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흡혈왕-182화 (182/450)

33화. 큰손 (1)

평범한 표국으로 위장한 경내.

하지만 그 실상은 무림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광활한 암시장으로 통하는 입구였다.

보표의 안내에 따라 표국의 대마장으로 들어간 일행은, 말과 마차를 표국 사람들에게 인계했다.

“말과 마차는 저희 마사(馬舍)에서 보관할 겁니다. ‘안쪽’은 마차를 타기에 적합한 환경이 아니라서....”

양해를 구한 보표는 마차에서 내린 여인들을 연신 힐끔거렸다.

일부러 수수하게 화장한 데다 면사까지 걸쳤지만, 타고난 미색을 완전히 가릴 순 없었다.

대로를 거닐면 행인들이 무의식적으로 돌아볼 만한 용모.

그나마 소창후는 수더분한 인상이 됐지만, 백서희와 당묘정은 변장을 했어도 여전히 상당한 미인이었다.

강엽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갔다.

“건방지게 누굴 훔쳐보는 거냐?”

“예?”

“본 공자의 여자다. 네깟 놈이 함부로 봐도 될 여인이 아니란 말이다.”

“아니, 소인은 그게 아니라....”

“한 번만 더 내 여인을 향해 불온한 시선을 보낸다면 그 시건방진 눈깔을 뽑아주마.”

살벌한 으름장에도 보표는 겁을 먹기보다는 황당해하는 낯빛이었다.

강엽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대답 안 하나?”

“죄, 죄송합니다.”

보표가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강엽의 살기는 위협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지만, 야차마곤이 부리부리한 눈알을 부릅뜨자 정말로 무지막지한 위압감을 풍겼던 것이다.

‘개자식... 별 것도 아닌 놈이 집안 잘 만나서 잘난 척 하는 꼴이라니.’

하지만 보표의 신분으로 초대장을 갖고 온 손님에게 시비를 걸 순 없는 노릇. 온갖 손님들을 맞이하다 보면 이런 일은 일상다반사였다.

“괜찮소, 정매?”

“아... 네, 전 괜찮아요.”

당묘정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연기라고 하나 강엽이 그녀를 누이처럼 부르자 정말 정혼한 사이처럼 느껴졌던 것.

하지만 강엽의 눈길은 그녀가 아니라 백서희를 향했기에 약간은 씁쓸해진 기분도 들었다.

물론 백서희라고 마냥 속내가 좋은 건 아니었다.

‘쳇, 아주 그냥 정매라는 말이 입에 딱딱 붙네.’

당묘정이 이 역할을 맡은 건 어쩔 수 없었다.

명문가의 공녀로서 타고난 기품이 몸에 밴 까닭에, 시비로 변장한들 위화감을 드리울 테니까.

“이쪽으로 오십시오. 입구는 이쪽에 있습니다.”

표국 한 구석에 폭포가 쏟아지는 작은 암벽이 있었다. 그곳에도 지키는 자들이 있었는데, 보표가 눈짓을 보내자 작은 장치를 잡아당겼다.

그그그그그긍......!

“기관장치인가.”

“입구는 이쪽 하나입니다. 나가실 때도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다른 출구가 없다는 거군.”

“그렇습니다.”

강엽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면서 대충 턱짓으로 끄덕여보였다.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시기 바랍니다.”

내려가는 계단은 매우 좁아서 여러 명이 통과하기는 어려웠다. 기골이 장대한 야차마곤이 지나가니 통로가 꽉 찬 느낌이 들 정도였다.

다행히 내부가 어둡긴 해도 양 벽변과 천장 등에 야광주를 달아놔서 발을 헛디딜 염려는 없었다.

보표들이 안 보일 때까지 내려갔을 때쯤 당묘정이 의문을 제기했다.

“입구가 이렇게 좁은데 물자를 어떻게 옮기는지 모르겠군요. 짐마차를 쓰지도 못할 텐데.”

