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97화 (197/450)

35화. 난전 (2)

야차마곤이 강룡방주를 데려간 뒤, 일행은 전장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고지대로 왔다.

“안개 때문에 잘 보이지도 않을 텐데 여기는 뭐하러... 어라?”

아래를 내려다본 백서희가 신기해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안개가 앞을 가리고 있었는데 지금은 놀랍도록 멀쩡했다.

강엽을 돌아보는데, 청수의 입에서 대답이 나왔다.

“이런 큰 술법을 지속하는 건 힘들 겁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소창후의 물음에 강엽을 곁눈질한 청수가 말을 이었다.

“저도 술법은 잘 모르지만... 본파의 술맥을 이은 사형들로부터 귀동냥으로 들었습니다. 호풍환우의 술법 같은 대술법(大術法)은 오래 붙잡고 있기 힘들다고요.”

“청수 도장의 말이 맞소.”

강엽이 덧붙이자 일행의 시선이 다시 모였다.

“저런 술법은 일으키는 것도 어렵지만, 유지하는 건 그보다 몇 배로 어려우니까. 저 술법을 발동한 후유증도 만만치 않을 것이오.”

“그런 것도 있나요?”

이번엔 당묘정이 물었다.

“이 세상에 대가 없는 힘은 없소. 무인이 초식에 경력을 불어넣으려면 내공을 써야지.”

술법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술법진을 만들었다 해도 술법을 일으키고 유지하는 힘은 따로 들었다.

“본래는 술사 자신의 주력이나 내공을 쓰지만, 이 경우엔 다른 걸 쓴 것 같소.”

“그게 무엇이지요?”

“용맥(龍脈)이라 짐작하오.”

사람의 몸에 경맥이라는 통로가 있듯 땅 깊숙한 곳에도 지기가 흐르는 통로가 존재했다.

용맥이라 하여 천지자연의 막대한 기운이 몰리는 장소.

대략적인 설명을 듣고서야 당묘정도 알아들었다.

“삼이나 하수오 같은 영초들도 용맥의 기운이 몰리는 곳에서 자란다고 들었어요.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대문파들이 용맥이 흐르는 명당에 터전을 잡았고요.”

천지의 기운을 가득하기에 조석으로 운기할 때마다 많은 기운을 축기할 수 있다. 소위 대문파들이 뛰어난 제자들을 많이 배출하는 것엔 이런 요인도 있는 것이다.

백서희가 피식 웃었다.

“한마디로 그 용맥의 힘을 술법으로 끌어왔다?”

“그래.”

“그럼 뭐가 후유증이라는 거야?”

술사 자신의 주력을 쓴 게 아니면 아무런 문제도 없지 않은가?

백서희뿐 아니라 다른 일행도 의문이 완전히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설명해달라는 눈빛을 보내자 강엽이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술법진은 굉장히 정교한 물건이지. 조금만 손상이 되어도 문제를 일으켜. 섬세하게 다뤄야 할 도구를 강하게 휘두른다면 어떻게 될까?”

“당연히 고장나겠지. 용맥의 힘이 과해서 술법진이 망가졌다는 거구나.”

“그래, 하지만... 그건 흑룡교가 처음에 술법진을 만들었을 때의 의도와는 어긋나지.”

처음 암시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감지했던 술법.

강엽은 허공에 남은 희미한 잔향을 느끼고 술법의 이치를 거슬러 올라갔다.

“강 무사님, 눈이...!”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물든 오른쪽의 눈동자. 제 스스로 영롱한 청광을 내뿜는 강엽의 눈동자를 본 일행은 할 말을 잃었다.

‘좋아. 정마안(正魔眼)은 한쪽만 써도 지장없군.’

진조에게 받은 여섯 번째 능력.

본래는 양눈으로 쓰는 안법으로, 오른쪽의 정안과 왼쪽의 마안이 한 쌍을 이루는 능력이다.

