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204화 (204/450)

36화. 신녀 (4)

유이강이 전개한 흑무암쇄진은 단순히 검은 안개만 부르지 않았다.

쿠르르르릉...! 콰카캉!

그 안에서 호풍환우라도 몰아치는지 벼락이 번뜩이고 우렛소리가 끊이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바깥에서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정도.

“얼추 시간은 벌었군.”

유이강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벌이 이상은 되지 않겠지만, 자네들을 바깥으로 내보낼 정도는 되겠지.”

경계의 눈길로 유이강을 노려보던 일행이 그 말에 흠칫했다.

백서희가 인상을 찌푸렸다.

“우릴 내보내주겠다고?”

“그렇다네.”

“그럼 왜 술법진에 가둔 건데?”

상대가 구천호법이라고 하나 존대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는지 결례를 서슴지 않는다.

유이강의 주름진 입가에 쓴웃음이 번졌다.

“아, 사실 자네들을 이용하기 위해서였네.”

“쓰레기 같은 말을 참 당당하게 지껄이네.”

“흠, 난 자네들도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특히 저쪽에 있는 청년은 말이지.”

그러면서 강엽을 가리키자 일행이 그와 유이강을 번갈아 바라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강엽이 내뱉듯 말했다.

“우릴 이용해서 혈귀들을 소탕하고, 이후엔 인질로 잡아 당문과 협상하려고 했겠지.”

“뭐?”

“일련의 과정을 보면 명확해.”

흑룡교도들은 술법진에 휘말리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명도상인과 불괴강시,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강엽을 어둠뿐인 공간에 가둬버렸다.

“아마 몇 가지 변수만 일어나지 않았어도 나와 명도상인, 불괴강시를 따로 상대했을 거다.”

유이강의 입장에선 혈교의 최고수 두 명과 정체를 알 수 없는 강엽이 가장 위협적이었다.

“뭐, 나 같은 경우엔 본인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태화문의 이공녀로 하여금 나를 상대하게 하려고 말이야.”

그리고 다 죽어가는 풍도마장을 포함한 일행이 한 곳에 모여서 혈교도들을 상대하게끔 했다.

술법진을 만든 장본인이 안배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

조영옥이 물었다.

“...강 무사의 말이 사실인가요?”

“그렇소.”

의외로 속 시원히 인정하는 언행.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공녀와 풍도마장을 칼로 쓸 생각이었소. 풍도마장이 저런 꼴이 될 줄은 몰랐지만, 어쨌든 갑자기 나타난 정파인들이 쓸모는 있다고 생각했지.”

“차도살인지계...!”

“병법의 기본이지. 공녀도 손자병법을 마르고 닳토록 읽었다면 알 거라 생각하오만.”

물론 조영옥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짧은 시간에 이만한 계책을 짜내고 실행에 옮긴 결단력에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알다시피 보기 좋게 실패했지. 모든 계책은 시작 일 각 만에 쓰레기가 되는 법이라지만, 이쯤 되면 좀 너무하다 싶더구려.”

한 사람은 우연히 함정을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설마 셋 다 나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유이강이 한숨을 내쉬자 일행은 그의 귀계에 간담이 서늘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계책을 알아낸 강엽의 통찰력과 힘으로 격파한 불괴강시의 능력에 소름이 돋았다.

강엽이 물었다.

“이제 와서 계획을 바꾼 이유는?”

“자네가 만만치 않아서.”

어검술의 경지에 오른 유이강도 강엽을 제압하는 게 쉽지 않음을 인정했다.

“태화문의 공녀와 협력했다고 하나, 그녀가 한 것은 시간을 조금 번 게 전부였지. 기습도 했고 운도 따랐지만, 자네 혼자서 서태진을 잡은 것과 다름없어. 자네는 능히 교성과 대적할 만한 고수일세.”

“칭찬으로 알아야 하나?”

“하하, 내 딴에는 자네를 높이 평가한 건데... 자네는 별로 칭찬으로 여기지 않나 보군.”

