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사냥 (3)
“갑자기 부르실 줄은 몰랐습니다.”
법복을 입은 술사가 찾아와서 꺼낸 말에 날카로운 수염을 쓰다듬은 명도상인이 서늘한 눈빛을 보냈다.
“그래서 불만인가?”
“하하, 그럴 리가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오면서 들었습니다. 유이강이 사고를 쳤다지요?”
“정확히는 놈의 경매장에서 사고가 터졌지. 자칫하면 광명마교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
“사도의 죽음은 저들도 민감하게 반응할 테니까요. 본교로 치면 교왕이 죽은 거 아닙니까.”
“흘려들을 수 없는 말이군.”
세간에서 사도와 교왕을 동급으로 보더라도, 혈교도로서는 그래선 안 되었다.
술사도 실수를 깨닫고 고개를 숙였다.
“사과드리겠습니다. 속하가 실책을 저질렀습니다.”
“조심하라, 심윤. 모산혈조의 대제자라도 본교의 권위를 능멸하면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야.”
하지만 심윤은 딱히 반성하는 눈초리는 아니었다.
말실수 좀 했다고 자신이 죽는 일 따위는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명도상인 역시 그걸 알고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심윤은 능글거리는 웃음으로 받아냈다.
“그보다 중독자들이 꽤 많던데 정확한 숫자는 어느 정도입니까?”
“천오백 명쯤 된다. 무림인은 삼백 명 정도고.”
“휘유, 엄청나게 많군요.”
청수와 소창후가 조사한 것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드러나지 않은 숫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만하면 어지간한 대문파는 도모할 수 있지 않습니까? 구파나 팔가가 아니고선 제대로 막지 못하겠지요. 다른 흑상의 힘을 빌릴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만.”
“그렇겠지. 하지만 이 기회에 다른 놈들의 힘을 줄이는 게 좋지 않겠나.”
“아하.”
심윤의 실눈이 둥글게 휘어졌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흑상들을 처리하고 놈들이 가진 부를 몽땅 빼앗을 생각이시군요. 한데 흑상들에게 투자를 꽤 하지 않으셨습니까?”
흑상들에게 제공한 비약은 혈교의 입장에서도 어마어마한 자원이 들어간 보물이었다.
일시적으로나마 젊음과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비약을 만드는 게 얼마나 어렵겠는가?
“암시장을 본교의 텃밭으로 만드는 걸로 그들의 역할은 끝났다. 유이강을 죽이면 더 이상 그들의 협조를 받을 필요도 없지. 사냥을 끝낸 사냥개는 삶아먹을 뿐.”
“토사구팽이라... 하긴, 쓸모를 다했다면 더 이상 키워줄 이유가 없지요.”
물론 그 전제조건은 유이강을 죽이는 것이다.
심윤이 어깨를 으쓱였다.
“주문하신 ‘물건’은 가져왔습니다. 한데 유이강이란 자도 참 어지간한가 보군요. 아직 대계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걸 쓰실 줄은 몰랐습니다.”
“성능은 확실하겠지?”
“그야 이를 말씀입니까. 장담컨대 교성께서도 쉽지 않으실 겁니다.”
명도상인의 자존심을 건드릴 수도 있는 말이었지만 심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명도상인 또한 침음만 흘렸다.
“흐음, 그 정도란 말이지....”
“유이강이란 자가 그만큼 강하다면 본교에서도 성과를 인정해주겠지요. 예산이나 많이 타면 좋겠습니다.”
심윤이 한숨을 내쉬었다.
세간에서 마교니 뭐니 불려도 엄연히 조직인 이상 예산의 한계를 벗어날 순 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군. 성과만 확실하면 예산은 원하는 만큼 탈 수 있을 거다.”
“그럼 다행이지요. 기왕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 유이강이란 자의 육신은 온전히 남겨뒀으면 좋겠습니다. 그만한 고수의 시신은 찾기 힘드니까요.”