“어떻게든 옮기지 않겠어요?”

소창후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강엽이 말을 받았다.

“아마 표국 안에 다른 길이 있을 것이오.”

“네?”

“표국을 두고 굳이 다른 곳에 길을 낼 필요가 없으니까. 암시장이 필요로 하는 물자를 표물로 위장해서 들여보내면 되는데 뭐하러 다른 길을 파겠소? 그러다 엉뚱한 놈에게 들키면 골치만 아파질 텐데.”

“그럼 왜 길을 두 개나 낸 건데? 비효율적이지 않아?”

이번엔 백서희가 물었다.

“글쎄, 비상시를 대비한 게 아닐까 싶다.”

“응?”

“지금은 초대장을 받은 사람만 암시장에 출입할 수 있지. 하지만 암시장의 수뇌부는 적습을 당하는 경우도 상정했을 거야.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적들이 어디서 정보를 얻을까?”

“어, 글쎄... 초대장을 가진 손님을 통해서?”

그제야 백서희도 강엽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비록 암시장이 권력과 유착해서 안전을 보장받았다지만 만약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나.

적들이 암시장을 공격한다면 십중팔구는 일행이 걷는 계단을 통해 쳐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야차마곤이 킁 하고 콧김을 뿜으며 두툼한 턱을 긁적였다.

“입구가 좁고 계단이 가파르니 아무리 많은 병력이 쳐들어와도 한계가 있지. 입구만 막으면 한 사람이 능히 백 명을 막아낼 수 있는 곳일세.”

“실제로는 이 길이나 물자를 옮기는 길 말고도 다른 출구가 있을 겁니다. 이를테면 수뇌부만 알고 있는 비밀통로 같은 것들 말입니다.”

요컨대 암시장의 병력이 적들을 막는 사이 수뇌부는 비밀통로를 통해 빠져나갈 거라는 소리.

딱히 근거는 없었지만, 강엽의 말이 워낙 그럴듯했기에 일행도 정설로 받아들였다.

그때 청수가 물었다.

“한데 입구가 이렇게 좁으면 나중에 아군이 들어오는 데 애를 먹지 않겠습니까?”

아니, 애를 먹는 건 둘째치고 서로 어떻게 신호를 주고받아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이쪽에서 신호를 보낼 방법은 있다. 그리고 길은... 여기 말고 다른 데를 찾아봐야지.”

강엽은 암시장의 길잡이를 떠올렸다.

하오문주가 소개한 사람이라면 필시 암시장의 내부 지리쯤은 손금 보듯 꿰뚫고 있으리라.

* * *

“맙소사, 여기가....”

“한중의 암시장이군요.”

지하 깊숙이 나 있는 계단을 통해 암시장이 지하에 있음을 짐작했지만, 실제로 드러난 암시장의 규모는 상상 이상이었다.

복잡한 지하에 노점과 천막, 가옥 등이 즐비했다. 마치 지상의 도시를 옮겨둔 것만 같은 광경.

일행 중 가장 강호 경험이 풍부한 야차마곤도 기가 막히다는 듯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한중에 이런 지하도시가 있었다니....”

“원래는 흑룡교의 유적이었다고 하더군요.”

흑룡교의 이름이 나오자 백서희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하지만 일행의 시선은 강엽에게 쏠려 있었기에 아무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흑룡교 종자들이 빛을 싫어하긴 하지. 근데 한중에 이런 커다란 도시를 지었단 말인가?”

“안개를 깔면 발각되니까요.”

오직 세상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지하에 도시를 세운 장대한 광기.

강엽은 암시장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대기에 흐르는 강력한 술법의 잔향을 감지했다.

“인력으로만 만든 건 아닌 겁니다. 술법도 동원했을 테고... 한수(漢水)의 수맥이 지하까지 들이치지 않도록 세심하게 조절한 것 같군요.”

한중을 동서로 관통하는 한수.

흑룡교는 지하도시를 온전히 손에 넣기 위해서 수맥을 뒤틀어버리는 술법까지 쓴 것이다.

