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잠입 (3)
“생각보다 잘 싸우는군.”
맹월림의 전사들이 싸우는 모습을 지붕 위에서 바라보던 흉터의 사내가 혀를 내둘렀다.
작은 흑도 방파라고 해서 우습게 여겼거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양상이었다.
용맹한 전사들을 상대로 한 치도 물러섬이 없는 게 아닌가?
물론 기랑병단의 전사들이 가면인들에게 묶인 것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이깟 흑도 방파쯤은 쓸어버려야 마땅했다.
“심지어 저놈들은 죄다 절정고수 같은데....”
일곱 명 전원이 기합이나 신음 따위는 전혀 내지 않은 채 묵묵히 초식을 전개한다.
각자 다른 병장기를 쓰는데도 묘하게 손발이 잘 맞는 모습. 때로는 각개전투를 하거나 등을 맞대면서 기랑병단의 압박을 무위로 돌리고 있었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기수와 늑대가 하나둘씩 고꾸라지면서 승세가 기울고 있었다.
“저놈....”
자색 흉갑을 걸친 가면인.
다른 놈들과 달리 권각술로 싸우는데, 발경 권파를 맞은 기랑병들이 맥없이 픽픽 쓰러지고 있었다.
오히려 홀로 여덟 쌍의 기랑병을 쓰러트리면서 자신의 간합을 불가침의 영역으로 만드는 위용까지.
늑대와 기수가 함께하는 기랑병의 무위가 일류에 육박한다는 것을 고려하면, 자색 흉갑을 걸친 놈의 무공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쯧, 중단전을 열었나? 야단 났군. 가뜩이나 저놈들도 걸리는데....”
“...예?”
그의 옆에 있는 길잡이가 반사적으로 묻자 사내가 피식 웃으면서 턱짓을 해보였다.
“저길 봐라.”
사내를 따라서 시선을 멀리 향한 길잡이는 세 명의 남녀를 발견하고 파리하게 질렸다.
지난날 청우방을 무너뜨린 악몽의 당사자가 그들을 향해 의미심장한 눈길을 보내고 있는 모습.
“귀, 귀영...!”
“그놈은 없다면서?”
태연히 되묻는 말에 길잡이의 말문이 막혔지만, 정작 사내의 얼굴에 책망하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흥미로워하는 얼굴로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허, 저렇게 젊은 놈이 천인장급을 죽였단 말이지....”
맹월림주 바로 아래의 무인들.
운남 무림을 사실상 통일한 것과 다름없는 맹월림에서도 세 명밖에 없는 초고수들이 천인장이었다.
그런 천인장과 비슷하다고 일컬어지는 혈교의 교성을 죽인 것만으로도 경계할 만했다.
“재밌군. 안 그래도 한번 붙어보고 싶었는데....”
“후, 후퇴해야 합니다! 저자는 혼섬잔도를...!”
청우방을 부쉈던 붉은 줄기들과 그 위에서 오연하게 서 있던 놈의 모습이 지금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하지만 더 무어라 외치기도 전.
푸학!
“...컥?”
“거참, 쫑알쫑알 시끄럽게.... 도망칠 거면 너 혼자 도망쳐라.”
저승길로 말이야.
그 말을 끝으로 만도가 슥 빠져나오자 가슴이 꿰뚫린 길잡이가 비틀거리다 처마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쿠웅!
이어지는 둔중한 소리를 뒤로한 사내가 칼에 묻은 핏물을 탁탁 털며 몸을 돌린다.
어느덧 같은 선상에 선 흑포 청년을 향한 눈꼬리가 한껏 휘어졌다.
“빠르군. 은밀하기도 하고. 거의 칠팔 장은 되었던 것 같은데... 네가 귀영이라는 놈이냐?”
“그러는 그쪽은 맹월림이고.”
“사휘간. 맹월림의 백인장이다.”
“백인장이라....”
“말 그대로지. 백 명을 이끌고 있거든.”
“맹월림에 너 같은 놈이 많나?”
“하하, 글쎄?”
상식적으로 방파에 대한 정보를 누설할 리는 만무.
홍예칠위와 싸우는 기랑병들을 힐끗 바라본 강엽이 말을 이었다.
“맹월림의 무인들이 짐승과 함께 싸운다는 말은 들었지.”
언젠가 맹월림과 부딪칠 가능성이 있었기에 황산에 머무르는 동안 하오문주를 통해 이것저것 알아봤다.
“기랑병단이라고 했던가?”
기습처럼 찌른 질문에 사내의 어깨가 움찔거렸지만, 강엽은 시종일관 무시하면서 기랑병만 관찰했다.
기수가 창과 칼을 내지르면 늑대가 그에 호응하여 홍예칠위의 어깨나 목덜미 등을 물려고 했다.
