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7화 (187/450)

33화. 큰손 (6)

대환단의 입찰이 보류됐다는 소식과 함께 경매가 파하자 장내는 시끄러워졌다.

혹자는 경매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제아무리 돈이 많은 부자라도 흑상의 뜻을 거스를 순 없었다.

그렇게 어수선한 상황에서 일행은 객잔에서 다시 모였다.

“청수 도장과 소창후는 아직인가?”

“뒷골목을 탐문하겠다고 했으니까요. 우리보단 오래 걸릴 겁니다.”

강엽의 말에 야차마곤은 그러려니 했다.

사실 경매장의 후폭풍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야차마곤만 그런 게 아니라 백서희와 당묘정도 벌집을 헤집은 기분이었다.

“대체 그 작자는 누구야?”

“...모르죠.”

따로 행동한 백서희 덕분에 일행 모두 경매장에선 공개되지 않은 비밀까지 알 수 있었다.

비갑채주의 수급뿐만 아니라 광명마교 칠사도의 수급까지 목함에 담겨 있었다는 것을.

“저기, 강엽. 우리가 저번에 만난 팔사도 말이야. 삼화취정의 고수라고 하지 않았어?”

“...그랬지.”

강엽도 충격은 받은 건 매한가지였다. 사내가 강할 거라 짐작은 했지만, 광명마교의 사도를 죽일 줄이야?

“사도의 서열이 무공의 강함과 일치하진 않더라도 칠사도가 팔사도보다 약하진 않을 거야.”

“삼화취정의 고수를 죽일 만한 고수라니... 이거 혈교보다 더 큰일 같은데.”

사내가 정말 사도를 죽였다면 천하팔존에 필적한다고 봐야 하리라.

당묘정도 혼란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대환단이 누구한테 넘어갈지 모르겠네요.”

“누군가는 손에 넣겠지.”

정체불명의 사내가 얻든, 조영옥이 얻든 대환단은 둘 중 한 사람의 손에 들어갈 공산이 컸다.

그 이상은 일행이 관여할 계제가 아니다.

“장발의 사내는 혈교나 흑상과는 상관없을 겁니다. 두 세력과 관련이 있다면 돈은 넉넉했을 테니까요.”

“동의. 광명마교를 들쑤실 짓을 할 이유가 없어.”

“그런 짓을 해봤자 손해니까요.”

강엽과 백서희, 당묘정이 차례대로 말했다. 야차마곤도 고개를 끄덕이며 세 사람의 의견에 동의했다.

강엽이 콧잔등을 찌푸렸다.

“정리하지. 그 남자와 조영옥을 제외하고 대환단에 입찰한 자들은?”

“총 여덟 명이었어. 다들 오십만 냥 이상을 부르더라. 그 사람들 몸에 표식을 남겨뒀어.”

당묘정과 야차마곤은 그 표식이 피라는 것을 모른다. 강엽이 술법으로 그들의 행방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여덟 명이라... 아슬아슬한데.”

혈종술이 유용한 술법이긴 해도 한 번에 쫓을 수 있는 대상의 숫자는 정해져 있었다.

큼지막한 양피지를 펼쳐두고 미리 흑룡비환에 담아둔 혈종술을 발동하자 혈점들이 떠올랐다.

각각 다른 경로로 향하는 혈점들.

그중 하나는 놀랍게도 일행이 머무르는 한평루로 오는 중이었다.

“...누구지?”

“호북금상(湖北金商) 같군.”

호광성에 있는 큰 상단이었다.

강엽은 한평루에 상단의 표식을 새긴 무인들을 봤던 얘기를 해주자 일행도 납득했다.

당묘정이 물었다.

“호북금상이 흑상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내가 몰래 염탐해볼까?”

백서희가 실력을 발휘한다면 호북금상의 무리 사이에 잠입하는 것은 일도 아니리라.

암시장 최고의 객잔답게 고수들이 많았지만 그녀의 은신을 알아차릴 만한 고수는 없었으니까.

