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90화 (190/450)
  • 34화. 사냥 (2)

    호연 장주는 바보가 아니었다. 순순히 이실직고한다고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안다.

    하물며 그 자신은 이들이 누군지도 모르지 않은가.

    분근착골을 당한 고통으로 생각이 제대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머리를 쥐어짜내면서 최대한 시간을 끌어봤다.

    “쿨럭, 네놈들... 흑상을 건드리다니 정신이 나갔구나. 뒷감당을 할 자신이 있느냐?”

    “이게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짜악!

    어이가 없다는 듯리 피식거린 백서희가 대뜸 호연 장주의 따귀를 찰지게 후려치는 소리.

    고개가 돌아간 호연 장주는 뒤늦게 자신이 뺨을 맞았다는 것을 깨닫고 벌겋게 부어오른 뺨을 부여잡은 채 분노를 내뿜었다.

    “너, 너...! 뺨은 아버지한테도 맞은 적 없는데...!”

    “뭐든 처음이 있는 법이지.”

    강엽은 백서희를 말리지 않았다. 교활하게 눈알을 굴리는 놈에겐 생각할 시간을 오래 줘선 안 되었으니까.

    “큭, 멍청한 연놈들... 내가 죽으면 다른 흑상들이 나설 거다!”

    “흑상들에게 의리란 게 있었나?”

    “당연히 없지! 한 놈이 약점을 드러내면 다 같이 물어뜯는 놈들인데! 하지만 지금은 거사를 앞두고 있단 말이다!”

    “...거사?”

    “우리도 혈교가 암시장을 침범한 걸 봐줄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진 누가 비약을 뿌리는지 몰라서 손을 쓰지 못했을 뿐! 하지만 이젠 달라. 유이강이라고 아나?”

    “그게 누구지?”

    “경매장의 주인이지. 놈이 비약을 뿌렸단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손을 잡고 놈을 처단하기로 했다.”

    호연 장주의 태도를 보건대 두 사람이 유이강과 연관이 없음을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유이강이 보낸 사람들이라면 흑상이 누군지, 혈교도가 누군지 물을 이유가 없으니 말로 구슬릴 수 있다고 판단한 걸까.

    그는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띠우며 두 사람을 어르고 달랬다.

    “너희가 누군지 모르겠지만 백도 문파나 무림맹에서 왔겠지. 날 죽이면 거사가 멈춘다. 혈교를 뿌리 뽑는 일에 문제가 생긴단 말이다!”

    “흑상이 모인 이유가 그 유이강이라는 자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그래. 유이강의 세력은 흑상 중에서 가장 크다. 놈을 죽이려면 다른 흑상들이 손을 잡아야 해. 너희가 날 죽이는 건 유이강을 도와주는 거다.”

    얼핏 그럴듯하게 들리는 논리.

    강엽이 무심하게 물었다.

    “계획이 뭐냐?”

    “...뭐?”

    “그 유이강인지 뭔지 하는 놈을 치겠다며. 공정하게 비무 따위를 할 리는 없고. 암습을 하거나 독살을 하겠지. 우르르 몰려가서 죽이거나.”

    “그건 기밀이라서 말해줄 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목을 지나는 경동맥을 지긋이 누르는 서늘한 예기.

    비수를 드리운 백서희가 한기 가득한 눈동자로 쏘아보자 호연 장주는 입 안이 바짝 마른 나머지 목울대를 꼴깍 움직였다.

    “이, 이봐, 말로 하자고....”

    “응. 우리도 말로 하는 거 좋아해. 좋은 말로 할 때 순순히 불면 유혈사태는 없을 거야.”

    “...기가 드센 여자군. 자고로 여자란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 제맛....”

    다음 순간 호연 장주는 따끔한 고통에 헉 하고 목을 부여잡았다.

    “크업, 젠장...!”

    “지랄하고 자빠졌네, 발정난 개새끼. 경동맥 안 베었거든?”

    진짜였다. 경동맥 주변의 살갗을 살짝 그어버렸을 뿐.

    하지만 정말 목이 베이는 두려움을 느낀 호연 장주의 낯짝은 백짓장처럼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강엽이 다시 한번 말했다.

    “정말 혈교의 세력을 뿌리 뽑을 생각이라면 계획을 말해라.”

