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큰손 (2)
다른 사람들 몰래 객잔을 빠져나온 강엽과 백서희는 길을 돌고 돌아 큰 가항에 나왔다.
눈에 띄는 비단 장삼과 시비 복장은 벗어두고 평범한 무인들처럼 회색 무복을 입은 행색이었다.
얼굴 역시 망나니 공자와 예쁘장한 시비에서 또다른 모습으로 변장했다.
이목구비가 완전히 변한 것은 아니나, 눈매나 피부색이 약간 달라진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게 길을 걷고 있는데, 별안간 백서희가 서운하다는 듯이 볼멘소리를 중얼거렸다.
“아까 연기 되게 잘하더라.”
망나니 공자를 연기한 걸 말한 게 아니다. 당묘정의 정혼자 역할을 충실히 수행한 것을 꼬집은 것.
강엽이 대답 대신 입가를 피식 당기자 그녀의 눈꼬리가 샐쭉해졌다.
“웃어?”
하지만 강엽이 손을 내밀자 못 이기는 척 같이 손을 잡고 길가를 거닐었다. 조금 걷자 그녀의 입가에도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났다.
마침 두 사람이 지나는 거리에서 노점상이 빙당호로(氷糖葫蘆)를 팔고 있었는데, 값은 비싸긴 해도 사람들이 많이 몰리는 게 상인의 솜씨가 상당히 좋은 듯했다.
강엽이 물었다.
“먹고 갈까?”
“웬일이래. 평소엔 단 거 잘 안 먹잖아.”
가끔 식사를 하긴 해도 강엽은 식탐이 강하지 않았다. 그야 피만 마셔도 살 수 있으니까.
흡혈귀가 된 뒤로는 입맛도 변해서, 맛은 느낄 수 있을지언정 식도락을 즐기지는 않았다.
“그래도 가끔은 나쁘지 않지.”
평범한 사람들처럼 먹고 자고, 희로애락을 느끼며 살아야 인간성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승려나 도사처럼 세속의 즐거움을 멀리하는 것은 오히려 스스로를 인간성에서 멀리 떨어트려놓는 짓.
그렇게 빙당호로를 사서 와작와작 깨물어먹는데 백서희가 물가를 보며 신기해했다.
“진짜 여기도 물고기가 사네.”
크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암시장이 있는 지하도시에도 제법 깊고 넓은 물길이 흐르고 있었다.
강이라고 하기엔 좁았고, 개울이라고 하기엔 크니 운하라고 해야 할까.
흑룡교가 처음 이 도시를 만들 때 술법으로 물길을 끌어온 건지, 아니면 술법으로도 미처 통제하지 못한 수맥이 터져서 물길을 이뤘는지 모를 일이었다.
여하튼 나무로 만든 목교에 앉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강엽이 돌연 눈을 빛냈다.
“찾았다.”
물가에 앉아 낚싯줄을 드리운 죽립 사내.
지하도시엔 어울리지 않는 버들잎을 질겅질겅 물고 있는 사내가 두 사람의 접근을 알아차리고 죽립을 살짝 들어올렸다.
“뉘시오?”
“몇 마리나 낚았소?”
“허, 세어보면 되지 않소.”
“물고기는 많은데 내가 찾는 건 없구려. 만 년 묵은 적휘공(赤輝公)이 있다면 푹 고아서 먹을 텐데.”
적휘공은 잉어의 다른 이름.
만 년을 묵은 적휘공이라 함은 무림에서 영물로 통하는 만년화리(萬年火鯉)를 뜻함이었다.
수십 년에 한 번 발견될까 말까 한 영물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는 일. 강엽이 시처럼 읊조린 것은 하오문주가 알려준 암어였다.
암시장에 가면 입에 버들잎을 물고 있는 낚시꾼을 찾으라고 했던가.
“...뭐가 궁금하시오?”
“암시장의 상인들이 물자를 들여오는 통로와 수뇌부가 비상시에 탈출하는 통로.”
“전자는 알지만 후자는 모르오. 하오문이라고 모든 걸 다 아는 건 아니외다.”
“그리고 약재상들에 대한 정보.”
“...약재? 뭐 영약이라도 찾으시오?”
대답 대신 빤한 시선을 보내자 죽립 사내도 본인의 실수를 자각한 듯 쓰게 웃었다.
