짓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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