    “하지만 네놈들을 뭘 믿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하면 도와주마.”

    “...진심이냐?”

    예상을 벗어나는 말에 호연 장주가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대답이 늦어지자 강엽의 눈매가 매서운 살기를 띠었다.

    “왜, 문제 있나? 너희들 입장에서도 고수가 합류하면 좋은 거 아닌가?”

    “그, 그렇긴 한데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이건 문제가....”

    “걱정 마라. 우리 몫을 달라고 하진 않을 테니까. 우린 비약을 뿌리는 놈만 처단하면 돼. 뒷일은 우리 알 바가 아니야.”

    “...그걸로는 부족해. 너희의 뭘 보고 믿나?”

    “우릴 믿을 필요는 없어.”

    강엽이 턱주가리를 잡고 억지로 벌리자 백서희가 작은 호리병을 꺼내 이름 모를 액체를 흘려넣었다.

    “으으읍!”

    잡힌 와중에도 본능적인 위기감에 발버둥을 치는 호연 장주.

    그러나 정체불명의 액체가 목구멍을 막자 살기 위해서라도 꿀꺽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연 장주가 정신을 못 차리는 동안 강엽은 흑룡비환에 내재된 혈독을 상처를 입은 목 부위에 은밀히 흘려넣었다.

    “케엑! 쿨럭쿨럭! 이게 뭔...!”

    “독이다.”

    토악질을 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강엽이 다시 목을 붙잡아서 억지로 삼키게끔 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사지백해가 돌처럼 굳을 거다. 다 굳으면 그땐 죽는 거야.”

    사실 호연 장주에게 먹인 건 당묘정이 만약을 위해 준 해독제였다.

    술법을 쓴 것을 감추기 위해 해독제를 독으로 둔갑시킨 것.

    “이, 이런 개 같은...!”

    “우리도 널 믿을 수 없거든. 신뢰 문제는 네 목숨을 붙여두는 걸로 갈음하지.”

    죽기 싫으면 협조하라는 소리.

    강엽은 한술 더 떠서 호연 장주의 몸에 스며든 혈독을 발동시켰다.

    “허억...!”

    목의 감각이 사라졌으니 강엽의 말이 허언이 아님을 알았으리라.

    사시나무처럼 벌벌 떠는 호연 장주의 머리채를 끌어당긴 강엽이 시선을 강제로 맞추었다.

    “거사일이 언제인지, 어떻게 유이강을 칠 건지 불어.”

    “...아, 알겠다.”

    호연 장주도 계속 입 다물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든 주도권을 잡기 위해 뻗댄 건데 다짜고짜 독을 처먹일 줄이야.

    원한을 곱씹으면서도 그는 거사의 계획을 얼추 말해주었다. 그를 포함한 네 명의 흑상이 병력을 모아 유이강을 불시에 치기로 했다는 계획.

    강엽과 백서희가 눈빛을 교환했다.

    [어떤 것 같아?]

    [글쎄, 계획 자체는 진짜인 것 같은데....]

    [좀 찜찜하지? 유이강이 정말 혈교의 편인지도 알 수 없고.]

    [석연찮은 점이 있긴 해.]

    암시장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흑상들이 비약을 뿌리는 큰손의 정체를 몰랐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약재상을 털기만 해도 누군지 알 수 있는 일이야.’

    아무리 유이강의 세력이 강대해도 약재상들이 다른 흑상에게까지 사실을 숨길 순 없는 노릇.

    결정적으로 강엽은 호연 장주의 몸에서 풍기는 희미한 술법의 잔향을 느꼈다. 어떤 술법인지는 몰라도 기운이 혼탁한 것이 사마외도의 느낌처럼 다가왔다.

    [이놈이 사기를 치는 것 같다.]

    [그냥 죽일까?]

    [아니, 이렇게 된 이상 역으로 이용하는 게 낫겠어.]

    어쨌든 유이강이라는 흑상이 다른 흑상들에게 견제받는 것은 사실.

    그렇다면 호연 장주에게 낚이는 척하면서 그 안에서 변수를 만들어내는 게 낫지 않겠는가.

    ‘그래도 거사일을 미리 안 건 엄청난 행운이군.’