“음, 미안하오. 쓸데없는 질문을 했군. 내가 알 필요는 없는 건데....”
“그래서 답은?”
“형장도 계단을 통해 내려왔을 것이오. 물자가 오가는 통로는 거기서 백여 장쯤 떨어진 곳에 있소. 무인들이 지키고 있으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게요. 위쪽에 있는 표국의 표고(鏢庫)와 이어져 있소이다.”
의뢰인들에게 받은 표물을 일시적으로 보관하는 곳.
어찌 보면 표고야말로 통로를 숨겨놓기에 가장 합당한 장소였다.
이어 암시장에서 약재를 취급하는 상인들에 대한 정보를 들은 뒤에 다시 물었다.
“혹시 최근에 퍼진 소문은 없소?”
“소문이라... 경매장에 귀한 물건들이 나온다는 소문은 듣긴 했소만.”
“다른 사람한테 듣기로 암시장엔 현상금이 걸린 사마외도가 나돌아다닌다고 하던데.”
“하하, 혹시 현상금을 노릴 생각이라면 그만두라고 충고하겠소. 여기도 사람 사는 데니 싸움도 나고 살인도 나지만... 대놓고 싸우면 좋을 게 없소이다. 왜 여지껏 무림 문파들이나 관군이 암시장을 놔뒀는지 아시오?”
암시장이 그들의 뒷주머니에 검은 돈을 찔러주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중의 암시장을 다스리는 수뇌부들이 무섭기 때문이오. 달리 흑상(黑商)이라 불리는 자들. 형장이 얼마나 대단한 고수인지는 모르겠소만,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암시장을 빠져나가기 전에 잡혀 죽을 것이오.”
“그들과 따로 만날 방법은 없소?”
사내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흑상은 존재만 알려져 있을 뿐 모든 게 오리무중이었다.
구성원은 누가 있고, 몇 명이나 되는지, 그들의 세력이 얼마나 큰지 알려진 게 전무했다.
“혹시 모르지. 경매장에 나타날지도.”
“거긴 왜?”
“조금 전 내가 했던 말 기억하시오? 경매장에 귀한 물건들이 나온다는 말.”
강엽이 말없이 고갯짓을 하자 죽립 사내가 버들잎을 질겅거리며 대답을 이었다.
“경매라는 게 말 그대로 경매다 보니 나오는 물건들이 언제나 똑같진 않소. 그래도 암시장의 명성이 있다 보니 보물들이 나오지만, 그 안에서도 경중은 나뉘기 마련이오. 항간의 소문에 따르면 이번 경매장에 출품되는 물건 중에 대환단(大還丹)도 있다고 하오.”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을 대표하는 절세영약.
복용하면 일 갑자의 공력을 얻을 수 있는 영약의 출현에 암시장이 발칵 뒤집힌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누가, 어떤 경위로 대환단을 얻었는지는 모르오. 경매장에 물건을 출품하는 사람은 제각각이고, 그들의 사연은 알려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대환단이 경매에 나왔다면 흑상 역시 관심을 갖지 않겠소?”
“.......”
강엽과 백서희도 대환단이 나온다는 말에 표정이 진지해졌다. 열양지기의 영약 중에선 최고봉. 대환단에 비견할 만한 것은 만년설삼(萬年雪蔘)이나 공청석유(空靑石油) 같은 전설의 영약들밖에 없다.
그나마 대환단은 실존하기라도 하지, 만년설삼이나 공청석유는 기록만 무성했다.
“대환단 말고도 귀한 물건들이 이것저것 나온다고 하니 관심 있으시면 가보시오. 운이 좋다면 흑상을 만날 수 있겠지. 하나 흑상이 참가해도 정체를 숨겼을 테니 누가 흑상인지는 알 수 없소.”
* * *
하오문의 죽립 사내와 헤어진 뒤 강엽은 길가를 거닐며 사색에 잠긴 기색이었다.
백서희도 지금 강엽의 머리가 굉장히 바쁘게 굴러가고 있다는 걸 알기에 방해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한평루에 돌아갔을 때쯤, 일행 역시 볼일을 마치고 방으로 집결했다.
청수만 안 왔기에 강엽이 물었다.
“청수 도장은요?”
“아직 투전판에 있네. 두 사람이 한꺼번에 빠지면 의심을 받지 않겠나.”
