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6화 (186/450)
  • 33화. 큰손 (5)

    대환단의 등장에 좌중의 눈빛에 욕망이 일렁거렸다.

    “오십만 냥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지금까지의 시작가를 가볍게 뛰어넘는 액수.

    하나 그게 비싸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없었다. 자금이 부족한 자들만 탄식할 뿐이었다.

    “서희.”

    “응. 이제부터 시작이지?”

    백서희는 곳곳에서 막대를 들며 수십만 냥을 부르는 자들의 면면을 둘러봤다. 가면을 쓰고 있어도 복장은 모두 다른 자들이었다.

    저들 중 몇 명은 흑상의 대리인으로 이 자리에 왔으리라.

    “여기요, 백 소저.”

    당묘정이 쪽지를 건넸다.

    돈을 많이 쓴 자들의 행색을 기록한 종이였다.

    물론 돈을 많이 썼다고 흑상과 연관됐다는 보장은 없지만, 이중 한 명만 흑상의 대리인으로 참석했어도 반은 목적을 달성한 셈이었다.

    강엽이 당부했다.

    “조심해라. 무인상을 산 남자는 건드리지 말고. 느낌이 안 좋아.”

    “걱정 붙들어 매셔.”

    한쪽 눈을 찡긋한 백서희.

    야차마곤의 뒤로 돌아가자마자 자연스럽게 사라진 은신술에 당묘정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대단하네요. 바로 앞에서 봤는데도 어떻게 사라진 건지 모르겠어요.”

    “으음.”

    반면 야차마곤은 백서희가 살수 무공을 구사했다는 걸 알고 침음했지만, 지금은 그걸 언급할 때가 아님을 알기에 조용히 침묵했다.

    그녀의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강엽은 시선을 돌렸다.

    과열된 경쟁에 타오르는 열기.

    욕망에 사로잡힌 군중들은 경쟁자를 물리치기 위해 고성과 욕설을 터뜨리는 등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사회자 역시 열기를 가라앉히기는커녕 불을 지피고 있는 실정.

    ‘그쪽은 관심이 없나?’

    관영신창의 무인상을 입찰한 장발의 사내.

    아까와는 달리 조용한 모습에 강엽이 고개를 갸우뚱하는 찰나, 위층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백만 냥.”

    “.......”

    은쟁반에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미려한 음성.

    마침내 조영옥이 경매에 참전한 것이다.

    * * *

    풍도마장이 정체불명의 사내가 대환단도 노리고 있음을 알려주었지만, 조영옥은 순순히 포기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백만 냥이라니.......”

    “놀랍군, 놀라워.”

    대환단에 눈이 뒤집힌 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큼 압도적인 거금.

    물론 조영옥에게도 이백만 냥은 큰돈이었다. 천금상단을 외가로 두었어도 부담감을 느낄 만큼.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쓰린 속을 달래면서 자신의 선택을 합리화한다.

    대환단의 소문이 사방에 퍼진 바람에 욕망에 눈이 먼 자들이 몰려와서 어쩔 수 없었노라고.

    그 소문을 퍼뜨린 흑상만 짝짝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기실 누가 대환단을 사든 그는 상관없었다. 앉아서 떼돈을 벌 수 있다면 말이다.

    “하하, 화통하시구려. 그 배포에 경의를 보내겠소. 당분간은 밥을 안 먹어도 배부를 것 같군.”

    이 빌어먹을 인사가....

    자신을 놀리는 언사에 부글부글 끓어오르면서도, 조영옥은 애써 속내를 가라앉히며 화사하게 웃었다.

    “천고의 영약을 얻으려면 이 정도는 투자해야죠.”

    “암, 그렇고 말고. 하나 이백만 냥을 이 자리에서 주실 수 있겠소?”

    “...분할해서 납부하겠어요.”

    “귀빈들께만 주어진 권리를 쓰시겠다는 말이군. 그거야 소저의 자유지. 근데 이자가 센 데다 소저의 정체를 알려줘야 하는데... 괜찮겠소?”

    “이자는 걱정하지 마세요. 제대로 낼 테니까. 그리고 제 정체는... 이미 짐작하실 텐데요?”