두 눈의 효과가 다르기에 정안만 꺼내본 건데, 별 문제는 없었다.

그렇게 오른쪽의 눈으로 본 시야.

본디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술법의 구성과 이치를, 강엽은 정안을 통해 꿰뚫어보고 있고 있었다.

‘모든 술법을 꿰뚫는 안법이라더니.’

정답지를 옆에 두고 시험 문제를 푸는 기분이 이러할까.

정안의 공능이라면 어떤 술법이든 한 번 보는 것만으로도 그 이치를 터득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순간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전장을 지배했던 술법진의 이치를 탐구하는 일 따위가 아니었다.

“술법진을 망가뜨릴 만큼 쥐어짜냈으니까. 이제 암시장의 술법은 제 기능을 못할 거다.”

“잠깐, 그 말은 설마....”

그제야 이해한 일행의 안색이 납덩이처럼 새파랗게 질렸다.

“더는 한수의 수맥을 조절할 수 없어.”

“......!”

물론 수맥이 터지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리겠지만, 누가 이기든 더는 이 지하 도시가 존속할 수 없는 것도 사실.

정안으로 전장을 조망한 강엽이 별안간 이채를 발했다.

“숫자는 혈교가 더 많군.”

흑룡교의 숫자도 만만치 않았으나 혈교가 동원한 병력의 숫자는 천 단위를 헤아렸다.

환각을 불러일으키는 술법으로 수백 명을 잃고도 저만한 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저력.

새삼 마교의 전력이 얼마나 강대한지 엿볼 수 있었다.

“하지만 싸움은 숫자로만 하는 게 아니야.”

강엽은 백서희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숫적으로 흑룡교가 밀릴지라도 질적인 면에선 혈교를 압도하고 있었으니까.

정예 무인들이 환각에 빠져 허우적거렸기에 혈교가 동원한 병력은 혈라분에 중독된 약쟁이들뿐.

물론 범부를 뛰어넘는 괴력과 맹목적인 투쟁심은 웬만한 무인들도 기가 질릴 정도였지만....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무인들을 뛰어넘을 정도는 아니야.’

혈교가 물량으로 퍼붓는다면, 흑룡교는 잘 조직된 무인들이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대응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사상자가 나와도 또다른 무인이 그 자리를 대체하며, 하나로 어우러진 검진으로 혈교의 병력을 갈아버린다.

필시 합이 맞을 때까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보았으리라.

당묘정이 추임새를 넣듯 말을 이었다.

“고수들의 숫자도 흑룡교가 더 많은 것 같아요.”

죽립과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고수들이 검진과 따로 움직이며 혈교도들을 격살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많은 적들을 상대하는 바람에 구멍이 뚫릴 뻔한 검진에 숨통을 틔워 주고 있었던 것.

강엽이 눈매를 좁혔다.

“흐음.”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글쎄, 거리가 멀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턱을 긁적이면서 바라보는 것은 얼굴을 가린 고수들이 아니었다.

전장의 뒤편에서 전황을 살피는 흑룡교의 인사들.

“왠지 저쪽에 삼화취정의 고수가 두 명이 있는 것 같아서. 한 명은 유이강이라고 쳐도....”

“흑룡교도 삼화취정의 고수가 두 명이나 있다고?”

이제 와서 삼화취정의 고수가 뚝 떨어지는 것도 이상한 일.

강엽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태화문이 합류한 모양이다.”

유이강으로 짐작되는 자의 옆에 있는 자.

태화문의 풍도마장이었다.

* * *

유이강의 만면에 쓴웃음이 어렸다.

“서태진... 생각보다 더 많은 병력을 숨겨뒀군.”

술법진으로 거하게 한 방 먹인 덕분에 주도권을 쥔 것조차 대단치 않게 여기는 기색.

문득 그가 옆에 있는 면사 여인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태화문의 조력엔 감사하오. 공녀께서 협력해주시지 않았다면 패색이 짙어졌을 것이오.”