    유이강이란 자가 얼마나 강한지 몰라도 흑상들이 그를 진작에 치지 못했다면 만만한 자가 아니리라.

    그럼에도 굳이 이 시점에서 유이강을 치려는 건 아마 경매장의 소란과 깊은 연관이 있을 터.

    광명마교가 쳐들어오기 전에 유이강을 죽이고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기 위함이라면, 흑상들이 뒤늦게 작당모의를 하는 것도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흑상들이 병력을 들여오겠다고 했지? 우리 자리도 만들어라.”

    “...두 명만 만들면 되나?”

    “그래.”

    놈이 뒤통수를 치지 못하도록 독을 먹여뒀지만 이쪽의 전력을 알려줄 생각은 없다.

    ‘흑상의 정보력이라면 우리 인원만 알아도 역추적할 수 있겠지.’

    바깥으로 드러난 칼보다는 숨겨진 칼이 더 치명적인 법.

    암시장 바깥에서 신호만 기다리는 아군과는 별개로, 강엽은 일행의 전력을 최대한 감췄다가 결정적인 순간 한꺼번에 터뜨릴 작정이었다.

    “독은... 해독제는 있겠지?”

    “이걸 먹어라.”

    다른 호리병을 건네자 호연 장주는 주저하면서 조금씩 내용물을 삼켰다.

    그때에 맞춰 술법으로 굳어버린 목을 살짝 풀어주자 감각을 되찾은 호연 장주의 안색이 한결 편해졌다.

    “죽다 살아났군....”

    “안심하기엔 이른걸. 그 해독제는 독을 억제할 뿐이다. 완전히 해독하는 건 아니야.”

    “뭣!? 그, 그럼 어쩌라고!”

    “진짜 해독제는 거사가 끝난 뒤에 주지.”

    “....”

    호연 장주의 안색이 다시 거멓게 죽든 말든 매정하게 몸을 돌린 두 사람이었다.

    호연 장주가 급히 외쳤다.

    “자, 잠깐! 난 데려다줘야 할 거 아니냐!”

    “알아서 찾아가라. 그런 체력도 없이 밤일을 하는 건 아닐 거 아니냐?”

    그렇게 두 사람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호연 장주는 일그러진 얼굴로 털썩 주저앉았다.

    “시발! 찢어죽일 새끼들, 내가 이 원한은 반드시...!”

    “아, 깜빡할 뻔했네.”

    별안간 옆에서 들리는 여인의 미성.

    순간 심장이 철렁인 호연 장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딸꾹질까지 했다.

    “뭐, 뭐냐?”

    “네가 괴롭힌 그 시비, 책임지고 제대로 치료하라고. 안 그러면....”

    섬뜩한 살의가 목끝을 스치고 지나간다. 백서희는 경고를 남긴 뒤 홀연히 사라졌지만, 호연 장주는 감히 꿈쩍도 하지 못했다.

    마치 심장이 베인 것 같은 기분에 익사한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렸다.

    * * *

    호연 장주는 비틀거리며 장원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혈라분에 중독된 약쟁이들과 마주칠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몰랐다.

    그렇게 좁은 골목을 돌아서 간신히 장원에 도착한 그의 모습에 문지기들이 깜짝 놀랐다.

    “아니, 장주님? 이게 어찌된...!”

    “이 무능한 새끼들!”

    퍼억!

    뜬금없이 욕을 먹은 것도 모자라 무릎을 까인 문지기들은 억울해했지만 왜 그러냐고 따질 수도 없었다.

    한동안 신경질을 부린 호연 장주가 땀으로 범벅이 된 이마를 쓸어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장원에 별고 없었나?”

    “아, 예! 어, 없습니다!”

    “그 말이 참이렷다?”

    “소인들이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습니까.”

    문지기들이 억울해하는 모습에 호연 장주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 당원의 무인들은 침입자가 왔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한데 장주님, 얼굴에 상처가... 호, 혹시 싸우신 겁니까?”

    “...흥, 알 거 없다. 총관이나 불러와라.”

    장주의 신변에 변고가 생겼음을 안 가솔들은 호들갑을 떨었다.

    늙은 총관과 가내무사들은 면목이 없다면서 고개를 들지 못했지만 호연 장주는 화를 낼 기운도 없는지 의원이나 불러오라고 닦달했다.