    “....”

    흑상의 표정은 가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조영옥은 그가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흑상이 운영하는 암시장에 귀빈으로 참석할 젊은 여인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하물며 풍도마장을 비롯해 여러 고수들을 호위로 대동할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값은 천금상단의 전표로 치르겠소?”

    흑상이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답이었다.

    “절반인 백만 냥은 이 자리에서, 나머지는 열 달에 걸쳐 드리겠어요.”

    “편할 대로 하시구려. 나는 언제나 이 자리에 있으니까. 다만 열 달이라....”

    이백만 냥이 큰 금액이긴 하지만 조영옥이 작심한다면 그 돈을 못 낼 리가 없다. 장기적으로 본다면 이 자리에서 값을 치르고 손을 터는 게 이득이리라. 그럼에도 굳이 열 달에 걸쳐 값을 치르겠다는 것은....

    ‘혹시 군자금을 모으는 건가?’

    영약 말고도 돈 들어갈 데가 있다는 말이겠지.

    ‘태화문에 내전의 기운이 감돌고 있다더니. 번천광야가 매병(呆病, 치매)에 걸렸다는 정보가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당연하지만 흑상 역시 대상인으로서 천하의 정세를 두루 살피고 있었다. 태화문처럼 암시장에 영향을 행사하는 세력엔 첩자까지 심어놨다.

    항간엔 아직 소문이 퍼지지 않았지만, 태화문주 번천광야 조광해의 정신은 온전치 못했다.

    ‘사도십대고수에 오른 자가 매병에 걸리는 게 말이 되나 싶었는데. 형제들을 죽이고 권좌에 앉은 업보를 이렇게 치르시는구려, 태화문주.’

    현 태화문주인 조광해는 전대 문주의 사후 아비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배다른 형제들을 도륙하고 스스로 문주위에 오른 효웅.

    하나 그 역시 말년에 이르러 자식들이 서로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꼴을 보고 있었다.

    아니, 매병의 증세가 심하다면 자식들이 뭘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겠지.

    “...좀 전에 말한 대로 소저가 편할 대로 하면 되오. 다만 돈을 못 받는 경우도 생각해야 하니, 따로 담보를 받아야 할 것 같소만.”

    “이걸 맡기지요.”

    조영옥의 손짓에 뒤편에 있는 무인이 흑단목함을 가져오자 흑상이 의아해했다.

    “이게 무엇이오?”

    “열어보세요.”

    뭔지 알고 함부로 열어보겠나. 흑상도 똑같이 아랫사람을 시켜 목함의 뚜껑을 열어봤다.

    안에 든 것은 조그마한 병이었다.

    “이건...?”

    “대인께서도 ‘독곡(毒谷)’을 아시겠지요?”

    “알다마다. 남만에 있다는 독인들의 문파 아니오. 저 사천당문과 비견된다는... 설마?”

    “그 독곡이 혈교와 맹월림에 짓밟혀서 멸문했다는군요. 우연히 외가가 독곡의 생존자와 연이 닿아서 그쪽의 독을 조금 얻을 수 있었답니다. 그 사람이 말하길 당문의 무형지독(無形之毒)에 버금간다는군요.”

    “허어...!”

    독중지왕이라 불릴 만큼 강력한 독이 무형지독이었다. 절세고수의 목숨조차 앗아갈 수 있다고 하던가.

    조영옥이 건넨 독이 정말 무형지독과 맞먹는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반의 반 만큼만 강력해도 어지간한 고수들은 독살시킬 수 있으리라.

    “이건 제가 선물로 드리지요.”

    “돌려받지 않겠다는 말이오?”

    “대신 이자를 받지 않는 조건으로.”

    “그건....”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대인. 이 독이 언젠가 대인을 구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해가 되지 않는군. 이게 어찌 나를 구해준다는 말이오? 독이란 건 사람을 죽이는 데 쓰는 물건인데.”

    “그러니까요. 언젠가 대인이 위기에 몰려서 누군가를 간절히 죽이고 싶을 때... 그때 쓴다면요?”