“우리와 협력해서 불괴강시를 제압할 생각은 없나?”

“아까 자네들끼리 회의했던 그것 말이군. 유감스럽지만 그 제안은 거절하겠네.”

“이유는?”

그 말에 유이강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강엽의 귓가에 전음이 날아왔다.

[흑룡교와 연을 끊었다 하나, 옛 주군의 혈손이 죽는 꼴은 보고 싶지 않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엽의 말문이 막히자 유이강이 짓궂은 미소를 흘렸다.

[그래, 저 여인이 교주의 핏줄임을 알고 있네. 보자마자 알 수밖에 없었지.]

[...어떻게 알았지?]

혹시 구천호법은 교주의 핏줄을 알아보는 능력이라도 지닌 걸까?

하지만 유이강의 대답은 예상을 벗어났다.

[닮았거든.]

[뭐?]

[흑룡교에도 신녀가 있었다네. 교주의 부인이었지. 너무 닮아서 그녀가 다시 살아돌아온 줄 알았지 뭔가.]

[....]

[혹시나 해서 찔러본 건데 맞았군. 살수 기예를 익히고 있던데... 흑접 출신인가?]

[모르는 게 없군.]

[흑접주가 흑룡교주의 핏줄이었으니까. 흑룡교 재건엔 관심이 없어도 알고 있었다네.]

어쩌면 미련이었을 것이다.

과거의 연을 무자르듯 쉽게 잘라버릴 수는 없었으니까.

상리를 초월한 절세고수라고 해도, 그 역시 과거의 미혹을 떨쳐내지 못한 것은 뭇 범부들과 다르지 않았다.

[흑접의 멸문 소식을 들었을 땐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했었거늘... 역시 사람의 마음이라는 건 그렇게 간단하지 않군. 그녀를 지켜주게. 그게 자네들을 고이 보내주고, 자네 비밀을 지켜주는 이유야.]

역시 술법진에서 일어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나.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부탁하지 않아도 내 목숨처럼 지킬 거다.]

[후후, 길은 저쪽에 있네.]

자세히 알려주지 않아도 기감으로 찾을 수 있었다.

석림 복잡한 곳에 이 술법진을 나갈 수 있는 통로가 열렸다는 것을.

[우린 그렇다 치고 당신은 어쩔 거지?]

[아마 지난한 싸움을 해야 하겠지. 서태진이야 자네가 손을 썼으니 문제 없지만....]

흡혈귀의 능력을 지닌 데다 본신의 무공도 삼화취정에 오른 불괴강시는 교왕급의 초강자.

비록 유이강이 절세고수의 반열에 들었다 하나, 앞선 싸움에서 내상을 입은 몸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약속 하나만 해주게. 내 부하들을 그냥 놔주겠다고. 이 싸움이 끝나면 새외로 가겠다고 맹세하지. 다신 중원에 돌아오지 않을 걸세.]

[...활수명의에게 말해보지.]

[그는 온화한 성격이니 설득할 수 있을 걸세.]

물론 당우경도 가문의 입장이 있는 만큼 설득될지는 미지수였지만, 그건 강엽이 하기 나름이리라.

‘살아돌아가기만 하면 결과는 챙기겠군.’

물론 결과는 같아도 과정은 조금 다를 것이다. 당초 유이강이 세운 계획은 일행을 인질로 잡고 당우경과 협상하는 것이었을 테니까.

차이가 있다면 인정에 호소한다는 것이겠지만, 모든 게 뜻대로 풀린다면 어쨌든 결과는 같다.

미련이니 뭐니 들먹이긴 했지만, 어쨌든 유이강도 나름 살기 위한 구멍을 만든 것이다.

‘설령 힘으로 우리를 제압한다 해도 그때쯤이면 불괴강시도 흑무암쇄진에서 풀려나왔겠지. 현 상황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다.’

물론 본인이 말한대로 백서희가 흑룡교의 신녀와 빼닮았다는 이유도 있을 것이다.

백서희가 흑룡교주의 핏줄임을 알아본 걸 봐선 아예 새빨간 거짓말은 아닐 테지.