    그렇게 가솔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광경을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다.

    백서희가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일 끝나고 저 새끼 살려둘 거야?”

    시비가 당한 모습을 보고 열이 뻗쳤던 걸까?

    강엽이 그녀의 등을 살살 어루만지면서 위로했다.

    “우리가 손 쓰지 않아도 저놈은 죽어.”

    “하긴. 유이강이란 인간이 이기면 흑상들을 죄다 죽여버리겠네. 근데 유이강이라는 사람이 흑상들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흑상들은 그렇다 쳐도 혈교가 있잖아.”

    “그건 까봐야 알겠지. 그래도 혈교가 여태 내버려둔 걸 보면 유이강 본인도 상당한 고수가 아닐까 싶은데. 교성급 이상이 혈교의 배후에 있다는 걸 상각하면 아마....”

    양측의 전력을 미루어 짐작하면서 싸움의 양상을 머릿속에 그린다.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으나 양측 모두 준비를 철저히 했다면 싱겁게 끝나지는 않으리라.

    ‘고래 싸움에 등 터지지 않게 조심해야겠지.’

    두 세력의 싸움에서 변수를 만들어 상황을 자신이 원하는 국면으로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것.

    그것이 강엽의 목표였다.

    * * *

    두 사람이 객잔에 돌아왔을 땐 청수와 소창후도 복귀한 뒤였다.

    “중독자들이 예상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숙련된 무인들도 다수 보이더군요.”

    “중독자들만 따지면 천 명은 우습게 넘어갈 것 같고, 무인들만 해도 이백 명은 훨씬 넘었어요.”

    두 사람의 목격담에 일행의 안색에 흐린 먹구름이 드리웠다.

    천 명이라면 어지간한 대문파에 준하는 인원.

    당연히 질적인 수준은 못 미치겠지만, 그만한 대병력이 한꺼번에 들이친다면 우습게 볼 수 없었다.

    야차마곤이 심각하게 물었다.

    “혈라분 중독자들은 악력이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나?”

    “악력만 강해지는 게 아니라 고통을 덜 느끼고, 굉장히 맹목적으로 변해요. 증세가 심한 자들은 사지가 잘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고요.”

    두려움을 모르는 일천의 군세와 죽고 죽이는 혈전을 벌여야 할 판국.

    청수가 강엽을 돌아봤다.

    “작전을 결행하실 겁니까?”

    “상황을 지켜봐야겠지. 일이 생각보다 복잡해지고 있어.”

    호연 장주를 심문해서 알아낸 사실을 말하자 일행 모두 망연해졌다.

    “...흑상들끼리 싸운단 말입니까?”

    “증거는 없지만 연합한 네 명이 혈교와 손을 잡은 것 같다.”

    “그럼 우린 유이강이란 사람을 도와야 하는 겁니까?”

    강엽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저쪽에서 우릴 받아줄지 알 수도 없고... 설령 합류한다 해도 효과는 그리 크지 않겠지.”

    그러나 안쪽에서 흔들면 달라진다.

    유이강의 세력이 열세에 처해도 일행이 안쪽에서 흔들면 혈교와 흑상도 온전히 집중하지 못할 테니까.

    강엽이 야차마곤을 돌아봤다.

    “신호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저희 쪽으로 와주십시오. 지금은 따로 움직이는 게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음, 알겠네.”

    “호연 장주의 말에 의하면 결행은 나흘 뒤입니다. 저와 서희는 하루 전날 호연장에 가겠습니다.”

    그때까지 몸 상태를 최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당 소저는 독을 최대한 많이 준비해주시오. 다수와의 싸움에선 당 소저의 역할이 가장 클 테니까.”

    “알겠습니다. 약재상에 들러야겠네요.”

    암시장인 만큼 평범한 약방에선 취급하지 않는 독초들도 많으니 독을 제조하는 건 수월하리라.

    강엽이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일행을 쭉 둘러봤다.

    “누가 혈교든 나흘 뒤엔 끝장을 볼 겁니다.”

    살아남으려는 자와 죽이려는 자, 그 뒤에서 계획을 꾸미는 자까지.

    음모의 밤이 깊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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