“만약을 대비해서 확인은 해야겠지만...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응? 왜?”

“어제 우리가 만난 길잡이가 했던 말 기억하지?”

“그 인간이 어떤 말을... 아!”

무언가 깨달았는지 백서희의 눈이 반짝였다.

야차마곤이 답답해했다.

“자네들만 알지 말고 속 시원히 말해보게. 어제 뭔가 따로 들은 겐가?”

“하오문의 길잡이가 말하길 북쪽 구역에 장원들이 있다고 하더군요.”

“장원? 이 암시장에 말인가?”

“예. 그래서 암시장에 자주 오는 귀빈들은 객잔을 잡지 않는다고 합니다. 별장처럼 장원을 두고 거기에 수행원들과 함께 머무르는 거지요.”

그러니 호북금상은 흑상이 아닐 가능성이 컸다. 흑상이라면 필시 장원을 마련했을 테니까.

“문제는 북쪽 구역이 아무나 접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겁니다. 장원 주인에게 초대를 받지 않는 한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건 하오문도 해결해주지 못한 문제였다. 암시장에 장원을 마련해두지 않은 것이다. 암시장에 장원을 마련하려면 흑상들이 동의해야 했다.

“저와 서희는 호북금상을 살펴본 뒤 북쪽 구역에 잠입하겠습니다.”

“조심하게.”

여덟 명 중 누가 흑상의 끄나풀일지 모른다. 하나 흑상의 뒤에 혈교가 있다면 최악의 경우 혈교와 싸워야 할 수도 있으리라.

* * *

강엽의 예상대로 호북금상은 흑상이 아니었다.

애초에 대리인을 보내지도 않았거니와, 상단주가 호위와 함께 경매장에 갔던 것이다.

상단주와 호위가 나눈 대화로 그 사실을 알아챈 두 사람은 즉시 한평루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북쪽으로 향한 혈점의 숫자는 셋. 호북금상을 제외한 네 개의 혈점은 다른 방향에 고루 퍼졌다.

“두 명은 경매가 끝나자마자 암시장을 나간 것 같다. 출구로 갔어.”

“그쪽은 신경 쓸 필요 없겠네.”

“그래, 나머지 둘도... 방향을 보면 객잔 같고.”

암시장엔 고급 객잔이나 기루가 많았다. 한평루가 가장 좋은 객잔으로 평가받지만 그에 버금가는 곳도 곳곳에 있었다.

그렇게 혈점이 멈춘 북쪽 구역으로 걷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위화감을 깨닫고 멈칫했다.

“.......”

이제까지 지났던 길과는 다른 적막한 거리.

경매가 끝나면서 인파가 빠져나갔기 때문이 아니다. 완전히 다른 공간에 들어온 것처럼 공기가 달라졌다.

거리에 누운 거지들이나 여상하게 장사하는 노점상들이 힐끔거리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암시장에서 오래 지낸 자들조차 꺼려할 정도로 이 앞으로 가는 길이 안전하지 않다는 뜻이겠지.

“돌아갈 거야?”

“그편이 안전하겠지만....”

역설적으로 중심부인 상가 구역에서 북쪽 구역까지 가는 가장 빠른 길이 이쪽이다.

돌아가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그게 더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는 바.

우우우우우웅-!

초음으로 거리 구석구석을 손금 보듯 자세히 살핀 강엽의 표정에 묘한 기색이 떠올랐다.

“...의외인데.”

“뭔데 그래?”

“가보면 알 거야.”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조금만 가면 되니까.

그렇게 복잡할 골목을 돌고 돌아 이십장 쯤 나아갔을 때 백서희도 강엽의 말뜻을 깨닫고 아연해졌다.

“이건...!”

등롱도 달지 않은 어두운 거리.

토사물과 곰팡이로 범벅이 된 더러운 뒷골목에 사람들이 시체처럼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흐으으... 흐으으으...!”

“헤, 헤헤. 헤헤헤헤....”