“...가자.”

“어? 이대로 간다고?”

백서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눈을 껌뻑였지만, 강엽의 눈빛을 본 순간 뭔가 직감했는지 입을 꾹 다물고 순순히 뒤를 따라왔다.

“출구가 저기 있다더군. 여기서 멀지 않아.”

그 말에 다른 일행도 두 사람이 밀담을 나눴음을 깨달았다. 입을 다문 채 상대를 노려보는 시간이 제법 길었으니 전음을 나눴음을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전 찬성이에요.”

풍도마장의 용태가 걱정되는 조영옥은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남은 태화문도들로 하여금 풍도마장을 업게 하고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좀 찝찝한데....”

하후진도 뒷머리를 긁적이고는 따라가려는데, 유이강이 뒤에서 그를 불렀다.

[자네 사부가 암시장에 왔었네.]

하후진을 처음 보지만, 푸르게 타오르는 열양지기만 봐도 누구한테 사사했는지 알 만했다.

하후진의 걸음이 우뚝 멈춰 섰다.

“지금, 뭐라고...?”

얼굴에 어리는 은은한 경악.

사부인 염왕이 바로 지척에 있었다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짓자 유이강이 끌끌 웃었다.

“역시 몰랐나. 잠시 왔다 떠났다네. 지금은 어딨는지 모르겠군.”

“혹시 칠사도의 목을 베었다는 자가...?”

“자네 짐작이 맞네.”

사부가 은거를 깨고 나왔다는 말에 하후진이 입맛을 쩝 다셨다. 하지만 큰 의미를 두진 않은지 이내 콧김을 킁 내뿜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알려줘서 고맙수다.”

그렇게 하후진이 가자 일행도 차례대로 떠났다.

후미에 붙은 야차마곤이 유이강을 힐긋 바라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마구니를 두고 발길을 돌리다니... 난생 처음 있는 일이라서 당혹스럽구만.”

“나야말로 외소림의 생존자를 봐서 놀라웠네.”

“...그건 또 어떻게 알아낸 게요?”

“말하지 않았나. 술법진은 내 뱃속이나 마찬가지라고. 여기서 일어난 일은 모두 봤네. 자네 무공도 똑똑이 견식했지.”

“으음, 그래도....”

“속세의 행색을 한 자가 소림의 본산 무공을 쓴다면 외소림밖에 없지. 근 오십 년간 본산 제자들 중 탈속한 자는 없지 않은가?”

“허, 귀신이 따로 없구려.”

“자네들이 혈교의 함정에 빠져서 사라졌다는 말은 들었네. 실수로 무고한 가문을 멸문시키는 바람에 그 일로 내분을 일으켰다고....”

“거기까지만 하시오.”

괴로운 기억을 떠올린 건지 처참하게 일그러진 낯빛.

유이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 가보게.”

그렇게 야차마곤까지 저 멀리 사라지자 유이강은 수염을 쓸며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가는 길이 쉽진 않겠지.”

출구를 열어주긴 했어도 강엽 일행이 탈출하려면 또다른 산을 넘어야 하리라.

그가 고개를 들어올릴 때, 흑무암쇄진이 갈라지듯 흩어지면서 핏빛의 안광이 폭사되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걸어오는 불괴강시가 뒤편에 선 명도상인을 향해 말했다.

“이자는 내가 맡을 테니 그대는 쫓아간 쥐새끼들을 잡아라. 다른 놈들은 몰라도 그 어린 동족이 술법진을 나가는 일만은 무슨 수를 쓰든 막아야 하느니라.”

“존명.”

유이강을 힐끗 곁눈질한 명도상인은 기암괴석을 박차고 뛰며 화살처럼 쏘아졌다.

불괴강시가 싸늘하게 비웃었다.

“아는지 모르겠구나. 너희 흑룡교의 유산이 본교에도 많이 흘러들어왔지.”

손가락을 한껏 구부린 불괴강시의 기수식을 알아본 유이강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적룡마조(赤龍魔爪)....”

