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신녀 (3)
“쿨럭! 들 낯이 없소이다, 공녀.”
“그런 말씀 마세요. 노사께서 얼마나 애써주셨는데요.”
조영옥은 풍도마장의 손을 꼭 잡았다. 한때 삼화취정의 초고수로서 위풍당당했던 노인의 손은 근육이 빠지면서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메말라버렸다.
자신의 부친보다도 늙은 노익장의 주름진 얼굴에 조영옥은 씁쓸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죄송합니다. 제가 욕심만 부리지 않았어도....”
유이강의 손을 잡은 게 실수였다. 대환단에 눈이 멀어서 자신의 사람을 잃어버릴 뻔했다.
풍도마장이 늙수레한 목소리로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허허, 그런 말씀 마시오. 상황이 여유롭지 않다는 건... 공녀도 잘 알지 않소. 이 늙은이가 공녀를 지켜드릴 수 있는 시간도 그리 많이 남진 않았소이다.”
“백 세까진 사셔야죠. 본문의 재산을 털어서라도 성대한 연회를 열어드릴 거예요.”
“....”
입을 다문 풍도마장은 말없이 씁쓸한 웃음만 흘렸다.
그는 젊은 날에 이것저것 잡다한 내공을 익히면서 기껏 이룬 정기신 합일의 균형이 어긋났다.
그렇기에 세월이 갈수록 숙성되는 정파 고수들과 달리 늙고 병들며 쇠락해지고 있었다.
아직은 심후한 공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그 날도 많이 남지 않았다.
“껄껄, 너무 염려하지 마시오. 공녀가 문주에 오르고 일가를 이루는 것까지는 볼 테니까. 이 풍도마장이 영락했어도 저승사자를 내쫓을 힘 정도는 있소이다.”
짐짓 쾌활하게 웃고 있지만 풍도마장의 안색은 창백하기 이를 데 없었다.
잠시 후 그가 눈을 감았다.
“잠드신 거니 너무 걱정하진 마세요.”
두 사람이 얘기를 나누는 동안 한쪽에 물러나 있던 당묘정이 곁에 다가와서 말했다.
조영옥도 풍도마장의 가슴이 천천히 오르내리는 것을 보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머리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노사를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끄럽게도 의원으로서 한 건 별로 없었어요.”
당가타, 하다못해 분원이었어도 이보다 훨씬 나았으리라. 하지만 이런 환경에서는 요상약을 먹이거나 침을 놓는 것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당 소저 덕분에 노사께서 위기를 넘기셨으니까요. 혈교로부터 노사를 지켜주셨고요.”
일행이 풍도마장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혈교는 진작에 풍도마장을 인질로 잡거나 죽였을 터.
조영옥은 그 점을 알고 사의를 표한 것이다.
“이 빚은 꼭 갚겠어요.”
당묘정이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태화문의 공녀에게 은혜를 입힐 날이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드세요.”
“이건?”
“본문의 요상약이에요. 몸이 약간 불편하신 것 같은데 도움이 될 거예요.”
강엽처럼 다른 사람의 경맥을 들여다보는 재주는 없었지만 당묘정은 유능한 의원이었다.
굳이 맥을 짚지 않고도 조영옥이 부상을 입었다는 것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고마워요. 잘 먹을게요.”
조영옥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녀가 지닌 요상약은 이전에 운기하면서 써버렸기 때문이다.
‘체면 따위에 목숨 걸 때가 아니야. 만약을 대비해서 조금이라도 기력을 회복해야 해.’
그때 당묘정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태화문의 일에 참견하고 싶진 않지만, 이건 의원으로서 하는 말이니 들어주셨으면 좋겠어요. 풍도마장 어르신은 더 싸우시면 위험해요. 한동안은... 아니, 최소 일, 이 년은 정양하며 안정을 취하셔야 해요.”
“...그 정도인가요?”
“다행히 뼈는 괜찮지만 근육이 많이 상하셨어요. 기혈의 흐름도 원활하지 않아요. 폐수혈(肺兪穴)이 막히는 바람에 호흡에 잡음이 섞였어요. 여러 장기에 내상을 입으셔서 부전(不全)도 의심되고요.”