초점이 맞지 않는 눈은 썩은 생선처럼 흐리멍텅해서, 낯선 사람들이 왔음에도 돌아보지 않는다.

토끼처럼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침을 질질 게워내는 비쩍 마른 몰골. 남이 흘린 토사물 위에 아무렇지 않게 누워서 실실 쪼개고 있었다.

다른 자들 모두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비슷한 꼬락서니였다.

쪼그려앉은 채 알 수 없는 말을 꿍얼거리거나, 갑자기 비명을 지른다. 심지어 옆사람이 갑자기 주먹질을 해도 별 반응이 없었다.

“우웨엑-!”

말문이 막힌 두 사람의 앞에서 웬 곱사등이가 구역질을 해댔다.

다른 사람들처럼 실핏줄이 돋았지만, 완전히 이성을 잃진 않았는지 그럭저럭 초점이 잡힌 눈빛.

“흐, 뭐야. 멀쩡하게 생긴 새끼들이... 여긴 왜....”

이내 히죽히죽 입꼬리를 씰룩거린 그가 손바닥을 비볐다.

“너희들, 돈 많지? 가진 거... 다 내놔...!”

비틀거리며 걸어온 곱사등이가 강엽의 멱살을 쥐려고 했다. 무공을 익혔는지 약기운에 취했음에도 제법 매서운 기운이 서려 있었다.

곱사등이의 주먹이 벽돌을 쾅 치자 균열이 일면서 부스러기가 떨어졌다.

하지만 강엽과 백서희는 이미 곱사등이를 피해서 골목 위쪽의 지붕에 올라간 상태였다.

곱사등이가 고개를 돌리며 악다구니를 썼지만 은신술을 펼친 두 사람을 찾진 못했다.

“여기에 약쟁이들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말로만 듣던 것보다 훨씬 심각한걸.”

“이 약쟁이들 소굴이 여기서부터 반경 오십 장까지 널리 퍼져 있다.”

“흑상들이 이 꼬라지를 그냥 놔뒀다고?”

“글쎄, 일부러 놔둔 건지 그들도 방법이 없는 건지....”

남쪽 구역에 있는 출구를 제외하면 암시장은 상가 구역을 중심으로 서북동 삼면에 형성된 상황.

중심부와 북쪽을 제외한 나머지 동서 구역은 치안이 나쁘다고 알려져 있었다.

동쪽이 독물이나 화탄 등 위험한 물건을 거래하는 진정한 음지라면, 서쪽은 파산한 빚쟁이와 약쟁들이 몰리는 밑바닥이라고 했던가.

“동서 모두 혈라분 중독자들이 늘어나고 있다더니 여기까지 침투한 모양이야.”

그렇게 말하는 강엽의 손엔 어느덧 작은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좀 전에 곱사등이 사내가 시비를 걸 때 피하는 척하면서 놈의 혈라분을 슬쩍한 것. 스멀스멀 올라오는 피냄새를 맡은 강엽이 말했다.

“을약이군.”

당문은 두 종류의 혈라분을 각각 갑약과 을약으로 분류했다. 교도들은 갑약을 복용하지만, 평범한 중독자들은 을약을 복용하며 서서히 혈교에 세뇌된다.

다시 한번 초음의 파동을 퍼뜨려 중독자들을 세세히 살핀 강엽이 표정을 굳혔다.

“대부분은 일반인이지만 무림인들도 적지 않아. 단전의 진기가 잡스러운 걸 보면 흑도 사파인 것 같은데... 아마 동쪽에서 흘러나온 놈들이겠지.”

심신을 단련한 무림인조차 혈라분에 맛들이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걸까.

흑상이 일부러 놔뒀는지, 아니면 손을 쓰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두 사람이 보고 있는 광경이야말로 암시장이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했다.

겉으로는 흑상이 암시장을 이끌고 있을지 몰라도 실상은 혈교의 입맛대로 조종당하고 있다는 뜻.