검진과 따로 떨어져서 혈교도들을 제거하는 자들은 태화문의 고수들이었다.

조영옥은 대수롭지 않게 공치사를 받아넘겼다.

“저야말로 한 수 배웠습니다. 설마 술법진을 이용해서 적의 예봉을 꺾으실 줄은 몰랐어요.”

“있는 걸 써먹은 거요. 수십 년 전에 본교... 아니, 흑룡교가 새긴 술법진이지.”

과거와 선을 긋는 언행.

유이강의 부하들 중에는 아직 흑룡교의 신앙을 가진 이들이 많았지만, 정작 유이강 본인은 충성심을 버린 것이다.

“이 싸움에서 이겨도 이 지하 도시는 버려야 하오. 다른 곳에서 새출발을 해야지.”

“많이 아쉬우시겠군요.”

“하하, 정든 곳을 떠나는 게 쉽지만은 않지. 하지만 배가 침몰하고 있다면 탈출해야지 않겠소?”

흑룡교의 패망을 들먹이는 건지, 암시장을 버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들먹이는 건지 모르겠다.

조영옥은 후자라고 추측했다.

“여길 떠나면 어디로 가실 건가요?”

“뭐 어디든 갈 곳이 있지 않겠소.”

두 사람이 손을 잡긴 했지만 그 이후는 미지수였다. 어디까지나 암시장에서 싸우는 동안에만 일시적으로 손을 잡은 것이니까.

‘이 사람과 계속 동행하는 건 위험해. 자칫하면 내 자리를 위협할 수 있다.’

조영옥 자신의 그릇 안에 담기엔 유이강이 너무 거물이었다.

유이강과 그를 따르는 세력이 가세한다면 당장은 도움이 될지 몰라도, 나중에 가선 역으로 삼켜질 위험이 컸다.

전쟁에서 이기면 서로 주고받을 것만 나누고 빠르게 헤어지는 게 정답일지도....

“한데 대환단은 복용하셨소? 어째 어제에 비해서 기도가 좀 달라지신 것 같소이다.”

“덕분에요.”

유이강을 거들어주는 대가로 받기로 한 영약.

사태가 급박하게 흘러가자 유이강은 대환단은 물론, 처치 곤란한 보물들까지 넘기기로 한 것이다.

조영옥의 얼굴을 돌아본 유이강이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조만간 삼화취정의 고수가 또 한 명 탄생할 것 같구려. 대공자가 긴장 좀 해야 할 것 같은데.”

“....”

조영옥이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아마 공녀도 짐작하고 계실 거라 생각하오. 대공자는 비밀리에 혈교의 마공을 연마하고 있소. 대공자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대환단을 복용하는 선택지는 틀리지 않았다는 말이지.”

증거를 찾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공자가 맹월림, 나아가 그 뒤에 있는 혈교와 손을 잡았고 모처에서 마공을 익히고 있다는 정황이 속속 드러나고 있었다.

“유 대인께서도 알고 계실 줄은 몰랐군요.”

“내가 세작을 심은 게 기분 나쁘시오?”

“좋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죠.”

“걱정하지 마시오. 암시장을 떠나면 사천땅엔 얼씬도 안 할 테니까. 이제 마교라면 지긋지긋하오.”

쌓아둔 재산이 많으니 중원을 벗어나서 먼 새외에서 새출발을 하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물론 이 전쟁에서 이긴 뒤의 일이지. 마침 저놈들도 본진이 나서려는 것 같구려.”

그 말에 조영옥의 시선이 멀리 향했다.

붉은 물결과 검은 물결이 거세게 부딪치면서 물고 물리는 전선의 저편에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명도상인과 혈교의 수뇌부들.

“우리를 보고 있군요.”

“그렇군. 나오라고 시위를 하나 보오.”

“어떻게 하실 건가요?”