“그런...!”
“빠르게 조치하지 않으면 목숨을 장담할 수 없어요.”
다름 아닌 당문 의원의 말이다. 당문주의 여식이자 당문제일의원의 제자인 당묘정의 단언.
조영옥의 눈밑에 짙은 그늘이 드리우자 당묘정이 쓸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당묘정이 나왔을 때 바깥에선 강엽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영옥 덕분에 그가 왔다는 걸 알고 있는 당묘정은 놀라지 않고 차분히 다가갔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운이 좋았소. 한데 풍도마장의 상태가 그 정도로 좋지 않소?”
뛰어난 청각을 지닌 강엽이다. 조금만 의식을 집중하면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다.
“아, 들으셨나 보네요. 맞아요. 풍도마장은 더 이상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에요.”
“당 원주님의 행방도 묘연하다고 들었소만.”
“예, 어쩌면 숙부님께서도 이곳 어딘가에 계실지 모르지만... 제 생각엔 아닐 것 같아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전장을 덮은 어둠. 그게 저희를 삼킨 걸로 끝났거든요. 본문과 숙정방의 무사들은 대부분 피했어요.”
일행만 삼켜진 것은 선두에서 싸웠기 때문이다.
당우경은 당문을 이끌면서 전열을 조절하고, 단목정이나 고섭풍은 숙정방과 함께 더 뒤에서 싸웠기에 술법진에 삼켜지지 않았다.
“그러면 우리끼리 해결해야 한다는 거군.”
“...우리가 할 수 있을까요?”
상리를 초월하는 괴물이 둘이나 있었다.
조영옥이 가세했어도 일행의 전력으로 두 괴물을 상대하는 것은 자살 행위에 지나지 않을 터.
“글쎄, 명도상인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만....”
선천지기의 팔 할을 빼앗겼고, 불괴강시에게도 적잖은 피를 빨렸으니 초주검이 되었을 것이다.
완전히 숨을 끊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리지만....
‘살아도 산 목숨이 아니겠지.’
그 외는 강엽도 섣불리 예단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선 모든 게 미지수였으니까.
“유이강을 찾는 게 급선무요. 그와 협력을 해서 불괴강시를 쓰러트리든, 아니면 그를 죽이고 술법진을 빠져나가든... 일단 찾아야겠지.”
시퍼렇게 빛나는 오른쪽의 눈.
강엽이 손을 휘젓자 기이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면서 기암괴석 사이에 그림자가 솟구쳤다.
“찾을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니까.”
* * *
잠시 후 일행이 한 자리에 모였다.
적당히 해후를 나눈 강엽이 입을 열었다.
“먼저...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소.”
일행이 한 명도 죽지 않은 것도, 이렇게 한 자리에 다시 모일 수 있는 것도 천운이었다.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미안하오. 내가 잘못 판단해서 여러분을 사지로 끌어들이고 말았소.”
유이강이 술법진을 발동하고, 불괴강시가 강엽의 피를 마시고 자아를 되찾은 것까지.
강엽도 예측하지 못한 대형 사고였다.
“고개 들게, 후배.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는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네.”
“맞아, 네가 무슨 옥황상제도 아니고... 세상사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떻게 다 알겠냐? 그건 제갈량도 불가능할걸?”
일련의 사건들을 강엽의 탓으로만 몰아가기엔 하나같이 예상 밖의 사태였다.
뒤늦게 합류한 청수와 소창후도 동의했다.
“지금은 잘잘못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그리고 명도상인이라는 교성을 잡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애초에 교성만 잡으면 된다고 생각한 걸요. 사실 그 이상은... 무림맹이 나서야 할 일이에요.”
하다못해 구파나 팔가가 나서야 구천호법과 자웅을 결해볼 수 있으리라. 구천호법조차 고전시킨 불괴강시는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조영옥이 말했다.
“하지만 여기엔 우리밖에 없어요. 이렇게 된 이상 우리끼리 어떻게든 해결해야죠.”
그 말도 사실이었다. 여기에 처박혀 있는다고 누군가 그들을 구하러 와준다는 보장도 없었다.