불괴강시의 손톱 끝에 서린 붉은 기운. 호갑투처럼 길게 늘어선 강기가 대기를 웅웅 흔들었다.

교맥의 무공이 적의 손에 들어가서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상황에 유이강의 눈빛 또한 매서워졌다.

“당신을 죽일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났군.”

일세를 풍미하는 두 초고수가 다시 부딪쳤다.

* * *

어마어마한 기파가 충돌하는 것을 느낀 강엽이 멈칫하자, 일행의 걸음도 자연스레 느려졌다.

백서희가 불쑥 물었다.

“걱정돼서 그래?”

“설마.”

강엽이 쓰게 웃었다.

“내가 아직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누구나 다 그럴 거야.”

강엽뿐만이 아니다. 백서희도, 하후진도, 청수도... 그리고 함께 온 조영옥까지. 이 자리에 있는 누구 하나 무력감을 곱씹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어쨌든 암시장에 있는 혈교를 뿌리 뽑았으니까. 결과적으로는 성공한 셈이잖아.”

물론 암시장의 세력을 소탕해도 혈교는 다시 혈라분을 만들겠지만, 그건 혈교를 멸문시키지 않는 이상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지금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걸로 만족해야지.”

언제나 대승을 거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행 역시 한마디씩 거들려고 할 때였다.

“엎드려!”

강엽이 불현듯 경고했고, 조영옥과 야차마곤이 한 박자 늦게 상황을 알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엎드렸다.

하후진과 청수, 소창후, 당묘정이 몸을 바짝 숙였을 때, 머리 위로 날카로운 칼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쐐애애애애애액!

조금만 늦었다면 그대로 몸이 양단되어 내장 조각을 흘리고 있었으리라.

예상치 못한 기습에 일행의 등골이 오싹해질 느낄 때, 백서희를 안고 엎어졌던 강엽이 허리를 펴고 일어났다.

“그래, 생각해보니 너도 있었지.”

“날 깜빡했다니 섭섭하구만.”

하나도 섭섭하지 않은 얼굴로 섭선을 살랑거리는 사내가 암기처럼 던진 병장기를 회수했다.

날카로운 톱날이 달린 원반인데, 원반 안쪽의 심지에 질기면서도 탄력적인 실을 매달아 투척하고 다시 회수하는 추명반(墜命盤)이라는 기문병기였다.

추명반을 던지고 받은 심윤이 비릿하게 웃었다.

“안 됐지만 출구는 우리가 점거했네.”

우워어어어어어!

석림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괴인들의 모습.

혈라분에 중독된 자들이 마구잡이로 달려들자 일행이 기겁했다.

“맙소사! 이렇게 가까이 있었는데 몰랐다고!?”

“기척을 숨기는 술법이다.”

어느새 오른눈이 푸르게 물든 강엽이 심윤의 주변에 깔린 술법의 구성을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일행에게 경고하기 직전 낌새를 눈치채고 정안을 발동했던 것이다.

“자네들이 열심히 싸우는 동안 나도 나름대로 수를 준비하고 있었거든. 갑자기 출구가 나올 줄은 몰랐지만... 이리 된 이상 시간을 끌어야지. 자네들을 죽이진 못해도 붙잡을 수는 있을 걸세.”

“지랄도 풍년이다, 미친놈.”

하후진이 귓구멍을 후비고는 강엽을 돌아봤다.

“어이, 대장. 어떻게 할 거냐?”

“돌파해야지.”

사방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보며 목을 우두둑 꺾는다.

“하후진, 선두를 맡아라. 야차마곤 선배와 조영옥 공녀가 양 날개를 맡고, 소창후는 하후진의 뒤를 받친다. 후미는 백서희와 청수 도장이 책임진다. 당 소저는 중앙에서 풍도마장과 태화문도들을 지켜주면서 독을 뿌려주시오.”

“너는 어떻게 하려고?”

백서희의 물음에 강엽이 대나무 꼭대기에서 오연하게 웃는 심윤을 노려봤다.

“난 저놈을 제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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