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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혈왕-202화 (202/450)
  • 36화. 신녀 (2)

    “으음.”

    한순간 눈매가 뻐근해진다.

    강엽이 무의식적으로 눈가를 문지르자 함께 달리던 조영옥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무래도 쉬는 게 좋겠네요.”

    “불괴강시가 언제 올지 모르오.”

    “그래도 휴식이 우선이에요. 강 무사 기파가 얼마나 불안한지 알아요? 무슨 기복이 이렇게 심한지... 주화입마에 빠질 수도 있어요.”

    삼화취정의 고수의 피를 흡혈한 데다, 불괴강시의 손에서 탈출하느라 정안을 무리하게 썼다.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하나 조영옥의 말마따나 휴식이 절실했다.

    “저도 좀 쉬고 싶고요. 무리하게 강기를 썼더니 생각보다 후유증이 심하네요.”

    조영옥의 어깨와 팔도 미세하게 경련하고 있었다. 초음으로 그녀의 내부를 자세히 살핀 강엽은 뭐가 문제인지 깨달았다.

    ‘수양명대장경맥의 세맥에 이상이 생긴 것 같은데....’

    만약 혼자 싸웠다면 조영옥은 강기를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한 수로 명도상인을 죽이지 못한다면 자신이 당했을 테니까.

    강엽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럽시다.”

    조영옥이 운기를 하는 동안 강엽은 호법을 서며 기암괴석의 석림(石林)을 돌아봤다.

    기껏 도망쳤더니 또다시 어딘지 모를 공간에 갇힌 것이다.

    과연 여기도 사람들이 있을까.

    ‘유이강의 목적이 뭐지?’

    단순히 불괴강시나 명도상인 등 위험한 적들을 격리하고자 술법진을 쓴 것 같진 않았다.

    분명히 그들을 죽일 자신이 있으니 썼을 텐데, 지금까지는 실패로 보여지는 상황.

    ‘일단 그자부터 찾는 게 급해.’

    자아를 되찾은 불괴강시를 상대하는 건 몇 배로 까다로울 터. 불괴강시를 쓰러트리려면 반드시 유이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에 생각을 거듭할 때쯤, 조영옥이 숨을 길게 내쉬며 눈을 떴다.

    “지켜줘서 고마워요.”

    “나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오.”

    단순히 기파를 가라앉히는 게 아니라 피 안에 담긴 선천지기를 끌어모아야 한다.

    며칠이 걸릴지는 강엽도 예측할 수 없었다.

    “괜찮으니까 운기하세요. 전 호법을 설 겸 요깃거리나 떼우고 있을 테니까요.”

    상황이 어찌 될지 모르는 만큼 건량을 챙기고 전장에 나온 것이다.

    고개를 끄덕인 강엽은 구멍이 뚫린 기암괴석 안에 들어가서 운기를 시작했다.

    밖에서 지키고 있던 조영옥은 요동쳤던 기파가 급속도로 안정되는 것을 느끼고 나직이 감탄했다.

    기파를 이토록 빨리 수습하는 것만 봐도 강엽의 감각이 얼마나 초월적인지 알 만했다.

    “강 무사, 당신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불괴강시가 강엽을 향해 동족이라고 내뱉은 말을 지금도 똑똑이 기억한다. 아마 명도상인을 목내이처럼 만든 수법과 관련이 있겠지.

    하지만 강엽이 비밀을 숨기고 있어도 한 배를 탄 이상 함부로 추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볼 수밖에.’

    한시라도 빨리 풍도마장과 태화문도들을 찾아야 한다.

    강엽의 도움은 필수였다.

    * * *

    후우우우우웅......!

    내면의 소용돌이가 가라앉으면서 중단전으로 인도한 선천지기가 새로운 고리를 그려냈다.

    소마동의 피를 마셨을 땐 아슬아슬하게 부족했는데, 명도상인의 피까지 마시자 칠룡환을 넘어 그 이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팔룡환.’

    여덟 번째 용환은 다른 용환들에 비해 가늘어서 완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래도 칠룡환만 운용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났다.

    강엽은 기감이 한층 높은 경지로 올라 사방으로 뻗는 것을 느꼈다.

    십 장, 십오 장, 이십 장....

    점점 넓게 퍼지는 영역에서 그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술법진의 기운을 감지했다. 또한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그것을 비틀고 잡아당길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지금까지 얻은 능력들과 상승 작용한 건가?’

    초감각, 초음, 정안... 감각과 관련된 능력들이 기감을 발달시키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여자가 술법진을 넘은 것도 이런 감각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겠군.’

    삼화취정의 고수라면 흡혈귀의 능력이 없어도 이런 기감을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기운을 갈무리하는데....

    ‘음?’

    문득 술법의 기운이 출렁거렸다.

    다시 불괴강시가 쳐들어오는 건가 싶어서 감각을 곤두세우는데, 여럿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중에 몇 명은 익숙하기까지 하다.

    “공녀.”

    “배는 안 고프세요? 하루가 지났는데.”

    만 하루 동안 가부좌를 틀고 앉아 주야장천 운기조식만 했던 것.