“마음 같아선 놈의 힘을 뺀 다음에 상대하고 싶지만... 그럼 부하들만 죽어나가겠지. 어차피 무림의 전쟁은 고수들의 승부로 향방이 갈리기 마련.”

국가의 전쟁과 달리 무림의 전쟁은 어떤 양상으로 이어지든 결국 좌장들의 생사결로 귀결된다.

“차라리 잘됐소. 저놈이 설치는 것도 짜증났었는데. 이참에 구천호법과 일개 교성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가르쳐줘야겠소.”

“저쪽도 패를 다 꺼낸 건 아닐 텐데요.”

“알고 있소. 그것 때문에 태화문에 도움을 청한 것 아니겠소. 풍도마장?”

유이강이 고개를 돌린 곳.

허연 수염을 쓸어내린 풍도마장이 침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기어이 이 늙은이를 부려먹겠다는 거구려.”

“그래봤자 나보다 어리지 않소? 젊은 시절 온갖 잡스러운 무공을 익혔으니 기운이 혼탁해질 수밖에... 그대의 전성기가 빨리 저문 것은 그 부작용이외다.”

“끄응!”

풍도마장은 부정하지 못했다.

온갖 무공을 연구하겠답시고 자신의 몸으로 시험한 결과 단전의 진기가 흐려졌던 것이다.

“그래도 골골대는 늙은이를 부려먹으려니 마음이 아파지는군. 나중에 위급해지면 도와주시오.”

당장 풍도마장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적들의 의표를 찌를 한 수로 써먹겠다는 계산.

유이강이 싸울 뜻을 밝히자 주변에 있는 흑룡교의 고수들이 호종하듯 뒤를 따랐다.

* * *

“유이강...!”

“멀리서도 눈총이 따갑더군. 얼굴에 구멍 나는지 알았네.”

유들유들한 대답에 명도상인이 코웃음을 쳤다.

“네놈의 내력이 궁금했었지. 본교의 정보력을 동원해도 네놈의 과거를 캐낼 수 없었다. 알고 보니 흑룡교의 잔당이었군.”

“알아낸 게 그게 전부라면 실망인데.”

“뭐라?”

유이강은 대답하지 않고 뒤편에 있는 서안전장주를 힐끔거렸다.

“강룡방주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낙오된 것 같고... 서안전장주만 살아남으셨군.”

“....”

살집이 푸짐한 서안전장주는 뇌리를 헤집는 듯한 시선이 날아들자 어금니를 꽉 물었다.

억지로 체통을 지키는 모습에 가볍게 코웃음을 친 유이강이 심윤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네가 모산파의 대제자였군. 멀리서 한번 봤는데 생각보다 수준이 높아서 좀 놀랐네.”

“유 대인께서 칭찬해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군요. 소생이야말로 유 대인께서 쓰신 대술법에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구천호법이라면 당연히 지녀야 할 소양이지.”

“......!”

“하하, 놀란 표정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군. 그래, 나는 구천호법이라네. 옛날엔 귀산자로 불렸지. 이름을 바꿔서 몰랐을 게야.”

상상 이상의 거물이 튀어나오자 서안전장주와 심윤은 물론, 명도상인까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좌중을 둘러본 유이강이 손을 펴들었다.

“팔대교왕이라면 모를까, 일개 교성이 나를 상대한다고 나섰을 땐 얼마나 가소로웠는지....”

똑같이 삼화취정에 올랐어도 교왕과 교성의 무공은 하늘과 땅 차이. 그리고 팔대교왕과 동급이라고 일컬어지는 구천호법의 무공 역시 마찬가지였다.

“친애하는 혈교 제군들, 마도의 선배로서... 내 오늘 천외천이 뭔지 가르쳐주겠네.”

유이강의 입가에서 웃음기가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촤아아악!

스스로 일어난 한 줄기 빛살이, 혈교 고수들의 허리를 수평으로 양단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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