    순간 흑상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조영옥이 이자를 내기 싫어 되도 않는 말로 유혹하는 건지, 아니면 뭔가 아는 게 있어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서로 싸우는 게 본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

    올해로 스물일곱이라고 했던가. 태화문의 이공녀라고 해도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 계집이 감히 그를 상대로 이런 술수를 부리다니.

    하지만 흑상은 웃는 낯으로 받아쳤다.

    “이거 참, 이게 당문의 무형지독만큼 강한 독이라고 하니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구려. 소저의 호의를 흔쾌히 받겠소. 대신에 이자를 면제하는 건 안 되오.”

    흑상 역시 여간내기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자금을 줄이려는 조영옥의 속내를 꿰뚫어본 것이다.

    “본래 이자는 달에 이 할이오. 하나 소저께서 이리 성의를 보이시니 일 할로 줄이겠소.”

    백만 냥을 열 달에 걸쳐 일 할의 이자와 함께 내면 총 백십만 냥이었다. 물론 조영옥이 제때 내지 못한다면 이 돈은 눈덩이처럼 불어날 터였다.

    하지만 조영옥이 대답하기도 전에, 아래층에서 또다시 방해꾼이 튀어나왔다.

    “이백이십만 냥.”

    “.......”

    가면 속 조영옥의 옥용에 짜증이 스치고 지나갔다.

    ‘또! 또 저 망할 남자가...!’

    풍도마장이 경고했던 장발의 사내. 그가 막대기를 들고 이백이십만 냥을 내겠노라 선언한 것이다.

    흑상도 어이가 없는지 잠시 말문을 잃었다.

    “...돈이 있는지 궁금해지는데.”

    분할납부는 어디까지나 신분이 확실한 귀빈들에게만 주어진 특권. 만약 사내가 돈도 없는데 높은 가격을 부른 거라면 문제가 커진다.

    그가 경매장의 무인을 불러 지시하자 무인이 부리나케 사라졌다.

    잠시 후 단상에 올라간 무인이 사회자의 귀에 무어라 속삭이자 사회자가 조금 사이를 두고 물었다.

    “예... 이백이십만 냥 나왔습니다. 한데 손님, 그걸 정말 한 번에 내실 수 있겠습니까?”

    “지금은 그만한 돈이 없다.”

    그런 주제에 경매에 참여한 건가. 다른 손님들도 간덩이가 배 밖으로 나왔다며 수군거렸다.

    강엽 일행도, 손님들 사이를 돌아다니며 강엽의 피를 조금씩 묻힌 백서희도 어안이 벙벙해졌다.

    ‘돈도 없으면서 무슨 배짱으로...?’

    설마 힘으로 강탈할 생각일까?

    경매장의 무인들이 병장기로 손을 가져가는 모습에 사내가 웃었다.

    “떼먹을 생각은 없다. 지금 돈이 없다고 했지, 돈을 못 낸다고 한 건 아니다.”

    “정확히 말씀해주시길 바랍니다.”

    “옛다.”

    대답 대신 보퉁이를 건네는 사내.

    사회자의 눈짓을 받은 무인들이 조심스럽게 접근해서 보퉁이를 받아서 바닥에 내려놓았다.

    매듭을 풀고 목함의 뚜껑을 열자 혀를 빼물고 죽은 수급이 드러났고, 기대 반 긴장감 반으로 구경하던 사람들이 헛숨을 삼켰다.

    “이런 미친!”

    “설마 암시장에서 살인을...!”

    제법 오래되긴 했지만 염장을 해서 썩지 않은 수급.

    사회자는 물론 흑상과 조영옥, 풍도마장 등도 아연실색했다.

    “해명하시오! 암시장에서 누굴 죽인 것이오!?”

    “암시장에서 죽인 건 아니다. 여기 오기 전에 죽인 거지. 비갑채주인지 뭔지 하는 놈이라던데.”

    수급의 정체가 밝혀지자 크나큰 술렁임이 파문처럼 장내를 휩쓸었다.

    “비갑채주? 장강수로맹의 비갑채주라고?!”

    “말도 안 되는 거짓부렁이다! 비익마도(飛翼魔刀)가 누구인데. 장강수로맹의 이인자다. 사실상 다음 맹주로 점쳐졌던 인사가 아닌가!”