“기대하지 마라. 유이강은 쉽지 않은 상대다.”
비밀병기가 왔어도 명도상인은 방심하지 않았다.
방심해도 될 만큼 만만한 상대였다면 여태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단숨에 죽였을 터였다.
* * *
암시장이 편한 점은 천장이 태양을 가로막았기 때문에 낮이든 밤이든 어두컴컴하다는 것이다.
아침 일찍 객잔을 나서도 태양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게 얼마나 큰 이점인지, 강엽은 암시장에 들어와서야 제대로 실감했다.
‘여섯 번째 능력을 얻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초감각, 재생력, 암신, 초음, 그리고 혈목.
혈목을 얻은 지 다섯 달째에 접어든 지금, 강엽은 여섯 번째 능력이 깨어날 조짐을 감지했다.
흡혈귀의 능력을 더 많이 각성할수록, 혈공진기의 화후가 깊어질수록 태양에 대한 저항력이 높아진다.
아직은 화상을 피할 수 없지만, 언젠가는 저 태양마저 두려워하지 않는 날이 오겠지.
하지만 그때가 되면....
“어떻게 할까? 전처럼 몰래 들어가?”
바로 옆에서 백서희가 묻고 나서야 강엽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시선을 멀리 향했다.
며칠 전엔 쉽게 드나들었던 호연장의 담벼락.
얼핏 보면 그때와 다를 게 없었지만, 대문 안쪽에서 일렁거리는 기파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장소가 됐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백서희도 뭔가를 느꼈는지 입맛을 다셨다.
“은밀히 병력을 불렀다더니 수준이 다르네. 몰래 침입할 수는 없겠어.”
“정면으로 가자.”
어차피 호연 장주를 제압한 시점에서 월담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정면에서 등장한 두 사람의 모습에 대문을 지키는 문지기들의 시선이 모였다.
둘 다 얼굴의 인상을 약간 변장한 채 무복을 걸치고 허리춤에 병장기를 패용한 모습.
다만 백서희는 면사를 걸치고 있었는데, 얼굴은 가려도 육감적인 몸매를 가리긴 쉽지 않은지라 문지기들은 본능적으로 눈으로 몸매를 훑으며 목구멍을 꼴깍 움직였다.
대문 앞에 선 강엽이 운을 뗐다.
“호연 장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왔으니 기별이나 넣어주시오. 이틀 전에 약속한 사람이 왔다고 말이오.”
양지의 장원들과 달리 암시장의 장원에는 현판을 붙이지 않는다.
흑상들이 자신들의 정체를 감추고자 암시장의 모든 장원에 똑같은 조치를 한 것.
달리 말하면 호연장을 똑바로 찾아왔다는 것은 내부인이 알려주지 않고서야 불가능에 가까웠다.
지금은 흑상들이 외부의 병력을 은밀히 들여오는 만큼 문지기들도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렇게만 전해드리면 되겠소?”
“그렇소. 남녀 이인조라고 말씀드리면 될 거요. 섬영문(閃影門)의 제자들이 왔다고 전해주시오.”
두 사람의 별호인 귀영과 섬무검예에서 한 글자씩 따와서 만든 가상의 문파.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 문지기들이 고개를 갸웃했지만, 이내 순순히 안쪽으로 기별을 전하러 갔다.
애초에 장주가 초대장을 보내지 않았다면 두 사람이 암시장에 출입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잠시 후 답을 받고 돌아온 문지기 뒤로 늙은 총관이 나와서 두 사람을 살펴봤다.
“섬영문이라고 하였는가?”
“그렇습니다, 총관님.”
“노부가 총관인 걸 바로 알아보는구먼.”
“호연장의 장주님을 보필하는 분이라면 십중팔구 총관님일 테니까요.”
“눈썰미는 나쁘지 않군. 하나만 정정하자면 여긴 호연장이 아닐세. 본가는 다른 곳에 있거든. 여긴 암시장에 올 때마다 쓰는 별장에 불과하네.”