그나마 상대가 홍예칠위라서 피하거나 흉갑으로 막은 거지, 하수였다면 제대로 반응할 새도 없이 바로 목숨을 헌납했을 합격술이었다.
“저런 맹수들을 참 용케 길들였어.”
“어렸을 때부터 잘 먹이고 훈련시킨 결과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뒷짐을 진 강엽을 향해 기습처럼 일도를 휘두르는 사내였다.
하지만 공력을 듬뿍 머금은 칼날은 몸에 닿기도 전에 불그스름한 막에 막히고 말았다.
“호신강기...?!”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습관대로 연격을 가져갔지만, 호신강기는 불똥만 튀길 뿐.
그 사이 반격할 준비를 마친 강엽이 작게 입술을 달싹였다.
“쳐라.”
꾸우우우웅...!
땅 속에서 혈목이 움직인다.
이미 그전부터 땅 속의 진동을 느끼고 있었던 늑대들이 뭐 마려운 것처럼 낑낑대자 기수들도 당황했다.
“이 녀석들이 대체 왜 이래?”
“뭣들 하는 거냐!”
사내가 노호성을 토했을 때였다.
별안간 지면을 꽝 뚫고 올라온 혈목들이 늑대의 배를 뚫고, 그 위에 탄 기수들의 사지를 휘감아 인정사정없이 끌어내렸다.
캐앵!
“어어억!”
“쓸데없는 싸움이야.”
숙정방도들과 달리 강시인 홍예칠위는 저기서 더 성장할 여지가 없다.
만에 하나 부상을 입으면 외려 큰 손해였다.
“네놈...!”
그때서야 저 혈목이 강엽의 수작임을 깨달은 사내가 눈을 부릅뜨며 다시금 도격을 내리쳤다.
무지막지한 경파가 연이어 쏟아지자 강엽을 둘러싼 호신강기도 깨진 달걀처럼 균열이 일어났다.
그렇게 사내가 결정타를 내리꽂는 순간.
콰아아앙!
급작스레 호신강기가 안쪽에서부터 터지며 발생한 경파가, 사내를 저 멀리 훨훨 내동댕이쳤다.
호신강기를 지키는 데 집착하지 않고 먼저 깨트려서 일순간 막대한 위력을 행사한 것.
하지만 강엽은 사내가 타격을 받는 순간 신묘한 신법으로 경파를 흘려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도 몸이 자연스럽게 회피할 만큼 사내가 경험이 출중하다는 증거였다.
그나마 완전히 피한 것은 아닌지 입가를 따라 한 줄기 선혈이 흐르고 있었지만....
‘별반 피해는 없어. 내상을 입은 척한 거다.’
초음으로 살펴본 사내의 경맥엔 아무런 이상도 없었다. 방심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혀를 살짝 깨물었다.
볼품없이 땅에 곤두박질치기 전에 거대한 그림자가 사내를 낚아챘다.
뒤따라오는 혈목들을 피해 날랜 표범처럼 껑충 뛰어오른 거대한 늑대.
제 주인을 입에 문 늑대가 주둥이를 위로 치켜들며 주인을 던지자, 사내가 한 바퀴 돌며 안장에 앉으며 벌레 씹은 표정으로 강엽을 노려봤다.
“이거 참....”
설마 이런 식으로 기랑병단을 잃고 자신 역시 궁지에 몰릴 줄은 생각하지 못한 걸까.
“하아, 이거야 원.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자세히 알아볼 걸 그랬어.”
“인제 와서 후회하나?”
“후회하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근데 다행히 수습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말이야.”
“음?”
사내가 품 속에서 꺼낸 신호탄의 밑둥을 잡아당기자 한 줄기 불꽃이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퍼퍼퍼퍼퍼펑-!
“지원군을 불렀다.”
“저게 전부가 아니었군.”
“아무렴. 노주에 숙정방만 있는 것도 아니고... 동시에 여러 군데를 치기로 했었지.”
노주에서 가장 강한 문파는 숙정방이지만, 양견회를 비롯해서 다른 문파들도 있었다.
맹월림이 노주를 사천 진출의 교두보로 삼고자 한다면 그 문파들까지 복속해야 하는 상황.
“다시 소개하지. 기랑병단의 일대주 사휘간이다. 기랑병단주이신 합골 천인장을 모시며, 맹월림에선 증장도(增長刀)라는 별호를 얻었다. 오대호(五大虎)로 꼽힌다.”
“증장도, 오대호....”
점창파를 제치고 운남제일세에 올랐음에도 불구하고 맹월림은 특유의 폐쇄적인 분위기 때문에 내부 인사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알려지진 않았다.
운남에 흩어진 수많은 부족들을 힘으로 규합하면서도, 한족 등 외지인들을 배척하는 정서 때문에 세작이 침투하기 어렵기 때문.