“...마교가 별별 짓을 다 하는 줄은 알았지만....”

“일단 숙소부터 찾는 게 좋겠네요. 인파가 엄청나게 많은 게 까딱하면 노숙할 수도 있겠어요.”

그나마 당묘정이 빨리 충격에서 벗어나서 제안했다.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대충 눈에 보이는 객잔을 찾아서 들어갔는데, 호위무사의 신분으로서 값을 알아보러 갔던 청수와 야차마곤이 기겁했다.

“아니, 뭐 이리 비싸답니까?”

“허어, 순 날강도밖에 없구만!”

돈이 많기에 한 푼 아끼자고 흥정할 필요가 없는 일행이다. 하지만 이 객잔은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엄청난 바가지를 자랑했다.

“한 명당 일박에 은전 열 냥이라니... 이보시오, 주인장. 이건 비싸도 너무 비싸지 않소?”

“흥, 싫으면 꺼지쇼. 여기 객잔들은 가장 싼 방도 은전 열 냥부터 시작하오. 여긴 그래도 외곽이라서 싼 거요. 안쪽으로 들어가면 이보다 몇 배는 많이 받수다.”

방값도, 음식값도 바깥보다 몇 배나 비싸다. 싸구려 화주도 열 냥은 줘야 했다.

그때 강엽이 나섰다.

“여기서 가장 비싼 객잔이 어디지?”

대뜸 반말을 지껄이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강엽이 한눈에 봐도 값비싼 금의를 입고 있었기에 주인장은 약간 누그러진 말투로 대답했다.

“저 위쪽에 있는 한평루(漢平樓)입니다. 근데 거긴 가장 싼 방도 백 냥은 줘야 할 겁니다.”

아무리 부잣집 공자라도 부담스러울 테니 얌전히 자기 객잔에서 묵으라는 뜻도 있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기대는 배신당했다.

“한평루라고? 그럼 거기로 가지.”

“거참, 정말 돈이 많으신 모양입니다그려.”

“굳이 은전 열 냥이나 주고 쥐가 돌아다니는 객잔에서 묵고 싶진 않거든. 돈부터 요구하기 전에 본인 주방이나 청소하는 게 어떤가?”

쥐가 나온다는 말에 여인들의 얼굴엔 경멸이 떠올랐고, 주인장의 표정은 돌처럼 굳어졌다.

객잔을 나오자마자 백서희가 작게 속삭였다.

“정말 한평루라는 데 가려고?”

“돈은 많잖아?”

“그래도 그런 데 묵으면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정체를 숨긴 채 암시장을 들어왔는데 가장 비싼 객잔에 묵으면 눈에 띄지 않겠는가.

“가장 비싼 객잔이라면 꽤 크겠지. 우리가 간다고 크게 주목받진 않을 거야. 그리고....”

“또 뭔데?”

“우리 말고 다른 숙박객도 많다면, 그 사람들을 통해서 암시장의 정보를 들을 수도 있어.”

길잡이에게만 의존할 수는 없다.

정보를 교차 검증하기 위해서라도 한평루에 묵는 돈 많은 사람들에게 접근할 생각이었다.

그렇게 대로를 가득 메운 인파를 헤치고, 노점상들에게 길을 물으며 걷기를 한참.

“저기인가 봅니다.”

청수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평루라는 세 글자가 힘찬 문체로 적힌 현판. 사합원 양식의 거대한 장원이 있었다.

“저만하면 사원루랑 맞먹는 것 같은데....”

암시장에서 가장 큰 객잔이라고 하더니 고수들까지 고용한 듯했다.

가죽 경장을 걸친 무인들이 예리한 눈빛으로 객잔 앞을 지나가는 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무인들은 일행을 처음 본다고 제지하지는 않았다. 여인들을 잠시 눈여겨본 정도.