“그렇군요. 소생이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한데 초대장은 모두 노부가 보냈는데 섬영문이라는 이름은 기억나지 않네만.”
암시장에 들어올 수 있는 초대장을 일일이 만드는 걸 장주가 할 리가 있나.
호연장에선 장주가 누군가를 지명하면, 눈앞의 총관이 그 업무를 대행하고 있었던 것이리라.
어딘지 두 사람의 정체를 의심하는 듯한 총관의 눈빛에도 강엽은 침착하게 받아넘겼다.
“초대장은 옛날에 다른 경로로 얻었습니다. 장주님과는 개인적인 인연이 있어서... 장주님께서 저희를 모른다고 하진 않으셨을 텐데요?”
“으음.”
총관의 잇새 사이로 침음이 나왔다.
“자네 말대로 장주님은 자네들을 알고 계셨네. 다만 확인차 물어봤을 뿐이니 괘념치 말게.”
“총관님께서 걱정하시는 것도 당연합니다.”
“바로 장주님을 뵙겠는가?”
“장주님께서도 바쁘시지 않겠습니까. 나중에 저희가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그런가. 따라오게나.”
총관이 안내한 외원의 객당.
월동문을 지나서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제법 아름답게 꾸며진 연못 딸린 안뜰이 나왔다.
암시장의 환경 때문에 어둡긴 해도 곳곳에 설치된 석등이 시야를 밝혀준 덕에 연못에 빠지거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염려 따위는 없다.
그러나 기감을 곤두세우고 있떤 강엽은 안뜰을 둘러보기도 전에 객당에 신세를 지는 자들을 헤아렸다.
두 사람에게는 다소 허술했던 장원을 침입불가의 철옹성으로 만든 고수들의 존재감.
[흠, 고수들의 숫자가 두 배는 많아진 것 같은데? 수준도 전보다 훨씬 높아진 것 같고.]
[호연장의 무인들이나 빈객들이겠지. 급하게 섭외한 고수들도 있을 테고.]
“자네들 방은 이쪽일세. 방은 두 개를 줘야겠지?”
“하나면 충분합니다.”
남녀의 잠자리를 갖지 않는다 해도 적진에 들어온 이상 두 명이 같이 지내는 게 나으리라.
젊은 남녀가 같은 방에서 묵겠다는 말에 총관이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지만 모두가 여상히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푸핫,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여기 장주는 여색을 무지막지하게 밝히거든. 예쁘장한 시비들은 죄다 침실로 끌어들여서 범했다지?”
감히 총관의 앞에서 장주를 모욕하는 언사.
허연 눈썹을 치켜뜬 총관이 무우라 말하기도 전에 천장에서 작은 인영이 툭 떨어진다.
군데군데 섞인 새치만 아니면 소년이라고 오해했을 앳된 남자가, 총관을 돌아보면서 이죽거렸다.
“뭐, 어디 가서 처맞았는지는 몰라도 눈탱이 밤탱이가 됐으니 당분간 여자랑 뒹구는 건 꿈도 못 꾸겠지만.”
“소마동(小魔童) 어르신, 말씀을 삼가주십시오.”
“이 몸이 틀린 말을 했나?”
“....”
아예 대꾸하지 않으려는지 총관은 눈꺼풀을 닫은 채 숨을 골랐다.
초대를 받고 왔음에도 주인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소마동은 그제서야 강엽과 백서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후배들은 어디서 온 아무개냐? 나름 흑상의 초대를 받고 왔다면 무명은 아닐 텐데.”
“섬영문의 강영입니다, 선배. 이쪽은 제 사매인 예희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이름과 별호를 적당히 섞은 가명.
생소한 문파와 이름에 소마동은 일순 의구심을 내비쳤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게 미소를 흘렸다.
“아아, 섬영문의 후배들이셨군. 만나서 반갑다. 저 노친네가 지껄인 것처럼 난 소마동이다. 내 이름을 들어봤는지 모르겠구만. 내가 얼굴은 이래 보여도 삼십 년 전부터 강호에서 살았거든.”