    다만 강엽은 초고수의 선천지기를 가득 흡수했기에 공복감을 느끼지 않았다.

    “공녀는 어떻소?”

    “적당히 요기를 해서 버틸 만해요. 여기요.”

    육포와 건량, 그리고 약간의 물.

    딱히 허기지진 않아도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독을 탄 것도 아니고.

    적당히 배를 채운 강엽이 입을 닦으며 말했다.

    “이 공간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 것 같소.”

    “그건 또 어떻게... 아니, 그냥 묻지 않을게요. 또 강 무사스러운 짓을 했겠죠, 뭐.”

    ‘나 같은 짓이 뭔데?’

    강엽은 그렇게 물으려다가 꾹 참았다.

    조영옥이 먼저 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 있는데요?”

    “대충 여기서 삼 리쯤?”

    “맙소사, 그 거리에 있는 사람들을 찾았다고요? 그게 대체 뭔... 아니, 그냥 설명하지 말고 앞장서세요.”

    강엽이 설명할 조짐을 보이자 바로 끊는 조영옥이었다. 어쩐지 해탈한 얼굴로 웃는 게 이제 강엽에 대해 이해하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잠시 그녀를 어이없이 바라본 강엽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석림의 험준한 산길을 넘기를 한참.

    ‘진짜로 있었네?’

    조영옥은 석림 내부에서 칼날이 부딪치는 파찰음과 경파가 휘몰아치는 소리를 듣고 입을 벌렸다.

    강엽을 쫓아오면서도 한편으론 의구심을 가졌거늘, 정말로 싸움이 났던 것이다!

    콰아아아앙......!

    석림 바깥으로 폭사되는 열기.

    그게 하후진의 열양지기라는 것을 알아본 강엽이 눈매를 좁힐 때, 이번엔 굉음이 뒤따랐다.

    그쪽으로 가보니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이야, 이 형님 엄청 호쾌하시구만?”

    “으하하! 자네야말로 꽤 하는군, 후배. 자네의 소문은 청송객잔에서 익히 들었는데 명불허전일세.”

    하후진과 야차마곤이었다.

    근처엔 붉은 옷을 입은 혈교도들의 시체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강엽과 조영옥이 나오자 일순 시선이 날카로워진 두 사람이 뒤늦게 기세를 거두었다.

    “강엽, 이 자식아! 인제 오냐!”

    “오, 무사했군. 눈알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네, 후배. 한데 함께 오신 소저는 뉘신가?”

    야차마곤이 조영옥을 곁눈질했다. 강호 경험이 풍부한 그였지만 태화문의 공녀인 조영옥과 만난 적은 없었던 것이다.

    조영옥이 두 손을 모아 정중하게 포권을 쥐었다.

    “태화문의 조영옥입니다. 여기서 저명하신 야차마곤 선배님을 만나뵐 줄은 몰랐군요.”

    “가만, 조영옥이라면... 소저가 이공녀인가? 사천삼미 중 일인인 흑호선 조영옥?”

    “부끄러운 허명이지요.”

    머리는 산발이고 얼굴엔 흙먼지가 껴서 엉망이 됐지만, 그럼에도 조영옥은 뭇 사내들의 넋이 나갈 만큼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하후진이 삐딱하게 물었다.

    “야차마곤 선배는 그쪽을 못 알아봤는데, 어째 그쪽은 한번에 알아보는구만?”

    “그야 당연하죠. 야차마곤이 귀주를 떠나 중경에 터를 잡았다는 건 사천 무림인이라면 모두 아는 일. 칠 척 거구의 사내가 귀신같이 흑곤을 다루는 솜씨를 보면 백이면 백 모두 야차마곤을 떠올리지 않을까요?”

    세 사람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기야 야차마곤 같은 자가 흔하지는 않겠지.’

    강호 무림에 고수가 모래알처럼 많아도 야차마곤처럼 특색이 뚜렷한 고수는 한 줌에 꼽으리라.

    “뭐,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지만 우리도 댁이 이 뭔지 모를 곳 어딘가에 있다는 건 알고 있었수다. 우리가 풍도마장을 보호하고 있거든.”

    “그게 정말인가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올라갈 정도로 놀란 조영옥의 반응에 하후진이 떨떠름해했다.

    “으음, 어쩌다 보니 만나서... 풍도마장뿐만 아니라 그쪽 부하들도 몇 명 있수다.”

    “잠깐, 지금 보호라고?”

    강엽이 굳은 얼굴로 끼어들었다.

    풍도마장 같은 삼화취정의 고수를 보호한다니?

    조영옥의 안색도 딱딱해졌다.

    “설마 노사께서....”

    “자세한 말은 가면서 해주겠네. 우린 혹시 주변에 먹을 게 있나 싶어서 나온 거거든.”

    일행도 각자 비상식량을 갖고 있었지만, 술법진 안에서 오래 버티는 것을 대비해서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봤던 것이다.

    “안타깝게도 먹을 만한 건 없었네. 짐승은 아예 보이지도 않고... 그나마 과일이나 도라지 같은 건 좀 찾았는데, 먹어도 포만감이 느껴지지 않더군.”