야차마곤만 배를 채우겠다는 구실로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이다. 안 그래도 위장이 공복감을 호소하는 소릴 냈기에 누구도 야차마곤을 의심하지 않았다.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곡차로 입가심을 한 야차마곤이 입술을 닦으며 말했다.
“청수 도장이 생각보다 잘 버텨주었네. 솔직히 나 혼자였다면 금방 털렸을 게야.”
돈을 따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하나 판돈을 잃어버리면 투전판에 남을 명분이 없었다. 청수가 적당히 돈을 따줬기에 여태 버틴 것이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청수 도장이 생각보다 고수더군. 골패 실력만 보면 우리 중에 제일고수가 청수 도장이 아닌가 싶네.”
청정도량 무당의 도사가 노름 재주를 타고났다니....
강엽이 쓴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알아내신 건 있습니까?”
“암시장에 그 혈라분인지 뭔지 하는 빌어먹을 약이 돌고 있는 건 사실인 것 같네. 도박꾼들 중 몇 명이 자연스럽게 권하더군. 앵속보다 더 좋다면서.”
“그래서요?”
“당연히 거절했지! 우리가 미쳤다고 손을 대겠나?”
“아뇨, 그게 아니라. 도박꾼들이 어디서 혈라분을 구했는지 알아내셨습니까?”
순간 야차마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거기까지는 미처 알아내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 청수가 문소리를 내며 방에 들어왔다.
“아, 다들 여기 계셨군요.”
“투전판은?”
“적당히 개평 주고 나왔습니다. 너무 늦게 돌아가면 공자님한테 혼난다는 핑계를 대니 다들 이해해주더군요. 근데 어디까지 얘길 나누셨습니까?”
강엽이 야차마곤과 나눴던 대화를 들려주자 청수가 말했다.
“야차마곤 선배님께서 가신 뒤에 넌지시 물어봤는데, 운 좋게 대답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누구지?”
“흑상입니다.”
물론 흑상 중에 누가 퍼뜨리고 있는지는 투전판에서 오래 살아남은 타짜들도 알지 못했다. 위험한 일에 호기심을 가져서 좋을 게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당묘정이 끼어들었다.
“저랑 혜심 스님은 강 무사님이 지시하신 대로 상점들을 돌아다니며 정보를 수집했어요. 약재상도 몇 군데 들러봤는데, 누군가 혈라분의 약재들을 대량으로 사갔더군요. 그 약재들만 재고가 없었어요.”
“누가 샀는지는 알아냈소?”
당묘정이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었지만 대답을 듣지 못했어요. 상인들이 완강하더군요. 하다못해 장부만 봤어도 수월했을 텐데....”
하지만 잠입을 한 처지에 그런 돌출행동을 할 순 없었다. 혈교가 약재상들을 주시하고 있다면 그런 소란을 허투루 넘기지 않을 테니까.
소창후가 말했다.
“대답은 못 들었지만 상인들이 죄다 대답을 거절하는 걸 보면....”
“흑상이겠지.”
일행의 안색이 무거워졌다.
모든 단서들이 흑상과 이어져 있었다. 어쩌면 흑상 전체가 혈교에 포섭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야차마곤이 푸념했다.
“답답하구만. 흑상이란 놈들은 정체도, 사는 곳도 알려지지 않았다면서?”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닙니다.”
그 말에 일행의 시선이 강엽에게 모였다.
“하오문과 접선했습니다. 그쪽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몇 가지 수확이 있었습니다.”
물자가 오가는 통로의 위치와 경매장에 대환단이 나왔다는 말을 알려주자 다들 눈이 빠지게 놀랐다.
“약재상은 당 소저와 소창후가 가봤으니 굳이 안 들러도 되겠군요. 문제는....”
“아, 아니! 그보다 자세히 말해보게. 경매장에 대환단이 나온다는 말이 참인가?”
“하오문의 말로는 그랬습니다.”
야차마곤이 허어 탄식했다. 당연하지만 소림에서 사사한 그에게 있어 대환단은 여타 무림인들이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특별하게 다가왔다.
“누가 출품했는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흑상이 대환단에 관심을 갖는다면 기회가 있을 겁니다.”
만약 흑상이 대환단을 노리고 있다면 본인이 경매장에 나오거나 대리인을 보낼 터.
백서희가 미간을 모았다.
“근데 꼭 흑상이 대환단을 노린다는 보장은 없잖아? 그럼 어떻게 해?”