‘어쩌면 처음부터 흑상이 혈교와 한 편이었을 수도 있겠지. 오히려 이쪽의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지 않고선 혈교의 세력이 암시장에 이토록 부드럽게 침투하는 게 설명이 되지 않았다.

백서희가 강엽의 소매를 당겼다.

“가던 길 계속 가자. 여기 계속 있으려니 기분이 안 좋아.”

“그래... 음?”

양지피를 펴든 강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혈점이 움직이고 있는데.”

“엥? 어디로?”

“북쪽 구역의 중심부. 한 군데로 모이고 있군. 이거 아무래도....”

혈점은 흑상의 대리인으로 추측했던 자들의 종적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한 곳에 모인다는 게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북쪽에 있는 혈점이 모두 흑상의 수족들이면... 흑상이 한 군데에 집결하는 셈인가.’

약쟁이들의 소굴이나 서성거릴 때가 아니었다.

“지금 바로 출발해야겠어.”

* * *

“이거 일이 엉뚱하게 돌아가는구려.”

여러 사람들이 모인 장내.

값비싼 비단 장삼을 걸친 존귀한 자들이 커다란 원탁을 빙 둘러싼 채 앉아 있었다.

군데군데 공석이 있긴 해도 일곱 자리 중 네 개가 채워진 모습.

그 뒤엔 호위를 비롯한 수행원들이 굳은 얼굴로 시립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대환단이 경매장에 나온다고 하질 않나, 사람을 보내 살펴봤더니 엉뚱한 놈이 비갑채주와 칠사도의 목을 들고 오질 않나.”

“유 대인의 의중이 뭔지 모르겠군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요?”

“흐음, 호연 장주께서는 유이강이 그 고수를 일부러 끌어들이셨다고 보나 보오?”

“실제로는 어떤지 모르지요. 하나 최악을 가정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글쎄, 그건 너무 간 게 아닌가 싶소만. 유이강이 우릴 견제하기 위해 초절정의 고수를 끌어들였다? 그 가정엔 너무 허점이 많지 않소?”

“자칫하면 광명마교가 쳐들어올 수 있네. 유이강이 끌어들인 자가 칠사도를 죽였다면, 결과적으로는 악수(惡手)를 둔 셈이지.”

자리에 앉은 자들이 각자 의견을 나누었다. 각자 의견이 분분했지만, 한 가지는 일치했다.

그들이 유이강이라 불린 경매장의 주인, 그들의 동업자인 또다른 흑상에게 적개심을 품고 있다는 것.

하지만 활발하게 의견을 나누면서도 아직까지 입을 열지 않은 한 사람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모두가 동등하게 좌석하는 원탁인 만큼 서열은 없었으나, 일곱 명의 흑상 중 가장 강대한 세력을 거느린 자가 탁자를 두들긴다.

이윽고 흑상들의 목소리가 잦아들었을 무렵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이강은 뭘 하고 있는가?”

“세작들이 보고하기로는 태화문의 이공녀와 그 정체불명의 사내를 자기 장원으로 데려갔다고 하더이다.”

같은 흑상의 세력에 세작을 심어놨다는 말을 하고 있는데도 그걸 문제 삼는 자는 없었다. 유이강이 걷는 길은 그들과 너무 달랐다.

“휴, 유이강을 일찌감치 제거했어야 했소.”

하지만 한탄하는 흑상도 알고 있었다. 그가 말한 게 한없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같은 흑상이지만 유이강은 격이 다른 존재였다. 단순히 세력만 큰 게 아니라 본인 역시 엄청난 고수였다.

과거에 수많은 살수들과 무인들이 그를 노렸지만, 유이강은 그 모든 난관을 타파하고 흑상의 자리를 지킨 강호. 유이강을 제거하려면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하고 덤벼야 했다.

은연중에 좌장으로 인정받은 흑상도 유이강을 무턱대고 제거할 엄두를 못 냈었던 바.

하지만 이젠 끝을 봐야 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오, 교성(敎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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