굶어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리라.
“여기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소. 일단 유이강을 찾아야지. 그래서 말인데....”
강엽이 잠시 사이를 두고 일행을 쭉 둘러봤다.
“유이강과 협력해야 할 수도 있소. 그걸 미리 터놓고 말하려고 여러분을 부른 것이오.”
“으음, 구천호법과....”
야차마곤이 신음을 삼켰다.
평상시의 그였다면 죽으면 죽었지 사마외도와 협력하는 것은 생각지도 않을 일이었다.
청수와 소창후, 당묘정도 마찬가지.
“생각할 게 있나? 일단 사는 게 먼저 아냐?”
살수 출신으로서 정사(正邪)의 개념이 흐릿한 백서희만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 찬성했다.
하후진도 고개를 주억였다.
“내 생각도 백 소저와 똑같아. 어제의 적이 오늘의 아군이 되는 건 흔한 일이잖냐.”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청수의 말에 하후진이 인상을 썼다.
“왜, 네가 정파라서? 구천호법하고 한편을 먹을 생각 하니 두드러기가 돋디? 정신 차려, 인마. 죽느냐 사느냐가 걸렸다고!”
“그와 협력해서 불괴강시라는 혈교의 마녀를 쓰러트린다고 해도 그 이후가 문제입니다.”
“어엉?”
“정확히는 당문이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습니다.”
“뭐야. 알아듣게 설명해 봐.”
“당 원주님이 바깥에 계시지.”
대답은 강엽의 입에서 나왔다.
일행의 이목이 집중되자 강엽은 한쪽에 우두커니 선 당묘정을 향해 묘한 시선을 던졌다.
“내 생각에 당 원주님은 필시 흑룡교도들을 제압하셨을 것이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흑룡교도들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일행도 혈귀들하고만 싸웠을 뿐, 흑룡교도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다고 했었고. 그건 술법진의 범위에서 흑룡교도들이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유이강이 그 점을 알고, 우리에게 자신과 교도들을 무사히 보내달라는 조건을 내건다면?”
“...!”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명예가 무너지고, 약속을 지키면 마교도들을 보내줬다는 오명을 쓰게 되지.”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만약 유이강이 사문의 명예를 걸고 맹세를 시킨다면, 각자 사문이 있는 일행으로선 그 약속을 저버리지 못하리라.
강엽도 자신을 선뜻 도와준 당문이 그런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을 두고볼 순 없었다.
“이런 썅, 그럼 어쩌자는 건데?”
“그건....”
강엽이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
석림의 공간이 이지러지며 검은 구멍이 뚫리더니, 묘령의 여인이 준엄한 목소리로 꾸짖는다.
강엽과 조영옥의 안색이 변하고, 처음 들어보는 일행도 그 안에 담긴 거력을 느끼고 경악했다.
[어차피 여길 나가가도 못할 것을. 그 이후의 일을 논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허망한가.]
붉은 물결이 일렁거리는 검은 구멍.
어느덧 구멍에서 나온 새하얀 장삼을 입은 적발의 여인이 일행을 차갑게 오시한다.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태화문도들이 달려들었다.
“죽엇!”
“안 돼! 물러나라!”
조영옥이 뒤늦게 외쳤지만 이미 그들의 병장기는 불괴강시의 면전에 치달은 상황.
가소롭다는 듯 웃은 불괴강시가 손가락을 들자 일직선이 일며 태화문도들의 몸뚱이를 양단했다.
“아...!”
“용기만 가상하군. 주제를 모르고 달려드는 하루살이들에게는 벌을 내려줘야겠지.”
허공에서 후두둑 떨어지는 시체들. 그녀가 장심을 들자 핏물이 절로 솟구치며 구슬처럼 뭉쳤다.
농밀한 핏빛 구슬을 꿀꺽 삼킨 불괴강시가 만족스럽지 못한 얼굴로 혀를 찼다.
“쯧쯧, 이렇게 피맛이 떨어져서야... 역시 본녀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진미는 하나밖에 없는가.”
“저도 맛보고 싶군요.”