    장강수로맹이 맹주와 비갑채주의 세력으로 분열해서 내전을 벌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혹자는 광명마교가 비갑채주의 배후에 있다는 소리까지 했다. 한데 비갑채주의 머리가 암시장에서 돌연 출현한 것이다.

    “.......”

    일전에 하오문주로부터 장강수로맹의 내분을 들었던 강엽의 눈빛도 깊게 가라앉았다.

    * * *

    “비갑채주의 수급이 맞습니다.”

    부하가 가져온 소식에 흑상은 두개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비갑채는 장강의 지류인 한수에 근거지를 두고 있기에 용모파기가 제법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부하가 가져온 소식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한데... 수급이 또 하나 있습니다.”

    “누구의 수급이냐? 장강수로맹주의 수급이라도 된다더냐? 맹주는 사도십대고수이니 그의 수급이라면 이백만 냥은 하고도 남겠구나.”

    “아, 아닙니다. 그게....”

    말하다 말고 조영옥이 있는 태화문의 진영에 슬쩍 시선을 준다. 다른 사람들이 듣는 데서 보고해야 할지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됐으니 그냥 말해라. 여기까지 왔는데 더 놀랄 일이 있나 싶군. 네가 뭘 말해도 놀라지 않겠다.”

    “과, 광명마교 칠사도의 수급입니다.”

    “.......”

    “저 남자의 일방적인 주장이라서 믿어야 할지는....”

    광명마교의 사도라면 구파와 팔가에서도 최정상급의 무인들만 상대할 수 있는 절세고수였다.

    비갑채주의 수급을 들고 온 것도 믿기지 않는데, 광명마교의 사도를 죽이고 그 수급을 취했다고?

    “...돌아버리겠군.”

    저게 거짓이어도 문제지만, 진짜라면 더 큰 문제였다. 안 그래도 혈교가 암시장에 스며들어서 골치 아픈데 광명마교까지 끼어든다면....

    ‘혈교와 광명마교가 암시장에서 부딪칠 수도 있다!’

    두 마교가 싸운다면 암시장이고 뭐고 개털만 남는다. 하지만 저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그냥 내보낸다면 칠사도를 격살한 고수의 분노를 산다.

    흑상의 부하들도 안색이 허옇게 질려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

    “어, 어찌합니까, 대인? 비갑채주와 칠사도의 목이면 이백이십만 냥은 할 테니 대환단 내놓으라고 합니다....”

    “젠장, 어디서 미친놈이 분탕질을 쳐가지고!”

    그야말로 상식을 거부하는 파격이 아닌가. 돈이 없으니 고수들의 목을 따서 값을 치르겠다니. 수십 년간 경매장을 운영하면서 한 번도 이런 참신한 미친놈은 본 적 없었다.

    “일단... 정중하게 모시거라. 내 직접 이야기를 하마.”

    부하들을 보낸 흑상이 짙은 한숨과 함께 가면을 쓸어내렸다. 차마 조영옥을 쳐다보지 못하고 입만 열었다.

    “...저자는 내가 알아서 해보겠소이다. 저자의 정체가 뭔지 몰라도 경매장의 원칙은 변치 않소.”

    비갑채주라면 몰라도 광명마교 칠사도의 목엔 현상금도 걸리지 않았다. 아무리 한중에 광명마교의 영향력이 덜 미친다고는 하나 마교 최상층의 수급을 돈으로 바꿔먹을 생각을 하는 미친놈은 없었다.

    그때 풍도마장이 침중하게 물었다.

    “저자가 정말 칠사도를 죽였다고 생각하시오?”

    “그거야 모르지. 내가 칠사도를 본 것도 아닌데 그의 얼굴을 어찌 알겠소? 다만 비갑채에 광명마교의 칠사도가 머무른다는 소식은 들었소.”

    “...조심하시오. 그는 당금 천하에서 가장 강한 여덟 명 중 한 명일지도 모르오.”

    “천하팔존이라도 상계를 존중하지 않는다면 대가를 치를 것이오.”

    그렇게 말한 흑상의 눈엔 어두운 기운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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