그럼에도 하오문은 세작을 침투시켰고, 몇 가지 정보를 빼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중 하나가 오대호의 존재였다.
‘맹월림주와 세 명의 천인장 다음가는 강자들.’
백인장의 직위를 받은 전사들 중에 다음 세대를 책임지리라 기대받는 유망주들.
스스로를 오대호의 일원이라 밝힌 사내는 맹월림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강자였던 것.
‘삼화취정을 목전에 둔 자가 그렇게 많을 리는 없겠지. 구파에도 몇 명밖에 없는데.’
애초에 강엽이 사내를 상대하려고 나온 이유가 사내가 중단전을 개방했기 때문이다.
그저 그런 절정고수였다면 홍예칠위에게 맡기고 멀리서 관망하기만 했으리라.
“하후진!”
“아니, 내가 갔다 올게!”
백서희가 홍예칠위를 데리고 장내를 빠져나갔다. 본디 홍예칠위는 그녀의 명령만 듣는 만큼 현장에서 유동적으로 대처하려면 그녀가 가는 게 맞았다.
***
백서희는 떠나기 전에 하후진을 잠시 돌아봤다.
[바깥 놈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단목 동생이 다치지 않게 잘 지켜봐.]
눈썰미가 있다면 하후진이 싸움에 통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알 수밖에 없었다.
행여 단목정이 위험해질까 봐 감각을 곤두세우는데, 그런 상태로 바깥에 나가봤자 싸움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고, 고맙다.”
계면쩍게 중얼거리는데, 마침 짧은 경호성이 비명과 악다구니를 뚫고 귓가에 꽂혔다.
맹월림의 전사가 내지른 칼날에 어깨 어림을 스친 단목정이 이를 악물고 있었다.
“이런 썅! 저 개잡놈의 새끼가...!”
뇌리에서 뭔가 툭 끊어지는 기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한달음에 아래로 내려가, 단목정을 기습한 놈의 관자놀이에 호쾌한 족격을 먹여 그 자리에서 목뼈를 꺾어버렸다.
“하, 하후 무사님?”
“괜찮은 거요!?”
얼떨떨해하는 단목정을 붙잡고 부상을 살폈다. 칼날에 독이 묻었다면 상처가 얕아도 위험해질 수 있었다.
“아, 네. 전 괜찮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단목 방주는 열심히 싸웠수다. 여긴 내가 맡을 테니 후방으로 물러나쇼.”
일대일의 싸움도 아니고 세력과 세력이 부딪치는 난전이었다. 얽히고설킨 전장에선 고수도 눈먼 칼날에 당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지만 단목정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 끝까지 싸울 겁니다.”
“고집 부리지 마쇼. 방금 죽을 뻔했어.”
“전 숙정방의 방주입니다. 방도들이 싸우고 있는데 저 혼자 안전한 곳에 있을 순 없어요.”
“.......”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낯빛은 창백하게 질리고 손발이 떨리는데도 뜻을 굽히지 않는다.
강엽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의지로 이 싸움이 끝날 때까지 남겠다고 천명한 것이다.
낭인으로 살면서 비슷한 말을 수도 없이 들었기에, 하후진은 그 말에 담긴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스스로 자리에 걸맞는 사람이 되기 위해 두려움을 견뎌내며 앞을 향해 나아가려는 자세.
그 눈부신 각오 앞에서 말문이 막힌 하후진은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후진.]
강엽의 전음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단목 방주와 함께 싸워라. 그녀는 지쳤어.]
무공을 수련한 기간이 짧기 때문에 체력도, 단전도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그쯤 싸웠으면 충분해. 방주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충분히 보여줬어.]
[너 설마 일부러...?]
단순히 단목정이나 방도들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만 도와주지 않은 게 아니었다.
단목정이 방도들이 믿고 따르는 방주가 되어야 숙정방 전체가 함께 강해질 수 있었다.
[그렇다고 너무 날뛰지는 말고. 네가 그러면 단목 방주의 공로가 빛을 바래니까.]
“허참....”
마음 같아선 죄다 쓸어버리고 싶은데, 숙정방이 강해지려면 함께 사선을 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적잖은 방도들이 목숨을 잃겠지만, 하후진 역시 지금의 싸움이 숙정방이 강해지기 위한 성장통이라는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씁, 어쩔 수 없지. 단목 방주, 강엽 저 녀석이 방주를 도우라고 했으니까 끼어드는 거요.”
“예? 주, 주군께서요?”
“그렇다니까. 방주의 뒤를 노리는 놈은 내가 족칠 테니까 방주는 앞만 보고 가쇼.”
“...감사합니다.”
“갑시다. 저 개자식들 궁둥이를 걷어차줘야지.”
그렇게 두 사람이 등을 맞대었다.