그렇게 객잔 입구로 들어가자 말끔하게 차려입은 어린 점소이가 넙죽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한평루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삼인실 두 개 잡으려고 하네.”

점소이가 어렸기에 야차마곤은 인자하게 웃었으나 본판이 워낙 험악한 탓에 흉흉하게 보일 따름이었다.

점소이는 안색이 살짝 창백해졌지만, 그래도 수많은 손님들을 접대한 경험으로 두려움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응대했다.

“어르신, 삼인실은 모두 다 찼습니다. 남는 방은 이인실뿐인데....”

“으음, 일인실도 없느냐?”

“죄송합니다, 어르신.”

“...그렇다고 하는데?”

공교롭게도 일행이 모두 남녀 세 명씩이었기에 이인실만 잡으면 남녀가 합방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평소였다면 문제되진 않았을 것이다. 강엽과 백서희가 한 방을 잡으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은 당묘정이 강엽의 정혼녀로서 동행하고 있었다.

청수가 강엽을 돌아봤다.

“강 도... 아니, 공자님. 이러면 다른 객잔을 잡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손님들, 외람되지만 지금 다른 객잔들도 남은 방은 거의 없을 겁니다.”

어린 점소이가 용기 있게 꺼낸 한마디에 일행의 시선이 모였다. 점소이가 볼을 긁적였다.

“이제 조금 있으면 경매장이 열리거든요. 사실 이맘때에 손님들이 가장 많이 몰립니다. 지금은 어딜 가나 다 비싸거나 방이 거의 없을 거예요.”

“음, 경매장이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암시장은 일년 내내 상시로 열리지만, 경매장은 매월 보름에만 열렸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사람이 몰리는 만큼 혈교가 비약을 퍼뜨리기도 제격이었다. 하지만 몰려든 인파 때문에 방이 부족해진 것이다.

“어쩔 수 없네요.”

결국 당묘정이 결단을 내렸다.

“공자님.”

그녀는 곧 강엽과 백서희에게 차례로 전음을 보냈다. 나중에 백서희와 방을 바꾸겠다는 전음이었다.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방에서 짐을 풀고, 남자들 방에서 다시 모인 일행은 앞으로의 방침을 논의했다.

“난 길잡이를 만나러 가지. 서희가 나와 동행한다. 당 소저와 소창후는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노리개 같은 걸 사면서 상인들에게 정보를 모아주시오. 청수 도장과 야차마곤은 객잔에서 정보를 얻고.”

야차마곤이 의아해했다.

“객잔에서 어떻게 정보를 모은단 말인가?”

“혹시 골패 할 줄 아십니까? 아까 지나가면서 보니 객잔 안에 도박장이 따로 있는 것 같던데요.”

낭인으로서 오랜 경험을 쌓은 야차마곤이라면 투전판 정도는 몇 번 기웃거렸을 수도 있었다.

야차마곤이 떨떠름한 표정이 됐다.

“몇 번 해본 적은 있네만, 돈을 딴 적은 없는데....”

“호구 잡혀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건 혈라분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거니까요. 투전판에서 오래 구른 사람들이라면 뭔가 알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래도 호구 잡히는 건 안 되지. 그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군.”

야차마곤이 결의를 다지는데 청수가 가세했다.

“제가 선배님을 돕겠습니다.”

“음? 청수 도장 자네가?”

“어디 가서 내세울 정도는 아니지만 골패 정도는 둘 줄 압니다. 몇 번은 돈을 따기도 했었고요.”

“아니, 자네는 무당의 제자가 아닌가? 대체 골패 같은 걸 어디서 배웠단 말인가?”

“그게 표주를 하면서 어깨 너머로 배우다 보니... 여비가 부족했을 땐 그걸로....”

차마 당당하게 말하지는 못하고 시선을 슬쩍 피하는 청수의 모습에 일행 모두가 순간 벙쪘다.

야차마곤이 껄껄 웃으며 청수의 등을 쳤다.

“후배, 이제 보니 훌륭한 말코였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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