    “씁, 아무래도 단단히 꼬인 것 같다. 시험 삼아 냇물을 마셔봤는데 갈증이 가시지 않더라고.”

    먹을 것도 마땅치 않고, 냇물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다. 이래선 적과 싸우기 전에 아사하지 않을지 걱정부터 해야 할 판이었다.

    강엽이 말했다.

    “환각이라서 그런 거다.”

    “뭐?”

    “우리가 서 있는 땅, 눈에 보이는 나무와 돌... 저 위에 있는 하늘까지. 모두 환각이다.”

    “...이게 모두 가짜라고?”

    “그래.”

    “어이가 없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쥐고 만질 수 있는데 가짜라니....”

    하후진이 바닥에 떨어진 잎사귀를 주워들자 강엽이 그것을 받아서 의식을 집중했다.

    그러자 나뭇잎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엇! 뭐, 뭐야!?”

    “이게 환각임을 알고, 그 환각을 파훼할 수 있으면 이런 식으로 없앨 수도 있는 거지.”

    팔룡환의 경지에 오르면서 감각이 한층 높은 경지에 올랐기에 술법진에 개입할 수 있었다.

    “어, 이러면....”

    “술법진 자체를 없애는 건 무리야. 여기서 빠져나가는 방법도 아직 못 찾았고.”

    술법진에 구멍을 내서 다른 곳으로 갈 수는 있지만, 술법진 전체의 생로를 찾는 것은 무리였다.

    “아마 유이강을 만나야만 생로를 찾을 수 있겠지. 어쩌면 생로가 있는 곳에 놈이 있을지도 몰라.”

    “끙, 그 유이강이란 놈에 대해선 다른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그놈이 그렇게 강하다며?”

    “구천호법이라고 하더군.”

    “....”

    “....”

    하후진과 야차마곤이 일순 멍해졌다. 너무 엄청난 이름을 들어버려서 의식이 따라가지 못한 것이다.

    뒤늦게 이해한 하후진이 식겁했다.

    “...이런 미친! 구천호법이 왜 여기서 나와!?”

    “유이강은 과거 귀산자라 불렸고, 귀산자는 구천호법의 막내였어요. 정확히는 전쟁 말기에 구천호법이 전사하자 그 자리를 대신한 사람이었죠.”

    유이강은 당시에도 강했다. 그러나 반백 년의 세월 동안 더욱 정진해서, 이젠 팔대교왕의 수좌나 광명마교의 일사도에 비견할 만큼 고강해졌다.

    “하지만 혈교의 마녀는 그런 유이강조차 고전할 만큼 강해요. 대체 정체가 뭔지....”

    그 시점에서 조영옥은 잠시 강엽을 힐끔거렸지만, 강엽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말했다.

    “일단 사람들을 모으는 게 먼저요. 하후진, 풍도마장 말고 누가 있지?”

    “우리 일행은 다 있다.”

    * * *

    “강엽!”

    멀리서 백서희가 달려오는 모습에 강엽은 그녀가 다치지 않았는지부터 살펴봤다.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이 더러워지긴 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구석은 안 보였다.

    “괜찮은 거냐?”

    “응, 나야 뭐 무사하지. 근데....”

    말끝을 흐린 그녀가 강엽의 뒤에서 따라오는 조영옥을 알아보고 살짝 미간을 좁혔다.

    “역시 조 소저도 있었네요.”

    “오랜만에 보는군요, 백 소저.”

    두 사람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곳은 숙정방이었다. 하지만 백서희가 조영옥을 알아봤듯, 조영옥 역시 백서희를 잊지 않고 기억했다. 사천삼미와 비견될 만큼 빼어난 미인이기 때문이었다.

    “우리 일행은 전부 있어. 활수명의는 없고, 당문의 무인들과 숙정방도들은 좀 흩어졌지만... 다들 무사하길 바라야지.”

    “사정은 하후진에게 들었어. 풍도마장도 있다고?”

    “당 소저가 돌보는 중이야.”

    “강 무사, 노사께 가봐도 될까요?”

    “그러시오.”

    양해를 구한 조영옥이 감사의 눈짓을 보내면서 저편으로 사라지자 백서희가 목소리를 낮췄다.

    “어떻게 만난 거야?”

    “겨우 함정을 빠져나왔더니 만났지. 아마 유이강이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싶다.”

    “수작?”

    “싸우게 하려는 목적으로.”

    실제로 조영옥과 모르는 사이였다면 대화가 안 통했을 수도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명도상인과 불괴강시가 나오지 않았다면 아직도 그 공간에서 조영옥과 대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

    저간의 사정을 들은 백서희가 혀를 내둘렀다.

    “마교 새끼 아니랄까 봐 하는 짓이 참 음흉하네.”

    물론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흑룡교주의 혈손이었지만, 그녀 자신은 핏줄에 의미를 두지 않았다.

    “그런데 그 불괴강시는 어떻게 할 거야? 정신을 차렸다면 무지 위험한 거 아냐?”

    “그 때문에라도 유이강을 찾아야 해.”

    술법진을 나가든, 아니면 불괴강시와 싸우든 유이강을 만나야 한다.

    그가 이 싸움의 열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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