한탄하는 불괴강시의 뒤엔 어느덧 안색이 짙은 갈색으로 물든 명도상인이 호종하고 있었다.
강엽의 눈이 기광을 발했다.
“혈라분을 복용했나. 그래봤자 명줄을 재촉할 텐데.”
“후후, 사마외도의 세상은 그대가 아는 것 이상으로 훨씬 깊고 광활하다. 그대의 작은 머리로 본녀의 한계를 가늠할 수 있으리라 여기느냐!”
“완전히 강시가 됐군. 심장이 멈췄어. 심장뿐 아니라 오장육부도 멈췄고. 뇌력은 좀 살아있는 것 같은데... 그게 오래갈 것 같진 않은데?”
“.......”
초음으로 명도상인의 체내를 완전히 꿰뚫어본 강엽의 말에 불만스럽게 입을 꾹 다무는 얼굴.
강엽이 들으란 듯이 중얼거렸다.
“삼화취정이 깨졌군. 공력도 절반이나 잃었고... 중단전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예전에 비하면 절반도 힘을 못 낼 텐데, 데리고 다니는 의미가 있나?”
“...특이한 재주를 지녔구나. 사람은 듣지 못할 소리를 이용해서 타인의 몸을 더듬는 수법이라니.”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그녀는 초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막거나 피하지는 못했다.
“명도상인, 내가 저 어린 동족을 상대하는 동안 하루살이들을 쓸어버리도록.”
“...삼가 신녀의 명을 받듭니다.”
목구멍을 긁는 듯 칼칼한 목소리로 명도상인이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에게 목숨을 구명받은 이후로는 옛날에 그랬듯 상전으로 받들고 있었다.
강엽이 말했다.
“불괴강시는 나를 노릴 거요. 내가 저 여자를 데리고 피할 테니 명도상인을 맡아주시오. 당 소저는 풍도마장을 데리고 자리를 피하고.”
“이봐, 아무리 너라도 혼자서는....”
강엽을 붙잡은 하후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정마안으로 인해 전혀 다른 색채를 품은 정마안의 눈을 본 순간 정신이 아찔했던 것이다.
백서희가 딱딱해진 얼굴로 물었다.
“할 수 있겠어?”
강엽이 쉽게 죽으리란 생각은 안 한다. 상대가 초월적인 고수라도 재생력이 있지 않은가.
“이기진 못해도 시간은 끌 수 있을 거다.”
“오호라, 필사적으로 허세를 떠는구나!”
콧방귀를 뀐 불괴강시가 한 발짝 내밀며 손가락을 들어올리자 핏빛 강구가 타오르듯 이글거렸다.
“이번엔 도망치지 못할 거다. 지옥 끝까지라도 쫓아가서 그대를 얻고 말 테니까!”
“저 쌍년이 어디서 개떡 같은 소릴...!”
누가 들으면 오해하기 딱 좋은 말을 아무렇지 않게 지껄이는 불괴강시의 모습에 백서희가 분통을 터뜨리는 찰나, 허공에서 목소리가 울렸다.
[미안하지만 그렇게는 안 되겠소.]
직후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와서 불괴강시가 쏜 강구를 정확히 갈라버렸다.
불괴강시의 봉목이 부릅뜨였다.
“구천호법...!”
“내 계산이 틀렸구려. 설마 당신을 각성시킬 수 있는 자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는데. 당신이 함정을 그토록 쉽게 빠져나올 것도 예상치 못했고.”
“감히 흑룡교의 찌꺼기가 본녀를 우롱하느냐-!”
“하하하.”
호탕하게 웃은 유이강의 눈이 서늘하게 번들거렸다.
“찌꺼기라... 틀린 말은 아니지. 근데 그거 아시오? 여긴 내 뱃속이나 다름없소이다.”
능청스럽게 대답한 유이강이 검을 휘둘러 불괴강시를 밀어버리는 것과 동시에,
기암괴석 사이에서 검은 안개가 뭉클 흘러나오면서 술법진의 공간을 가득 메웠다.
-흑무암쇄진.
교맥을 계승한 마지막 호법이 반푼짜리 흡혈귀를 절세의 술법진 안에 가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