“좀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강엽이 한숨을 내쉬었다.
“비싼 물건을 산 자들은 전부 미행해야지.”
밥값이나 숙박비도 바깥 세상보다 몇 배로 비싼 암시장이었다. 이런 암시장에서도 내로라하는 부자들만 모인다는 경매장이라면 그 안에서 오가는 돈은 가히 천문학적이라고 봐야 하리라.
‘정 안 되면 혈종술이라도 써야지.’
쫓는 사람의 피를 얻는 게 좋겠지만, 자신의 피를 다른 사람에게 묻혀도 효과는 있었다.
“아, 근데 대환단은 얼마쯤 하지?”
“글쎄요. 모르긴 해도 엄청나게 비싸지 않을까요? 어쩌면 수십만 냥을 호가할지도....”
강엽이 생각에 빠지는 동안 백서희와 당묘정은 대환단의 가격에 대해 추론하고 있었다.
여인들이 야차마곤에게 시선을 던지자 그가 떫은 표정으로 헛기침을 삼켰다.
“크흠, 나도 모르겠구만. 대환단이 어떻게 외부로 유출되었는지도 의문일세.”
소림에도 몇 개 없는 게 대환단이다. 소림의 제자인 야차마곤도 대환단은 구경도 못해봤다.
“강엽, 우리 예산이 얼마나 돼?”
“삼십만 냥.”
낭인전의 의뢰로 벌어들인 돈과 흑룡교 비밀 분타에서 찾은 보물들을 처분한 돈을 합친 금액.
평범한 사람들은 평생 동안 못 만져볼 거금이다. 하지만 거만의 부를 쌓은 흑상이나 대상인들에 비하면 한참이나 모자란 돈이었다.
“으음, 나도 한 오만 냥쯤 들고 왔네만....”
“저도 가문에서 십만 냥을 지원받았어요.”
야차마곤과 당묘정이 가진 돈을 합쳐도 오십만 냥이 채 되지 않았다.
구파의 제자로서 늘 청빈함을 실천해야 하는 청수와 소창후는 가진 돈도 얼마 없는 상태.
“경매장엔 참가한다고 꼭 뭔가를 살 필요는 없어. 비싼 물건들이 누구 손에 들어가는지만 알면 돼.”
애초에 대환단 같은 신외지물은 부르는 게 값이었다. 뜨겁게 경쟁이 붙는다면 수십만 냥이 아니라 수백만 냥을 훌쩍 넘을지도 몰랐다.
* * *
“간신히 시간 맞춰서 도착했군요.”
“대리인을 보내면 편하지 않았겠소?”
“그럴 수야 있나요. 다름 아닌 대환단이 경매장에 올라왔는데. 영약에 눈이 먼 자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노사께서도 잘 아시잖아요.”
삼단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기른 미인의 질문에 그녀와 마주 앉은 단신의 노인이 백염을 쓸어내렸다.
“대환단이라... 이 엄중한 시기에 그만한 영약이 암시장에 나왔다는 게 마음이 걸리는구려.”
“함정이라고 생각하시나요?”
“모르겠소. 경매장 측이 대환단의 존재를 공인한 만큼 대환단 자체는 진품이겠지만....”
“하나 다른 방법이 없어요. 오라버니와의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실력을 키워야....”
그맘때쯤 마차가 멈추고, 호종 무인들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시비가 내리고, 그 다음에 노인이 내렸다. 그녀의 차례는 맨 마지막.
본래 암시장은 들어가는 입구가 좁아서 마차가 들어올 수 없지만 귀빈들은 예외였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달리 특별히 마련된 통로를 통해 들어온다.
그렇게 경매장 입구에 다다랐을 때 그녀가 어딘가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음?”
“왜 그러시오, 공녀?”
“아는 사람을 본 것 같아서요.”
“누구 말이오?”
“빨리 스쳐지나가서 자세히 보진 못했어요. 인상이 좀 달랐던 것 같기도 한데....”
그녀도 긴가민가했다. 어쩌면 닮은 얼굴 때문에 착각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제가 잘못 봤겠죠.”
“그렇구려. 어서 들어갑시다.”
오직 귀빈들에게만 지급되는 초대장을 건네자 경매장의 무인들이 허리를 굽혀 예를 갖추었다.
“태화문의 방문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