“저희들의 강호 경험이 일천한지라... 혹시 선배님께선 섬서에서 활동하셨습니까?”
소마동의 말투에 어린 억센 섬서 억양.
하후진과 비슷한 억양으로 강엽은 소마동이 섬서에서 활동했으리라 추측했고, 그 추측은 사실이었다.
“그래, 쭉 북쪽에서 활동했었지. 사실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일월신교에 갈 생각이었는데....”
소마동의 입술을 비집고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일월신교의 분타가 깡그리 사라졌더라고. 완전히 불타서 없어졌던데....”
남들 앞에서 마교에 투신할 거라고 얘기하는 게 황당했지만, 소마동은 사마외도였다.
초음으로 소마동의 체내를 살핀 강엽은 예상과 다른 결과에 내심 놀랐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는군.’
고수라는 것은 보자마자 알았지만, 중단전을 개방한 것을 넘어 상단전까지 발달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기신이 합일되어 삼화취정을 이룬 고수들과 비교하면 묘하게 일그러진 상태.
하단전과 중단전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상단전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하게 꼬인 상태라고 할까.
“...일월신교와 연통할 방법이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한중에 왔는데 이쪽 장주가 내 단골 기루에 사람을 보내더군. 자길 좀 도와줄 수 있냐고 말이지.”
강엽이 자신을 속속들이 관찰하는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 소마동의 모습.
“아무튼 잘 해보자고. 이 싸움에서 이기면 한몫 거하게 챙겨준다던데. 돈 받으면 잠수 좀 타다가 다시 일월신교로 갈 방법을 찾아봐야지.”
“왜 일월신교로 가시려는 겁니까?”
“...어엉? 혈교랑 광명마교가 설치고 있는데 당분간은 몸 사려야지. 어차피 일월신교로 가면 부귀영화를 얻을 수 있는데 뭐하러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피를 봐?”
약간 뒤늦게 튀어나온 대답.
강엽은 왠지 소마동이 대답을 회피한다는 인상을 받았지만, 남의 개인사야 그가 알 바 아니었다.
그보단 소마동처럼 흑상이 끌어들인 고수들의 면면을 파악하는 게 더욱 중요하리라.
흑상, 그리고 배후에 있는 혈교를 쓰러트리려면 흑상이 섭외한 고수들과 충돌할 테니까.
‘소마동을 제외한 객당의 고수들은 총 여섯 명.’
그 모두가 소마동 같은 고수들은 아니다. 중단전을 개방한 고수들은 기껏해야 한 명뿐.
하지만 다른 다섯 명도 절정고수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 * *
“흑상이 대단하긴 하네. 며칠 만에 이런 고수들을 섭외하고 말이야.”
침상에 엎드려 누운 자세로 얼굴을 괸 백서희가 시원하게 쭉 뻗은 다리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화리목 걸상에 앉아서 검날을 닦고 있던 강엽이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어했다.
“그러다 옷에 주름 생긴다.”
장주를 찾아가겠다고 한 것과 달리 밤이 될 때까지 방에서 두문불출한 두 사람이었다.
이경에 접어든 시간인데도 불구하고 낮에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은 채 밤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백서희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에휴, 방에서 자는데 불침번을 서야 하다니....”
“적진인데 어쩌겠냐.”
호연 장주의 목숨을 저당 잡긴 했어도 만약을 대비해서 두 사람이 번갈아서 잠들기로 했다.
“내가 먼저 설 테니까 그동안 푹 쉬어.”
“응, 제때 깨워줘야 해.”
하지만 강엽이 깨워주지 않아도 은밀한 기척들이 몰려오자 백서희는 절로 잠에서 깨어났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그녀가 미간을 좁혔다.
“이거 호연장이 아닌 것 같은데?”
기척은 외부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강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유이강이 선제타격을 가한 모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